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론
1648년 웨스트팔리아 체제 성립 이후 배타적 주권 개념에 입각한 국가간 양자주의를 관철시켜온 국제법은 특히 제2차 세계대전과 유엔설립 이후 ‘국제공동체의 이익’ 개념에 기반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국가의 의사와 동의를 국제법 형성의 원천으로 여겨온 오랜 전통이 국제평화와 안전, 인권, 환경 등 모든 국가들이 향유하는 이익 및 가치들의 도전을 받게 된 것이다. 이러한 추세는 국가들의 의사와 각국의 개별이익에 반하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국제공동체 전체의 이익과 복리를 강행할 수 있게 하는 새로운 국제법 규범 및 관련 기제의 등장으로 이어졌고, 국제 판례에서는 “휴머니티에 관한 기본적 고려”나 “국제관습법의 위반할 수 없는 원칙” 등의 용어로 표현되었다.1) 이는 헌법, 법률, 명령, 규칙 등 철저한 수직적 서열하에 법규범이 존재하는 국내법 체계와는 달리, 기본적으로 수평적 성격을 갖는 국제법이 마주하게 된 큰 변화였다. 일례로, 유엔헌장 제103조, 강행규범(jus cogens) 및 ‘대세적 의무(obligation erga omnes)’ 등은 그러한 규범간 수평적 평등구조를 뒤흔드는 국제법 분야에 새로이 등장한 “비공식적 서열”의 표현이 되었다.2) 이렇게 국가간 양자적, 상호적, 쌍무적 권리·의무에 기반한 각국의 개별이익 추구로부터 국제공동체의 이익추구로의 이동 및 규범간 수평적 평등구조로부터 수직적 서열구조로의 변화 움직임은 20세기 중반이후의 국제법을 특징짓는 양대 요소이다.
이 글은 이러한 변화 가운데, 1970년 국제사법재판소(ICJ) Barcelona Traction 판결을 통해 등장하여 반백년 동안 수많은 국제법학자들의 많은 관심, 그리고 한편으로는 의구심의 대상이었던 대세적 의무 개념에 대해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즉, 전통적 국제법의 양자적 기본도식상 쌍무적 권리·의무를 넘어 국가가 ‘모두에 대해(erga omnes)’ 부담하는 의무라는 뜻을 가진 이 대세적 의무 개념의 등장배경, 의미 그리고 법적 효과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먼저, 제II장에서는 일종의 배경설명으로서, 국제공동체 개념을 매개로 하여 전통적 국제법상 양자주의를 극복하고 각국의 개별이익이 아닌 국제공동체의 이익을 추구하게 된 국제사회의 전반적 변화에 대해 살펴본다. 그리고 제III장에서는 그러한 변화의 대표적 실례 또는 상징 중 하나인 대세적 의무 개념에 대해 알아본다. 이를 위한 주요 분석대상으로는 ICJ의 South West Africa 판결, Barcelona Traction 판결 및 East Timor 판결의 세 가지를 선택하였다. 본론의 마지막 장인 제Ⅳ장에서는 대세적 의무가 국제법의 강행 수단임을 드러내고 있는 유엔 국제법위원회(ILC) 국가책임 초안규정 제48조 및 제54조에 대해 살펴본다. 이를 통해, 제48조는 공익소송 형식의 법적 절차를 통한 대세적 의무의 강행을 규정하고 있으며, 제54조는 본질적으로 외교적, 정치적 수단인 ‘대응조치(countermeasure)’를 통한 대세적 의무의 강행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열어놓고 있음을 밝힌다. 아울러, ICJ의 Palestine Wall 권고적 의견과 Congo v. Uganda 사건 Bruno Simma 재판관의 개별의견, 그리고 Belgium v. Senegal 판결 상의 제48조 및 제54조 관련 해석론에 대해 알아본다.
Ⅱ. 전통적 국제법상 양자주의의 극복
전통적으로 국제법은 국가간 양자적 권리·의무 관계를 기반으로 국제관계를 규율해왔다. ICJ는 Reparations 사건에서 “국제의무가 이행되어지게 되어 있는 당사자만이 그 불이행 관련 주장을 제기할 수 있다”고 하여 국제법상 권리·의무 관계 및 관련 책임추궁은 양자적 성격의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3) 이렇듯 한 국가가 다른 국가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국제법에 특유한 “권리와 의무의 완벽한 상호성”4)에 기반하여 국가 대 국가간 양자관계에서만 논의되어왔다. 즉, 국제법상 의무는 국가 상호간에 발생하며, 타국의 의무불이행으로 피해를 당한 국가는 양국간 양자적 계약관계에 기반하여 개별적으로만 상대국의 책임을 주장할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상대국의 책임을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은 법적 ‘지위 또는 적격(standing)’의 보유를 의미하며, 이는 양자적 계약관계를 토대로 발생하는 권리로부터 유래된다. ICJ도 같은 취지로 언급하였는데, Barcelona Traction 사건 판결문에서 재판부는 “벨기에의 [법적]능력을 결정짓는 것은 벨기에에게 속하고 [그러한 사실을] 국제법이 인정하는, 권리의 존재 또는 부존재이다”라고 판시하면서 “책임은 권리의 필연적 결과”임을 명확히 하였다.5) 요컨대, 병렬적 국가주권을 전제로 하는 전통적 국제관계에 있어서의 국가간 권리·의무는 양자적 관계에 기반하였기에 국가의 국제책임은 “양자적 관계 안에 밀봉”6)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는 각국은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지켜야 하며 자국 외에 아무로부터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다는 국제법 및 국제관계의 양자적 기본도식의 당연한 귀결이었다.7)
이미 19세기에 국가, 주권, 불간섭 등의 개념을 강조했던 법실증주의 사상에 대항하여 일어났던 사회연대주의(solidarism) 학파는 국제사회에 대한 ‘공동체 지향적 세계관’를 가지고 있었다.8) 이 학파는 국제사회를 공동체로 보고 각국의 이익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하면서, 특히 경제적 또는 인도적 이유로 필요할 경우에는 타국에 대한 간섭 또는 개입이 허용된다고 주장하였다.9) 이 학파는 모든 인류는 궁극적으로 단일한 도덕 및 윤리적 공동체를 구성하고,10) 인류전체의 이익이 각국의 주권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하였다.11) 이후 사회연대주의 학파의 영향은 양차 대전 사이의 기간에도 계속 이어져 기본적으로 낙관적 세계관을 기반으로 국가 주권보다는 국가들의 상호의존성을 강조하였다.12)
