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우리 민사소송법은 한편으로는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 소를 취하할 수 있도록 하고(민사소송법 제266조 제1항) 소가 취하되면 소가 처음부터 계속되지 아니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민사소송법 제267조 제1항) 이미 선고된 본안종국판결이 소급하여 실효된다.
그런데 우리 민사소송법은 다른 한편으로는 본안종국판결이 있은 뒤에 소를 취하한 사람은 같은 소를 제기하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다(민사소송법 제267조 제2항).
그리하여 우리 민사소송법에는, 한편으로는 소취하의 자유를 넓게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이유로든 일단 소취하를 하였다가 나중에 다시 소를 제기하고 싶은 사람의 소취하를 크게 제한하는 점에서 전후모순의 측면이 있고, 소취하에 의하여 이미 실효된 본안종국판결이 존재했었다는 이유로 재소를 금지하는 점에서 이론적인 문제가 있으며, ‘청구포기 의사 없이 소취하만 한 원고’의 재판청구권을 박탈하여 가혹한 결과를 야기하는 측면이 있다.
그리고 판례와 다수설이 위 재소금지조항이 소취하로 인하여 종국판결이 당사자에 의하여 농락당하는 것과 그 동안 판결에 들인 법원의 노력이 무용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제재적 취지의 규정이라고 보는 것에 의문이 있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 소취하와 재소금지의 입법례를 소개하고, 재소금지조항의 취지에 대한 판례와 다수설이 타당한지를 검토하고, 우리의 현행법 아래에서 발생하는 여러 이론적·현실적 문제점을 살펴보고, 그런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한 입법론을 강구한다.1)
본안종국판결 선고 후의 소취하 건수가 최근 6년 연속 연간 2,000여 건이고 사건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소취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론적으로만이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이 문제가 의미가 있다. 사법연감에 의하면 최근 6년간 민사항소심(고등법원과 지방법원 항소심을 합한 것)에서의 소취하 건수가 연간 2,000건 내지 2,300건이고 민사상고심에서의 소취하 건수가 39건 내지 72건이며,2) 부동산소유권, 건물 인도·철거, 저당권말소, 공사대금, 사해행위취소, 구상금, 대여금, 매매대금, 어음·수표금, 임금, 부당이득금, 채무부존재확인, 손해배상 등 사건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항소심에서의 소취하가 각 여러 건씩 이루어지고 있다. 항소심이나 상고심에서 소취하되는 사건들 중 하급심판결이 소송판결인 경우는 드물고 거의가 본안판결이니까 매년 본안판결 후 소취하로 인하여 재소금지되는 사건이 2,000여 건이며, 그 중 재소금지의 구체적 타당성이 없는 경우가 드물지 않을 것이므로 재소금지의 폐지에 관한 논의가 상당히 의미 있을 것이다.
Ⅱ. 소취하와 재소금지의 입법례
독일에서 피고가 본안에 관하여 구술변론을 시작하기 전에는 피고의 동의 없이 소를 취하할 수 있고(ZPO 제269조 제1항), 소가 취하되면 소송은 계속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며 이미 선고되었지만 기판력이 생기지 않은 판결은 그에 대한 명시적인 취소 없이 효력을 상실한다(ZPO 제269조 제3항 제1문).3) ZPO 제269조 제6항이 “소가 새로이 제기되면 피고는 비용이 상환될 때까지 응소를 거부할 수 있다.”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4) 등에 비추어 소취하 후의 재소가 당연히 허용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5)
