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들어가는 말
법학전문대학원 제도는 ‘신림동 수험법학’으로 회자되는 사법시험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하여 2009학년도에 도입・시행되었다. 그 도입의 초기에는 사법시험의 존치 여부, 로스쿨 입학전형의 공정성과 학사관리의 엄정성 그리고 변호사시험의 합격률 등 많은 논란이 있어왔다. 그러나 법학전문대학원 도입 10년을 맞이하는 현재에서는 법조인 양성은 법학전문대학원 중심의 변호사시험으로 일원화되었고, 법전원의 입학전형에서도 공정성과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한 여러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어 각 학교별로 또 공통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나아가 학사운영의 면에도 엄격한 상대평가를 통한 나름의 객관성과 엄정성이 확보되어 있다고 하는 긍정적인 평가가 있다.1)
하지만 정부가 로스쿨도입의 목표로서 “교육을 통한 법조인 양성”을 표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법조인은 여전히 ‘선발’되고 있으며, 이마저도 그 합격률은 해마다 저하되고 있는 실정이다.2) 또한 법학전문대학원에서는 그 명칭에도 불구하고 법률실무가 배출을 위한 ‘변시 중심의 수험법학’에 끌려가다시피 하니 종래와 같이 그 ‘대학원’에서는 학문후속세대인 법학자의 양성이나 법학이론의 교육은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3)
이런 차제에 경북대학교 법학연구원이 “학문후속세대 양성 및 법학교육의 미래”라는 대주제하에서 법학교육의 미래를 위한 유의미한 고민을 지난 수년간 계속하여 그 중지(衆志)를 모우는 특별 세미나를 개최하여온 것은, 실로 학문으로서의 말기법학에 연명장치를 구비하고 법학연명의 처방전을 제시하여 학문법학・이론법학을 다시 소생하려는, 가히 중세의 문예부흥에 버금가는 법실무 만능의 시대에 법학부흥을 위한 새로운 ‘르네상스(renaissance) 운동’이라 평가할 만하다. 이와 같은 시대적 소명의 중차대한 자리에 미성숙하고 얄팍한 몇몇 단편적인 생각을 마치 ‘만병통치약’으로 포장하여 전래의 약방문에 그 처방전 하나를 보태고자 한다.
법제도나 그 현실이 변경되었음에도 여전히 현실감각 없이, 환언하여 로스쿨 도입의 10년을 지나는 현 시기에도 실무가 아니라 이론법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 방향으로 법학교육의 미래를 향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도대체 법학이 학문이었든가에 대해 답하여야 할 것이다.4) 다른 분야의 학문과 달리 법학에서는 법실무에 그 우위가 있고, 학문성에 대한 강조가 그 후순위의 반증이라면 이러한 지금까지의 논의의 파급력은 반감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법학의 학문성에 대한 의문과 현실의 도전을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Ⅱ. (형사)법학의 학문성 :
로스쿨제도의 도입으로 현재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의문은 다음과 같다. 필자는 학부재학시절에 다소 자학적이나 익살스런 표현의 하나로 ‘법학(Rechtswissenschaft)은 밥학(Brotwissenschaft)’이라는 말을 들었고 종종 사용한 바 있다. 이제는 로스쿨시대, ‘법학이 밥학이라도 되는가?’ 자문해본다. 법학의 학문성이 희석된다면, 장차 ‘學’(Wissenschaft; 과학, 학문)은 사라지고 ‘術’(art; 예술, 기교 등)로서의 ‘법’만이 남게 되는 것은 아닐까?
특별세미나의 마련에 초석을 제공한 경북대학교 김성룡 교수는 일전에 한 연구에서 법학(Rechtswissenschaft)인가, 아니면 밥학・빵학(Brotwissenschaft)인가?, “법학이 학문인가?”라는 자기성찰의 물음을 통해 우리 시대(여기서는 특히 로스쿨 시대) 법학의 학문성에 대한 다소 도전적인 질문을 던지고, 오래된 독일에서의 이 질문이 새삼스럽게 우리의 현실에 여전한 유효성을 지닌다고 설파한 바 있다.5) 이 오래된 질문과 그의 연구는 우리 시대 법학자・법률가・법조인의 과제에 대해 자기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기에 충분하였음에도 아이러니하게도 그에 대한 반향(反響)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위 현상은 아마 그 질문에 적답(適答)을 제시하는/하려는 노력에 비해 이른바 ‘밥’(연구업적)이 되는 연구의 가성비가 크게 떨어져서 그런 것이 아닐까라고 짐작만 할 수 있다.
‘법학이 밥학’이라는 자조 섞인 표현의 기원은 명확하지 않다. 꽤 오래된 이 격언은 다음의 묘사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만의 표현은 아니었던/든 것으로 보인다.
- 1676년 말경에 고트프리이트 빌헬름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는 하노버(Hanover)로 가서 도서관 사서로 일하다가 나중에는 법률사무소 고문의 지위(Stellung als Kanzleirath)를 받았다. 그때부터 그는 스스로 말했듯이, 법학은 그의 “밥학”이었다. 하노버에서 판사로서의 복무이외에도 그는 법원의 업무 개선을 위한 제안을 하였으며, 마인츠(Mainz)에 머물 때 기획한 로마법의 개정에 관한 계획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였다.6)
한편 체코 출신의 작가 프란츠 카프카(1883∼1924)의 학창시절에도 이 표현은 통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카프카는 원래 작가를 지망했지만, 아버지 헤르만은 카프카에게 “법학(Rechtswissenschaft)은 밥학(Brotwissenschaft)”이라며 법 공부를 하도록 아들을 다그쳤다고 한다.7) 또 독일의 법철학자 구스타프 라드부르흐의 저술에서도 이와 같은 문학사(文學史)의 많은 증거가 보인다.8)
- 그리스토프 쉴러(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 1759∼1805)는 칼스슐레(Karlsschule)에서 2년 동안 법학을 공부하는데 헌신했지만, “그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었고, 이때부터 그의 병세가 시작되었다고 널리 회자되듯이 이 희생은 많은 대가를 치르게 하였다.” 즉, 그에게 정신적 고통을 주었던 ‘법학’을 특히 언급하면서 그는 ‘밥학’에 대한 원망을 1789년 그의 대학교수 취임연설에서 적나라하게 설명한다.
- 또한 아버지의 희망에 따라 법학전공을 강요당했던 독일의 법학자이자 작가인 바켄로더(Wilhelm Heinrich Wackenroder 1773∼1798)도 그가 루드비히 티익(Johann Ludwig Tieck, 1773∼1853)에게 보낸 편지에서 “마음이 서로 마주치는 곳에서도 냉철한 이성을 사용해야만 했다”고 격정적으로 불평한다: “나는 결코 판사도, 또 위대한 변호사도 되고 싶지 않았다.”