20세기 중반 이후, 그때까지 국제관계를 지배해왔던 국가의 이익과 힘 그리고 자력구제의 논리에 기반한 양자적 기본도식에 대항하여 ‘국제공동체’ 개념을 매개로 한 윤리적, 도덕적 고려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 현상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양자주의로부터 공동체의 이익으로”13)의 이동이었다. 국가의 의사나 동의에 기반하기 보다는 오히려 국가들의 개별의사를 압도하는 선험적 가치의 존재가 ‘공동체’ 즉, ‘국제공동체’의 기치 아래 인정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는 1962년 헤이그 국제법 아카데미에서 행해진 Sir Humphrey Waldock의 강연내용과도 연결되는데, 그는 자국 이기주의에 기반한 양자관계를 극복하는 “조직화된 국제공동체의 시작들” 중 하나로 국가의 동의를 넘어선 강제관할권 행사의 가능성을 열었던 1921년 상설국제사법재판소(PCIJ)의 설립을 거론하였다.14)
이렇듯 ‘국제공동체’ 개념의 출현은 기존 국제법 및 국제관계의 출발점이었던 양자적, 쌍무적 기반으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했다. 1648년 웨스트팔리아 체제 이후 국제법은 각국의 영토 내에서의 해당 국가의 독립성과 배타적 관할권의 절대적 존중이라는 토대 위에서 정립되었다. 국가 상호간의 관계는 제한적이었고 국가간 협력은 예외적이었다.16) 국제법의 역할은 각국의 개별이익을 보호하는 것에 방점을 두고, 각국의 배타적 관할권 행사가 충돌하는 경우 해결책을 제공하는 것에 집중되었다.17) 예를 들어, 18-19세기 영국의 직물과 포르투갈의 와인간 교역은 영국의 와인 수요와 포르투갈의 직물 수요의 충족이라는 각자의 개별이익 보호를 위한 것이었으며, 유럽 각지의 관세동맹은 각국 산업의 보호라는 개별이익을 위한 것이었다.18) 하지만, 20세기 중후반 ‘국제공동체’ 개념의 본격적 등장은 각국의 개별적 이익, 영역, 관할권을 존중하기 위한 소극적 자제의 의무를 넘어서 ‘공동체의 이익(community interest)’을 위해 협력하여야 할 적극적 의무의 부과로 이어졌다. 아래에서 이러한 전반적 변화를 징표하는 세 가지 사례에 대해 살펴본다.
각국의 개별이익이 아닌 국제공동체의 이익에 기반한 국제법 기제 및 그 실제적 적용에 대해서는 이미 20세기 초반에도 관련 실례를 찾을 수 있다. 그러한 대표적인 예로는 1911년에 이미 45개 이상이 존재했던 국제우편연합, 국제무선전신연합 등 공공 국제기구들을 들 수 있다.19) 또한, 1919년 이후 유럽에서 체결되기 시작한 소수민족 보호조약들은 국가들로 하여금 자국의 이익이 침해당하지 않은 경우에도 소수민족을 위해 PCIJ에 소를 제기할 수 있게 하였는데, 특히 그 국가가 해당 소수민족 보호조약의 당사국이 아닌 경우에도 그러한 권리를 인정하였다.20)
한편, PCIJ는 1923년 Wimbledon 사건에서 영국, 프랑스, 이태리 및 일본의 독일에 대한 소제기를 받아들였다.21) 이 사건에서 비록 이태리와 일본은 독일의 키일운하 접근제한 조치로 인한 피해국이 아니었지만, PCIJ는 모든 국가가 항행의 자유를 누리며 키일운하는 “영속적으로 전세계의 사용을 위해 제공되었다”22)라고 판시하면서 두 나라의 관련 법익과 원고적격을 인정하였다.23) 같은 1923년 PCIJ는 또 다른 인권 관련 권고적 의견에서 전통적 국제법상 양자주의의 절대성을 부인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특정 사안이 전적으로 한 국가의 관할권에 속하는 것인지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상대적인 것이다. 이것은 국제관계의 발전에 달린 문제이다.”24)
제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경험한 후, 국제공동체가 인정하는 “도덕률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25)에 기반하여 “순수한 인도적 […] 취지”26)에서 채택된 1948년 제노사이드 협약은 각국의 개별이익을 넘어서 국제사회 전체의 ‘공동의 이익(common interest)’을 위해 국가들에게 의무를 부과한 대표적인 예이다. ICJ는 제노사이드 협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제노사이드 협약과 같은 성격의] 조약에서 당사국은 그 자신에게 귀속되는 이익을 갖지 않고 단지 모두 함께 공동의 이익 가질 뿐인데, [그 공동의 이익은] 그러한 조약의 존재이유인 숭고한 목적의 성취이다. 따라서, 이러한 유형의 조약에서는 국가의 개별적인 이익 또는 불이익이 말해질 수 없고, 또한 권리와 의무 사이의 완벽한 계약적 균형의 유지도 얘기되어질 수 없다.”27)
제2차 세계대전과 유엔설립 직후 인류가 인권이라는 새로운 가치에 눈뜨게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두 건의 문건은 유엔총회에서 하루 사이의 간격을 두고 채택된 제노사이드 협약과 세계인권선언이다. 이 두 가지 문건은 1948년 12월 유엔총회에서의 채택시점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본질상 배타적인 성격의 주권에 대한 국제공동체적 가치의 공격의 시작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국가들은 더 이상 절대적 주권과 자국 영토에서의 배타적 관할권을 주장하면서 자국민의 본질적 권리를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다른 국가들의 입장에서는 모른 척하고 넘어갈 수 있는 타국민의 권리를 국제법의 보호영역 안으로 끌어들인 국가들의 합의는 자국의 개별이익과는 상관없는 것이었다. 이는 국제사회 구성원 모두의 ‘공동의 이익’ 즉 ‘국제공동체의 이익’의 발현이었다. 어느덧 국제사회는 국제평화와 안전, 인권보호, 환경보호 뿐 아니라 빈곤 퇴치, 군축, 감염병 퇴치 등의 국제적 공공재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고 그에 대한 국제공동체 전체의 법익을 인정하게 되었다.