오스트리아에서 제1회 기일에 한하여 소취하가 허용되고 그 후에는 청구의 포기만이 가능하다고 우리나라에 알려져 있지만,6) 실제는 이와 달리 좀 복잡하다.7) 오스트리아에서 소취하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가 청구포기를 겸한 소취하이고 다른 하나가 청구포기 없는 소취하이다. 청구포기를 겸한 소취하는 제1심에서는 아무런 제한 없이 가능하고, 항소심에서는 아직 기판력 있게 확정되지 않았고 항소심절차의 대상이 된 부분만 취하가 가능하다. 그리고 청구포기 없는 소취하는 피고의 이익 보호를 위하여 단계별로 달리 규율하고 있다. 제1회 기일의 개시 전에는 아무런 제한 없이 소를 취하할 수 있다. 제1회 기일부터 판결선고시까지는 피고의 동의가 있어야 소를 취하할 수 있고 피고가 동의하지 않으면 포기를 겸한 취하만이 가능하다. 판결선고가 있으면 소취하는 불가능하고 한 당사자의 상소가 있어야 다시 취하의 길이 열린다. 항소심과 상고심에서는 그 심급의 절차의 대상이 된 부분에 관하여서만 피고의 동의를 얻어서 취하할 수 있다(ÖZPO 제237조). 그리고 청구포기 없는 소취하 후에는 언제나 재소가 가능하다.8)
미국 연방민사소송의 경우 원고는 ① 상대방 당사자의 답변이나 사실심리 생략판결의 신청이 송달되기 전에 언제라도 소취하 통지서를 제출함으로써, 또는 ② 모든 당사자들이 서명한 소취하 합의서를 제출함으로써 소취하(voluntary dismissal)를 할 수 있고, 소취하 통지서나 소취하 합의서에 다른 언급이 없는 한 소취하는 재소금지효(prejudice)가 없으며, 다만 연방이나 주의 어느 법원에서 이미 동일한 청구에 기하거나 동일한 청구를 포함한 소를 취하하였던 원고가 다시 소를 취하한 경우에는 이 소취하 통지서가 본안에 관한 사법적(司法的) 판단으로 작용하여 재소가 금지된다{연방민사소송규칙 41(a)(1)}.10) 그 외에는 법원의 명령과 법원이 적절하다고 판단하는 조건에 기한 경우에만 원고는 소를 취하할 수 있고, 이 경우 명령에 달리 명기되어 있지 않은 한 재소가 금지되지 않는다{같은 규칙 41(a)(2)}. 이미 소를 취하하였던 원고가 동일한 청구에 기하거나 동일한 청구를 포함한 소를 다시 제기한 경우 법원은 전(前) 소송의 비용의 지급을 명하고 원고가 이에 응할 때까지 절차를 정지할 수 있다{같은 규칙 41(d)}.
그리고 미국 대부분의 주에서도 연방민사소송규칙과 같은 제약을 두고 있고, 소취하는 당사자로 하여금 소송이 개시되기 전의 상태에 있게 한다.
현행 일본 민사소송법은 우리 민사소송법과 똑같다.
그러나 원래의 일본 민사소송법은 현행 독일 민사소송법과 비슷한 내용이었는데,11) 재소금지조항이 1926년의 민사소송법 개정 때 신설되고 1929년부터 시행되어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으므로 그 개정작업의 경과를 살펴본다.
민사소송법개정위원회에서의 두 위원의 아래의 발언을 보면 입법자의 의도를 알 수 있다고 한다.12)
松岡義正 위원은, “200조의 말항13)의 규정은 본 개정안에서 신설한 규정입니다. 본안에 대하여 종국판결을 받았으면서 소를 취하하고 다시 소를 제기하면 이는 소취하의 남용으로 된다. 결국 본안에 대한 종국판결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소를 취하해 놓고 다시 소를 제기하여 위 소송관계를 뒤집으려 하는 것은 좋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제한을 두었고, 실질로부터 말하면 이름은 소취하이지만 당사자 자신으로부터 말하면 청구권의 포기와 같은 것이 된다. 이러한 동일한 소를 제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함으로써, 원만하게 소취하로 해결된 것을 다시 소송으로 다투는 것은 못하게 하고 남소의 폐를 방지함이 적당하고, 이러한 것 때문에 위 제한을 두게 된 것입니다.”라고 발언하였고, 池田 정부위원의 발언도 위와 같은 맥락이다.
위 두 사람의 발언 모두 ① 본안판결 후의 소취하는 원고패소의 경우에만 한다는 오류와 ② 소취하가 청구권의 포기와 같다고 보는 오류와 ③ 소취하는 원만하게 분쟁이 해결되었기 때문에 하는 것이라고 보는 오류를 범하였다. 그러나 ① 원고가 전부승소 또는 일부승소의 본안판결을 받고 소취하를 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게 있고, ② 위 개정 전의 일본의 민사소송법에서도 위 개정 이후의 일본의 민사소송법에서도 우리의 민사소송법에서도 소취하와 청구포기는 명백히 구별되고 있으며 소취하는 소송물에 대한 처분행위가 아님에 비하여 청구포기는 소송물에 대한 처분행위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다르고, ③ 분쟁이 해결되지 않았는데도 이런저런 이유로 일단 소취하를 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게 있다.