아무튼 법은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안정된 밥벌이와 사회적 명망, 높은 지위를 보장해주는 보증수표였다. 고액의 등록금에도 불구하고 유수의 청춘이 법조인을 지망하며 로스쿨에 지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제 “법학은 학문인가?”에 답할 차례다. 법학이 학문인지, 또는 어떤 학문인가를 설명하기에 앞서 먼저 學問(Wissenschaft, science, scientia)이 무엇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9)
일반적으로 대학의 정식강좌로 개설된 분야를 학문의 이름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10)이지만 이러한 형식적 정의가 완전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대학의 강좌개설의 사실이 곧 학문성에 대한 증거가 될 수 없고, 학문성에 의심이 없는 분야도 여전히 대학 강좌로 개설되지 않은 경우도 있고 또 그 반대의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질적인 기준의 마련이 필요한데, 그러한 실질적 학문개념은 철학자인 칸트(Immanuel Kant)11)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학문을 “원리에 따라 정리된 인식의 전체로서 體系(System)에 해당하는 이론”이라고 정말 현학적으로 정의하였다. 암튼 전통적인 이론에 따르면, 사물의 원인을 구명(究明)하는 것(rerum cognoscere causas), 즉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으로 학문을 정의할 수 있다.
그런데 법학이 여기에 해당하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어 왔다. 특히 1848년 베를린의 검사, 키르히만(Julius Hermann von Kirchmann)은 베를린 법률가협회에서 행한 강연에서 학문적 사고는 불변의 객체에 대해서만 가능한데, 법실무학의 대상이 되는 법률은 - 개정 또는 폐지로 인하여 - 변경된다는 이유로 학문(Wissenschaft)으로서 법실무(Jurisprudenz)의 무가치성(Wertlosigkeit)을 강조하였다.12) 그는 (법률을 개정 한다는) “세 마디의 입법자의 보고적인 문언으로 전체 도서관의 책이 휴지 쪽이 되어버린다”고 이를 단언적으로 비유하였다고 한다.13) 그의 이러한 주장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법학적인 정언이 수학이나 자연과학과 같은 절대적 진리성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법학은 理性의 最適性(ein Optimum an Rationalität)을 추구하며, 이를 바탕으로 법조인은 법률분쟁을 해결하고 그 갈등을 해소하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 바로 이점에서 ‘법학의 학문성’은 결코 부인될 수 없다고 본다.
법학의 학문성에 대해서는 이미 2세기 초반의 로마 법학자인 첼수스(Publius Juventius Celsus, 67∼130년)가 법을 정의하면서 법학이 진정한 의미에서 학문임을 긍정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14)
- Digesta 1.1.1pr. Ius est ars boni et aequi. (법은 선과 형평의 기술이다)
여기의 ‘ars’는 단순히 기술(technique)을 뜻하는 것만이 아니라 이를 넘어 예술(art, Kunst)의 의미도 지니고 있다. 이는 동시에 ‘체계적인 사고와 인식의 배열’을 의미하는 단어로서 학문(Wissenschaft)과도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러므로 첼수스의 정의는 법이 학문이라는 사실을 의미하는 동시에 법을 다루는 가치가 법문언의 기계적인 적용만이 아니라 이익형량의 기술(ars)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첼수스는 위의 정의에서 법을 가치기준과 연계함으로써 법학이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을 제시하는 倫理學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강조한다.15)
그런데 法學은 현행 법률의 이념・가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점에서 성경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고 연구하는 神學과 그 성질을 같이 하는데, 여기서 법학과 신학은 함께 敎義學(Dogmatik)으로 지칭되고도 있다. 이 교의학의 연구대상이 되는 교의 또는 Dogma는 항구불변의 절대적 가치를 전제로 한다. 다만, 입법자의 결단으로 개정되거나 폐지되지 않는 한 법률은 그 효력가치가 유지된다는 점에서 신학의 성경과 차이가 있을 뿐이다.16)
다른 한편 법학은 학문 중에서 본질적으로 分析學에 해당하며,17) 이는 법률사안과 일반사안의 분리, 공법과 사법의 구분, 그리고 동일한 법률사안 내에서 상이한 법률쟁점의 분리기술로 나타난다. 이러한 같음과 다름의 가름(區分)은 생물학의 동・식물계통도의 체계구성과 분류에 비견되기까지 한다.
Ⅲ. 로스쿨시대의 법학교육
‘법학’(Rechtswissenschaft)이 이미 로마법시대 이래로 학문(Wissenschaft)으로서의 성격을 굳건히 유지하여 왔고, 중세이후 대학의 설립에서도 신학, 의학과 함께 법학은 전문적인 학문의 상급학부를 형성하였다.18) 그럼에도 19세기 중반기에 이르러 전술한 바와 같이 독일 검사 키르히만이 법학의 학문성에 의문을 제기했다고 쉽게 오도되고 있는데, 정확하게는 오히려 오늘날 우리시대 로스쿨 법학교육에 던지는 경종이라고 해야 한다. 이러한 생각의 단초는 아래에서 찾을 수 있다.
- 김성룡, 「법이론의 쟁점」, 도서출판 책과 세계, 2013, 1면 이하; Jurisprudenz와 Rechtswissenschaft, Jurisprudence와 legal theory, philosophy of law 등의 용어사용과 관련하여 물론 저자들 개인의 취향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예컨대, Ian McLeod, Legal Theory, 2. ed., Palgrave, 2003, p. 2), 영미(Anglo-American)법계에서는 Jurisprudence를 legal theory와 거의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지만, 프랑스의 경우에는 법원에 의해 발전된 법원리, 즉 판례를 통해 형성된 법을 의미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라고 한다. 김성룡 교수 자신도 prudentia가 scientia에 대비되어 이해된다면, Jurisprudenz는 법실무 또는 그 실무에서 형성된 법원칙 등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19)
이 Jurisprudenz는 일련의 판결들에서 발견되는 또는 대법원판결이 일관성 있게 말하는 ∼의(무슨, 무슨 또는 뭐, 뭐에 관한) ‘법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렇다면, 키르히만의 전술한 발제는 이제 법학(Rechtswissenschaft)의 학문성을 부정하고 그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법실무(Jurisprudenz)의 학문적 무가치성을 강조한 것으로 독해(讀解)될 수 있고, 이는 법학교육에서 실무의 우선성을 강조하는 현 세태를 질책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분석이 필자 혼자만의 과도한 독해(獨解)로만 보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필자는 일전에 캐나다 토론토 대학교의 마쿠스 두버(Markus D. Dubber) 법학교수가 독일 형법(학)과 미국 형법(학)의 특색에 관하여 쓴, “식물학으로서의 형법학”(Strafrecht als Botanik, in: Empirische und dogmatische Fundamente, kriminalpolitischer Impetus. Symposium für Bernd Schünemann zum 60. Geburtstag. Herausgegeben von Roland Hefendehl, Köln, Berlin, München 2005, 245∼256면)과 “학문성을 원치 않는 형법의 단순성”(Die Anspruchlosigkeit des awissenschaftlichen Strafrechts, ZStW 121 (2009), 977∼984면)이라는 두 편의 논문을 국역(國譯)하여 “미국 형법교수가 본 독일 형법과 미국형법의 특징”이라는 제하에 묶은 손미숙 박사의 글을 접한 적이 있다.20)
여기서 두버 교수는 미국의 법조인들이 독일 형법 도그마틱을 학문으로 이해하는 것을 생소하게 느끼듯이 독일 법조인은 이를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고 한다.21) 어쩌면 법실무와 법학의 다름에서 연유하는 위 양국 법조인의 생경함과 당연함의 차이에 대해, 필자가 느끼는/경험한 학부 법학교육과 로스쿨 법학교육의 차이를 대조시킨다면 이는 지나친 도약/비약일까? 여하튼 미국형법과 독일형법의 특성에 대해 두버 교수는 다음과 같이 담담히 서술하고 있다.
