Ⅰ. 서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가진다. 그동안 우리는 언제부터 사람이 되는지, 사망의 시점은 언제부터인지 다양한 논의를 해왔다. 특히 죽음과 관련하여, 치유가 불가능하거나 회생 불가능한 상태에 놓여 있는 환자에게 계속하여 연명의료를 할 것인지, 아니면 중단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많은 논의가 있어 왔다. 의학적 회복가능성이 없는 상황에서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계속하는 것은 환자의 입장에서 고통 받는 기간만 연장시키고 인간의 존엄을 해칠 수 있는 위험을 지니는 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1)
이러한 논쟁에 대해, ‘호스피스·완화의료의 이용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였는데, 이를 줄여서 소위 연명의료결정법 내지 웰다잉법이라고도 부른다.2) 하지만 간혹 이 법을 존엄사법이라고도 부르는데, 존엄사3)는 오래 전부터 안락사의 다른 명칭으로 사용되어 왔으며, 자칫 존엄사라고 하면 인위적인 죽음을 아름답게 포장할 수 있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기 때문에 연명의료결정법 내지 웰다잉법이라고 부르는게 타당하다.4)5) 이 법률은 호스피스법과 연명의료법을 합쳐 놓은 것으로, 호스피스법은 이미 2017년 8월 4일부터 시행되고 있으며, 연명의료법은 사회적 분위기를 감안하여 2018년 2월 4일부터 시행하고 있다.
이 법의 취지는 생전에 본인의 의식이 명료할 때, 작성한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따라 본인 스스로 연명의료여부를 결정할 수 있지만 가족 중심의 유교문화를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상당한 혼란과 예측하기 어려운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우려에서 제정되었다.6) 이처럼 죽음과 관련하여 중대한 변화가 생겼는데, 이제는 합법적으로 환자의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게 된 것이다.7) 하지만 안락사와는 달리 연명의료 중단은 임종과정에서 무의미한 치료를 중단하는 행위이다. 무의미한 치료 중단은 두 가지의 대전제가 있는데, 첫째 환자의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입증되어야 하며, 둘째 환자 본인의 명확한 의사표시가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1년 남짓 연명의료결정제도를 시행하면서, 이제 우리 사회가 웰다잉-존엄한 죽음이 있는 사회로 가기 위한 중요한 첫걸음을 내 딛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렇게 막 시작된 웰다잉의 문화를 우리 사회에 더욱 뿌리 내리기 위하여 그간의 시행 결과를 살펴보고, 개선해 나가야 할 과제들을 도출해 보고자 한다.
Ⅱ. 웰다잉법 제정의 의의
보라매병원 사건은 1997년 12월 4일 대낮에 술에 취한 환자가 연립주택 2층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뇌출혈로 경막외혈종이 생겨 보라매병원에서 응급수술을 받고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를 달고 있었는데, 환자의 보호자인 부인이 남편의 평상시 술주정과 구타에 불만을 갖고 있던 터에 진료비가 많이 나올 것을 우려해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퇴원각서를 쓰고 자진 퇴원하였으나 집에 도착한 직후 사망한 사건이었다. 당시 판사는 시동생의 형사고발로 입건된 담당의사와 수련의, 그리고 부인에게 살인 및 살인방조죄를 적용해 유죄선언을 하였으며, 피고인의 상고를 기각하여 형이 확정되었다.8)
대법원의 판단은 인공호흡기를 제거한 것이 작위에 의한 것으로 환자의 자기결정권보다 국가의 생명보호 의무에 더 중점을 두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국가의 생명보호 의무라는 관점에서는 처음부터 인공호흡기를 부착하지 않은 것과 일단 부착했다가 나중에 제거한 것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국가의 생명보호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서는 일단 인공호흡기를 부착하여 생명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는 것은 작위에 의한 살인죄로 판단한 것이다.