유엔 산하기구로서 국제법의 성문화에 앞장서 왔던 유엔 국제법위원회(ILC)에서 양자주의로부터 국제공동체 개념에 입각한 공익적 접근법으로의 변화는 1958년 조약법에 관한 특별보고자였던 Fitzmaurice의 제3차 보고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평가받고 있다.28) 이 보고서는 다자조약에 있어서 非쌍무적 의무를 ‘상호의존적(interdependent)’ 의무와 ‘필수적(integral)’ 의무로 구분하면서, 이러한 두 가지 의무중 하나 이상이 포함된 다자조약에 위반되는 후속조약의 무효가능성을 시사하였다.29) Fitzmaurice는 이 두 가지 의무를 “더욱 절대적 형태의 의무(a more absolute type of obligation)”라고 지칭하면서 전통적 국제관계에서의 양자적, 쌍무적 의무와 구별하였다.30) 이 보고서에서 상호의존적 의무와 필수적 의무는 모두 국가간 양자주의를 넘어 국제공동체의 이익과 밀접히 연관되는 개념으로 정의되고 있다. 상호의존적 의무는, 대표적으로 군축조약이나 환경조약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성격의 조약에 있어서 각 당사국의 의무 이행은 여타 모든 당사국의 의무 이행과 상호 연관되어 있으며 서로 의존적이다.31) 즉 한 당사국의 의무불이행은 여타 모든 당사국의 의무이행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32) 한편, 필수적 의무는 상호의존적 의무보다도 더 절대적인 성격을 갖는 것으로서 예를 들어 제노사이드 협약상 의무처럼 조약당사국의 의무는 여타 당사국의 의무이행 여부와 상관없이 계속 존속한다.33) 특별보고자 Fitzmaurice의 이 보고서는 전통적인 국제법의 양자적 기본도식을 극복하고 국제공동체의 평화와 안전, 인권 등의 새로운 가치를 대표하는 국제법상 의무에 이름(‘상호의존적’ 및 ‘필수적’)을 부여하고 그 법적 위상을 제고하고자한 시도로서의 의의를 가진다.34)
Ⅲ. 국제사법재판소 판례에서의 대세적 의무
이 장에서는 국제공동체 개념을 매개로 하여 전통적 국제법상 양자주의를 극복하고 각국의 개별이익이 아닌 국제공동체의 이익을 추구하게 된 국제사회의 전반적 변화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한 가지 실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그것은 ‘대세적 의무(obligation erga omnes)’라는 국제법 개념으로서, 1970년 국제사법재판소(ICJ)의 Barcelona Traction 사건 판결문에서 유래하였다. 그 핵심적 내용은 한 국가가 양자적 관계에서 개별 국가에 대해 부담하는 의무가 아니고, 관련 권리·의무의 중요성에 비추어 국제공동체 전체에 대해, 즉 ‘세상에 대해(對世的)’ 부담하는 의무가 위반된 경우 특별한 법률효과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 법률효과는 절차법적인 것으로 한정하는 것이 바람직한데, 아래35)에서 살펴보는 바와 같이 국제 판례는 자꾸 실체법적 언어로 대세적 의무의 법률효과를 설명하려는 유혹을 느끼고 있다. 이는 대세적 의무 개념과 관련한 여러 오해와 혼란의 대표적인 예 중 하나이다. 요컨대, 대세적 의무의 법률효과는 한 국가의 대세적 의무 위반이 발생한 경우, 그로 인한 직접적 피해국이 아닌 다른 모든 국가들에게도 위반국의 책임을 추궁할 수 있는 절차법적 지위(원고적격, standing, locus standi)를 부여하겠다는 것이다.36) 이 대세적 의무 개념은 공동체 지향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국가의 개별이익보다 국제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국제사회의 결의와 전반적 추세를 보여준다. 특히, 이 대세적 의무 개념에 동반하는 절차적 법률효과는 ‘국제법의 강행’ 수단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사실 ‘모두에 대하여(toward all)’이라는 의미의 ‘대세적(erga omnes)’이라는 표현은 ‘국제법의 강행’ 분야에 포섭되는 Barcelona Traction 판결 상 대세적 의무 개념과는 별개의 맥락에서 이미 사용되고 있었고 그러한 의미로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37) 이 경우 ‘대세적’이라는 표현은 특정 규범의 적용범위와 관련된다. 즉 ‘대세적’이라는 용어는 원래 조약이나 판결의 제3자에 대한 효력에 관한 것이었는데, 1970년 Barcelona Traction 판결 이후 ‘국제법의 강행’ 분야에 적용되기 시작되었다.38) 예를 들어, 주로 양자조약을 통해 확정되는 국가간 경계획정은 단순히 양 당사국 뿐 아니라 전세계 모든 국가를 향해 그 법적 효과를 주장할 수 있고, 따라서 이는 대세적 성격을 갖는다. 그러한 실례로, 1928년 Island of Palmas 중재판결에서 Max Huber재판관은 영토주권의 효력과 관련하여 “대세적(erga omnes)”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39) 또한, 중립지역, 비무장지역, 경계획정, 인권, 환경 등의 주제와 관련하여 ‘객관적 체제(objective regime)’를 설립하여 당사국 이외의 모든 국가들에게도 효과를 발휘하는 조약과 관련해서도 ‘대세적 효력’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어왔다.40) 비슷한 맥락에서, 유엔헌장 제25조 및 제7장에 의거한 안보리결의가 모든 유엔회원국을 구속하는 효력도 ‘대세적 효력’이라고 지칭될 수 있다.41)