위 개정과정에 대하여, 「위 재소금지조항에 관한 민사소송법중개정법률안 이유서에 “본조 제2항은 종국판결 후의 소의 취하의 효력을 규정하는 것으로 하여 이러한 경우에 재소를 허용함은 상당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허용하지 않는 취지를 명백히 함”이라고 아무리 봐도 관공서 식으로 막연하고 간단하게 해치웠고 의회의 위원회의 속기록을 보아도 모두 개괄적인 논의여서 상세하게 천착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일본인의 신랄한 비판도 있다.14)
위 재소금지조항이 신설된 1926년에 일본은 제국시대였고 이때의 일본에서는 국민이 국가의 주권자가 아니라 천황의 신민(臣民)에 불과하였기 때문에15) 천황의 대리인인 법관이 뼈를 부러뜨려16) 쓴 본안판결문의 효력을 신민이 소의 취하에 의하여 소멸시켜 놓고서 감히 다시 소를 제기하여 법관에게 판결을 해달라고 하는 것은 좋지 않기 때문에 이를 금지하자는 법관 중심 발상의 개정안이 별 반대 없이 제국의회를 통과하고 천황의 재가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위와 같이 일본에서 제국시대에 어처구니없는 과정을 거쳐 재소금지조항이 입법되었는데 그 조항이 무비판적으로 우리나라에 도입되어 존속하고 있는 것이다.
제소조건에 부합하지 않는 경우 인민법원은 제소를 불수리하여야 하고(민사소송법 제123조), 판결의 선고 전에 원고가 소의 취하를 신청한 경우 그 허가 여부는 인민법원이 결정하는(민사소송법 제145조) 등 중국에서는 소제기의 자유부터 제약이 있고 소의 취하는 아예 법원의 허가제로 되어 있다.
이상의 입법례를 비교하여 보면, 국민에 대하여 국가가 우위인 일본, 중국에서는 국가가 우위가 아닌 구미에 비하여 소취하 또는 재소에 대한 제한이 많음을 알 수 있다.18)
Ⅲ. 재소금지에 대한 평가
1) 무제한으로 재소를 허용하게 되면 당사자의 농간을 막을 수 없는 것은 분명한 것이고, 따라서 아예 본안의 종국판결이 있은 후에는 소를 취하할 수 없게 하여 원천적으로 그러한 사태가 발생할 여지를 막아버리는 것과 현재법과 같이 상소심에서의 소취하도 인정하면서 제재를 가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실용적이냐 하는 데에 해결의 열쇠가 달려 있다고 할 것인데 전자보다는 현행법이 나은 입법태도라는 견해가 있다.19)
2) 현행법을 소취하남용 및 재소남용의 방지를 통한 효율적인 사법경제·신뢰를 도모하기 위한 합리적인 제도로 보는 견해가 있다.20)
3) 나라마다 어떠한 경우에 소취하를 허용할 것인가, 소취하 후의 재소를 허용할 것인가 여부에 관하여 각기 다른 규율을 가지고 있다. 이는, 소취하와 재소의 허용 여부를 어떻게 규율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모범답안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각 입법자가 국민의 재판받을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합목적적으로 정할 수 있는 사항임을 시사하고 있다. 따라서 처분권주의의 원칙을 살려서 상소심에서도 소취하를 인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일정한 실권적 제재를 가하는 것이 반드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견해가 있다.21)
4) 일본에, 현행법의 입법취지가 타당하다는 견해,22) 재소금지제도에 현재에도 수긍할 수 있는 합리성이 있다는 견해23) 등이 있으나, 모두가 원고의 제소의 반복과 법원농락의 방지, 피고의 이익의 부당한 침해라는 추상적인 내용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일본에는 본조가 금지하려 하는 것은 본안종국판결이 내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만연히 이를 실효시켜 놓고 재소를 제기함으로써 다수의 소송을 공평·신속하게 처리할 직책을 지는 법원의 부담을 쓸데없이 증가시키고, 취하에 동의하여 판결과는 별개의 해결기준이 타당하다고 신뢰한 피고를 이유 없이 다시 소송에 말려들게 하는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24)
입법론상 종국판결 확정 전까지 소취하를 허용하면서 재소금지의 제재를 가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비판하고 법원의 노력을 헛수고로 만들지 않으려면 직접 소취하를 금지하는 쪽이 철저하고, 입법기술로서도 간명하여 적용상의 문제가 적으며 현행법의 방식으로는 취하 후의 소가 재소에 해당하는지의 여부에 관한 까다로운 판단이 요구된다는 견해가 있다.25) 그리고 재소금지효가 적용되는지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취하가 아닌 당사자 간의 화해에 맡기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26)
1) 재소금지에 대한 대표적인 구체적 비판27)을 소개하며 필자도 이를 지지한다.