2009년 대법원에 의해 최초의 연명치료중단 판결이 내려진 세브란스병원 김 할머니는 폐조직 검사를 받던 중 기도가 막혀 저산소증에 의한 뇌손상을 받아 8개월째 혼수상태로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를 달고 있는 식물인간 상태의 환자였다. 뇌간기능의 일부는 살아있어서 자발적으로 눈을 뜨며, 통증자극에 대하여 팔다리의 반사적 반응이 존재하였다. 뇌파가 뛰고 있으며, 신체감정을 한 의사에 의하면, 뇌사는 분명 아니지만 회복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기대생존기간은 3~4개월로 추정된다고 판단하였다.9) 이 때 김 할머니 자녀들이 식물인간 상태인 어머니로부터 인공호흡기를 제거해달라며 서울 서부지방법원에 낸 소송에서 민사 12부는 2008년 11월 28일 김 할머니의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라고 판결을 하였다.10) 법원은 적극적 안락사를 비롯해 말기 환자에 대한 치료 중단 행위를 일반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지만, 안락사를 인정한 국내 첫 판결이 나왔다는 점에서 사회적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이어 2009년 대법원에서도 김 할머니의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라는 판결을 하였다.11) 다만 대법원은 연명의료결정을 허용함에 있어서 첫째 환자는 회복불가능한 사망의 단계에 이를 것, 둘째 환자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행복추구권에 기초하여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인정할 것, 셋째 기타 특별한 사정이 없을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러한 대법원 판결의 의의는 첫째 대법원이 처음으로 연명치료중단의 일반적 요건 혹은 절차를 제시하였다. 둘째 대법원이 처음으로 구속력을 인정할 수 있는 사전의료지시서의 요건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셋째 대법원은 연명치료중단을 반드시 소송을 통하여 해결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신중한 판단을 위한 절차적 기준으로서 병원윤리위원회를 제시하였다는데 있다.12)
보라매병원 사건과 김 할머니 사건을 계기로 2009년 10월 대한의사협회, 대한의학회, 대한병원협회가 합동으로 구성한 ‘연명치료 중지에 관한 지침 제정 특별위원회’에서 ‘연명치료 중지에 관한 지침’을 발표하였다. 2009년 12월에는 정부가 나서서 보건복지부 산하에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20여명의 위원으로 ‘연명치료중단 제도화 관련 사회적 협의체’를 구성하고 이듬해까지 연명치료중단과 관련한 쟁점사안을 논의하였다. 당시 가장 중요한 쟁점은 환자의 의사추정 및 대리에 의한 의사표시에 관한 것으로 7차례 회의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제도화하지는 못하였다. 이후 18대 국회에서 신상진, 김세연 의원 등이 존엄한 죽음에 관한 입법을 시도하였으나 회기가 끝나 자동 폐기되었으며, 2012년 12월 21일에 설치된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 제도화를 위한 특별위원회’는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에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권고’라는 보고서를 제출하였다.13) 이를 근거로 하여 김재원 의원이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안)을 제출하였으며, 여기에 김세연 의원이 호스피스·완화의료 법률(안)을 삽입시켜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안)’이 최종 상정되어 2016년 1월 8일 국회 본회의에 통과되고, 2016년 2월 3일 법률 제14013호로 제정되어 2017년 8월 4일부터 시행되고 있다.14)15)
웰다잉법은 삶의 마지막 시기에 환자의 최선의 이익을 보장하고 자기결정을 존중하기 위한 것으로 사회적 공론화를 일으킨 보라매병원 사건이 발생한지 20년 만에 제정되었다. 입법 과정에서 다양한 견해 차이가 있었지만, 환자 스스로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여 연명의료를 중단하고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는 문제는 생명권 보호라는 헌법적 가치를 실현하는 것으로 충분한 사회적 합의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나아가 보라매병원 사건 이후, 의료계의 왜곡된 반응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현실 인식과 김 할머니 사건, 그리고 김 할머니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 판결 이후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보고자 했던 사회적 협의체의 노력,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의 입법 권고, 이 입법 권고의 정신과 내용에 따른 법률안 마련의 노력 등은 첨예한 생명윤리적 쟁점을 우리 사회가 어떻게 풀어 나가야 하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모델을 제시하였다.16) 또한 웰다잉법은 과잉 의료로 죽음을 맞는 임종과정 환자들이 최선의 돌봄을 받을 수 있는 법적·제도적 근거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그리고 연명의료결정 중단에 대한 절차 및 요건이 명시적으로 제도화됨으로써 말기의료에 있어 치료여부 선택의 부재에 따른 혼란을 방지하고 건강한 일상에서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이를 대비하는 웰다잉 문화가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긍정적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웰다잉법은 연명의료결정에 대한 법적 문제를 입법을 통하여 해결하였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 반면에, 법 시행에 따른 부정적인 측면도 공존하고 있다. 