하지만, 이러한 ‘대세적 효력’이 있는 법적 현상은 국제재판소 등에서 법적 절차를 시작할 수 있는 법적인 지위를 부여하는 ‘대세적 의무’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대세적 효력은 발휘하지만 대세적 의무가 아닌 것, 따라서 제3국에 관련 법익과 원고적격을 부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연안국의 배타적 경제수역에 관한 권리는 모든 국가들에 대하여 주장할 수 있으므로 그 적용범위가 대세적이다. 그러한 권리는 비록 ‘대세적 권리’라고는 부를 수는 있겠지만, Barcelona Traction 판결 상의 원고적격을 부여하는 효과가 있는 대세적 의무와는 무관한 것이다. 즉, 어떤 국가에 의한 연안국의 배타적 경제수역에 대한 권리 침해가 발생하였다고 해도, 이것이 모든 국가들에게 그 침해국의 책임을 원용할 수 있는 법익과 원고적격을 부여하는 것이 아닌 것은 자명하다.42)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아래에서 논할 ICJ의 1995년 East Timor 판례가 “대세적 권리”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고 하겠다.43) 올바른 표현은 ‘특정 권리에 관한 대세적 의무’라는 형태여야 하고, East Timor 사건에서는 ‘자결권에 관한 대세적 의무’라는 표현을 사용했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ICJ가 2019년 Chagos 사건 권고적 의견에서 “자결권에 대한 존중은 대세적 의무이다”라는 어구를 사용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하겠다.44)
‘국제공동체의 이익’이라는 사상이 즉시 국제법의 영역에서 명실상부한 법익으로 인정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66년 ICJ의 South West Africa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에티오피아와 라이베리아가 남아공의 위임통치를 받던 South West Africa(지금의 나미비아)에서 행해지던 인종차별 정책 등과 관련해 남아공을 ICJ에 제소한 것이었다.45) 즉 에티오피아와 라이베리아의 소제기는 자국의 개별이익과는 상관없는 일종의 국제공동체의 이익 사상에 근거한 공익적 성격의 것이었다.46) 결론적으로 이 사건에서 ICJ는 본안판단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면서, 국가는 타국의 행위로 직접적 피해를 입지 않은 경우에는 “어떤 법률문서 또는 법원칙(some text or instrument, or rule of law)”이 그 국가에게 관련 법익 내지 권리를 명확하게 부여한 경우에만 법적 절차를 통해 그 법익에 근거한 주장을 할 수 있다—즉, 원고적격(standing, locus standi)을 갖는다—고 판시하였다.47) 요컨대, ICJ는 이 사건의 요체를 “공익을 옹호하기 위해 소를 제기하는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권리” 즉 “공익소송(actio popularis)”을 제기할 권리가 국제법상 인정되는지의 문제로 파악하면서, 공익소송은 국가들의 국내법에서는 인정될 수 있을지 몰라도 국제법에서는 인정되지 않는다고 결정하였다.48) 이 판결은 국제사회의 지대한 관심을 받았으나, 그 주된 정서는 이 판결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국제법률가들과 대중은 이 판결을 통해 ICJ는 보수적이고 선진 서구국가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관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이는 ICJ에 대한 국제사회의 신뢰도와 관련하여 거의 재앙에 가까운 사건이 되었다.
이렇게 궁지에 처한 ICJ에게 1970년 Barcelona Traction 판결은 좋은 반전의 기회였고, 과연 ICJ는 그 기회를 흘려보내지 않았다. 이 사건에서는 법인에 대한 외교적 보호권 행사가 주된 논점이었지만 오히려 이 판결문에서 이후 오래도록 국제법률가들의 지대한 관심을 끌게 된 내용은 본안에 대한 판단과는 별 상관이 없는 판결문의 극히 짧은 일부분이었다. 즉, 이는 재판부의 ‘방론(obiter dicta, 부수적 의견)’이었는데 향후 이에 쏠린 학문적, 실무적 관심의 크기는 이를 일반적으로 ‘Barcelona Traction 방론(Barcelona Traction dictum)’이라고 지칭하기에까지 이르렀다.49) 이 방론의 핵심은 바로 ‘대세적 의무’라는 새로운 법개념이었는데, 동 판결문의 관련 부분은 다음과 같다.