소취하는 소송물의 내용을 이루는 권리나 법률관계에 대하여 당사자도 아무런 처분을 함이 없고 법원도 아무런 확정적 재판을 함이 없이 단순히 소송을 종료시켜 처음부터 소송이 없었던 것으로 하는 제도이다. 따라서 소를 취하한 원고가 다시 제소하는 것을 막을 까닭이 없다. 이는 설령 원고가 제1심에서 판결을 선고받고 나서 소를 취하하였더라도 그 판결이 소멸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므로 달리 볼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사소송법 제267조 제2항은 본안종국판결이 있은 뒤에 소를 취하하였으면 동일한 소를 다시 제기할 수 없다고 규정하였다. 그 취지는 판결을 하는 데에 들인 법원의 노력이 소취하로 말미암아 쓸모없게 되므로 법원의 종국판결이 농락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판결의 농락 방지’는 권위주의적 표현이고, 정확하게 말하면 재소권의 남용 방지라고 해야 할 것이다. 판결의 농락 방지가 목적이라면 아예 소취하 자체를 금지하는 것이 논리적일 것이다.
소취하와 청구포기를 구별하는 법제에서는 소취하와 재소를 자유롭게 허용하고, 양자를 엄밀하게 구별하지 않는 법제에서는 소송계속이나 응소 이후에는 소를 취하하지 못하도록 하고, 이를 허용하더라도 그 후의 재소를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는 소취하와 청구포기를 엄격하게 구별하고, 소취하를 자유롭게 허용하면서 본안판결 선고 후의 재소는 금지하고 있다. 이 규정을 두어 일률적으로 규율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차라리 재소금지 규정을 두지 않고 재소권을 남용한다고 보일 구체적 사정이 있을 때는 그 소를 권리보호의 이익이 없다고 하여 각하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2) 우리나라에, 원고가 청구에 대하여 처분권을 갖고 있고 피고도 소취하에 동의했는데 법원이 그 권위를 내세워 재소를 금지하는 것은 합당하다고 보이지 않는다는 견해가 있고,28) 대부분의 입법례가 재소금지를 제재적 취지로 이해하지 않음을 언급하고 우리 법의 재소금지제도가 원고에게 가혹할 뿐 아니라 분쟁종결의 촉진을 가로막고 있지 않는지 의문이라는 견해가 있고,29) 소의 취하를 통해 소송계속을 소급적으로 소멸시킴으로써 소가 제기되지 않았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을 인정하면서 다른 한편 종국판결 선고 후에는 소멸한 전소(前訴)를 기준으로 동일한 소를 재차 제기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불필요한 분쟁을 유발할 가능성이 크다는 견해가 있다.30)
3) 일본에, 민사소송법이 한편으로 종국판결 후의 소취하를 적법하다고 하면서 종국판결 후의 소취하에 대하여 제재로서 재소를 금지하는 것은 입법으로서 수미일관하지 못한 것은 확실하고, 입법론으로서는 일본의 1890년의 구법처럼 소취하 후의 재소에 대하여는 종국판결 후의 취하인지를 묻지 않고 전소의 소송비용이 변제되지 않은 경우에 피고에게 응소거절권을 부여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라는 견해가 있고,31) 일본 민사소송법은 긍정할 수 있는 충분한 정당성 없이, 적어도 승소원고에 대해서는 가장 엄혹하고 예외 없는 재소금지를 하였다고 비판하는 견해가 있다.32)
Ⅳ. 재소금지에 대한 필자의 의견의 전개
대법원은 재소금지조항이 소취하로 인하여 종국판결이 당사자에 의하여 농락당하고 그 동안 판결에 들인 법원의 노력이 무용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제재적 취지의 규정이라고 판시하고(대법원 1998. 3. 13. 선고 95다48599, 48605 판결 등), 다수설도 이와 같다.33) 이는 일본 최고재판소의 판시34)와 비슷한데,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이런 판시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문헌을 찾기 어렵다(호문혁 교수의 ‘판결의 농락 방지는 권위주의적 표현이고, 정확하게 말하면 재소권의 남용 방지라고 해야 할 것’이라는 비판은 위 Ⅲ의 3항에서 소개하였다).35)36) 그러나 필자는 이 항에서 소취하로 인하여 종국판결이 농락당한다는 판시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다음의 2항에서 소취하로 인하여 판결에 들인 법원의 노력이 무용화된다는 판시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바이다.