하지만 웰다잉법은 그동안 사회적으로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회복 불가능한 연명의료의 중단을 법적으로 해결한 것으로 의사들에게 연명의료중단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마련해 주었으며,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의사에 따라 존엄하게 죽을 수 있는 권리가 인정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의료현장에서 당해 환자의 의사(意思)는 배제된 채 담당의사가 환자가족과 상의해 음성적인 관행으로 시행되어 온 연명의료중단이 금지되었으며, 과잉 연명의료로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들이 최선의 돌봄을 받을 수 있는 웰다잉(well-dying)으로의 전환할 수 있는 법적·제도적 근거를 마련하였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17)
이하에서는 웰다잉법이 시행된 지 만 1년이 경과한 시점에서, 법 시행에 따른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검토하여 앞으로의 개선 방안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Ⅲ. 법 시행에 따른 제 문제
‘호스피스·완화의료의 이용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의 법률 명칭에서 보듯이, 이 법은 원래 호스피스법과 연명의료법을 별도로 제정할 예정이었으나 국회 심의과정을 거치면서 연명의료제도가 마련되기 위해서는 우선 호스피스제도가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는 의견을 수용하여 두 법안을 합쳐서 제정한 것이다. 동법의 법명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연명의료의 중단과 호스피스·완화의료를 함께 규율하고 있는데, 이러한 제도의 설계가 동법이 추구하고자 하는 목적인 ‘대상 환자의 이익보장 및 자기결정권의 존중’이 이행될 수 있는지 의문이 제기된다.18) 이렇듯 서로 다른 토대를 지닌 연명의료 중단과 호스피스·완화의료를 함께 규율하여 제도를 운영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연명의료결정의 대상자를 확정하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연명의료결정의 대상 범위를 확장시킨다면 생명권에 대한 침해의 범위도 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19)
동법은 연명의료결정의 대상 시기인 “임종과정”을 회생의 가능성이 없고, 치료에도 불구하고 회복되지 아니하며, 급속도로 증상이 약화되어 사망에 임박한 상태로 정의하고 있으며, 담당의사와 해당 분야의 전문의 1명으로부터 확인을 받아야 한다. “말기환자”는 적극적인 치료에도 불구하고 근원적인 회복의 가능성이 없고 점차 증상이 악화되어 보건복지부령으로 정하는 절차와 기준에 따라 담당의사와 해당 분야의 전문의 1명으로부터 수개월 이내에 사망할 것으로 예상되는 진단을 받은 환자를 말한다(법 제2조). 여기서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판단 기준은 첫째 회복불가능성, 둘째 치료회복불가능, 셋째 급속한 증상악화로 인한 임박한 사망 상태 등이라는 세 가지 요건에 대한 의학적 판단을 필요로 한다(법 제2조 제1호). 그러나 이러한 판단기준에도 불구하고 연명의료결정 중단을 위한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판단기준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즉 어떠한 경우가 회복불가능하며, 치료에도 불구하고 회복이 불가능한지 그리고 사망이 임박한 상태인지에 대한 명확한 의학적 판단기준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20)
김 할머니의 경우 지속적 식물인간 상태의 환자였는데, 의학적으로 지속적 식물인간 상태에 대한 기준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법원 판결에 따라 연명의료결정 대상 환자에 포함시킨 것이다. 현재 이러한 임종과정과 말기환자에 관해 법에 정의 규정을 두고 있지만, 실제 의료현장에서는 이를 구분하기가 여전히 쉽지 않기에 최근 각 질환별로 관련 학회의 지원으로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이를 활용하고자 하는 움직임도 있다.21)
현재 연명의료는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에게 시행하는 심폐소생술, 혈액 투석,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착용의 의학적 시술로서 치료효과 없이 임종과정의 기간만을 연장하는 것으로 정의하여 연명의료 대상의 범위를 제한하고 있다(법 제2조 제4호). 이러한 규정에 대하여 외국은 ‘말기환자’를 포함하는 넓은 개념과 비교해 볼 때, 우리는 매우 엄격한 한정된 범위 내에서 연명의료결정의 대상자를 제한하고 있다.