- 1800년경 포이어바흐(Paul Johann Anselm Feuerbach)를 시작으로 독일 형법에서 이백년의 이론적인 연구와 1871년 제국형법전 이래 100년이 훨씬 넘는 통일적인 도그마틱 체계화의 결과에 대해, 스페인의 한 형법학자는 이 독일의 형법체계를 “인문학의 가장 큰 업적 중의 하나로 인정해야 하는 아주 훌륭한 건물”로 평가했다.22)
- 예쇅/바이겐트(Jescheck/Weigend)는 일반적 범죄론에 대한 독일형법학의 노력을 여러 가지 중 특히 19세기 대양에서 배가 난파된 후 食人한 살인을 다룬 유명한 영국의 미뇨네트(Mignonette) 사건 판결[Regina v. Dudley & Stephens (1884) 14 QBD 273 (CCR)]을 예로 들며 정당화시킨다. 바로 독일 범죄체계인 “구성요건해당성, 위법성, 책임의 범죄개념 체계와 이와 연관된 위법성조각 긴급피난과 면책적 긴급피난과 같은 구분이 없다면 이 사건의 해결은 불확실한 직감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예쇅/바이겐트는 논증한다.23)
- 이에 대한 미국적인 시각에서는 어떤 사건의 해답에 대한 잘잘못(是非)은 물론 한 사건의 ‘해답’에 대해 말하는 것 자체가 매우 낯설다. 그 대신에 항상 한 사건의 분석과 해결에는 법 규정뿐만 아니라, 특히 개별사례의 사실적 정황에서 연유하는 여러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형법체계를 학문적 업적으로 여기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다.24)
위의 두 사고는 법학의 학문성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본다. 즉, 법은 학문이기 때문에 모든 사례에 맞는 해답이 있고, 이러한 사례들을 해결하는 것은 학문적 인식의 총체인 형법체계의 과제라고 한다. 그래서 두버 교수는 학문으로서의 법학은 학자들의 과제인데, 이것이 미국 법조인에게는 너무나 생소한 것인데 반해 독일의 학자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하였다.25)
- 역사적으로 보면, 형법학자로서 독일교수들은 형법 도그마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독일판례의 영향은 독일교수들의 그것보다 훨씬 적다. 독일법이 시민에 의해 ‘법제화’된 것이고(시민법국가), 보통법국가처럼 판사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독일 판사들은 사실관계를 제정된 법규범에 포섭함으로써 법을 단지 이론에 따라 적용한다. 법조문의 불명확성과 흠결은 끊임없는 학문적 연구와 분석을 통해 인식(즉 형법)을 완성하고, 그 발견은 판사들에게는 구체적인 사례해결을 위해, 입법자들에게는 형법개정을 위한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학자인 교수들에 의해 보충된다.26)
- 그 결과 19세기 초까지 독일의 법과대학은 전문 상소법원의 역할을 했다. 종종 서류송부라는 복잡하고 오래 걸리는 소송에서 하급심 판사들은 교수들에게 전문 감정을 위해 사건기록에 관한 서류를 제출했다. 법과대학은 사건을 해결하고, 판결을 초안한 서류를 판사들에게 되돌려 보냈고, 판사들은 그에 따라 판결을 했다. 지금도 여전히 독일 교수들은 상소법원의 판사가 될 권리가 있다. 이는 교수들도 다른 판사후보들과 마찬가지로 선출하거나 - 적어도 - 임명하거나 종종 일정한 요건 하에 종신판사로 임명하는 미국에서조차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고 한다.27)
- 심지어 판례가 학문으로서의 형법체계형성에 조금이라도 관여한 것이 있다면, 학문의 특정한 해결이나 입장을 개별사례에 적용한 것이다. 그래서 독일 법원의 판결은 종종 전문 감정인의 감정문과 같이 서술되었는데, 이는 판례나 입법자가 아니라 - 특히 - 20세기 초 교수들이 개발하였던 형법학의 분석적 구조를 강하게 반영하여 활용하고 있다. 판결들은 보통 사실관계를 요약하고 나서 바로 관련된 법규범에 관한 설명을 하는데, 여기서 다시 형법학의 추상적 형태를 반영하고 있다.28)
- 독일 교수들은 형법에 대한 최고의 영향력을 학교교육이나 사법시험출제나 입법, 판례에 대한 직접적인 영향력을 통해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논문이나 교과서와 주석서 같은 학문적 활동을 통해 행사한다. 19세기 초부터 축척된 독일 형법도그마틱에 대한 문헌은 모든 면에서 엄청나다. 이 문헌은 단지 도그마틱의 모든 부분들을 다룰 뿐 아니라, 또 항상 새로운 부분들을 발견한다. 독일 형법이라고 하는 광범위하고 복잡한 형상은 먼저 독일 교수들에 의해 만들어졌고 - 보통법처럼 판례의 세심한 분석을 통해서가 아니라 – 학문적인 발전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이는 또 어떤 학문적 발견에서 다음 발견을 시작하고, 보통법과 달리 오래된 판결 혹은 오판결의 역사는 연구하지 않아도 되는 독일 형법 도그마틱의 상대적인 무역사성을 말해준다.29)
위와 같은 두버 교수의 분석을 바탕으로 이제 우리의 로스쿨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보자. 세칭 로스쿨의 공식적 법률상의 명칭은 “법학전문대학원”이지만, 국내외 유수 대학의 학부를 졸업한 후에 무슨, 무슨 학사가 법학적인 전문지식 없이, 법학적 지식을 묻지 않는/물을 수 없는 이른바 법학적성시험 리트(LEET)시험을 거쳐 소정의 성적이 있어야 입학하는 ‘학사후 과정’으로서 (그런 형식적 의미에서는) 대학원이기는 하다. 그런데 여기서의 교육은 키르히만 검사가 강조하였고 또 두버 교수가 비교하여 특징을 부여하였듯이, 학문으로서의 법학(교육)은 뒷전으로 밀려나있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교육현실을 감안하여 우리식 어감에 맞게 이른바 ‘법리전문직 대학원’이라고 지칭하더라도 이는 필자만의 독설(毒舌)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소한 법학전문대학원은 도입당시의 표방부터가 ‘법조인 양성기관’이었으며, 학문연구기관/법학자양성기관이 아니었기에 그렇다. 여기서 법학전문대학원은 법조인 양성기관만인가? 환언하여 법조인은 법학자가 아닌가? 또는 아니어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슬그머니 뇌리에 스며든다.
