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론
현대 국가들은 국가공동체의 최고법인 헌법을 두고 있다. 헌법이 그 국가공동체의 운영원리로 작용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으나, 헌법이 어떻게 그리고 어느 정도로 국가의 운영을 통제하는가라는 헌법의 위상과 효력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변화해왔다. 입헌주의 내지 헌정주의(英 constitutionalism, 獨 Verfassungsstaat ‘헌정국가’)1)는 헌법의 국가 통제 즉, 정체(political regime)의 근본 원칙들이 보다 충실하게 실현될 수 있도록 정부를 제한하는 원리로 설명할 수 있다.2) 국가 작용에 대한 헌법의 최고성 내지 우선성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이는 규범통제제도 등 헌법재판제도의 근거가 되는 개념이다. 헌법재판제도 자체에 대한 정당화 개념으로서 기능할 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헌법재판소의 결정례에서 빈번히 등장하고 있는 표현이기도 하다.3) 역사적으로는 고전적 의미의 헌정주의에서 근대적 의미의 헌정주의로 발전하여 왔으며, 현대에는 자유주의적/비자유주의적 헌정주의로, 또는 국내·지역·국가간(transnational)·전지구적(global) 헌정주의 등으로 다양한 수식어와 함께 인식되며 선진 민주주의 내의 사회적 논의가 활발하였고, 학문적 연구성과도 축적되어 왔다.
그런데 헌정주의에 대한 국내 학계 연구 및 사회적 담론은 아직 충분하지 못한 상태임을 관찰할 수 있다. 헌정주의의 변천에 대한 역사적 연구는 발견되나, 개념과 요소에 대한 연구는 희소하며, 용어와 관련하여 ‘입헌주의’, ‘헌정주의’, ‘헌법주의’ 등 상이한 표현에 대한 합의도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다. 헌법재판소의 결정례들에서 헌정주의(입헌주의)의 개념과 요소의 실마리가 드러나고 있으나, 후속 연구를 통해 학문적으로 개념화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헌법재판제도의 기초로서 헌정주의의 중요성에 비추어 볼 때, ‘헌법국가’라는 독일적 개념의 연원과 한국적 수용가능성을 탐구하는 본 연구는 앞서 본 바와 같은 현재의 학계의 희소한 기성의 연구성과를 보충하는 기능을 할 것이며, 장래 후속 연구로서 예상되는 헌정주의와 관련한 우리 헌법재판소 결정례의 분석과 평가의 결과와 함께 이 연구가 참고되면 헌정주의의 개념과 요소에 관한 적지 않은 학술적 실무적 의미를 제공하게 될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특히 헌정주의가 법학적 개념으로 갖는 실익에 대하여 헌법재판과 관련한 심도있는 평가가 요구된다. 즉, 이 개념이 단순히 ‘수사적(修辭的) 개념’의 위상인지, 또는 헌법재판의 결론에 영향을 미치는 개념적 수단, 즉 이른바 ‘재판규범적(裁判規範的) 개념’으로서의 위상을 갖고 있는지 등을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는 먼저 헌정주의의 의의가 무엇이고 그 개념적 요소는 무엇인지 살펴본다. 또한 헌정주의의 본질을 이루는 핵심 요소 내지 징표는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제시하고자 한다(II). 다음으로 헌정주의 개념의 인식 방식 중 우리의 실무와 학계에도 큰 영향을 미친 영미적 전통인 constitutionalism과 독일적 전통인 Verfassungsstaat 중에서 후자인 ‘헌법국가(Verfassungsstaat)’ 개념을 중심으로 파악해보도록 한다.4)(III) 이와 같이 이러한 전통을 검토한 후에는 그것이 우리 헌법해석에 수용될 수 있는 가능성과 한계를 평가하여 보고(IV), 나아가 결론으로서 이러한 헌정주의의 개념에 대한 탐구를 통해 우리가 우리의 헌법재판에서 얻을 수 있는 시사점은 무엇인지 밝히고자 한다(V). 이러한 탐구는 우리 사회·학계에서의 헌법적 쟁점에 관한 논의 및 헌법재판소 등 기관의 유권해석에 있어서 관련 헌법적 근거를 제시하고 그 내용을 확정함에 있어 의미 있는 결과를 줄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II. 헌정주의의 기본 개념과 개념요소
일반적인 교과서상의 정의에 따르면 헌정주의란 ‘국민의 자유와 권리가 국가권력으로부터 침해당하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하여 통치관계를 헌법에 규정하고, 국가가 국민에 대하여 행하는 권력작용을 헌법에 구속되도록 하는 “헌법에 의한 통치”의 원리’5)라고 하고 있다.
오늘날을 기준으로 볼 때 20세기를 지나 21세기도 이미 십 수 년을 경과한 현재를 기준으로 볼 때, 모든 국가들은 헌법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고, 아주 드문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헌법은 성문(成文)의 것이다. 각국의 헌법들은 성격과 그것이 반영하는 이념에 따라 다양하다. 예컨대 제2차 세계대전이후 동유럽의 사회주의 헌법들과 같이 본질적으로 선언적이고, 프로그램적이라고 지적되었던 헌법들이 있었다. 특히, 개인의 헌법적 권리에 대해서는 그 권리란 인정이 되는 것이지만, 그 권리가 정부를 구속하는 것으로 인식되기보다는 정부가 그 권리를 인정할 준비가 된 것으로 보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서 예컨대 현대 서유럽국가들의 헌법들과 같은 경우는 규범적이면서 실행되는 것이었다. 특히 개인의 헌법적 권리에 대해서는 그 권리란 인정이 되는 것이며, 정부가 그 권리를 인정할 준비가 된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닌 그 권리가 정부가 권리에 구속되고 그것을 존중하도록 의무를 지우는 것이었다.6) 그리고 후자의 헌법들의 범주에는 예컨대 각각의 사회적 정치적 발달에 따라 2차대전후 제국주의에서 해방되고 또 독재에서 벗어난 비서유럽권의 다수의 국가 등 여러 다른 국가들도 포함되게 되었고, 대한민국의 헌법의 경우도 그와 같다.
위와 같은 점을 배경으로, 이 장에서 묻게 될 질문은 요컨대 다음과 같다. ‘헌정주의(constitutionalism)’란 무엇이고 그 개념은 지금까지 어떻게 발전하여왔으며, 어떤 요소를 지니고 있는가? 헌정주의 개념은 먼저 서구에 그 근대적 기원을 두고 발달한 것이므로 서구의 개념사를 우선 살펴보도록 한다. 우선 헌정주의 개념은 어떤 정치공동체의 법령체계 안에 헌법이라는 성문법전을 구비했는가 여부는 결정적이지 않다. 일단 상세한 분석은 추후에 할 것을 염두에 두고 본다면, 통상적으로는 다음과 같이 지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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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식적 의미의 헌정주의를 구성하는 징표 (역사학적, 정치학적 의미)
: higher law, higher law의 규범력. (독일적 표현으로는 ‘헌법의 우위(Vorr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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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질적 의미로서의 헌정주의를 구성하는 징표 (규범학적, 헌법학적 의미)
: 법치주의, 권력분립, 기본권 보호
위에서 본 바와 같은 헌정주의에 대한 정의를 더욱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헌법 및 헌정주의의 고전적, 근대적(및 현대적) 의미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일단, 헌법은 고전적 의미에서 볼 때 ‘기본적인 국가질서를 규정하는 근본법’으로 이해되어 왔다. 이러한 헌법을 통해 국가의 조직과 구조, 통치방식 등 가장 근본을 밝혀놓은 법이라는 뜻이다. 이와 같은 의미의 헌법 개념에서 본다면 그것은 국가의 구조와 작동에 관한 기술적인(descriptive) 체계로 볼 수 있으며, 성문이든 불문이든 헌법은 인류 역사에서 국가가 탄생했던 때부터 언제나 존재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근대에는 위와 같은 헌법의 고전적인 의미와 맥락에 더해, ‘국민주권원리’에 기반한 ‘민주주의제도’와 국민의 ‘기본적인 권리’ 즉 기본권 실현의 과제가 헌법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근대의 헌법을 전제로 한 헌정주의도 기본권 보장 및 민주적 기본질서의 보장(민주주의 그 자체와는 구별)7)을 그 중요한 요소로 내포하게 된다. 이러한 맥락 때문에 일부 문헌에서 ‘헌정주의’라는 표현을 ‘입헌민주주의’나 ‘입헌민주정’을 뜻하는 말로서 만연히 쓰이는 현상도 발생하게 된다. 여하간 이러한 근대적 의미의 헌정주의는 오늘날까지도 사용되고 있는 헌정주의의 의미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근대적 헌정주의는 사회계약론의 영향을 받은 결과물이며, 이를 통해 헌법은 ‘기본적인 국가질서를 규정하고 기술하는’ 체계라는 경험적이고 고전적인 의미를 넘어, 개인들의 ‘기본권’과 ‘민주주의질서’의 보장을 국가의 과제로 하는 규범적인(prescriptive, normative) 의미를 가지게 된다. ‘법치주의’도 물론 요소로 포함된다. 근대적 의미의 헌정주의는 헌법의 위와 같은 규범적 의미를 기초로 탄생한 근대적 현상이다.