위 판시는 국가의 주권자인 국민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고 국가 내지 법관의 입장에서만 판시한 것이며 일본의 판례를 무비판적으로 구체적 표현까지도 따라간 것이고, 민사소송제도의 목적에 관한 국내의 통설인 사권보호설(권리보호설)37)에 배치된다. 즉 사권보호설은 국가가 사인의 자력구제를 금지하는 대신에 사인의 권리를 실현하게 할 목적으로 민사소송제도를 두었다고 보는바, 국가의 주권자이며 민사소송제도의 이용자, 즉 법원의 고객인 국민이 민사판결을 선고받고 확정 전에 소를 취하하는 것이 자유이고(민사소송법 제266조 제1항에 명시됨) 소를 취하하면 소가 처음부터 계속하지 아니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민사소송법 제267조 제1항) 이에 따라 필연적으로 판결의 효력이 소급하여 소멸한 상태에서 다시 제소하는 것을 이미 효력이 소멸한 판결에 대한 농락으로 볼 것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법률이 ‘종국판결 후의 소취하’를 명시적으로 허용하고 있는 터에 ‘종국판결 후의 소취하’로 인하여 종국판결이 농락당한다고 볼 것이 아니다. 그리고 유효한 판결이 없는 상태에서 판결을 받겠다고 하는 것을 사법제도의 농락으로 볼 것도 아니다. 본안판결 선고 후 소를 취하하였다고 하여 재소가 금지되면 엄연히 존재하는 사권을 민사소송제도를 통하여 실현할 수 없게 되므로 이는 원고에게 가혹하고 민사소송제도의 목적인 사권보호에 배치되는 측면이 있는 것이다. 위 95다48599 판결은 민사소송제도의 목적을 전체주의적 국가관에서 파악하는 사법(私法)질서유지설(사법질서의 유지가 민사소송제도의 목적이며 사인의 권리의 구제는 사법질서유지의 수단 또는 효과일 뿐이라는 일본제국주의 시대의 통설)에 가까운 것인데, 오늘날에는 사법질서유지설을 지지하는 학자가 없다.38)
설령 본안판결 후의 소취하에 판결농락의 성격이 조금 있다고 보더라도, 본안판결 후의 소취하를 허용하는 실정법에 따라 소취하를 하는 것을 위법하다고 볼 여지는 없다. 그리고 원고가 청구를 포기하지 않고 재소가능성을 남겨둔 채로 피고의 동의를 받아 일단 소를 취하하는 것에 대한 비난가능성이 크지 않다. 소를 취하하는 원고가 그 소의 소송비용을 부담하고 재소하여 패소하면 재소의 소송비용도 원고가 부담한다는 측면에서 보아도 재소가능성을 남겨둔 채로 일단 소를 취하하는 것에 대한 비난가능성이 크지 않다. 더구나 원고는 소멸시효와 제척기간의 제한 내에서만 재소를 제기할 수 있다. 그런 소취하에 대하여 아예 재소를 금지해 버리는 것은 실용적이지도 않고 합리적이지도 않으며 과잉제재이다.