그들은 법률전문가 그 이상의 존재이고, 존재이기를 기대한다. 그래야 필자를 포함한 일반시민이 자신의 일생일대의 사건을 신뢰하고 맡길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예로부터 ‘법학이 밥학’이라는 말로서 법률에 관한 전문적 지식을 갖춘 전문직업의 위상과 역할이 - 최근까지만 하더라도 - 연일 상한 없이 상종가를 쳐왔던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우수한 인재들이 법과대학으로 몰리고, 대학에서는 전공여하를 불문하고 법률전문직 선발시험을 향해 돌진하고 심지어 대학교육의 파행을 초래하는 원흉으로 지탄되기도 하였고, 이러한 몰림 현상은 로스쿨의 시대에도 크게 달라진 바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권력과 명예, 부와 안정감 등 우리 사회가 높게 자리매김하고 있는 가치들을 한꺼번에 움켜잡을 수 있는 매력적 요소가 법률전문직에는 있기 때문이다. 이 매력적인 법률전문직을 특히 ‘법조인’이라고 자리매김하고 있다.30)
일찍이 구스타프 라드부르흐는 “이해심과 자신감에 충만하여 인간적인 모든 것을 통찰하는 눈을 가지고, 원칙에 엄격하면서도 말없는 부드러움을 가지고, 당사자의 다투는 심정을 초월하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독자성을 추구해 나가는 노판사”의 모습을 이상적인 법률가의 상으로 그리고 있다.31) 이러한 표상에서 흔히들 법조인이 갖추어야 할 3대 덕목으로서 법률적 지식, 인격 그리고 용기를 꼽고 있다. 여기에 덧붙여 사건의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고자 하는 뜨거운 가슴을 추가하고자 다음과 같이 이를 강조하는 김성돈 교수 같은 이도 있다.
- 감수성 없는 법조인은 사건의 眞相에 접근하지 못하고, 자신이 받은 인상과 확신만 신뢰하다가는 오판에 이르기가 일쑤다. 감수성 없이 타인이 처한 상황에 감정이입할 수 없는 법조인은 사건의 당사자들에게 ‘일생’의 사건을 자신에게 부과되는 ‘일상’의 사건으로 치부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법정에서 확인될 사건의 진실에 접근해가게 하는 더듬이를 ‘법적 감수성’이라고 부른다면, 그 사건이 사회의 전체에 미치게 될 파장과 정의의 실현에 이바지할 정도를 가늠하게 하는 통찰력을 법조인의 ‘역사의식’이라고 부를 수 있다. 역사의식 없는 법조인은 현행의 질서 유지에만 관심이 있고, 눈앞에 놓인 불의에 가려진 정의를 바라볼 수조차 없다.32)
- 법률은 그 사회의 제반 갈등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기능을 하는데, 그 법률은 적용자의 철학이나 가치인식에 따라 적절하게 해석되고 적용되어야 할 경우가 많다. 즉 법률은 언제나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정치적・역사적・철학적・사회문화적 맥락마다 다르게 적용될 수 있다. 그 결과 ‘법률적용자’는 법률을 대신하여 말하는 입 혹은 자동판매기와 같은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가치철학에 따라 법률을 새롭게 해석해낼 수 있는 법률전문가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법조인은 다양한 세계관을 이해할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하고, 사회의 다양한 가치들에 대한 나름의 평가도 할 수 있는 분석력이 있어야 한다. 나아가 우리 사회의 선량한 일반인이 가지고 있는 평균적인 정서를 따라갈 수도 있어야 한다.33)
우리시대의 로스쿨은 위의 생각과 같이 바람직한 법조인의 교육에 얼마나 기여하는가를 자문하고 자성한다. 반대로 법조인을 지망하는 로스쿨 학생은 법을 공부하고 법학을 연마하는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법학사든 비법학사든 상관없이 목전의 변시에만 매몰되어 다른 생각은 미처 하지도 못 하고/할 수도 없는 것이 우리시대의 로스쿨 학생의 현실은 아닐까. 바람직한 법조인 상(像)을 바라며 위와 같은 그런 다양한 사고로 일탈 내지 이탈을 즐기는 로스쿨 학생의 말로는 변시 5탈의 사고로 처량하게 끝날 수밖에 없는 선발시험이든, 양성교육이든 그것이 현행의 제도로 제도화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답할 수 없는 이 물음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것은 온전히 로스쿨에서 자기정체성에 대해 혼돈을 겪고 있는 로스쿨 신출내기, 중고교수인 필자의 몫이어야만 하는데 현실도 과연 그런가? 아니라고 본다.
대학에서 법학이 사라진 자리에 남을 것, 남아있는 것 또는 남아있을 것은 무엇인가? 지금까지 ‘법학이 밥학’이었다면, 냉정하게 말해 법학에서 ‘학’이 사라지게 되면 이른바 ‘밥’도 함께 없어질 것이다. 암울한 위의 진단은 ‘지능정보’사회의 도래와 ‘AI’ 변호사의 등장만으로도 순전히 예상이 가능한, 현행과 같은 로스쿨 교육의 변시대비 치중의 교육과정에서 선발된 변호사의 말로를 단적으로 ‘비전’한 것이다.