다음으로 이러한 근대적 헌정주의는 결국 ‘헌법재판제도(Verfassungsgerichtsbarkeit)’를 통해 헌법의 우위성의 완전한 실현을 도모하게 된다. 이러한 헌법재판제도를 포함한 헌법국가의 모습을 근대적 헌정주의로 부르는 이도 있고 현대적 헌정주의로 따로 개념화하는 이도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분류방법의 차이에 불과하다고 판단된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근대적(내지 현대적) 의미의 헌정주의에 대한 도전적 상황이 현대에 생겨나고 있는 데, 이에 대한 응답으로 헌정주의를 현대적으로 이해하고 구성하려는 노력들이 보이고 있다. 비록 이러한 노력들이 대부분 그 근본에 있어서 근대적 헌정주의의 개념을 결국 벗어나지는 않는 것으로 밝혀진다 할지라도 우리의 헌정주의에 대한 이해를 풍부하게 해 주고 있는 점에서 학문적으로도 실무적으로도 관심을 끌고 있다고 하겠다. 대표적인 것이 ‘사법적 헌정주의’나 ‘민주적 헌정주의’ 또는 ‘초국가적 헌정주의’ 등의 개념이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는 안전(안보) 중시 경향, 민주주의와 헌정주의의 갈등적 관계의 현대적 변주, 초/간국가적, 전지구화적 헌법주의 경향이라는 크게 세 가지의 흐름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다.
모두 똑같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현대의 실행되는 헌법들은 헌정주의를 반영하고 효력을 부여하게 된다. 헌정주의는 그에 대해서 확고한 정의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헌정주의를 반영하도록 설계된 헌법이라면 무릇 보유하고 있는 공통요소를 갖고 있다고 널리 인식되고 있다. 그것은 두 가지로 다음과 같다.
이는 앞서 보았듯이 형식적 의미의 헌정주의를 구성하는 징표로서만 헌정주의를 보는 태도로서, 주로 역사학, 정치학 등에서 보는 입장이며 또한 (국민주권주의의 완전한 도입 이전인) 고전적 헌정주의에서 보이는 태도와 연관이 있다. 다시 말해, 이러한 관점들은 “규범력있는 higher law(고차법)가 존재하여 권력을 제한한다”는 간단한 명제로서 헌정주의를 이해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이 견해는 예컨대 권력분립, 기본권존중이라는 두 요소를 중심으로 보는 견해(최협의), 권력분립, 기본권존중, 법치주의라는 세 요소를 중심으로 보는 견해(협의)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우리나라의 헌법학 교과서 또는 헌법학 저술들을 살펴보면, 아예 헌정주의(입헌주의, 헌법국가)의 요소를 언급하지 않는 태도들도 있고8), 명시적 언급은 않지만 위에서 본 바와 같은 요소들을 나열하며 언급하는 입장으로 나눌 수가 있다.9) 공통적으로 권력분립, 기본권존중, 법치주의는 언급하고 있으며, 학자의 입장에 따라 ‘국제평화주의’, ‘지방자치제도’, ‘성문헌법주의’, ‘복지국가원리’ ‘사법심사제도(헌법재판제도’ 등을 포함하기도 한다(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서술한다).10)
여러 학자들의 견해 뿐만이 아니라, 헌법재판소에서도 이러한 서술을 하고 있는 결정들이 다수 보인다. 대표적인 예는 다음과 같다. “입헌주의적 헌법은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그 이념으로 하고 그것을 위한 권력분립과 법치주의를 그 수단으로 하기 때문에 …” (헌재 1994. 6. 30. 92헌가18, 판례집 6-1, 557, 568. 밑줄은 연구자).
‘복지국가원리’, ‘지방자치제(연방국가성)’, ‘민주주의’ 등을 단수 또는 복수로 포함하는 견해들이 있다11). 먼저 우리나라의 헌법학 교과서 또는 헌법학 저술들을 살펴보면, 앞서본 바와 같이 공통적으로 권력분립, 기본권존중, 법치주의는 언급하고 있으며, 학자의 입장에 따라 ‘국제평화주의’, ‘지방자치제도’, ‘성문헌법주의’, ‘복지국가원리’ 등을 포함하기도 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요소의 언급들은 학자마다 편차가 있다. 영미의 경우에도 이러한 편차들은 큰 편이다. 이는 독일의 예와 비교가 된다. 역사적, 실정헌법적 이유(독일 기본법 제79조의 명시적 개정한계조항 등) 때문인데, 이는 독일의 학자들의 서술에서 쉽게 알 수 있는 바이다. 대표적으로 Isensee 교수의 서술에서 보면, 그는 ‘민주주의’, ‘기본권’, ‘권력분립’, ‘법치국가’, ‘연방주의’, ‘사회국가목표’를 그러한 기본적인 요소로 파악한다. 그는 “‘민주주의’, ‘기본권’, ‘권력분립’은 프랑스 혁명 이후 헌법이라는 이름에 부합해 제대로 성립된 모든 헌법에 내재한 세 개의 본질적 요소인데, 이들이 헌법국가의 요소에 포함된다. 그 밖에 ‘법치국가’, ‘연방주의’, ‘사회국가목표’라는 전통적으로 독일 헌법국가 개념을 정의하는 요소들이 있다.”고 하였다.12)
독일 헌법학계에서 ‘독일’의 헌법국가성에 대한 이해는 위의 Isensee의 이해와 대동소이하다고 할 수 있다.13) 이것은 헌법개정의 한계를 규정한 제20조와 제1조의 서술이 위의 요소들을 포함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으로 관찰된다. 나아가 ‘민주주의’를 이러한 헌정주의에 포함하는 것으로 여기는 지에 대해서도 입장이 나뉜다고 보인다.14) 한편, ‘공화정’을 포함하는 입장도 있다. 이 또한 국가들의 헌법상에 헌법개정의 한계로서 ‘공화정’ 규정 등 헌법적 결단을 포함하는 경우가 많은 것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다(예: 터키).
헌법재판소는 ‘입헌주의’15), ‘입헌민주국가’16), ‘입헌민주헌법’17), ‘입헌주의적 헌법’18), ‘입헌적 민주주의’19), ‘민주적인 헌법국가’20), ‘반입헌주의’, ‘반법치주의’21)라는 표현22)과 함께 그 내용적 요소들을 명시 또는 간접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헌정주의(입헌주의)는 그 사용하는 맥락에 따라 광의로도 협의로도 쓰일 수 있겠다. 예를 들어 입법을 할 때 헌정주의를 고려한다고 했을 때에는 협의보다는 광의로 사용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그러나, 재판규범으로서, 즉 헌법재판 등에서 요구되는 금지규범은 그 의미가 명확하고 뚜렷해야 한다. 그래서 헌법재판에서 요구되는 금지규범적 의미에서 헌정주의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협의로서 정의하여야 하고, 따라서 그 핵심 요소로는 고차원법 및 그 규범력에서 바로 도출되는 ①권력분립, ③법치주의, 그리고 근대 국민주권이 기초가 된 근대헌법의 목표인 ②기본권존중은 근대 이후 포함되어 왔으므로 그를 포함한 세 가지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러한 기본적 세 요소 이외에, 헌법의 우위성 확보를 위해 ④헌법재판제도도 본질적 요소로 존재한다는 태도도 다수 존재한다. 이 점에는 원칙적으로 동의할 수 있지만, 헌법재판제도는 입헌주의의 본질적 요소로 꼭 두지 않더라도, 핵심적 보장 ‘수단’이라고도 분류할 수가 있으므로, 헌정주의의 본질적 요소라 말한다면 보통 위의 세 가지로 언급이 자주 되고 있다.23) 이것은 위의 우리 헌법재판소의 결정례 중 최근 설시에서 본 바와 상응하며, 영미, 독일 학계에서의 다수·유력 견해와도 일치한다고 하겠다.
법치국가(법치주의)와 헌법국가는 개념상 상호 밀접한 관계를 갖지만 몇 가지 중요한 요소를 통해 구분된다. ① 우선 가장 선명하게는, ‘헌법의 규범적 효력(規範的 效力)’의 차이가 법치국가에서 헌법국가로의 이행 중에 나타난다. 헌법국가가 설립되고 헌법국가성이 확립되면 헌법은 소구(訴求)가 가능한 최상의 법적 규범인 동시에 정치적 권력에 정당화를 부여하는 핵심 권원(權原)으로 성격이 변화하게 된다.24) 기존에는 설령 한 국가가 ‘법치국가‘라 하더라도, 그 헌법은 정치적 선언(宣言) 정도의 성격이었을 수 있다는 점과 대조된다. ② ‘입법자(立法者)의 지위’ 또한 변화한다. 헌법국가에서 입법자는 최상의 ‘헌법’ 제정자 및 국민 의사를 표명하는 가장 중요한 기관으로서 지위를 상실한다. 헌법제정권력이 입법자의 상위에 위치하며, 입법자는 형식적으로, 또한 내용적으로 헌법제정권력에 구속된다. 핵심 입법기관인 의회가 개헌에 관한 권리를 행사하게 될 수도 있지만, 이 역시 헌법 제정자가 설정한 한계 틀에서 행사되어야 한다. ③ 세 번째로는 ‘사법의 비중 강화’를 들 수 있다. 즉, 판결을 통해 입법부와 행정부의 헌법 준수 여부를 심사하는 사법의 위상이 높아지는 것이다. 특히 최후의 조치로 헌법재판소는 법의 무효를 선언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헌법재판소는 법치국가수준에서 규정한 법률의 사법부에 대한 구속에서 벗어난다. ④ 정치와 법의 관계 및 ‘정치의 위상’ 또한 헌법의 새로운 성격에 기인하여 변화한다. 정치 행위자는 헌법적 쟁점(예컨대, 시민적 자유, 참여권, 국가기관의 업무분배 등)을 일반적인 정치적 논의와는 분리해야 한다. 또한 그와 같은 문제에 있어서 변화를 위해서는 국민이나 정치 행위자 중 과반수 이상이 변화를 찬성하여야 한다(주요 사안의 한시적인 탈(脫)정치화, 헌법적 쟁점으로의 분리 현상이 발생). ⑤ ‘시민과 국가의 관계’도 헌법국가에서는 변화한다. 헌법에 명시된 기본권은 개인에게 ‘자유 공간‘을 허용하며, 개인은 필요한 경우 다수의 이해관계 즉 국가의 개입과 사회의 개입에 대항해 사법적(司法的) 방법으로 본인의 자유 공간을 관철할 수 있다.