“[…] 전체로서의 국제공동체를 향한 국가의 의무와 외교적 보호 분야에서 타국과 관련하여 발생하는 의무 사이의 본질적 구별이 있어야 한다. 전자는 그 본질상 모든 국가들의 관심사가 된다. 관련된 권리들의 중요성을 고려할 때, 모든 국가는 그 보호에 대한 법익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는 대세적 의무이다.”50)
앞서 대세적 의무 개념에 대한 개관에서 언급했듯이 대세적 의무란 한 국가가 국제공동체 전체에 대해 부담하는 의무로서, 그 실질적 의의는 국제공동체의 이익 사상에 기반하여 모든 국가들에게 관련 법익을 향유할 권리를 인정하고 이를 침해하는 국가에 대해 국제재판소 등에서 소를 제기할 수 있는 원고적격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이는 전통적인 국제법상의 대원칙인 주권존중 및 불개입원칙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이 대세적 의무는 ‘국제법의 강행’ 관련 담론 내의 개념이며, 국제사회가 최소한 국제공동체의 이익과 밀접히 관련되는 중요한 국제의무에 관해서는 다수국가에 의한 국제법의 강행을 받아들였음을 표상한다.51) ICJ는 이 대세적 의무가 국제관습법 또는 보편적(또는 준보편적) 성격의 조약에 근거하는 침략행위 및 제노사이드의 금지, 노예제 및 인종차별 금지 같은 기본적 인권 원칙 등으로부터 도출된다고 한다.52)Barcelona Traction 방론을 통해 인정된 대세적 의무 개념은 불과 4년전 South West Africa 판결을 사실상 뒤집는 것이었다.53) 만약 이 개념이 인정되었다면 South West Africa 사건의 제소국인 에티오피아와 라이베리아는 원고적격을 인정받았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Barcelona Traction 방론은 South West Africa 판결이 명시적으로 국제법상 인정되지 않는다고 언급했던 국제법상 ‘공익소송’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의의도 가진다. 이 대세적 의무 개념에 대한 국제법학계의 반응은 대부분 긍정적이었다.54)
Barcelona Traction 방론은 국제법 분야에 있어서 자국의 개별이익과 관련이 없는 사안에 있어서도 국제공동체의 이익 사상에 의거하여 국가들의 원고적격을 인정하는 법적 기제에 대한 공식적인 출발점이 되었다. 하지만 Barcelona Traction 판결 이전에도 비록 자국의 이익이 관련되지 않았어도 타국에 대한 제소 등 법적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국제법적 기제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는 유럽인권협약, 미주인권협약 등 지역적 인권조약상 ‘국가간 통보제도(inter-state communications)에서 찾아볼 수 있다.55) 이는 관련 조약의 모든 당사국으로 하여금 타당사국의 조약상 의무위반 행위에 대해 일종의 제소·고발을 할 수 있게 한 제도이다. 일례로 유럽인권협약 제33조는 “국가간 사건”이라는 제목하에 “당사국은 타당사국의 의한 본 조약 및 부속의정서들의 위반을 [유럽인권]재판소에 회부할 수 있다”라고 규정하고 있다.56)
이 조항은 자국의 개별이익이 관련된 사건을 회부하는데 활용될 수도 있고, 그러한 개별이익과는 관련이 없는 아래에서 설명할 ‘당사국간 대세적 의무’ 위반의 경우에도 활용되어질 수 있다. 후자의 경우에는 유럽이라는 지역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일종의 공익소송을 제기하는 것이 될 것이다. 유럽인권재판소에서는 1953년 유럽인권협약이 발효된 이후 2020년 1월까지 총24건 사건이 제33조에 따른 국가간 통보제도에 의거해 개시되었다.57) James Crawford는 Bruno Simma의 분석을 인용하면서 유럽인권협약상 국가간 통보제도를 활용한 공익소송, 즉 ‘당사국간 대세적 의무’ 위반 사건으로 이 24건의 사건중 3건을 지목하고 있다.58) 따라서, 유럽인권협약 제33조에 근거해 유럽인권재판소로 회부된 사건 중 대다수는 제소국의 개별이익이 관련된, 따라서 국제공동체의 이익 사상에 근거한 공익소송이라고 볼 수 없지만 그러한 성격의 사건이 소수이기는 하나 엄연히 존재해 온 것이다.59)
지금까지 ICJ는 전반적으로 대세적 의무 개념에 상당히 조심스럽게 접근했는데, 특히 의무의 대세적 성격이 인정되더라도 ICJ의 관할권이라는 두 번째 관문을 통과한 경우에만 실제 원고적격이 인정된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60) 그러한 첫 번째 사례는 1995년 East Timor 사건 판결문이었는데, 여기서 ICJ는 자결권의 대세적 의무로서의 성격을 인정61)하면서도 ‘필요적 제3자의 원칙(indispensable third-party rule)’ 또는 소위 ‘Monetary Gold 원칙’에 근거하여 관할권 행사는 거부하였다.62) 이 사건의 당사자는 포르투갈과 호주였고, 사안과 밀접히 연관된 인도네시아는 당사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ICJ는 이 사건에서의 본안판결은 인도네시아가 행한 행위의 적법성도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63) 결국, ICJ는 이 사건에서 스스로 관할권을 인정하고 본안판단에 나서는 것은 국가의 동의에 기초한 ICJ의 기본적 관할권 행사 원칙에 위배된다고 결정하였다.64) 학자들은 이 사건에서 만약 인도네시아의 ICJ 관할권 행사에 대한 동의를 통해 관할권 문제가 해결되었으면, ICJ는 대세적 의무 개념에 의거하여 티모르인들에 대한 자결권 존중의무 위반을 피해국이 아닌 포르투갈이 주장할 법익을 인정했을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65)