최근 이세돌과 알파고간 세기의 바둑대결에서의 시사(示唆)와 인공지능(AI) 의사 왓슨(Watson)의 사례에서 법학자는 무엇을 봐야 하고, 그 탈출구를 어디에서 구해야 할 것인지는 불 보듯이 명확하다. 일전에 국내 첫 인공지능 변호사 ‘유렉스’가 2018년 2월에 국내 대형 로펌 ‘대륙아주’에 입사(?)되었다고 하는 보도를 접했다. 한편 대법원 법원행정처도 개인회생・파산 사건을 담당하는 AI 재판연구관 도입을 골자로 한 ‘지능형 개인회생파산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고 한다.34) 현재와 같은 대법원 판결요지 중심의 단순 암기식 법학공부 방법은 딥러닝(deep learning) 기계에의 종속을 의미한다. 인간이 기계를, 인공지능을 능가하고 초월하기 위해서는 계산되지 않는, 아니 계산할 수 없는 ‘창의적인 사고’를 필요로 한다.35) 로스쿨시대에도 여전히 실무법학을 지양하고 학문법학을 지향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2010년, 학계에서 주장되는 다양한 학설은 실무와 무관한 이론에 불과하다는 일부 실무자의 폄하를 단번에 날려버리는 사건이 실제로 헌법재판소에서 발생한 바 있다.36) 그동안 강학상으로만 논의되었던 범죄체계론과 고의의 체계적 지위, 위법성조각사유의 객관적 전제사실에 관한 착오를 해명하기 위한 다양한 학설들이 헌법소원사건의 심판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헌법재판소는 검사의 기소유예처분 견해와 달리 이 사건 청구인의 착오사례를 명시적으로 ‘위법성조각사유의 객관적 전제사실에 대한 착오’사례로 판단하고서 그에 대한 법적 효과를 달리하는 다양한 학설이 대립하고 있으며 어느 견해를 취하는가에 따라 청구인이 무죄가 될 경우도 있음을 설시하면서, 이 사건 담당검사는 청구인 착오의 성격과 그 법적 효과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도록 하는 실체적 진실을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고, 검사의 그와 같은 중대한 수사미진의 위법이 기소유예처분 결정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청구인의 평등권과 행복추구권을 침해한 것으로 판단하여 이 사건 기소유예처분을 취소하는 결정을 하였다.37) 이러한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여하튼) 이 사건 착오사례의 형법이론적인 정립과 그에 대한 이해가 실무적 관점에서도 결코 간과되지 말아야 할 중요한 내용이고, 실무의 결정에 반드시 이론적 내용도 고려되어야 한다는 점을 명료하게 지적하고 있다. ‘실무가 바로 형법이론의 원천이고 실무와 무관한 형법이론은 있을 수 없는 것이며 로스쿨 시대에도 형법이론이 결코 소홀하게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38)
형법이론은 전형적으로 반복되는 실무의 일관된 문제해결을 위해 만들어진 ‘법리’이고, 법원의 판례는 구체적 사건의 해결을 위하여 그와 같은 형법이론을 적용한 법리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판결요지가 아니라 판례의 법리가 더욱 중요한 로스쿨의 교육 내용이 되어야 하는 것이며 법이론(법리론)과 법실무는 결코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로스쿨 학생에게 ‘실무에서는 이론이 필요 없고 판례가 중요하다’는 말로써 판례만, 여기서는 특히 판결요지만을 암기하게 하는 것이 로스쿨시대 법학교육의 전부인 것으로 여기는 태도가 있다면, 그러한 태도야말로 이론과 실무의 관계에 관한 오해를 넘어 실무는 법이론의 이른바 ‘현역’법리이고 법이론은 판례 법리의 ‘예비역’이기 때문에 실무의 정체・본질조차도 모르는 태도라고 가르쳐주어야 한다.39)
Ⅳ. 법학의 연명장치 마련을 위한 제언
앞서 변론한 것처럼 로스쿨의 교육방향 재정립이라는 고뇌에도 불구하고, 법학전문대학원의 도입과 10년의 시행은 그 도입취지40)와 무관하게 학부법학과의 감소현상 및 학문후속세대의 고갈 등 부정적인 파급효과를 가져온 것이 사실이다. 이는 ‘학부 법학과 폐지/축소’와 함께 법학연구자로서 ‘대학원생의 감소’ 및 그로 인한 ‘학문후속세대의 고갈’이라는 3 악재가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려 돌아간 결과이다. 이러한 빈익빈(貧益貧) 현상은 이제 - 오늘의 특별세미나를 하게까지 하는 - 학문으로서의 법학의 고사(枯死)를 우려해야할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였다.
위 빈익빈의 악순환을 부익부(富益富)의 선순환 구조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먼저 제1구동축의 방향을 바꾸는 것, 즉 ① ‘학부 법학과의 소생’이 급선무인 점은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는 대응이지만 그러나 현실의 법제41)와 법학교육계의 사정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다는 것 또한 기정사실이다. 이와 같은 법제와 현실사정을 감안한다면, 다음으로는 ② ‘로스쿨 입시 평정요소로 학부 법학이수 학점의 강화’를 생각해볼 수 있다. 지난 시기의 사법시험 시대에도 신림동 학원가 중심의 수험법학의 폐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사법시험 응시요건의 하나로 ‘35학점의 법학과목이수제도’가 있었다.42) 현행의 법학전문대학원법 제23조(학생선발) 제2항 제2문은 단지 ‘법학에 관한 지식을 평가하기 위한 시험을 실시하여 입학전형자료로 활용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43) 따라서 학부시절 수강한 법학과목에 대한 이수학점 및 교과명을 기재하여 제출하게 하는 방안은 법학지식을 가늠하게 하는 당시 취득한 성적의 기재를 요구하지 않는 한도 안에서 동 조항의 위반은 아닐 것이다. 심지어 로스쿨 입학전형에서 ‘법학사가 입학자의 3분의 2미만으로만 선발’하는 것도 동법 제26조(학생구성의 다양성) 제2・3항의 반대해석에 따라 법학전문대학원법 위반은 아니게 된다.44) 이들 법문의 체계해석에 따라 예전의 사시시절 ‘35학점의 법학과목이수제도’와 유사하게 법학전문대학원의 입시에서도 학부에서의 기본적인 법학교과목의 이수를 입학전형자료의 하나로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45) 이마저도 법학전문대학원법 관련규정의 탈법 또는 편법이라는 이견이 제기될 수 있는 경우로써 불가하다면, 끝으로 생각해볼 방안은 ③ ‘변호사시험의 변화’를 모색하는 것이다. 현행과 같이 변호사시험이라는 형식이 로스쿨에서의 교육내용을 좌우하게 되는 정도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면, 이 상관관계를 활용하여 그 ‘형식의 변화를 통해 그 내용을 개변하자’는 말이다.
연 3회에 걸쳐 실시되는 법학전문대학원협의회 주관의 변호사시험 모의시험이나 법무부 주관의 변호사시험 중 사례형문제에는 법학이론문제가 일정부분 포함되어 있었던 시행당시의 출제경향과는 달리 현재에는 대부분의 문제가 판례중심으로 출제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출제경향은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래서 예컨대 필자의 전공분야인 형사법 중 사례형의 경우를 보면) 100점 만점인 하나의 사례형문제에 형법 및 형사소송법상의 쟁점(통상적으로는 60대40의 비중)이 하나의 또는 일련의 사실관계에서 추출되도록 사안을 창작하거나 판례사안으로 이를 구성하다보니 불가피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현상은 아닐까 추측해본다. 특히, 이러한 경향은 형법의 결론이 형사소송법상의 쟁점과 관련이 깊은 사안 구성일수록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된다. 개별사안의 구체적 타당성에 근거한 판결요지 중심의 부분적인 무량한 수험공부가 오히려 살아있는 법으로 현실의 안정을 지도하고 있는 전체로서 판례의 법리를 뒷전으로 밀려나게까지 하는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야기하기까지 한다.