물론, 법치국가와 헌법국가의 개념은 겹치는 부분이 많으며 구분이 어려운 경우도 있다. 특히 ‘실질적 법치국가‘와 ‘실질적 헌법국가‘ 간 경계는 유동적이다. 현대의 많은 선진국형 법치국가들은 헌법이 상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실제적으로 법치국가와 헌법국가의 경계가 일견 불분명해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보다 구체적인 기준의 필요성이 등장하게 된다. 이와 같은, 하나의 국가를 헌법국가로 분류할 것인지 여부에 대한 구체적 기준을 제시한다면, 기본권 개입에 대한 장벽이 얼마나 높은지(기본권 보호 정도), 행정부와 사법부가 얼마나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는지(권력분립의 정도), 그리고 독립적인 헌법재판이 헌법의 위반을 효과적으로 판단하고 제재할 수 있는지(헌법재판제도의 실효성) 라는 것들에 달려있다고 지적된다25). 이와 같은 측면에서 한 국가를 헌법국가로 보기 위해서는, 시민이 필요하다면 헌법에 보장된 자신의 권리를 입법자에 대해서도 관철할 수 있어야 하며, 헌법이 법과 입법자에 대해 ‘사법적 우위‘를 누리고 ‘최종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나머지의 한 기준도 다른 전자의 두 기준이 존재하는 경우에는 자연스럽게 논리적으로 인정되는 것이라 하겠다26). 이렇게 볼 때, 위와 같이 정리된 구체적 구분 기준을 통해 어떤 정치 체제가 법치국가인지 헌법국가인지 등의 여부를 보다 명확히 분류할 수가 있게 된다.
요컨대 헌법국가는, 법치국가마저 포함하는 다양한 기본 구성요소로 이루어진 질서형태(Ordnungsform)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헌법국가성(Verfassungsstaatlichkeit)은 이러한 질서형태가 중시되는 성질 또는 이념을 의미하게 된다. 이러한 헌법국가를 구성하는 네 개의 요소는 ‘법치국가원리‘, ‘권력분립‘, ‘기본권/가치’ 및 기타의 ‘헌법원리‘이다. 문헌에 따라 이들 요소를 상이한 명칭으로 분류하고 요소 일부를 세분화하거나 하부요소로 포괄하는 경우가 있으나, 법학 일반에서는 헌법국가에 위 네 개의 요소가 존재한다는 점에 대해 폭넓은 견해의 일치가 발견된다. 또한, 민주적 헌법국가는 민주주의 원칙을 보완한 헌법국가의 특수 형태로서, 오늘날 다른 국가 형태보다 더 정당성을 인정받는 국가 형태이다.27)
헌법 및 헌정(헌정주의)를 이른바 ‘헌법Verfassung의 보호’라는 개념과 연관지어서 이해한다면, 헌법의 보호가 그 개별적 제도에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요구(예컨대 우리 헌법 제8조의 정당해산심판의 요건)하는 것 또한 이해가능하다. 앞서 검토한 바와 같이, 헌정주의에서 가지는 요소들은 협의 또는 광의로 인식될 수 있는데 이러한 것들이 결국 바로 민주정(democracy)의 기본질서로서 이해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작동을 보장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28) 즉 민주주의는 ‘운동’과 ‘제도’의 양면성을 갖고 있는데, 헌법 및 헌정주의는 ‘제도로서의 민주주의’(정치적 기본권 및 관련 절차와 제도)를 보장하여,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가 가능할 수 있도록 하는 여건을 제공한다.29)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는 동태적인 측면이며, 종종 구체적인 민주적 ‘의사(will)’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헌법 및 헌정주의는 ‘제도로서의 민주주의’(정치적 기본권 및 관련 절차와 제도)를 보장하여,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가 실제로 구현되게 한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이 둘의 관계는 ‘풍력발전기’와 ‘바람’의 관계에 상응한다고 할 수 있다. 풍력발전기라는 기제는 정태적 제도다. 이것은 동태적이고 (보이지 않는) 바람을 하나의 에너지로 전환하는 역할을 한다. 마찬가지로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는 동태적 민주적 의사를 형성(Willensbindung)하도록 하며 이것이 민주적 헌법국가의 기본 구조를 이룬다. 따라서 헌법국가(내지 헌정주의)는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를 포함하지만,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와는 구별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헌법국가는 제도로서 ‘민주적 기본질서’를 포함하며, 어떤 특정한 민주적 의사(그것이 때로 절대 다수의 다수결적 결정일지라도)가 ‘민주적 기본질서’를 훼손하려고 할 때에는 그것을 거부하는 논리적 귀결을 갖게 된다.
실제적 예를 검토해보면, 한 공동체가 정당해산심판제도를 헌법상 두고 있고, 그래서 어떤 당(또는 정치세력)이 ‘민주적 기본질서’를 해친다고 판단될 때 그것을 (보통은 야당 중 하나) ‘헌법의 보호’라는 목표에 근거해 해산할 수 있다면, 그런 성질의 어떤 당(또는 정치세력)이 곧 집권당이 되어 실제 정부를 장악하고 있어 헌법재판기관으로나 국민의 저항권으로도 그러한 권력에 대항해 사전적으로 ‘헌법의 보호’를 해내지 못한 경우에는, 그것은 사후적으로, 추후 헌정질서가 정상적으로 회복된 후에라도 사법심사의 대상이 되어야만 공평하고 정의에 부합할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헌법의 보호, 헌정주의의 보호,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세 가지를 통합적이고 상호관련적으로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준다.
헌법이 만들어 진 후 그 헌법이 갖게 되는 고유의 정체성을 의미하는 데, 예를 들어 ‘공화국’인 점, 자유민주주의, 국제평화주의 등을 꼽기도 한다. 독일어권에서는 대표적으로 Häberle, Lepsius, Schönberger, Rode 등이 각자의 방식으로 헌법의 정체성에 대해 이론적 설명을 한 바가 있다.30) 이러한 정체성은 헌정주의의 요소들과 겹쳐지는 경우가 많지만, 그 외연이 반드시 동일하다고 볼 수는 없다. 독일의 경우 ‘헌법적 정체성(Verfassungsidentität)’은 초국가적 체제 경향과 관련해 최근 자주 언급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독일연방헌법재판소는 2009년 리스본 판결(Lissabon-Urteil)에서는 기본법 제79조 제3항의 영구 조항이 연방공화국의 ‘헌법적 정체성’을 보호한다고 설시되었다. 연방헌법재판소는 이와 같은 판결로 기본법에서 명시적으로 거론한 원칙을 넘어 ‘헌법적 정체성’ 보장을 강화했으며, 특히 기본법 제38조의 선거권을 민주주의 원칙의 핵심으로 고려한다. 국민 개인이 행사하는 선거권을 통해, 국민이 선택한 독일 연방의회의 ‘민주주의적 자기형성능력(Selbstgestaltungsfähigkeit)’이 아무 효과 없이 헛돌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럽연합 법적 행위가 연방공화국에 과중한 부담을 유발해 연방의회가 사실상 ‘예산정책의 전체 책임’을 더 이상 질 수 없다면 위와 같은 상황이 발생할 것이다.31)32) 요컨대 ‘헌법적 정체성’은 대표적으로 위와 같이 이해되면서 초국가적 체제 경향과 관련한 결정례들에서 빈번히 언급되고 있다.
III. 헌정주의에 대한 독일적 인식: 헌법국가
독일에서 ‘헌법국가(=헌정국가. Verfassungsstaat)’에 대한 이해는 개략적으로 말하면 다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역사학과 정치학은 헌법국가를 광의적 개념의 형식법 차원에서 정의한다. 이에 따르면 ‘헌법국가’란 국가권력(Staatsgewalt)이 헌법에 구속되며 헌법이 국가권력의 통치권(Herrschaftsmacht)을 제한하는 국가체계(Staatswesen)를 의미한다. 이에 반하여, 오늘날 법학 특히 공법 관련 문헌은 주로 협의적이고 실체적 개념33)에서 헌법국가를 적용한다. 이에 따르면 해당 개념은 헌법국가의 특정 이념형(Idealtypus) 즉, 서구적 특징의 자유민주주의 법치국가와 연관이 된다는 점에서 영미적 전통의 ‘헌정주의’ 개념과 공통점이 있다.
일단 독일 문헌에서는 대체로 형식적 의미의 헌법국가에로의 이행은 유럽 대륙에서는 성문의 형태로는 1791년의 프랑스 헌법에 의해서 최초로 행하여졌는데, 독일에서는 이러한 이행은 19세기에 여러 란트의 입헌군주제 헌법과 아울러 1876년의 북독일연방 헌법이나 1871년의 비스마르크 헌법의 시행에 의해서 행하여졌다고 지적되고 있다.34) 다시 말해서 입헌군주제 하에서의 ‘입헌주의’, ‘헌법국가’가 실행된 것이다. 이러한 바에 의해 독일에서 실현된 형식적 의미에서의 ‘입헌성’은 그 후 1918년부터 19년에 걸쳐 생긴 민주주의에로의 이행, 즉 독일 제국 제정이 붕괴하고 의회민주주의적인 공화국이 탄생하였던 시기에도 유지되었다.
즉 입헌군주제의 후에 생긴 것은 ‘순수한’, ‘절대적’ 민주주의가 아니라, 바이마르 공화국으로의 이행 중에서 구체화되었듯이, 마찬가지로 ‘입헌적’ 민주주의였다.35)
이러한 형식적 의미의 헌법국가는 그 실효성이 현행 헌법의 준수를 확보하기 위한 ‘보장’이나 ‘제재’ 수단이 존재하는지 여부에 깊은 관계를 갖게 된다. 즉 그러한 보장이 결핍, 결여된 경우에 헌법은, 칼 뢰벤슈타인이 정식화한 바와 같이, “장식적인” (의미론적) 헌법으로 될 가능성을 가진다.36) 이러한 류의 헌법의 전형적 예는 1989년 혹은 90년까지의 동구권 국가들의 헌법, 특히 동독(독일 민주공화국 헌법)이었다고 지적되고 있다.