따라서 시행규칙에서 담당의사와 해당 분야 전문의 1인이 어떤 내용을 기록하라고 규정할 것인지가 관건이다. 법률의 정의 조항에서 구체적으로 열거하기 어려웠던 것들이 결국은 시행규칙에서 명시적으로 규정해야 한다. 시행규칙을 마련할 때, 해당 분야의 전문의가 누구인지도 논의해야 할 부분이기는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환자의 상태에 대한 의학적 측면에서의 객관적인 기준들에 의거하여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를 정확하게 판단하여야 한다.22) 이러한 과정에서 환자의 상태에 대한 의학적 판단은 연명의료결정의 중단과 그에 따른 환자의 죽음에 관하여 매우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 있어서 책임소재가 명확하지 않으면, 그만큼 오남용의 가능성도 생길 수 있다.23)
위의 <표 1>처럼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와 ‘말기환자’를 서로 다른 것으로 구별하고 있으며, 법적용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는 연명의료중단의 대상이 되지만 ‘말기환자’는 호스피스의 대상이 된다. 의학적 치료에도 불구하고 회생가능성이 없으며, 회복되지 아니하는 말기의 중증 환자의 경우에도 질병의 호전을 사실상 포기한 상태에서 오로지 현 상태 유지를 위한 치료에 불과한 경우라면 연명의료결정의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25)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 | 말기환자 | |
---|---|---|
대상질환 | 질병의 제한 없음 | 암, AIDS, 만성폐쇄성 호흡기질환, 간경화증 등(현재는 폐지) |
확인 | 담당의사 + 해당분야 전문의 1인 | 좌동 |
상태 | 급속도로 증상이 악화되어 사망이 임박한 상태 | 점차 증상이 악화되어 수개월 내 사망이 예상되는 상태 |
법 적용 | 연명의료중단 결정 | 호스피스 이용 결정 |
우리의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는 미국의 사전지시(advance directive) 중 대리인 지정제도를 제외하고, 생전유언(living will)26)만 도입하였다. 기존에 민간단체에서 자율적으로 작성한 사전의료의향서의 경우, 대리인 지정을 담고 있었지만 연명의료결정법에 따른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작성자 본인이 대리인을 지정하는 항목이 없으며, 그 결정을 서식에 기록하여도 이를 보호해주지 못한다.27)
연명의료계획서 역시 대리인도 작성할 수 있는 미국의 연명의료지시서와는 다르게 본인만 작성을 할 수 있다. 물론 대리인을 지정할 수 없기 때문에 환자가 의사능력을 상실한 경우에는 연명의료 결정을 할 수 없다는 한계가 발생한다.28) 이러한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환자가 연명의료에 대한 의사를 서면으로 남기지 않은 경우 환자 가족이 환자를 대신하여 의사를 진술할 수 있으며, 환자가 연명의료에 대한 의사표시가 없어도 환자가족 중 전원이 합의할 수 있는 의사결정방식을 두고 있다(법 제18조).29)
그러나 동법 제28조 제2항에서는 호스피스를 신청할 때 환자 본인이 의사결정 능력이 없을 때에는 미리 지정한 지정대리인이 신청할 수 있다는 규정을 두고 있다. 동법 내에서 연명의료결정에 대해서는 대리인 지정제도를 인정하지 않고, 호스피스 신청에 대해서는 지정대리인 제도를 인정하는 것은 법률 체계상 모순이 발생한다.30) 이것은 호스피스라는 동전의 한 단면만 보고 다른 면에 있는 연명의료의 유보에 대해서는 소홀히 취급한 처사라는 비판도 있다.31)
환자의 자기결정권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환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환자 가족 전원의 합의로 연명의료중단등결정을 하는 것보다는 환자가 지정한 대리인이 연명의료중단등결정을 하는 것이 훨씬 더 존중되어야 한다. 실제 의료현장에서는 동법 제17조에 따라 환자의 의사를 확인하기보다는 제18조에 따라 환자 가족 전원의 합의로 연명의료중단 결정을 시행할 가능성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32)
연명의료결정법은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확인하는 방법으로 사전연명의료의향서와 연명의료계획서를 도입하고 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한 개인이 삶의 마지막 시점에서 자신의 의학적 치료 여부에 대한 의사를 표현하는 ‘생전유언(living will)’에서 출발하였다. 이렇듯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중단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보호하고 존중하기 위해서는 본인의 의사표현을 명확히 할 수 있을 때 작성하여 보관하는 방식이다.