관련된 의무의 대세적 성격과 관할권 행사에 대한 고려를 분리하는 이러한 태도는 10년 뒤 Congo v. Rwanda 사건에서 강행규범의 경우로까지 확대되었다. 즉 강행규범에 관련된 사안에서도 절차적으로 관할권 행사에 대한 요건이 만족되지 못하면 ICJ는 그 사안을 다룰 수 없다는 것이다.66) 이러한 사례들, 즉 대세적 의무 및 강행규범에 대한 판단과 관할권에 대한 판단을 분리하는 ICJ 판례의 조심스럽고 신중한 태도는 주권 및 국가의 개별이익이라는 전통적 가치와 국제공동체의 이익이라는 미래지향적 가치가 충돌하는 접점 위에서 균형을 잡기위해 노력하는 ICJ의 입장을 잘 대변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Ⅳ. 유엔 국제법위원회 국가책임 초안규정상 대세적 의무
1970년 ICJ의 Barcelona Traction 판결에서 처음 명시적으로 인정된 대세적 의무의 개념은 2001년 유엔 국제법위원회(ILC)의 ‘국제위법행위에 대한 국가책임 규정초안(Draft Articles on Responsibility of States for Internationally Wrongful Acts, 이하 ‘ILC 국가책임 규정초안’)’ 제48조에 규정되면서 흐릿했던 그 개념상 내용이 어느 정도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67) 한마디로 이 제48조가 말하는 바는 대세적 의무에 대해서는 모든 국가가 그 보호와 존중에 관한 법익을 가지며, 따라서 그 위반이 발생한 경우에는 모든 국가가 법적 절차를 통해 위반국의 책임을 주장할 지위 즉 원고적격을 갖는다는 것이다. 즉, 제48조는 실체적 권리가 아닌 절차적 권리를 규정하고 있다. 제48조 채택시 일부 전문가들은 이 조항에 근거한 국제소송이 난무할 우려가 있다는 점과 이 조항이 외견상 국제책임법에 근거한 국가간 힘의 정치의 수단으로 악용될 우려가 있음을 경고하였다. 하지만, 추후 국가실행은 그러한 염려가 기우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 국가들은 자국의 개별이익과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는 인권, 국제범죄, 환경 등 국제적 공익이 관련된 사안에 있어서 타국을 제소하는 등 그 책임추궁을 위한 법적 절차를 밟는 것에 매우 신중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68)
ILC 국가책임 규정초안 제48조(1)항은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1. 피해국이 아닌 국가는 다음의 경우 […] 타국의 책임을 원용할 권한을 갖는다:
(a) 위반된 의무가 그 국가를 포함한 국가들의 무리를 향해 부담하는 것이고, 그 무리의 집단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형성된 것일 때; 또는
(b) 위반된 의무가 국제공동체 전체를 향해 부담하는 것일 때.”69)
국가책임법은 원칙적으로 한 국가의 국제위법행위로 타국이 피해를 입은 경우에만 그 피해국으로 하여금 국가책임을 원용할 수 있게 한다. 제48조는 이에 대한 예외를 인정하면서, 비록 직접적 피해를 입지 않은 국가라 하더라도 위반된 의무의 성격이 (a)항 또는 (b)항에 해당할 경우 의무불이행국의 책임을 주장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 근거는 위반된 의무의 국제적 중요성이며, 그 중요성은 (a)항의 경우에는 다자조약상 당사국들의 집단적 이익 개념을 통해, 그리고 (b)항의 경우에는 모든 국가를 포함하는 국제공동체 전체의 이익 개념을 통해 표상된다. 특히 (b)항이 규정하고 있는 의무는 국제공동체 전체를 향해 부담하는 것이므로 ‘대세적(對世的, erga omnes)’인 성격을 갖는다. 일반적으로 국제법률가들은 (a)항 상의 의무를 ‘당사국간 대세적 의무(obligation erga omnes partes)’라는 용어로, 그리고 (b)항 상의 의무를 ‘대세적 의무(obligation erga omnes)’라는 용어로 구분하여 지칭한다. (a)항의 ‘당사국간 대세적 의무’는 고문방지협약이나 제노사이드협약 등의 조약 당사국간에 존재하며, (b)항의 ‘대세적 의무’는 국제관습법상 의무와 연결될 것이다.70) 한편, 이렇게 제48조(1)항에 근거한 책임 원용의 실체적 내용은 동조 (2)항이 규정하고 있는데, 책임을 원용하는 국가는 의무위반국의 국제위법행위의 중단, 재발방지의 약속 또는 보상을 요구할 수 있다.71)
한편, ILC 국가책임 초안규정 제54조도 대세적 의무와 관련되는데, 동 조는 대세적 의무 위반의 경우 직접적 피해국 이외의 모든 국가들이 제48조를 통한 강행과는 별도로, 국제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합법적인 조치(lawful measures)”를 취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즉, 대세적 의무 위반시 제3국에 의한 대응조치(countermeasures)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는 것이다. 제54조는 그러한 합법적인 조치는 위반의 중지 및 보상을 담보하기 위하여 취해질 수 있다고 한다. 이 경우 그러한 조치에는 여타 양자조약 등의 일시 효력정지 및 위반국의 자산동결과 같은 경제재제 등이 해당될 것이다. 이러한 대응조치들은 기본적으로 외교적, 정치적 영역의 것이며, 비례성 등 국가책임법상 대응조치와 관련한 기본적 요건들을 충족하면 국제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행해진 것이라고 추정될 것이다.