로스쿨에서의 법 교육은 판례의 법리가 아니라 그 결론, 즉 판결요지만 암기하는 방식으로 행해져서도 안 되고 또 그렇게 하지도 말아야 한다. 나무만 바라보면 숲을 깨닫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어떤 일을 할 때는 개별의 사안 하나하나를 살피는 것도 필요하지만,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전체를 바라보고 판단하는 통찰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접근하면, 변호사 본시험이든, 모의시험이든 그 자격시험에서는 제시된 사안의 사실관계에서 판례 법리를 찾아 적용하는 능력을 시험할 수 있도록 사례형문제의 변화를 촉구하고, 나아가 학계의 법리 즉 학설에 관한 지식도 테스트할 수 있도록 구성할 필요가 있다. 판례의 법리(법이론) 중심으로 교육이 실시되고 이를 통해 현실의 구체적 사건에 판례의 법리를 적용할 수 있는 법조인의 자질을 양성하며 이러한 로스쿨에서의 법 교육이 변호사시험으로 연동되어야 “교육을 통한 법조인 양성” 목표를 달성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유의해야 할 사실은 ‘교육을 통한 법조인의 양성’은 판례의 법리를 (맹목적으로) 답습하는 것으로는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현행법의 해석과정에 등장하는 다양한 법이론(학설과 판례)과 그 속에 사용된 개념 및 논리들이 단순한 언어유희가 아니라 현재(顯在)의 법과 잠재(潛在)의 법임을 분명하게 분석하고 비판할 수 있을 때 달성된다. 로스쿨시대임에도 상관없이 ‘판례의 법리(론)만이 법(학)이론의 전부는 아니다.’
법학전문대학원 제도시행 10년의 경과현실은 단언컨대 법학교육과 학문후속세대의 고사 위기로 정리되고 있다.
- 현행과 같은 변호사시험 대비에 급급한 로스쿨의 전문법학 석사의 교육과정만으로는 (학문후속세대의 양성을 위한) 능력 있는 법학연구자를 양성하기 어렵다. 지금의 법학전문대학원 교육만으로는 그 졸업생이 바로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법학연구직에 투입되기가 쉽지 않다. 법학연구자에게 요구되는 능력을 배양하기에는 현재의 로스쿨 교육과정은 지나치게 변호사시험 준비에 경도되어 있다고 한다.46)
위와 같은 현실의 진단에도 불구하고 그 처방의 마련에는 두 가지 방안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물론, 이들 처방전이 같은 시기에 동시에 존재한 것은 아니다). 로스쿨의 도입초기에도 법학연구 인력과 학문후속세대의 고사에 대한 우려가 예기되어 있었다. 그 당시에 제안된 하나의 처방은 일반대학원 법학과를 활성화하여 법학교육의 고사를 방지하고, 법학전문대학원의 성공적・안정적 정착에 기여하자는 상생의 협력관계 전략으로 요약될 수 있다.47)
그러나 10년 지난 현재에도 위의 전략적 대응이 실제로 약발이 있는 처방전인가/이었던가에 대해서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이른바 ‘SKY 대학’을 포함하더라도 과연 전국 유수의 일반대학원 법학과에 약효를 믿고 찾아오는 학문후속세대 자원자(신입생)가 얼마나 차고 넘쳤는지, 그 신약의 특효로 인해 그들이 지금에서도 건강하게 우리사회의 법학발전에 초석을 다지고 또 동량지재로 많이 등용되었으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양성될 것인지 자신 있게 답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당시의 예상된 법학의 고사라는 실질내용은 그 어느 대학인가와 상관없이 지금의 현실에서는 법학연구전문 예비인원의 감소라는 형식으로 표출되었다. 현실은 변수의 변화까지도 초래했다. 결국, 일반대학원과 법학전문대학원의 바람직한 역할 분담과 상생의 협력관계는, 마치 쌍발기의 한편 엔진이 연기를 뿜으며 정지되는 현실의 위기 앞에서처럼 기대하기가 곤란하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 참되다.48)
남은 하나의 처방은 - 전술한 헌법재판소 2008헌마429결정에서 알 수 있듯이, 적어도 – 청구인의 기본권침해여하를 소원 심판하는 헌법재판관이나 판례의 법리를 관장・생성하는 대법관 등 고위의 실무법조인 후보자의 형식자격요건에 지금과 같이 단지 변호사자격과 실무경력만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이와 함께 법학전문대학원 법학전문박사 또는 일반대학원 법학박사의 자격을 추가적으로 요구하는 방안을 생각해볼 수 있다.49) 매우 이기적 유전자에 근거한 위의 처방전은 법학전문대학원을 졸업한 유수의 우수한 법조인을 – 아마도 그들 자신의 장래희망과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 학문법학 연구의 산실로 최소한 유인할 수 있을 것이다. 구체적 처방전으로는 먼저 ① 법조일원화와 연계하여 법관임용에의 SJD과정 필수화 또는 Ph.D 인정이다. 다른 하나는 ② 법학교수요원 양성제도의 도입이다. ①의 방안은 求心的 유인책이라면, ②의 방안은 求人的 궁여지책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전술한 학부법학과의 소생이나 최소한 현행법제하에서도 실효성이 있는 ‘로스쿨 입시 평정요소로 학부 법학이수 학점의 강화’ 방안과 협공지계로 활용한다면 법학자양성책은 충분히 될 것으로 본다. 이러한 방책의 고사(古事)와 실전의 경험은 현재의 지구상에서는 법조일원화 제도와 이원적 법조인 양성체제를 운영하고 있는 독일의 법조인 양성에서 찾을 수 있다. 먼저 법조일원화의 근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50)
- 독일 법조인 양성제도는 법관, 검사, 변호사 등 법조 3역뿐만 아니라 법대 교수나 공증인(Notar) 혹은 행정기관이나 경제계 등 사회 각 분야에서 필요한 법률전문가 전부를 포함하여 소위 법조일원화(Einheitsjurist)를 그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법조일원화의 기본구성 틀의 법적근거는 바로 독일법관법에 규정되어 있으며, 다른 법조인 직업을 가질 수 있는 자격도 동법 제5조 제1항의 의미의 “법관직을 가질 수 있는 자격(Befaehigung zum Richteramt)”과 연계되어 있다. 예컨대 변호사의 경우 연방번호사법(Bungersrechtsanwaltsordning, BRAO) 제4조 제1문에서 변호사법상의 변호사(Rechtsanwalt)자격 조건의 일부로서 “법관직을 가질 수 있는 자격(Befaehigung zum Richteramt)”을 요구하고 있다.51) 따라서 법관에게 기본적으로 요구하는 법학교육을 성공적으로 이수한 자만이 법관뿐만 아니라, 검사, 변호사나 법학교수 혹은 공증인 등 법조인 직업을 행사할 수 있는 자격을 갖는다.52)
다음으로 소개된 법과대학에서의 법학교육과 유관기관에서의 실무연수의 이원적 법조인 양성과정 중 인상적인 제도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구 분 | 내 용 | 기 간 |
법과대학 | 법학수업 | 최소 4년 * 연방 평균 약 5.5년 |
고 시 | 제1차 국가고시 | * 응시기회 2번 |
사법연수 | 시보과정(Referendariat) | 2년 |
고 시 | 제2차 국가고시 | * 응시기회 2번 |
- 법과대학은 정원제한(numerus clausus)을 실시하는 학과이기에 입학배분을 위한 중앙부서(Zentralstelle fuer die Vergabevon Studienplatz, ZVS)를 통해 입학생이 분배되지만, 지원자의 수가 많아 입학하기 상당히 어려운 편에 속한다. 따라서 보통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만 법과대학에 입학한다.53)