헌법국가의 개념은 위와 같은 형식적 의미에 속할 수도 있지만, 보다 좁은 실질적 의미로도 사용된다. 이러한 실질적 의미의 헌법국가의 개념에 의하면, 헌법은 단지 국가의 통치에 ‘형식을 부여’하고 그것을 ‘제약’하는 요소인 것을 넘어서서, 무엇보다도 먼저 국가권력을 행사하기 위한 ‘전제조건’을 창출하는 것이 된다. 즉 이 개념에 의하면, 헌법은 국가와 그 일체의 통치권과 결정권을 ‘창설’하는 “최고의 법률”이라고 간주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헌법국가의 법적 특징은 다음의 점에 있다. 즉 헌법국가에는 주권의 보유자 그 자체인 어떠한 심급도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거기에서는 모든 국가기관은 헌법에 의해서 창설된, 헌법에 복종하는 권력이며 헌법에 의해서 부여된 권한의 담당자에 불과한 것이 된다. 이러한 생각은, 그 끝까지 밀고 나가게 되면, 집행기관뿐만 아니라 입법기관에 대해서도 말하며 심지어 국민조차도 (얼마나 민주적으로 조직된 국가이든 간에) - 헌법의 「지배자」 가 아니라는 것이 된다. 즉 가령 주권자라는 것이 있다면 주권자는 헌법 그 자체뿐이라는 것이다. 헌법은 바로 ‘주권적’ 헌법인 것에 의해서 권력의 규제와 자유의 보장의 깃발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37) 이러한 헌법국가의 개념은 실제적인 효과를 가진다. 즉 이 개념에 의하면, 개인에게 부담을 부과하는 이른바 침해적 조치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국가활동은 헌법에 근거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일체의 국가활동은 그것을 수권하거나 혹은 적어도 용인하는 헌법상의 권한을 필요로 하게 된다. 이것은 ‘법률 유보의 원리’와는 별개의 것이며, 모든 국가활동에 대한 ‘헌법 유보의 원리’에 관련되는 것이다.38)
그리고 이러한 실질적 헌법국가개념이라는 접근법에 의하면, 예컨대 급부행정의 분야에서 어떤 행위를 행하는 것이 법치국가적 관점에서 보아 법률에 의한 수권을 요하지 않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곧 당해 행위를 행할 수 있는 집행부의 권한이 생기는 것이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당해 행위에 대해서는 헌법 자체 중에 수권 혹은 위임이라는 근거가 있을 것이 필요하게 된다. 독일 기본법에서는 이러한 근거는 제20조 제2항과 제3항이 있다고 할 수 있다.39)
이러한 독일의 헌법국가(성)의 요소는 어떤 것이 있는 지가 파악될 필요가 있다. 독일의 헌법국가(성)의 요소의 파악에 있어서도 영미의 ‘헌정주의’의 요소에 대한 이해와 공통점이 있는데, ‘권력분립’, ‘기본권’, ‘법치국가’를 기본으로 하는 것으로 보이면서도 그 밖의 다른 요소들을 함께 고려하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다만, 이에는 세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첫째, ‘민주주의’를 ‘헌법국가’내에 포함시키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나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어떤 학자는 ‘헌법국가’와 ‘민주적 헌법국가’를 엄격히 구분하면서, ‘민주주의’를 ‘헌법국가’라는 것과는 구분하지만, 또 다른 학자들은 ‘헌법국가’와 ‘민주적 헌법국가’를 엄격히 구분하지 않는 경향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는 ‘민주주의’는 ‘헌법국가’라는 것에 이미 포함되는 것으로 이해되곤 한다. 둘째로, 독일의 법치주의는 ‘실질적’ 법치주의로 이해되고 있기 때문에, 영미의 절차적, 통제적 의미로서의 ‘법의 지배’가 갖는 성격과는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진다. 셋째로, ‘사회국가목표’는 독일적 전통에서 주로 논의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살펴보면, Isensee 교수의 경우는 ‘민주주의’, ‘기본권’, ‘권력분립’, ‘법치국가’, ‘연방주의’, ‘사회국가목표’를 기본적인 요소로 파악한다. 그는 “‘민주주의’, ‘기본권’, ‘권력분립’은 프랑스 혁명 이후 헌법이라는 이름에 부합해 제대로 성립된 모든 헌법에 내재한 세 개의 본질적 요소인데 헌법국가는 이들을 그 요소로서 삼는다고 한다. 그 밖에 ‘법치국가’, ‘연방주의’, ‘사회국가목표’라는 전통적으로 독일 헌법국가 개념을 정의하는 요소가 있다.”고 하였다.40)
R. Wahl 교수의 경우는 헌법의 규범성(Normativität), 헌법의 우위성(Vorrang), 헌법재판(Verfassungsgerichtsbarkeit), 이 세 개의 요소를 20세기 후반 (발전된) 헌법국가의 법적 중심으로서 삼고, 그 세부요소로서 위 Isensee 교수가 요소로 든 것들을 배치하고 있다.41) 다만 민주주의 자체를 이 요소들 중 하나로 생각하여 중요하게 고려한다기 보다는, 국민주권의 원리가 당연히 현대 헌법국가의 전제가 되면서 민주주의적 정치적 기본권이 보호된다는 것을 현대 헌법국가의 요소 중 하나로서 중요시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42)
이하에서는 이 요소들에 대한 독일에서의 인식 방법을 Wahl 교수의 분류법에 근거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한다.
헌법국가(Verfassungsstaat)는 헌법이43) 근본적인 법이고 법체계에서 최고의 권위를 누린다는 것을 기초로 한다. 이는 일반적인 정의이기도 한데, 이것이 법적 구체성을 보이는 것은 두 개의 법적 원칙, 즉 ‘헌법의 규범성(Normativität)’ 원칙과 ‘헌법의 우위성(Vorrang)’ 원칙을 세부적으로 기술하고 수용하면서 이루어질 수 있다. 논리적 우위성을 보이는 첫 번째 원칙인 ‘헌법의 규범성(Normativität)’에 따르면 성문헌법은 선언44) 또는 정치적 프로그램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구속력 있는 법임을 의미한다. 두 번째로, ‘헌법의 우위성’ 원칙은 (법)이론적으로 법질서의 위계적 구조(Stufenbau)45) 개념을 기반으로 한다. 이에 따르면 헌법은 법규범의 위계구조에서 최상위를 차지하며, 일반 법률 그리고 그 법률에 의한 권한을 기초로 존재하는 법령은 헌법에 종속된다. 헌법의 우위성은 모든 법이 합헌적이어야 한다는 요청, 즉 합헌성의 요청(Gebot der Verfassungsmäßigkeit)에서 잘 드러난다(기본법 제20조 제3항)46). 헌법의 우위성은 동시에 입법자의 종속성을 의미한다.
모든 다른 법에 대한 헌법의 이와 같은 내용적 우위와 함께 세 번째 단계로 헌법재판의 확대로 인한 헌법의 우위성 관철과 이행을 들 수 있다. 제정법(Gesetzesrecht)이 헌법을 위배했을 경우, 법적 통제를 통해 해당 법의 무효성을 판결하여 헌법 내용의 실체적 우위성을 보장한다. 헌법을 둘러싼 갈등이 발생할 경우, 사법 형태에서 갈등을 풀어나가야 하며, 이 갈등은 최고 법원의 구속력 있는 판결로 종결된다.
요컨대, 헌법의 규범성, 헌법의 우위성, 헌법재판제도, 이 세 개의 요소가 20세기 후반 (발전된) 입헌국가의 법적 중심이라 할 수 있다. 이하에서는 독일의 기본법에 관련하여 이 세 요소를 좀 더 서술해보도록 한다. 특히 독일 기본법의 특징을 헌법국가성 측면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것과 비교·요약해 고찰한다.