19세 이상의 성인이면 누구나 본인이 평소 건강할 때 연명의료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표명해 둘 수 있는데, 보건복지부의 승인을 받은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기관33)에 등록할 때 비로소 법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법 제11조). 그러나 현행법은 사전연명의료의향서가 있으면 그 결정에 따르도록 되어 있으며, 환자가 의사를 표현할 수 없는 의학적 상태의 경우에는 환자 가족 2명 이상의 일치하는 진술이 있어야 한다(법 제17조 제1항).
연명의료계획서는 환자 본인 및 가족과 합의한 후, 결정된 계획에 대한 의사의 의료적 결정이다.34) 담당의사는 해당 환자에게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이성적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연명의료계획서를 작성하기 전에 환자의 질병상태와 치료방법, 연명의료의 시행방법 및 연명의료중단등 결정에 관한 사항, 호스피스의 선택 및 이용에 관한 사항 등에 관해서 설명하고, 환자로부터 내용을 이해하였음을 확인받아야 한다(법 제10조 제3항).
우리의 연명의료계획서는 미국의 POLST(Physicians Orders For Life Sustaining Treatment)와 동일하지 않다.35) 연명의료계획서는 미성년자의 법정대리인 작성 부분을 제외하고는 대리 작성을 담고 있지 않다(법 제10조 제3항). 하지만 말기환자 또는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만 작성할 수 있는 연명의료계획서는 그 운용에 있어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할 수 있다. 즉 연명의료계획서는 말기환자 또는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로 진단을 받은 후에만 작성을 할 수 있기 때문에, 환자의 안녕감(well-being)을 증진하는 것을 도울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연명의료계획서 또한 대리인 작성이 허용되어야 한다.
실제 의료현장에서 환자의 진정한 의사표시를 확인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다. 연명의료중단에 대한 요청은 기본적으로 그 의사를 표현하는 자가 현재의 상황을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하며, 나아가 의사를 결정하여 표시할 수 있는 능력을 전제로 한다.36) 이러한 점에 근거하여, 사전연명의료의향서와 연명의료계획서는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최대한 보장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등록 후에 연명의료계획서를 다시 작성하는 경우에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의 효력을 상실한 경우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연명의료계획서의 보완적 성격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37)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환자가 질병을 앓기 이전에 건강할 때 작성한 것이라면, 연명의료의향서는 환자가 질병을 앓고 난 후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며 의사 앞에서 연명의료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는 것이기에 훨씬 더 실제적이며 현재의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어 임상적으로 더 요긴한 근거자료가 될 수 있다.38) 다만 환자 스스로 작성한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또는 연명의료계획서가 있는 경우 환자의 자기결정권의 행사 시점 사이에 시간적 간격이 있으므로 의사의 확인이 필요하다.
또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19세 이상의 사람이 작성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연명의료계획서는 담당의사가 작성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연명의료계획서는 의사가 환자의 상태에 대해 설명한 후, 관련 서식에 대하여 설명하고 환자가 개개의 상황에 대한 선택을 하고 최종서명을 하는 형태로 작성된다는 점에서 연명의료계획서의 작성 주체는 의사와 환자 공동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39) 이러한 사전연명의료의향서와 연명의료계획서는 신체와 생명에 대하여 환자 스스로 처분을 결정하는 것으로 엄격한 법률적 방식으로 행해져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정당성을 부여하기 어려울 것이다.40)
사전연명의료의향서 | 연명의료계획서 | |
---|---|---|
대상 | 19세 이상의 성인 | 말기환자 또는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 |
작성 | 본인이 직접 | 환자의 요청에 의해 담당의사가 작성 |
설명의무 | 상담사 | 담당의사 |
등록 | 보건복지부 지정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기관 | 의료기관윤리위원회를 등록한 의료기관 |
환자의 연명의료중단은 언제 어떠한 의료를 연명의료중단의 대상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기준은 환자의 개별상황과 관련하여 입법화의 한계를 가질 수 있으나 치료의 계속이 환자에게 주는 부담, 즉 단지 임종과정만 연장하는 처지의 무용성, 처치수단의 특별성과 이례성(異例性) 등이 주요 판단요소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43)
특히 연명의료중단의 결정 이행시 통증 완화를 위한 의료행위와 영양분 공급, 물 공급, 산소의 공급은 시행하지 아니하거나 중단되어서는 아니 된다(법 제19조 제2항). 이러한 의료행위는 열거된 특수연명의료에 한정하며 인간의 생을 영위하기 위한 기본적인 돌봄에 해당하므로 연명의료중단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 우리와 달리, 미국의 낸시 크루잔 사건에서는 식물인간 상태인 환자에 대해 인공영양 공급의 중단의 허용 여부에 관한 논쟁이 있었다. 이에 대하여 미국 연방대법원은 인공영양 공급을 환자가 거부할 수 있는 ‘연명의료’에 해당된다고 판결하였다.44)
한편, 연명의료의 유지 또는 중단을 양심상의 문제로 거부하는 의사에게 그 실행을 법이나 계약으로 강제하도록 요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환자가 스스로 연명의료결정을 중단하도록 요구했다면, 즉시 의료인은 연명의료를 중단하여야 한다. 하지만 연명의료결정 대상 환자의 법규정에 부합하는 의학적 상태에 대한 기준이 무엇인지 명확해야 한다.