- 학업기간이 장기인 이유는 법과대학에서 배워야 하는 필수과목이 많고 교과과정이 어려운 이유도 있지만, 1차 시험 응시회수가 일반적으로 두 번으로 제한되어 있어 2회 안에 국가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 그 준비기간을 오래두는 경향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학업기간의 장기화를 막기 위해 제도적으로 각 주(州) 별로 임의응시제도(Freiversuch 혹은 Freischuss)를 도입하여 8학기를 수료하기 전에 제1차 사법국가고시를 볼 경우 불합격하더라도 전혀 시험응시를 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도록 하고 있다. 그 결과 학업기간이 다소 단축되거나 임의응시후의 시험을 보는 경우 성적이 평균적으로 향상되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54)
- 법과대학의 법학수업과정 중에는 예컨대, 바덴-뷔템베르크(Baden- Wuerttemberg)의 법조인 양성 및 평가령(JAPrO BW) 제4조에 따르면, 학생들은 4학기말까지 중간평가시험(Zwischenpruefung)을 합격해야 한다. 중간평가는 민법, 형법, 공법 시험으로 구성되어 있고, 통과하지 못하는 경우 단 1차례 추가적으로 응시할 수 있다. 중간평가에 최종적으로 합격하지 못한 경우, 더 이상 법과대학을 다닐 수 없고 다른 전공으로 전과하거나 학교를 그만 두어야 한다. 중간평가시험에서 합격하지 못하는 경우 당연히 1차 국가고시의 응시자격이 주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중간평가시험을 두는 취지는 실질적으로 법조인으로서의 자질과 능력이 부족한 학생들이 입학 후 4학기 안에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여 다른 전공으로 전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55)
- 독일법관법 제5a조 제3항 제2문에 의하면, 방학기간동안에는 최소 3개월의 실무교육(Praktishe Studienzeit)을 받아야 한다. 실무교육의 목적은 실제 법률생활에서의 법의 의미를 알고 사회생활에 대한 이해와 법의 적용 및 실체법과 절차법의 관계에 관한 이해를 증진시키기 위한 것이다. 실무교육은 1차 국가고시의 응시를 위한 필수요건이다.56)
- 대학에서의 학습교육은 1차 국가고시를 통해 종료된다. 1차 국가고시의 주된 목적은 최소 4년 이상의 기간 동안의 학습 성과를 측정하는 것이다. 1차 국가고시는 독일법관법 제5조 제1항 제2문에 따라 대학에서 평가하는 심화과정분야(Schwerpunktbereich) 평가와 국가에서 평가하는 필수과목(Pflichtfach) 평가로 구성되어 있다. 대학평가의 심화과정은 1차 국가고시의 점수의 30%를 구성하고, 70%를 차지하는 국가평가의 필수과목은 필기시험과 구술시험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차 시험에서 구술시험은 대체로 법대 교수가 평가한다.57) 1차시험에 합격하면 사법연수(Vorbereitungsdienst)의 자격이 주어지며, 국가차원에서 수여하는 “법무 시보(Rechtsteferendar, Ref. jur.)”라는 타이틀을 취득한다. 대부분의 법과대학에서는 우리의 석사학위에 상응하는 법학 디플롬(Diplom-Jurist, Dipl.-Jur.) 학위를 수여한다.58)
- 독일법관법 제5b조 제1항에 따라 사법연수(Vorbereitungsdienst)는 2년 동안 이루어지며, 1차 국가고시 합격 후 바로 법원이나 검찰청등에서 실무수습을 받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법무시보들은 주 고등법원에 소속하고 고등법원이 관할하는 지방법원에 배치되며 실무수습 생활보조금 지원 등 시보와 관련한 행정적인 편의를 제공받는다. 각 지방법원에서는 배정된 시보를 대체로 20명 정도의 소규모 그룹으로 편성하여 실무적인 판결문 작성이나 기소처분서 작성 등 법원 및 검찰청에서의 사법연수(Vorbereitungsdienst)를 준비하기 위한 기초적인 실무교육을 실시한다.59)
- 2차 국가고시는 각 주 법무부에 부설된 주 사법시험청 (Justizpruefungsamt)이 주관한다. 2차 국가고시도 1차 시험과 마찬가지로 필기시험과 구술시험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필기시험은 대체로 사법연수(Vorbereitungsdienst)과정의 마지막 단계인 선택적 시보근무지에서의 근무 직전에 보며 구술시험은 선택적 시보근무 직후 필기시험 합격자를 대상으로 실시한다. 필기시험은 의무적 시보근무지에서의 수습내용과 관련된 것이어야 하고, 구술시험은 의무적 시보근무지 및 선택적 시보근무지에서의 수습내용을 포함하여 사법연수(Vorbereitungsdienst) 중에 습득한 전체 실무를 대상으로 치러진다. 필기시험과 구술시험의 반영 비율은 대체로 70:30이다. 2차 사법국가고시의 시험횟수 및 절차 등에 대해서는 제1차 사법국가고시와 마찬가지로 각 주법에 세부사항이 규정되어 있다(독일법관법 제5d조). 제2차 사법국가고시도 원칙적으로 2번의 응시기회로 제한되어 있으며, 각 주(州)마다 상이하나 대체로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 한하여 주(州) 법무부의 허가를 받은 후에만 추가적으로 1차례 더 응시할 수 있다.60)
- 독일의 법과대학 교수는 1차와 2차 국가고시에 합격한 사람 중에서 일반적으로 우수한 점수를 획득한 사람만이 박사과정생(Doktoranden)이 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독일 법과대학의 시험과 사법시험은 0점부터 18점으로 평가되고 4점 이상부터 합격으로 간주된다. 보통 사법시험에 합격하는 학생들의 평균점수는 4점에서 6점 사이이며 응시자의 절반 이상이 이 점수 군에 해당한다. 16점 이상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하고 아주 우수한 경우라야 13점에서 15점이 매우 드물게 주어진다. 박사과정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보통 7점 정도의 높은 점수를 획득해야 한다. 박사과정에 입학 후에는 수강해야 하는 별도의 과정은 없이 박사논문(Dissertation)을 작성하여야 하고, 최소 magna cum laude 이상의 점수를 획득한 경우 교수자격취득과정생(Habilitanden)이 될 수 있고, 이후 교수자격취득논문(Habilitationsschrift)을 작성하여 통과해야 한다. 교수자격취득과정은 박사학위취득자 중 대개 상위 10%에 해당하는 우수 자원만 들어갈 수 있으며 교수자격취득논문이 통과되어도 바로 교수임용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한편 박사과정생 및 교수자격취득과정생은 일반적으로 대학부설의 연구소에서 지도교수의 조교(wissenschaftliche Mitarbeiter)로 근무하고 그 대학의 교육공무원지위를 갖는다. 독일의 법과대학 정교수(ordentlicher Professor)는 법관에 보임될 자격이 있으며(독일법관법 제7조), 변호인으로 선임될 수도 있다(독일형사소송법 제138조).61)
Ⅴ. 나가는 말
1) 법학전문대학원을 도입한 지 10년이 지난 현재에도 그 도입의 목표가 ‘교육을 통한 법조인 양성’이었음에도 법조인은 여전히 ‘선발’되고 있으며, 이마저도 합격률이 해마다 저하되고 있다. 법전원에서는 그 명칭에도 불구하고 ‘대학원’의 학문후속세대인 법학자의 양성이나 법학이론의 교육은 뒷전으로 밀려나 있다. 이런 현실이 지속된다면, 예상한 바와 같이 학문법학은 고사할 것이고, 학부시절 말기・로스쿨체제 초창기의 법학자 또는 학문후속세대는 말기법학의 종기와 함께 종언을 고할 것이다. 법학자의 부족으로 인한 법학교육의 파행은 정부를 비롯한 사회 전역에 법적 지식과 상식의 부족현상을 초래할 것이고, 이는 법치국가의 퇴행으로 법치주의의 위기로 도래할 것이다.