1919년 바이마르 헌법(Weimarer Verfassung: WRV)과 비교했을 때 기본법이 보이는 새로운 특징은 입법자 또한 기본권의 적용 대상이라는 점으로, 기본법에서 핵심적이면서 매우 중요한 조항인 제1조 제3항, 즉 기본법 서문에서 이를 이미 규정하였다.47) 기본권의 이와 같은 포괄적 적용으로 국가의 가장 중요한 행위 수단인 입법 또한 기본권에 구속된다. 또한 기본권 이해(Grundrechtsverständnis)가 확대 및 확장하면서 기본법 제1조 제3항의 이와 같은 원칙 규정이 1949년 다시 한 번 예상치 못하게 중요성을 얻었다. 전통적으로 기본권은 국가로부터 국민의 방어권(Abwehrrecht)을 의미하며 입법자의 과도한 개입에서 국민을 보호한다. 기본법 제1조 제3항은 입법자의 기본권 구속을 확고하게 규정하였으며, 문헌뿐만 아니라 판결 또한 기본권에 대해 확장된 이해를 보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따라 기본권은 기존의 부정적이고 방어적이었던 성향을 넘어 소위 객관적인 차원의 발전을 보였다. 기본권은 법질서 전체의 기반으로, 법질서(Rechtsordnung)와 사법(私法) 질서(Privatrechtsordnung)에서 실현되고 모든 개별법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48)
기본법은 실체적 법으로 구체화되면서, 입법자를 넘어 다른 대상에도 적용된다. 헌법 입법자에도 법적 한계가 적용된다. 기본법 제79조 제3항의 소위 영구 조항(Ewigkeitsklausel)은 “연방의 주(州)로 분할, 입법에서 주(州)의 원칙적 참여 또는 제1조와 제20조에 규정된 원칙을 침해하는 기본법 개정은 [...] 허용되지 않는다.”라고 규정했다. 기본법 제1조는 인간의 존엄성을, 기본법 제20조는 독일이라는 헌법국가의 형태 및 중요한 ‘국가목표규정(Staatszielbestimmung)’을 명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러한 것이 독일적인 헌법국가의 ‘표지’들을 구성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헌법개정의 한계가 독일적인 헌법국가의 요소 내지는 표지와 큰 관련이 있다는 점은 앞서 서술한 바와 같다.49)
또 다른 주요 조치로 헌법재판제도를 통해 입법자와 헌법에 이와 같은 내용적 구속을 승인한 것을 들 수 있다. 기본법 제93조에 열거된 가장 중요한 헌법재판소 소송 유형은 독일연방헌법재판소의 매우 포괄적인 관할권 목록(Zuständigkeitskatalog)을 담고 있으며, 다른 민주주의 국가의 헌법과 비교해봐도 독일 연방헌법재판소 관할권 목록엔 매우 특별한 지위가 부여된다.50)
무엇보다도 기본권의 포괄적 적용과 이러한 포괄적인 헌법재판제도는 정치와 실제 삶에서의 헌법의 편재(遍在, Omnipräsenz)를 결과적으로 가능하게 한다. 다시 말해, 헌법이 여기 저기에서 그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단지 최고 헌법기관만이 헌법재판 절차에 참여하게 되는 것은 아니게 된다. 국민 개인은 헌법소원 절차를 이용할 수 있으며, 일반 법관 또한 구체적 규범통제(konkrete Normenkontrolle) 절차를 통해 참여가 가능하다. 최고 헌법기관과 정치 세력 모두 주요 헌법 사안이 미결정 상태로 남아있든지 또는 해석을 통해 구속력을 얻을지에 대해 원칙적으로 더 이상 관여할 수 없다. 정치 세력이 정치적 타협으로 헌법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제 해결에 대한 합의를 도출해야 하겠지만, 그럼에도 실제 주요 문제에서 헌법 지침에 따른 결정을 신청하고 신청할 수 있는 이는 대부분 위의 절차 청원자이며 국민 개인이 신청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포괄적인 헌법재판으로 헌법은 삶의 구체적인 다수의 상황에서 그리고 국민의 일상에서도 중요성을 얻는다. 따라서 헌법은 개인에게 과거의 엄숙한 선언이거나 ‘위에서’ 일어나는 정치적 대치에 대한 법적 질서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체험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51)
또 다른 변화로 지금까지 내향적이고 국내 중심적 성향을 보인 국가의 외부 개방을 들 수 있으며, 기본법이 이와 같은 변화를 제대로 인지한 것은 90년대부터라고 할 수 있으므로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통일후 유럽연합과 관련하여 개정된 기본법 제24조와 제23조로 인해 독일연방공화국은 ‘외부로‘ 폭넓은 개방의 자세를 헌법에 기초하여 단호하게 견지하게 된다.52) 이미 기본법에 확고하게 자리잡은 제24조로 인해서, 국가에 대한 이해(Staatsverständnis)가 근본적으로 변화하였고, 소위 ‘개방된(offen) 국가’ 및 ‘협력 의사가 있는(kooperationsbereit) 입헌국가’란 형태가 확립되었다고 지적된다. 특히 독일법의 유럽화(Europäisierung)는 헌법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이로 인해 국가 헌법은 어느 정도 ‘중요성 상실’을 동시에 겪었다.53) 개방된 국가성이란 논지가 힘을 얻으며 실현되었고, 이와 관련한 큰 변화가 생긴 것이다. 그밖에 국제기구에 참여하면서 독일연방공화국은 결정적으로 ‘국제화’되었다. 이러한 유럽화와 국제화로 국가와 국가관은 변화했다. 이제 독일에선 기본법만이 중요하고 유효한 것이 아니다. 유럽공동체 설립 조약 (EGV)과 유럽연합조약 (EUV)의 우위적인 일차법 또한 중요하며 독일에 직접적으로 적용된다.54)
그래서, 이러한 독일기본법의 유럽화는 영미권에서 회자되는 소위 “초/간국가적 헌정주의(supra/trans-national constitutionalism)”가 나타내는 현대적 상황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 점을 잘 드러내는 예로 리스본 조약 결정이 있다.55)
예컨대 Wahl 교수의 서술법에 따르면,56) 헌법의 규범성, 헌법의 우위성, 헌법재판제도를 헌법국가성의 세 초석으로 본다는 점은 이상에서 살핀 것과 같다. 그런데 나아가 그는 그 두 번째인 헌법의 우위성의 구체적 요소로 ①연방국가성, ②권력분립, ③기본권의 포괄적 보장, ④국가목표조항들 및 기타 본질적 헌법조항들의 순으로 나열한다. 특기할 만한 것은 의회주권원리(Parlamentssouveränität)를 배제한 입헌(자유)민주주의적 질서(konstitutionelle (freiheitliche) Demokratie)가 독일 기본법의 질서임을 밝히고 또한 그것을 정치적 기본권 등과 관련지어 기본권의 포괄적 보장 속에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다.57)
그렇다면 이와 같은 ‘헌법국가’라는 개념은 독일연방헌법재판소의 결정에서 실제로 어떻게 사용되어 왔는가? 데이터베이스를 통한 조사결과에 따르면,58) 독일연방헌법재판소의 결정례 중에서 헌법국가(Verfassungsstaat)는 71개, 헌법국가성(Verfassungsstaatlichkeit)은 42개의 결과가 드러나는데, 이 모든 결과를 면밀히 살펴보면 이러한 개념은 그 사안에 있어서는 주로 세 가지 사례군, 즉 ① 정당해산에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등을 언급하게 되는 경우(예컨대 독일사회주의제국당 해산결정례), ② 공무원의 헌법충실의무 등을 밝힐 때, ③헌법제개정의 한계 등을 언급하게 되는 경우, ④ 유럽통합과 관련해 국가성의 일부 상실에 대해 정당성 여부를 검토할 때(예컨대 리스본 조약 결정) 등에서 특히 자주 드러남을 파악할 수 있다(이하 각 결정례에서 모든 강조 및 밑줄은 연구자).
정당해산은 1950년대 독일의 사회주의제국당과 독일공산당에 대한 독일 연방헌법재판소의 해산 결정이 대표적이다. 독일연방헌법재판소는 1952년 히틀러가 세운 나치당의 후신인 사회주의제국당(SRP)을 해산했다. 이는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나치즘을 전후 민주주의 틀 안에서 몰아내려는 시도로 평가될 수 있다. 1956년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지향한 독일공산당에 해산 결정도 내린 바 있다.
그리고 독일에선 최근에도 정당해산 청구가 있었다. 독일연방정부 등은 2003년 신나치정당인 독일민족민주당(NPD)에 대한 해산을 청구했지만 연방헌법보호청의 첩자가 NPD에 잡입한 사실이 밝혀졌고, 그것이 절차적 흠결이 되어 재판소는 각하 결정을 내렸다. 10년 뒤인 2015년에 다시 독일연방참사원(상원)이 이 당의 해산을 청구하였고 이에 대해 독일연방헌법재판소는 독일민족민주당의 위헌성은 인정했으나 실제 해산을 시킬 정도의 위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이 중‘헌법국가’개념이 명시적으로 서술된 예들을 먼저 보자면, 2003년의 NPD 정당해산 심판 절차 결정(BVerfGE 107, 339)에서 매우 뚜렷한 서술을 네 차례에 걸쳐서 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은 설시가 이루어졌다. “기본법 제21조 제2항 헌법규범은 자유를 제약하는 경계가 무엇인지 분명히 보여준다. 기본법 제9조 제2항과 제18조 및 제21조 2항은 자유 질서를 수호하며, 자유질서를 위협하는 자유권리의 남용으로부터 헌법국가(Verfassungsstaat)를 수호해 헌법국가가 존속할 수 있도록 한다.59) 위의 세 가지 규범은 헌법의 예방적 수호(präventiver Schutz) 임무를 정의하는 핵심 규정이다. 기본법은 국민 개인이나 조직이 국가의사형성에 심도 깊게 참여할 수 있도록 기본권을 보장하였다. 그러나 위의 3개 규범으로 이와 같은 기본권은 자유의 영구한 유지를 위해 지켜야 하는 기본 질서의 한계 내에서만 행사할 수 있다.. 이로써 기본법은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교훈을 이끌어냈며, 바이마르 시기 당시엔 감수할 수 밖에 없었거나 비상시국을 선포해 헌법 외(外)적 방식의 위기 극복을 요구했던 예외적인 특정 위험상황에 대한 해결책을 찾았다.60)”
즉 정당해산에 대한 헌법상 절차는 ‘헌법국가(Verfassungsstaat)’를 수호하고 그 ‘헌법국가’를 존속할 수 있게 하는 목적임을 뚜렷이 밝히고 있다.61) 이어서 이 결정례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시한다. “정당이 자유로운 헌법국가의 존속을 위협하고, 또 이러한 위협이 구체적이고 입증가능하다면, 연방헌법재판소는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서 평등한 심판 절차 적용이라는 일반적 원칙 위반을 중대한 사안으로 간주해선 안 된다. 반대로 세력이 미미하고 중요성도 거의 없는 정당의 경우, 실제 확인된 헌법 위반 정도에 따라 다른 점을 고려해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위 두 경우 각 사안에 따라 정당해산 신청 결정을 내린다. 위헌일 가능성이 있는 정당이 자유로운 헌법국가의 존속에 어떤 위험을 유발하는지가 정당해산절차로 추구하는 방지 목적(Präventionszweck)의 중요성을 결정하는 유일한 문제는 아니다. 해당 정당이 정당 내에서 일반적인 방식으로 인간 존엄성을 조직적으로 침해하는지에 대한 문제를 해명하는 것도 중요하다. 정당의 인간 존엄성 침해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자체 존속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이를 해명하는 것이 방지 목적의 중요성을 결정할 것이다.62)”
특히 이 부분에서의 서술은, 헌법국가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가 어떤 뚜렷한 관계가 있는지를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헌법국가에 포함되는 개념이면서, 인간의 존엄성 자체와는 구별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2016년 1월 17일에 독일민족민주당(NPD)이 피청구인이 된 정당해산사건의 결정이 마침내 다시 내려졌는데63), 이 결정에서도 독일연방헌법재판소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가 헌법국가에 포함되는 개념임을 다음과 같이 명확히 밝혔다. “기본법 제21조 제2항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개념은 자유로운 헌법국가에 없어서는 안 되는 핵심적인 기본원칙만을 포함한다. a)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인간 존엄성(기본법 제1조)을 기점(起點)으로 한다. 인간 존엄성 보장은 특히 개인의 개별성과 정체성 및 무결성(Integrität)과 기본적인 법적 평등(Rechtsgleichheit) 보호를 포괄한다. b) 그 밖에 민주주의 원칙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구성하는 요소이다. 정치적 의사형성 절차에 대한 모든 시민의 평등한 참여 가능성과 국가권력 행사 시 국민에 재구속되는 것(기본법 제20조 제1항과 제2항)은 민주주의 체제에서 포기할 수 없다. c) 마지막으로 법치국가 원칙에 뿌리를 두고 있는 공권력의 법적 구속(기본법 제20조 제3항)과 독립적인 법원의 법적 구속 통제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개념을 규정한다. 동시에 헌법이 보장한 개인의 자유는 구속력있는 사법적 통제를 받는 국가 기관만이 신체적 폭력을 유보적으로 적용할 것을 요구한다.”