제54조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본 장은 제48조(1)항에 따라 다른 국가의 책임을 원용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국가가 위반의 중지와 피해국 또는 위반된 의무의 수익자들의 이익에 대한 보상을 담보하기 위하여 위반국에 대한 합법적인 조치를 취할 권리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72) 요컨대, 이 조항은 대세적 의무 위반 상황에서의 국제법의 강행 수단 중 사법적 수단에 해당하는 ILC 국가책임 초안규정 제48조에 의거한 국제재판소 등에서의 사법절차 개시 이외에, 비사법적 강행수단인 경제제재 등 외교적, 정치적 대응조치를 취할 수 있는 길을 조심스럽게 열어놓은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73) 제54조상 피해국 이외의 국가가 대세적 의무 위반을 이유로 대응조치를 실행한 사례로는 1973-1974년 이스라엘의 요단강 서안지구 및 예루살렘 점령에 대한 대응으로 아랍국가들이 행한 석유금수 조치, 1998년 코소보에서의 대규모 인권유린 사태에 대응하여 유럽연합 회원국들이 세르비아에 대해서 행한 자산동결 및 양자 항공협정 불이행 조치, 2003년 짐바브웨 인권상황과 관련하여 유럽연합 회원국들이 행한 짐바브웨 지도층의 자산동결 조치,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에 대응하여 유럽연합과 미국이 행한 경제재제 조치 등이 있다.74)
ILC 국가책임 초안규정 채택 3년 뒤인 2004년 ICJ는 Palestine Wall 권고적 의견을 내놓으면서 위에서 언급한 ILC 초안규정 제48조(1)(a)항 및 (b)항 상의 두 가지 대세적 의무 구분을 원용하였다.75) 이 권고적 의견에서 ICJ는 먼저 “이스라엘이 위반한 대세적 의무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자결권을 존중해야할 의무와 국제인도법상 일부 의무들”이라고 위반된 대세적 의무를 두 가지로 특정하였다.76) 여기서 ICJ는 자결권을 존중하여야 할 대세적 의무를 지칭하면서 “모든 국가(all States)는 의무를 부담한다”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반면, 국제인도법상 의무에 대하여는 “[국제인도법의 대표적 法源인] 제네바조약의 당사국인 모든 국가는(all the States parties to the Geneva Convention) … 그 조약에 포함되어 있는 국제인도법에 대한 이스라엘의 준수를 담보할 의무를 부담한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77) 이는 ILC 국가책임 초안규정 제48조(1)(a)항 및 (b)항에 각각 규정되어 있는 ‘당사국간 대세적 의무’와 ‘대세적 의무’ 양자의 구분이 실제 ICJ의 판결에 적용된 실례라고 하겠다.
이 권고적 의견과 관련하여 또 한 가지 주목할 만 한 점은 특히 이스라엘이 부담하는 국제인도법상 ‘당사국간 대세적 의무’를 설명하는 재판부의 용어선택에 관한 것이다. 즉 재판부는 이 대세적 의무 위반의 효과를 설명하면서 책임을 원용할 수 있는 법적 지위에 관한 절차적 권리를 규정하는 ILC 국가책임 초안규정 제48조(1)항의 언어가 아닌 제48조(2)항 및 제54조 상의 위법행위의 중지, 재발방지의 약속, 보상 등 책임원용의 결과 또는 실체적 내용과 가까운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78) 즉 “모든 국가들은 장벽 건설로 야기된 불법적 상황을 인정하지 않고 […] 그러한 상황의 유지에 도움이나 조력을 주지 않고 […] 팔레스타인인들의 자결권 행사에 대한 여하한 방해도 제거하며 […] 제네바 조약의 모든 당사국들은 […] 동 조약에 포함되어 있는 국제인도법에 대한 이스라엘의 준수를 담보할 의무를 진다”고 판시하였다.79) 이러한 ICJ의 설시는 Barcelona Traction 방론에서 비롯되어 ILC 국가책임 초안규정에 안착한 사법적 강행 수단으로서의 대세적 의무의 효과, 즉 모든 국가가 누리는 법익에 기반한 재판적격 인정이라는 절차적 효과를 넘어 대세적 의무 개념의 실체적 효과를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 설시의 타당성은 의심스럽다. Rosalyn Higgins 재판관은 이 권고적 의견의 개별의견에서 이에 대한 비판을 가하고 있는데, 그 요지는 Barcelona Traction 방론이 말하고 있는 대세적 의무는 절차적 “원고적격이라는 매우 특정한 이슈”에 대한 것이며, 사건 당사자가 아닌 “제3국에게 실체적 의무를 지우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80) 또한 Higgins 재판관은 장벽 건설로 야기된 불법적 상황을 인정하지 않고 그러한 상황의 유지에 도움을 주지 않아야 할 의무는 자명한 것으로서 어차피 유엔안보리가 장벽건설을 불법적 상황으로 판단한 시점부터 유엔헌장 제24조와 제25조에 따라 모든 유엔회원국이 관련 의무를 부담하고 있다고 한다.81)
Higgins 재판관의 개별의견은 대세적 의무가 원고적격 인정에 관한 절차법적 개념임을 분명히 함으로써 그 법적 성질을 명확히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ILC 국가책임 규정초안 제48조(2)항 및 제54조는 대세적 의무라는 법적 개념에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내용이 아니고, 위법행위의 중지·보상 등 대세적 의무가 논의되는 상황의 파생적 결과를 예시적으로 설명하면서 그 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대세적 의무의 획기적인 효과 즉 모든 국가에게 관련 법익과 원고적격을 인정한다는 효과를 고려할 때, 이 개념의 범위를 실체적 영역에까지 확대하는 것은 오히려 그 의미를 불명확하게 하고 그 실제 활용가능성을 저해할 수 있다. 따라서, 대세적 의무 개념을 어디까지나 원고적격 부여 여부에 관련된 절차적 개념으로 한정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82)
하지만, 불행하게도 ICJ의 2019년 Chagos 사건 권고적 의견은 2004년 Palestine Wall 권고적 의견과 같이 자결권 존중에 관한 대세적 의무 위반의 효과를 모든 국가에게 부여되는 절차적 지위가 아닌 모든 국가가 이행하여야 할 실체적 의무(특히 유엔과 협력할 의무)로 풀어 설명하고 있다.83) 이에 대해서는 ICJ가 ILC 국가책임 초안규정 제41조(1)항 상의 강행규범 위반 관련 국가들의 협력의무와 제48조(1)항 상의 대세적 의무의 법적 효과를 혼동한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84) Higgins 재판관의 대세적 의무의 효과 내지 기능이 무엇인지에 대한 문제제기는 대세적 의무 개념에 대한 개념적 혼란의 대표적 실례를 거론한 것이라고 평가된다.