Ⅳ. 앞으로의 해결 과제
환자의 자기결정권의 관점에서 보면, 환자가 연명의료결정법에 따른 사전연명의료의향서나 연명의료계획서를 작성하지 않고 의식을 상실한 채 임종과정에 진입한 경우, 환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환자 가족 전원의 합의로 결정하는 것보다는, 환자가 지정한 대리인이 연명의료중단을 결정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의견도 있다.45) 즉 환자 가족의 진술이나 합의가 어렵기 때문에 지정대리인에 의한 결정이 신속하고 효과적이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나 연명의료계획서를 미리 작성을 하지 않은 경우에 어떻게 이를 추정하는가와 환자 가족의 의사를 어느 선까지 인정할 것인가에 대해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대리인 지정제도의 도입을 위해 우리 사회에서도 이제 본격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시점이 되었다. 대리인 지정제도의 도입 없이는 연명의료계획서의 대리 작성 문제가 해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46)
지정대리인은 환자와 가깝고도 지속적인 관계를 갖는 사람이어야 하며, 환자의 선호와 가치를 정확하게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 이상적이다. 적어도 지정대리인은 환자가 임종과정에 들어간 상황에서 질병의 원인, 건강상태, 가능한 의학적 처치와 처치별 효과 또는 무익성 등을 알고 신속하게 결정할 수 있다. 이는 환자가 특정 임상 상황에서 무엇을 원하는지를 의사결정에 반영하고, 환자의 주관적 선(good)의 개념에 의하여 결정되는 환자의 안녕감(well-bing)을 증진하는 것을 도울 수 있다.47) 환자가 본인을 대신하여 결정을 위임한 지정대리인을 자유롭게 결정한다는 그 자체만으로 자기결정권을 보호한다고 볼 수 있다.48) 이처럼 지정대리인을 도입하기 위해서는 우선 연명의료결정법에 환자 가족의 진술 및 환자 가족 전원의 합의와 어떤 관계를 갖는지를 검토하고, 우선 순위를 고려하여야 한다.
생명윤리 이론 중에는 미끄러운 경사길 논리(Slippery Slope Theory)49)가 있다. 이것은 한 가지 예외상황을 허용하면 그 이후 줄줄이 허용하게 되어 결국은 원칙이 무너져 내린다는 이론이다. 현행법에서는 연명의료중단의 대상자를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로 제한하였지만 의료 현장에서는 지속성 식물인간에게도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도록 하자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50) 나아가 치매나 중증장애, 정신질환 등 연명의료 대상의 범위를 확대하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데 이는 매우 위험한 처사로 엄격히 경계하여야 한다.51)
한편 담당의사와 해당 분야의 전문의에 의하여 ‘말기환자’라고 진단을 받았지만 수개월이 아닌 수일 내에 사망에 이를 수도 있고, 이와는 반대로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라고 의학적 판단에 받았지만 수개월 동안 생명을 유지할 수도 있다. 따라서 두 환자의 사망에 이르는 시점이 정확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구별은 무의미해 질 수도 있다. 그래서 ‘말기환자’의 경우에도 연명의료결정 중단의 대상으로 포함하자는 의견은 설득력을 얻고 있다.52)
현행법에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를 명확히 규정하는 것이 바람직하겠지만,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대통령령에 위임규정을 마련하는 것이 타당하다. 즉 환자의 상태에 대한 의학적 측면에서의 객관적인 기준들이 열거되어 이 기준들에 의거하여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를 정확하게 판단해야 할 것이다.53) 환자의 임종과정에 있는지 여부의 판단은 현실적으로 의사(醫師)의 전문적 판단에 의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에 대한 오진가능성 또는 남용의 소지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54)