이와 같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가 헌법국가에 포함되는 개념이라는 점은 역시 정당해산과 관련하여 일찍이 독일 사회주의 제국당(SRP) 결정에서 암시된 바가 있다. 다음과 같은 설시가 이루어졌다. “이 규정이 기반으로 하는 근본 사상을 통해 제21조 해석에 중요한 지침을 세부적으로 도출할 수 있다. 특히 ‘자유민주적 기본질서(freiheitlich demokratische Grundordnung)’ 개념에 대한 상세 규정을 통해 이에 대한 도출이 가능하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당은 특별한 위상을 차지한다. 따라서 정당이 정당한 수단을 통해 개별 규정과 심지어 헌법 제도 전체에 맞선다는 이유로 해당 정당을 정계에서 축출한다면 이는 정당화할 수 없다. 정당이 자유민주적 헌법국가의 최상의 기본가치를 흔들려고 할 경우에야 해당 정당 축출이 정당화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기본가치는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질서를 구성하며, 자유민주주의 기본질서는 국가 질서 전체 즉, ‘합헌적 질서’ 內라는 점에서 기본법에 근본적인 중요성을 부여한다. 기본법에서 내린 헌법정책적 결정에 따라, 최종적으로 위 기본질서는 인간이 창조질서에서 자체적으로 독립적인 가치를 소유하며 자유와 평등이 국가 단위의 영구적인 기본가치라는 사상을 바탕으로 한다. 따라서 이 기본질서는 가치와 결합된 질서라 할 수 있다. 이는 인간 존엄성, 자유, 평등을 거부하는 배타적인 통치권을 행사하는 전체주의 국가와 반대되는 개념이다.”(강조는 연구자)
즉 일찍이 위의 독일 사회주의 제국당 결정에서도, 정당해산과 관련하여, 자유민주적 기본질서가 헌법국가에 포함되는 개념이라는 점이 언급된 바가 있지만, 최근의 결정들 특히 2003년 및 2016년의 독일민족민주당(NPD) 관련의 각 결정에서는 보다 반복적이고, 구체적이고, 명시적으로 설시를 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공무원의 헌법충실의무 등을 밝힐 때에도 헌법국가개념이 자주 사용되었다. 먼저 예로 들 수 있는 것은 연방헌법재판소의 소위 ‘극단주의자 결정’(BVerfGE 39, 334)이다.
여전히 냉전시절이었던 중 사민당 브란트 총리 재임기간(1972)에 극단주의자의 공공부문 취업에 대한 신원조사와 취업금지조치가 있었다. 논란도 있었지만, 극단주의세력을 억제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는 평가가 대체로 존재한다. 공직자 및 공직지망자의 헌법국가 및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한 충성심을 심사하는 제도는 극단주의 세력, 특히 공산계열에 대한 통제 조치 중 강력한 조치로서 극단주의적 위헌세력을 공공부문의 임용과정에서 배제 또는 현직으로부터 추방하는 정책이었다.
독일(서독)연방정부와 지방 주 정부는 공동으로 「과격파들에 대한 조치에 관한 훈령」(약칭 극단주의자 훈령: Radikalenerlaß)이라는 개념으로 알려진 공직임용과 관련된 헌법보호정책을 채택하였고, 이 정책에 따라 모든 정부조직과 공공부문에 공통으로 내려진 조치는 극단주의자들의 공직 임용 문제에 관한 통일된 대응방법에 관한 결정을 포함하고 있다.64)
연방 행정 재판소 (1975년 2월 6일의 판결)와 연방 헌법 재판소(1975년 5월 22일의 판결)는 <극단주의자 훈령>이 서독기본법에 합치하는 것으로 헌법합치 결정을 내려서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이 연방헌법재판소 결정(BVerfGE 39, 334. 1975년 5월 22일, 극단주의자 훈령 결정(Radikalen-Beschluß))에서 밝힌 공무원의 헌법국가 및 헌법충실의무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기본법 제33조 제5항에 따른 헌법 결정을 실현하는 것은 기본법 제21조 제2항에 위배되지 않는다. 기본법 제33조 제5항은 공무원이 합헌적 질서를 수호할 것을 요구한다. 반면에 기본법 제21조 제2항에 따르면, 국민은 금지되지 않은 정당에서 전반적으로 허용된 수단을 이용하여 합헌적 질서를 거부하고 이와 같은 질서에 정치적으로 대항할 수 있는 자유를 행사할 수 있다. 공무원이 이행하는 특수한 직무는 정당의 이해관계를 고려하지 않으며 특히 정당의 정치적 활동 방해가 공무원의 직무라 할 수 없다. 그보다 공무원은 공무원 집단 내에서 발생하는 위험에서 헌법국가를 보호하는 것을 직무로 한다. 만약 공무원이 정치적 충실의무(Treuepflicht) 요구를 준수하지 않는다면, 이들이 누리는 특수한 지위와 권한은, 헌법으로 규정된 정도(正道)를 이탈해 현행 헌법체제(Verfassungsordnung)를 변경하고 와해하려는 움직임을 실현하는 이상적인 도구가 될 것이다. 공무원이 특정 정당에 대한 소속을 이유로 차별을 받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공무원이 직무 수행 시 정치적 충실의무를 훼손하는지 여부와 어떤 직무 지원자가 개인의 성향에 따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항상 수호할 의사가 있는지 여부가 중요한 문제이다. 이는 당사자가 본인의 행동으로 답해야 하는 문제이다.65)
그 외에, 무슬림들이 교사 등 공직자가 될 경우 머릿수건(kopftuch) 착용을 인정할 것인가에 대한 결정에서도 공무원의 헌법국가 및 헌법충실의무의 의미를 이와 같은 종교적 의상 착용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공무원은 공익을 위한 업무를 수행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인격체로서 단순한 ‘집행도구’는 아니다. 공무원이 되길 원한다면, 주요 원칙 문제와 관련해서 그리고 공적 직무를 수행할 때 헌법국가에 충실성을 보이고 헌법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해야 한다. 왜냐하면 역(逆)으로 공무원의 공적 직무가 국가를 대변하고 따라서 구체적으로 국가는 공무원과 동일시되기 때문이다. 직업공무원제도의 모든 원칙엔 이와 같은 상호성과 근접성(Nähe)이란 개념이 두드러진다.66)”
이에 관해서는 대표적으로 위헌적 헌법’에 대한 결정례가 있다. 이 결정을 요약하자면, “(1) ‘위헌적 헌법’은 최소한 이론적으론 생각해볼 수 있다. 즉 헌법으로 실정법(positives Recht)을 제정했는데, 이 법이 실체적 정의(materielle Gerechtigkeit)를 위반하고 위반수준이 참을 수 없을 정도라면, 이는 위헌적 헌법이라 할 수 있다.” “(2) 기본법 제100조 제1항에 따라 기본법 규범 또한 자체적으로 ‘법’을 의미하며 따라서 연방헌법재판소의 이와 같은 절차에 따라 규범 검토가 가능하다”라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헌법국가의 개념을 아래와 같이 다루고 있음은 우연이 아니다. 헌법재판제도는 현대 헌법국가의 요체 중 하나이기 때문이고, 이는 형식적 헌법국가 뿐만 아니라 실질적 헌법국가 개념에도 부합하기 때문이다. 해당 부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c) 그러나 ‘위헌적 헌법 규범’을 고려할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 고등법원(OLG)이 제기한 안에 동의하기엔 근거가 여전히 충분하지 않다. 그보다 중요한 문제는 다음과 같다: 헌법 규범에 대해서도 적용되는 최소 요건 준수 여부 판단이 헌법 제정자에게만 위임한 문제라고 본다면, 이와 같은 요건을 준수하지 않을 경우 헌법 개정법만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혁신적인 행위를 통해서만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재판관의 권한으로 해당 문제 해결은 불가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위에서 권한문제에 대해 고려했던 사항과 별도로 법원이 심사에 어떤 권한도 행사할 수 없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해야 한다.”