2006년 Congo v. Uganda 사건의 논점중 하나는 Ndjili 국제공항에서의 민간인에 대한 콩고군의 비인도적 행위였는데, 다수의견은 이 논점이 외교적 보호에 관련된 것으로 보아 피해자들의 우간다 국적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우간다의 관련 주장을 각하하였다.85) 이에 대해 Bruno Simma 재판관은 개별의견에서 1949년 제네바조약의 당사국인 우간다는 비록 피해자의 국적이 확실치 않지만 Ndjili 국제공항에서의 민간인에 대한 학대, 즉 국제인도법 위반행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고 보았다. Simma재판관의 이러한 주장은, 1949년 네 개의 제네바조약에 공통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공통 제1조 즉 “당사국은 모든 상황에 있어서 본 조약을 존중하고 존중을 보장할 의무가 있다”라는 조항과 2001년 국가책임 규정초안 제48조에 규정되어 있는 대세적 의무 위반에 대한 모든 국가의 원고적격 인정 규정에 의거하고 있다.86) 이 개별의견은 자국민이 아닌 사람에 대한 인권침해 행위에 대해서도 제3국이 관련 대세적 의무 위반국에 대해 ICJ에서의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명시적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87)
2010년에 발간된 한 연구는 1970년 Barcelona Traction 판결 이후 2010년까지 ICJ는 본격적으로 대세적 의무 관련 사건을 다룬 적은 없었다고 평가하였다.88)Nuclear Test 사건, East Timor 사건, Belgium v. Congo 사건 등 소수의 공익소송적 성격의 사건에서도 소제기국들은 자국의 개별적 ‘특별이익(special interest)’을 강조하였다는 것이다.89) 이 논문이 발간된 2년 후인 2012년 ICJ는 Belgium v. Senegal 판결에서 사실상 1923년 PCIJ의 Wimbledon 판결 이후 처음으로 대세적 의무 개념(좀 더 정확히는 ‘당사국간 대세적 의무’)에 의거하여 소제기국(벨기에)의 원고적격을 인정하였다.90) 특히, 이 판결은 관련 조약(이 사건에서는 고문방지협약)의 당사국 모두는 ‘특별이익’ 보유에 관한 증명이 없이도 ‘당사국간 대세적 의무’ 위반 발생을 이유로 한 원고적격을 가질 수 있다고 명시적으로 판시하였다.91)
Ⅴ. 결론
학자들은 대세적 의무 개념에 대해 “순전히 이론적 범주”이고 “공허한 제스처에 불과할 뿐”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였으며, 심지어 어떤 이는 “쓸 돈이 없고, 보낼 군대가 없고, 전쟁중 죽을 수 있는 자식이 없는 일부 책상물림들의 희망사항”일 뿐이라고 냉소하기도 하였다.92) 하지만, 대세적 의무에 대해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온 한 주석가는 이러한 비판들은 대세적 의무 개념이 2001년 ILC 국가책임 초안규정 제48조를 통해 국가책임법의 어엿한 한 부분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또한 동 규정 제54조를 통해 피해국 이외의 제3국의 대응조치를 위해 원용될 수 있게 된 사실 및 다수의 관련 국가실행이 존재하고 있음을 간과한 것이라고 반박한다.93) 그는 여러 국제법 분야로 빠르기 침투하고 있는 대세적 의무 개념은 “놀랄만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평가한다.94) 아직 그 개념정의, 법적 효과 그리고 실제 적용가능성 등과 관련한 불명확함과 의문점들이 남아있지만, 대세적 의무 개념은 국제사회가 양자주의에 기반한 각국의 개별이익의 맹목적 추구에서 벗어나 국제공동체의 이익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향해 나아가는데 있어서 실효적 수단으로 활용될 여지가 많다고 생각된다.
대세적 의무 개념은 전통적 국제관계의 양자적 기본도식을 극복하고 국제평화와 안전, 인권, 환경 등 국제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위해 국가들의 행동을 지도해 나아가는 국제법의 강행 기제중 하나이다. 국제법 실무가 국제공동체 전체의 관심사가 되는 포기할 수 없는 가치들을 포착하는 어휘로서 개발해 낸 강행규범, 유엔헌장 제103조 등과 함께 대세적 의무는 국제사회 공동의 이익을 담보하기 위한 법적 수단이다. 대세적 의무는 모든 국가들이 국제공동체를 “위하여(대리하여)”95) 의무위반국에 대해 국제법정에서의 법적 절차를 개시할 수 있는 지위를 부여하는 사법적 기능과 가용한 외교적, 정치적 수단을 사용하여 의무위반국을 압박하는 준사법적 기능 양자를 통해 국제법을 강행한다. 대세적 의무 개념의 핵심은 국제공동체(또는 그 이익)을 대리한다는 대리성이다. 여기까지가 ICJ의 판례, ILC 국가책임 초안규정, 관련 국가실행 및 여러 학자들의 진지한 논의를 통해 드러난 대세적 의무의 대체적 윤곽이다. 하지만 이 윤곽선에는 아직도 흐릿한 부분들이 많고, 각국의 개별이익을 넘어선 국제공동체 전체의 이익 추구라는 명분에도 불구하고 국제법 주체들은 아직 대세적 의무라는 강행기제의 활용에 소극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