동법 제14조에 따라,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 여부에 대해 해당 환자의 담당의사와 해당분야 전문의 1인이 함께 의학적 판단을 하게 한 것은 의료 현장에서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와 말기환자의 구분, 그리고 세부적인 기준 마련이 가능한지 등에 있어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그래서 제도남용과 오류발생을 최소화하기 위해 담당의사가 참여하는 해당의료기관에 설치된 의료기관윤리위원회가 심의·확인하는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55) 이는 연명의료중단의 입법화가 직접 의술을 시행하는 현장에서 직면하는 모든 환자상황을 다룰 수 없는 한계를 가짐과 동시에 ‘임종과정’이란 개괄적 규정을 두고 있음을 감안할 때, 보다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행법에서 의료기관윤리위원회 위원의 구성은 위원장 1명을 포함하여 5명 이상으로 구성하되, 해당 의료기관에 종사하는 사람으로만 구성할 수 없으며, 의료인이 아닌 사람으로서 종교계·법조계·윤리학계·시민단체 등의 추천을 받은 사람 2명 이상을 포함하여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법 제14조 제3항). 과연 연명의료중단 결정의 전문성을 감안하여 의료진이 배제된 위원회 구성은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기가 어렵다. 최소한 환자의 담당의사와 해당분야 전문의 1인이 포함되어 객관적이고 정확한 연명의료중단 결정을 하여야 한다.
모든 의료행위는 환자의 자기결정권에 따라 이루어져야 하며, 이것이 의료윤리의 핵심이다. 환자가 연명의료중단의 의사표시를 할 수 있는 경우에도 적법절차에 의한 합리적이고 정당한 의사표시 절차에 따라 이행하여야 한다. 연명의료중단 여부에 대해 일정한 의사표시를 할 수 있는 사람의 경우 문제되는 연명의료의 거부·중단에 관한 충분한 설명을 제공하는 상담절차를 거치는 것이 필요하다.56) 반면에 환자의 의사표시를 확인하기 어렵거나 가족, 의사 등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에는 전문가로 구성된 병원윤리위원회 혹은 법원에서 결정할 수 있도록 법 개정이 필요하다.57)
1975년 카렌 퀸란(Karen Quinlan) 사건에서 미국 뉴저지주 대법원은 “담당의사가 카렌이 혼수상태에서 회복하여 의식을 되찾을 합리적 가능성이 없으며, 생명유지장치를 제거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카렌의 후견인과 가족과 이에 동의하는 경우 그들은 병원윤리위원회 혹은 이와 유사한 기구에 자문을 구할 수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도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다면 생명유지장치를 제거할 수 있으며 그 행위로 인하여 후견인, 의사, 병원 등 관련자들 어느 누구도 민사상, 형사상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연명의료 중단의 절차적 기준을 제시한 바 있다.58) 이 판결은 환자가 의료처치의 거부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는 환자의 충분한 의사능력에 근거하고 있으며, 또한 대리인인 아버지가 퀸란의 연명의료중단을 대신할 수 있다고 판시하고 있다.59)
Ⅴ. 결론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는 기준과 절차를 정립하여 국민이 삶을 존엄하게 마무리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한 연명의료결정제도가 시행한지 1년이 지났다. 연명의료결정제도가 시행되고 1년 동안 1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였고, 3만 6천명 이상의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가 연명의료결정제도를 통한 연명의료를 중단하였다. 우리 사회에서 연명의료결정제도는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지만, 아직도 여전히 제도의 취지나 내용에 대한 인식과 이해도가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최대한 존중하여,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보호하고자 했던 연명의료결정제도의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제도가 시행된 지 1년이 지난 지금도 의료현장에서는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웰다잉은 환자의 생명과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있기 때문에 참기 어려운 고통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환자의 아름다운 죽음에 대한 선택을 존중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면서 다른 한편으로 안락사의 남용을 방지하기 위한 전제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60) 이를 위해서는, 연명의료결정제도의 입법목적이 충실히 이행되고, 연명의료결정제도가 우리사회에 제대로 안착되기 위해서는 환자와 환자가족, 의사와 병원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해결하고, 현실에 맞게 법적·제도적으로 보완해 나가야 할 것이다. 더불어 호스피스 인프라 구축, 연명의료결정에 대한 지역의 형평성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한 정부의 지원도 확대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