“실제로 현대 헌법국가에서 법원 또한 헌법의 피조물이다. 따라서 법원은 헌법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역할을 도출하며, 원칙적으로 헌법이 부여한 임무만 이행할 수 있다. 따라서 학계 및 판례 일부에선 재판관이 헌법을 대상으로 심사 권한을 행사하는 것을 전반적으로 반대한다. ...(하략). ”
“‘위헌적 헌법 규범’에 대한 고려 가능성이 미미할지라도 이와 같은 가능성을 동의하는 결정을 했다면, 재판관이 해당 판결을 하도록 권한을 위임하는 것이 실제 당연한 수순이라 할 수 있다. 재판관이 행사하는 권한은 외부적으론 헌법을 바탕으로 그리고 업무활동의 본질적 특징을 고려했을 땐 어느 정도 법 이념(Idee des Rechts) 자체를 바탕으로 권위를 얻는다. 헌법 자체적으로 위헌적 규범이 존재할 수 있다는 인식의 경우, 개헌을 담당하는 입법자에게만 이와 같은 규범 폐지를 위임한다면, 위 인식은 그 가치를 잃을 수 있다고 본다.”67)
그리고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결정(1953년 12월 18일 선고)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 바가 있다. “시원적 헌법제정자는 모든 것을 자신의 의사에 따라 규율할 수 있다는 원칙을 예외없이 적용하는 것은 -법학과 법실무에서 오래전에 극복된- 몰가치적인 법률실증주의의 정신적 태도로 후퇴하는 것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바로 독일의 나치정권시대는 입법자도 불법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 즉 실제의 법적용이 그러한 역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발전(상황)에 무방비상태로 맞서서는 안된다는 것, 극단적인 경우 실질적 정의의 원칙이 -실정법을 적용함에 있어서 원칙인- 법적 안정성의 원칙보다 더 높게 평가될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시원적인 헌법제정자도 정의의 극단적인 한계를 넘을 위험에서 사유필연적으로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다.”68)
“헌법에 대하여도 선행하는 법을 표현한 것으로서 헌법제정자 자신을 구속하는 헌법원칙들이 있으며, 그러한 지위를 부여받지 못한 여타의 헌법규정은 그러한 헌법원칙들에 위반됨을 이유로 무효로 될 수 있다. 이는 특히 어떤 헌법규범이 이 헌법 자체의 기본결단에 속하는 근본적 정의의 요청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시하는 때에 문제된다.”69)
독일통일 후인 1991년에는 이른바 제1차 토지개혁결정에서 ‘헌법개정자’에 대하여 설시한 바도 있다.70)
소위 리스본 조약 결정(BVerfGE 123, 267)은 헌법국가가 초국가적 체계화 현상에 맞닥뜨렸을 때 포기할 수 있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에 대해 매우 상세히 서술하고 논증하고 있다. 이러한 논증에서 ‘헌법국가’ 뿐만 아니라 ‘헌법정체성’에 대한 논의도 함께 드러나고 있다.
“민주주의 원칙은 기본적으로 국제 및 유럽의 평화질서에 독일 통합을 목표로 한다. 이를 통해 성립 가능한 새로운 형태의 정치적 지배(politische Herrschaft)는 국내적으로 유효한 헌법 규정을 기계적으로 따르지 않으며, 따라서 협약가입국이나 회원국의 구체적인 민주주의 특징에 따라 이를 단순히 판단해서도 안 된다. 유럽통합에 대한 권한 위임(Ermächtigung)은 독일 헌법 질서에 대해 기본법이 규정한 것과 다른 형태의 정치적 의사 형성을 허용한다. 이는 처분 불가한 헌법정체성(unverfügbare Verfassungsidentität: 개정되지 않고 영구적으로 적용되는 규정의 정체성)으로 정한 한계를 제외하고 적용된다(기본법 79조 3항). 즉, 민주적인 자기결정(demokratischen Selbstbestimmung)과 평등에 부합하는 공권력에 대한 참여 원칙은 기본법의 평화 및 통합에 대한 임무(Friedens- und Integrationsauftrag)와 국제법 우호성(Völkerrechtsfreundlichkeit) 이란 헌법 원칙과 상관 없이 계속 적용된다.71)
a) 독일 헌법은 국가의 평화적 협력을 위한 국가 통치 질서 개방과 유럽통합을 추구한다. 유럽 연합에 대한 동등한 통합과 국제연합 등 평화유지 체제 참여 모두 외부 권력에 대한 항복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보다 이는 평화를 보장하고 공동의 조정 행위로 정치적 행동역량을 강화하는 자발적이고 상호적이며 동등한 결속(Bindung)으로 볼 수 있다. 기본법은 각자의 자기결정권을 의미하는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지만, 지나친 독단성과 타인에 대한 배려 없이 본인의 이익 만을 관철하는 행동 촉구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 정치 공동체의 주권적 자기결정권에도 동일한 사항이 적용된다.72)
헌법국가는 자유와 평등이란 동일한 가치를 기반으로 하는 국가와 결속하며 마찬가지로 인간의 존엄성과 동등한 개인의 자유 원칙을 핵심 법적 규정으로 내세우는 국가와 결속한다. 민주적 헌법국가는 자신의 이익과 전체 이익을 유지하는 의미있는 참여를 통해서만 갈수록 모바일화되고 국경을 초월하는 네트워크화가 심화되는 현재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73)“
“(1) 실체적 형법과 형식적 형법에 대한 결정, (2) 내부적으로 경찰 부문에서 그리고 외부적으로 군사 부분에서 권력 독점(Gewaltmonopol) 행사에 대한 결정, (3) 수입과 사회복지정책을 동기로 한 공공 부문 지출에 대한 기본적인 국가 재정 결정, (4) 사회국가적으로 생활환경 조성에 대한 결정, (5) 가족법, 학교 및 교육 시스템 또는 종교 단체와의 관계에 대해 문화적으로 특히 중요한 결정이 헌법국가의 민주주의적 자기형성능력(Selbstgestaltungsfähigkeit)과 관련해 이전부터 특히 민감한 결정으로 간주된다.”
“입법자는 어떤 행동이 처벌받을만 한지 아닌지에 대한 결정을 내린다. 이와 같은 결정으로 입법자는 현대 헌법국가에서 개인이 누리는 자유에 가장 강력하게 개입하는 고권적 행위(hoheitliches Handeln) 형태에 대해 민주적으로 합법적인 책임을 진다. ...(중략)... 입법자는 죄를 지은 행위에 대해 어떠한 형벌적 위협을 취할지에 대해 헌법의 구속(verfassungsrechtliche Bindungen)의 틀 내에서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소위 ‘기본조약 결정’ 등에서 헌법국가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밝힌 바가 있다.
“연방헌법재판소는 통일과 자기결정 실현에 기여하는 기본법의 권원(權原, Rechtstitel) (법적 지위(Rechtsposition))을 연방공화국이 포기하는 것, 기본법과 일치하지 않는 권원(權原)을 연방공화국이 마련하는 것 또는 위의 목표(통일과 자기결정 실현) 추구 시 반론으로 제기될 수 있는 권원(權原)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는 과정에 연방공화국이 참여하는 것을 금지한다. 바로 이와 같은 금지가 법치국가이고 헌법국가인 독일 연방공화국에서 존재하는 한계로 연방헌법재판소는 이와 같은 한계를 명확히 제시 및 결정하고 상황에 따라 관철할 수 있다. …”74)“이 조약은 지금까지 논증한 기본법의 어떤 부분에도 위배되지 않는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 조약을 해석할 때, 독일 연방공화국 내 당국에서 한 어떤 발언도 이와 같은 헌법적 기반을 일탈하지 않았고, 현재도 일탈하지 않는다고 이해할 수 있다.”75) (이상 강조 및 밑줄은 연구자.)
독일에서의 헌법국가의 인식은 앞에서 보았듯이 하나의 확고한 개념을 추구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법학적 개념에서는 ‘규범적’이고 연역적이며 도그마틱적인 접근을 선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기술적’ 성격의 사회학적 개념이나 그 변용 형태는 (최소한 연방헌법재판소의 판결례 또는 저명학자의 법학 학술 저서에서는) 그다지 다루어지지 않는 것으로 관찰된다.
또한 독일에서의 헌법국가의 ‘요소’는 실정헌법인 기본법 제79조에서 헌법개정한계를 정하면서, 그를 계기로 논리적으로 더 명확하게 설명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독일 연방헌법재판소가 설시한 바와 같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헌법국가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 개념으로서, 최근의 민족민주당 정당해산사건의 결정 설시에서는 전자가 후자에 포함되는 개념이라고 명시적으로 설시하였다. 그리고 최근 초국가적 체제의 영향과 관련하여, 헌법국가는 헌법정체성과 관련지어 설명되고도 있다.76)
이러한 ‘헌법국가’라는 개념의 법논리적 기능에 대해서 총평하자면, 독일연방헌재의 결정례들을 볼 때 독일연방헌재는 ‘헌법국가’라는 개념을 다른 헌법적 논거들에 조력하는 수사적(修辭的) 개념으로 쓰고 있는 사례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77)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독자적인 재판규범적(裁判規範的) 개념으로 쓰일 수 있는 가능성이 엿보이기도 함을 파악할 수 있었다.
Ⅳ. 한국적 수용가능성
독일에서 ‘헌법국가(Verfassungsstaat)’에 대한 이해는 개략적으로 말하면 다음과 같다. 역사학과 정치학은 헌법국가를 광의적 개념의 형식법 차원에서 정의한다. 이에 따르면 ‘헌법국가’란 국가권력(Staatsgewalt)이 헌법에 구속되며 헌법이 국가권력의 통치권(Herrschaftsmacht)을 제한하는 국가체계(Staatswesen)를 의미한다. 이에 반하여, 오늘날 법학 특히 공법 관련 문헌은 주로 협의적이고 실체적 개념에서 헌법국가를 적용한다. 이에 따르면 해당 개념은 헌법국가의 특정 이념형(Idealtypus) 즉, 서구적 특징의 자유민주주의 법치국가와 연관이 된다는 점에서 영미적 전통의 ‘헌정주의(constitutioinalism)’ 개념과 공통점이 있다.