위의 총체적 난국의 타개를 위하여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제언을 하였다. 먼저 ① ‘학부 법학과의 소생’을 대응방안으로 제안하였다. 그러나 현실의 법제와 법학교육계의 사정은 이를 쉽게 수용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오히려 법제와 현실사정을 감안한다면, ② ‘로스쿨 입시 평정요소로 학부 법학이수 학점의 강화’를 주장하였다. 학부시절 수강한 법학과목에 대한 이수학점 및 교과명을 기재하여 제출하게 하는 이 방안은 법학지식을 가늠하게 하는 당시 취득한 성적의 기재를 요구하지 않는 한도 안에서 법학전문대학원법 위반은 아니라고 본다. 예전의 사법시험시절 ‘35학점의 법학과목이수제도’와 유사하게 법학전문대학원의 입시에서도 학부에서의 기본적인 법학교과목의 이수를 입학전형자료의 하나로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위 ②의 제안이 법학전문대학원법 관련규정의 탈법 또는 편법이라는 이견이 제기될 수 있는 경우로써 불가하다면, 다시 생각해볼 방안으로는 ③ ‘변호사시험의 변화’를 모색하는 것이다. 현실과 같이 변호사시험 형식이 로스쿨에서의 교육내용을 좌우하게 되는 정도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면, 이 상관관계를 활용하여 그 ‘형식의 변화를 통해 그 내용을 개변하자’는 말이다. 즉, 변호사 본시험이든, 모의시험이든 그 자격시험은 제시된 사안의 사실관계에서 판례 법리를 찾아 적용하는 능력이 평가될 수 있도록 사례형문제의 변화를 촉구하고, 나아가 학계의 법리 즉 학설에 관한 지식도 테스트할 수 있도록 구성할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로스쿨시대 학문후속세대의 준비를 위하여 최소한 헌법재판관이나 대법관 등 고위직 실무법조인 후보자의 형식자격요건에 지금과 같이 단지 변호사자격과 실무경력만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이와 함께 법학전문대학원 법학전문박사 또는 일반대학원 법학박사의 자격을 추가적으로 요구하는 방안을 주장하였다. 매우 이기적 유전자에 근거한 위의 처방은 법학전문대학원을 졸업한 유수의 우수한 법조인을 학문법학 연구의 산실로 유인할 수 있는 추동력이 될 것이다. 그 구체방안의 하나는 법조일원화와 연계하여 법관임용에의 SJD과정 필수화 또는 Ph.D 인정이고, 다른 하나는 법학교수요원 양성제도의 도입이다. 전자의 방안은 求心的 유인책이라면, 후자의 방안은 求人的 궁여책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후자를 전술한 학부법학과의 소생이나 최소한 현행법제하에서도 실효성이 있는 ‘로스쿨 입시 평정요소로 학부 법학이수 학점의 강화’ 방안과 협공지계로 활용한다면 학문후속 법학자 양성책은 충분히 될 것으로 기대해본다.
2) 앞의 제언에 대한 성찰이나 성취가 없다면, 학문법학은 고사할 것이고 학문후속세대는 말기법학의 종기와 함께 종언을 고할 것이다. 법학자의 부족으로 인한 법학교육의 파행은 정부를 비롯한 사회 전역에 법적 지식과 상식의 부족현상을 초래할 것이다. 이는 법치국가의 퇴행을 의미하며, 법치주의의 위기로 도래할 것이다.
- 법조인을 포함하여 법률가가 될 사람은 단지 법률 테크닉만 훈련하는 것이 아니라 폭 널고 탄탄한 법률기초를 쌓아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중요한 받침대가 되어야 한다(유기천 교수).
- 법학전문대학원 제도는 법조인을 양성하기 위한 제도이지 법학교양인을 양성하는 곳은 아니다. 이제까지의 법과대학이 교양교육을 했던 것처럼 법학사를 대량 양산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나라의 법치주의가 이 정도라도 발전한 것은 법조인에 의한 것이기 보다도 법학공부를 한 다수 시민의 역할이 컸다고 하겠다(김철수 교수).
두 원로 교수의 생생한 말은 최종고 명예교수가 행한 최근의 기조연설에서 옮긴 것이다.62) 그는 여기서 그는 “많은 토론과 비용을 들여 로스쿨이란 실험을 시작한 이상 의학전문대학원처럼 원점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하더라도, 법대 4년의 학부를 복원하고 (일본처럼) 대학원 중심의 로스쿨로 내실화하는 방향으로 전환해야할 것이다. 미국식 로스쿨로 다 끝났다고 체념하며 주저앉아서는 아니 되고 꾸준히 좀 더 나은 제도와 운영을 모색해나가야 할 책임이 있다. 여러 면으로 다른 미국식 로스쿨을 어찌 한국에 강제 이식할 수 있겠는가!” 그는 이 기조강연에서 학문으로서의 법학의 회생을 위하여 교수들에게 학문적 양심의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