단, 앞서본 바에 기초해 보자면78) 그 요소의 파악에 있어서 주의해야 될 점이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 ‘민주주의’를 ‘헌법국가’내에 포함시키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나뉘는 것으로 보인다. 평가컨대, 이 이유는 ‘헌법국가’와 ‘민주적 헌법국가’를 엄격히 구분하지 않고 헌법국가내에 민주주의가 포함되어 있다고 보는 관점은 제도로서의 민주주의가 헌법국가내에 포함되어 있는 점을 강조해 보는 것이고79), 엄격히 구분하는 견해는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의 독자성을 뚜렷이 구분해내려는 것 때문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定義)나 인식의 문제에 불과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둘째로, 독일의 법치주의는 ‘실질적’ 법치주의로 이해되고 있기 때문에, 영미의 절차적, 통제적 의미로서의 ‘법의 지배’가 갖는 성격과는 다소 다른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차이는 독일적 전통의 ‘헌법국가’와 영미적 전통의 ‘헌정주의’ 사이의 일정한 의미 차이와 각각이 내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요소들(권력분립, 기본권 보호, 법치주의(법의 지배))의 내적 상호 관계 차이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셋째로, ‘사회국가목표’는 독일적 전통에서 주로 논의되고 있으며 영미적 전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볼 때 한국의 헌법적 논증, 특히 ‘헌법재판소’에서의 설시에 있어서는 이 글에서 밝힌 헌정주의에 대한 독일적 개념 전통인 헌법국가라는 개념에 유의할 필요가 있겠다고 판단된다. 독일적 연원을 가지는 헌법국가(Verfassungsstaat) 개념에 관한 논의는 영미적 전통의 헌정주의(constitutionalism)에 대한 논의보다도 더 많은 점에서 ‘기술적(descriptive)’이라기보다는 ‘규범적인(normative)’ 면에 집중하고 있고, 그것은 재판기관으로서, ‘있어야 할 것’에 관한, 연역적이고 도그마틱적 논의를 상대적으로 더 중요하게 여기고 활용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80)
그리고 이러한 헌법국가·헌정주의 개념 및 구성요소·징표의 명확화를 통해, 그래서 그와 동전의 양면인 ‘반헌정주의, 반법치주의’ 개념 명확화를 통하여 우리는 최소한 다음의 것을 기대할 수 있다. (1) 대한민국사에 있어서 소위 과거사 문제(transitional justice) 등에 대한 헌법적 심사 기준을 세우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줄 수 있고, (2) 이론적으로는 헌법의 보호 문제(정당해산제도, 공무원의 헌법충실의무 등), 헌법개정한계론, 헌법개정의 한계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심사가능성 등의 탐구에 대한 기초도 제공할 수 있으며, (3) 나아가 통일후 구 체제의 불법에 대한 청산 기준을 마련해줄 수도 있다. 그리하여 입헌주의적/법치주의적 청산과정을 통해, 통일후 조속하고 진정한 사회통합을 도모할 수 있다. (4) 또한, 헌법재판소가 종종 맞닥뜨리는, 헌법자체의 효력 문제, 사법심사의 대상과 한계 등과 관련한 ‘어려운 결정(hard case)’들을 해결하는 중요한 헌법적 준거 중 하나를 구체화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수용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유의할 점이 있다. 우선 국내에서 ‘헌법국가(내지 헌정국가)’라는 용어를 쓸 때에는 일단 그것이 지칭하는 외국어 두 가지 중의 하나의 번역어로서 쓰이는 것으로 보인다. 영어의 ‘constitutionalism’ 내지 ‘constitutional state’ 그리고 독일어로서의 ‘Verfassungsstaat’81)가 그것이다. 영어의 표현들이 헌정주의에 기반한 국가를 뜻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에는 크게 어려움이 없을 듯 하지만, ‘Verfassungsstaat’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조금 주의를 요한다.
영미법학 전통에서의 ‘rule of law’와 독일법학적 전통에서 ‘Rechtsstaat’가 가지는 외연의 범위가 다소 다른 것처럼, 독일헌법학에서는 ‘Verfassungsstaat’가 영미의 ‘constitutionalism’ 내지 ‘constitutional state’와 서로 외연이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독일에서 (특히 공법학에서) ‘Verfassungsstaat’를 말할 때에는 보통 권력분립, 인간의 존엄성 및 기본권 존중, 법치국가원리 이외에도 민주주의원리, 사회국가원리와 연방국가원리를 반드시 포함시키곤 한다.82) 이것은 독일 헌법의 구조와 관련이 있는데 기본법 제79조83)에서 금지하고 있는 개정불가사항에 제1조와 제20조84)가 들어 있으며, 이것을 풀어서 보면 위와 같기 때문이다. 즉, 독일 공법학계는 ‘Verfassungsstaat’을 헌법개정의 한계로서 대체로 인식하고 있다고 할 것이며, 그 요소로는 협의의 ‘헌정주의’의 요소 이외에도 민주주의원리(Demokratie), 사회국가원리(Sozialstaat)와 연방국가원리(Bundesstaat)를 포함시키고 있다. 이 점은 역사적인 이유가 있는데, 사회국가원리는 이미 비스마르크때부터 자리잡은 독일 공법의 전통적 입장이며 이것이 헌법 문구에도 새겨져 그 실무적 학문적 해석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고, 민주주의원리와 연방국가원리에 대해서는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 정권이 집권후 폐지시킨 것이 바로 연방국가성과 민주주의이며 이러한 폐지는 그 이후 국가사회주의 정권 및 독일 전체가 중앙집권적 반민주주의, 전체주의 체제로 나아가게 되는 조건을 만들어주었다는 데 대한 반성적 고려가 존재하고 있다.
이와 같이, 독일 기본법 제79조85)에서 금지하고 있는 개정불가사항은 실질적 헌법국가 개념을 증명하고 있으며, 또한 이러한 것이 실정헌법상으로 뚜렷하게 헌법국가의 요소들을 제시해주고 있는 역할을 하여, 그러한 실정헌법조항이 없는 다른 국가들(예컨대 우리의 경우도 그렇다)의 담론과 달리 헌법국가의 요소들 및 그 내용에 대해 대체로 쉽게 동의하게 되는 경향을 낳게 된다. 이러한 헌법국가의 요소들을 ‘헌법의 원리’라고도 부른다면, 이러한 ‘원리’에 대한 설명에 대한 학자마다 상이한 정도의 폭이 독일의 경우가 우리나라의 경우보다(또는 미국 등의 경우보다도) 훨씬 작은 이유 또한 위와 같은 실질적 헌법국가 개념의 확립 및 실정헌법의 구체적 조문(기본법 제79조)의 존재에 기인한다고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독일 기본법 속에서의 ‘Verfassungsstaat’는 영미의 대응물86)에 비해서 약간 다르게 이해되고 있으며87) 그에 있어서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역사적이고 실정헌법적인 이유도 있다고 하겠다.88) 그리고 역시 독일 기본법 제79조와 같은 개정불가사항이 명문상 존재하지 않는 우리 헌법의 해석에 있어서는 바로 이 점에 대한 주의가 요구된다고 하겠다. 무조건적 수용은 독일 기본법 제79조에 기반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헌법국가’의 모든 내용이 우리 헌법 해석상의 ‘헌법국가(헌정주의)’ 개념의 내용으로 바로 들어올 수 있는 무리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V. 결론
우리 헌법재판소는 ‘입헌주의’, ‘입헌민주국가’, ‘입헌민주헌법’, ‘입헌주의적 헌법’, ‘입헌적 민주주의’, ‘민주적인 헌법국가’, ‘반입헌주의’, ‘반법치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한 바가 있음은 앞에서(II) 살펴본 바와 같다. 그러나 그 내용적 요소를 명시적으로 제시한 예는 아직 없는 것으로 파악된다. 한국의 헌법적 논증, 특히 ‘헌법재판소’에서의 설시에서 위와 같은 표현을 사용함에 있어서는 헌정주의에 대한 독일적 개념 전통인 ‘헌법국가’라는 개념을 참고하고 유의할 필요가 있겠다고 판단된다. 독일적 연원을 가지는 헌법국가 개념에 관한 논의는 영미적 전통의 헌정주의에 대한 논의보다 더 많은 점에서 ‘기술적’이라기보다는 ‘규범적인’ 면에 집중하고 있으며, 그것은 ‘있어야 할 것’에 관한 연역적, 도그마틱적 논의를 상대적으로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에, 규범적 논증을 주된 임무로 하는 헌법재판기관에서 활용하기 적합하기 때문이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이러한 개념을 실제 주요 결정문들의 논증에서도 활용하여 왔다. 특히 이러한 헌법국가라는 개념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면서도 그를 포함한다고 볼 수 있는 개념이기 때문에,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위배여부가 문제되는 정당해산, 탄핵 등의 사건에 있어서 하나의 ‘규범적 개념’이자 도구로서 사회에서의 헌법적 논쟁에서나, 헌법재판소 등 헌법기관에서의 유권해석적 논증에 사용되어야 할 필요성과 적실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우리 헌법의 해석에 있어서는 유의할 점은, ‘사회국가원리’나 ‘연방주의’ 등 독일 기본법 제79조에 기반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헌법국가’의 내용 요소는, 개정불가사항이 명문상 존재하지 않는 우리 헌법 해석상의 ‘헌법국가(헌정주의)’ 개념의 내용으로 바로 연결되기는 어렵다는 것이라고 하겠다.
헌법국가·헌정주의라는 개념은 그에 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엄격하고 탄탄한 논증을 통해 사용되어야 할 것이며, 그럴 때만이 이와 같은 개념이 단지 수사적 효과만이 아닌 규범적 효과를 가지게 됨으로서, 정치권력이나 다른 힘에 의해 헌정이 무너져 간 20세기의 경험들이 후대에 반복되는 불행을 막을 수 있는 논리적, 규범적 힘을 보유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