우리나라에서 국민이 주권자이고(헌법 제1조 제2항) 법관은 공무원으로서 국민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사람이지(헌법 제7조 제1항) 국민 위에 군림하는 사람이 아니다. 법관에게 일정한 권한을 부여한 것은 법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의 권리보호의 실효성 확보를 위해서이다. 국민이 법관에게 급여를 주고 국민을 위한 일을 시키는 것이다. 그런 법관이 선고한 민사판결의 효력을 소멸시킬 것인지의 여부는 주권자이며 민사소송의 이용자, 즉 사법서비스의 고객인 국민이 판결의 확정 전까지 결정할 수 있되, 피고의 본안변론 뒤부터는 피고의 동의 또는 동의간주가 있어야 한다는 제약이 따를 뿐이다.
본안판결의 선고보다 소송절차가 더 진행되어 본안판결이 확정된 후에 그 확정판결을 원고가 어떤 사유로든 집행하지 않으면 그 확정판결을 농락하는 것이고 그 확정판결을 한 법관이 분하게 생각할 일인가? 그렇지 않다. 법관은 국민이 낸 세금으로 급여를 받고 소송당사자인 국민이 소송인지대도 납부하며 국민인 원고(채권자)에게 그가 원하면 집행할 수 있는 집행권원을 부여해 주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공증인이 채권자로부터 수수료를 받고 집행권원인 공정증서를 작성해 주었는데 그 채권자가 그 집행을 전부 또는 일부 하지 않는다고 하여 그 채권자가 공증인이나 공정증서를 농락한다고 불쾌해 할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물며 확정판결도 아닌 하급심의 판결문을 법관이 노고를 많이 기울여 썼다는 이유로 자신의 판결문대로 집행되어야 한다고 법관이 생각할 것은 더욱 아니고, 본안판결문을 자신이 수고하여 써준 후에 원고가 소취하를 했다가는 그 후 재소를 못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은 더더욱 아니다. 본안판결 후에 소취하되면, 즉 상급심에서 소취하되면 하급심판결의 약점을 상급심법관이 알게 될 가능성이 줄어들고 하급심판결이 취소·파기될 가능성이 사라진다는 점에서 상급심에서의 소취하는 하급심법관에게 좋은 일이므로 하급심법관의 입장에서 보아도 상급심에서의 소취하를 재소금지조항에 의하여 억제할 일이 아니다. 그리고 상급심에서의 소취하가 억제되면 그 억제되는 만큼 상급심법관이 판결문을 더 써야 하므로 상급심법관의 입장에서 보아도 상급심에서의 소취하를 재소금지조항에 의하여 억제할 일이 아니다.
본안판결 후 소취하를 하면 법원은 한 건을 확정적으로 처리한 것이 되고, 같은 소가 다시 제기되면 법원은 전소 판결을 많이 참고하여 그 사건을 비교적 쉽게 처리할 수 있고 이렇게 비교적 쉽게 처리하는 한 건도 온전한 한 건으로 계산된다. 이런 측면에서 보아도 본안판결 선고 후의 소취하와 재소가 법관이나 판결을 농락하는 것이 아니며 법관이 기분나빠할 일이 아니고, 법원 전체의 입장에서도 본안판결 선고 후의 소취하와 재소에 대하여 거부감을 가지고 제재하려고 할 일이 아니다.
본안판결 선고 후에 소취하는 할 수 있게 하면서도 재소는 못하게 하는 것은 그야말로 법관 입장의 권위주의적인 입법이다. 노고를 기울여 판결문을 쓴 것이 정 아까우면 본안판결 선고 후에는 소취하를 하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 이것도 타당하지 않은 입법이지만, 그나마 이렇게 입법하는 것이 논리적이기는 하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본안판결 선고 후에도 소취하를 할 수 있게 해야만 법관은 판결문 작성의 수고를 덜고 사건이 거저 처리되며39) 만약 본안판결 선고 후의 소취하를 금지하면 사건이 거저 처리될 수 없고 법관이 수고를 하여 판결문을 써야 하기 때문에 본안판결 선고 후에도 소취하를 할 수 있게 입법한 것이고, 만약 본안판결 선고 후의 소취하를 금지하는 쪽으로 개정을 하려고 하면 법관들이 강력히 반대할 것이 틀림없다.
일본에서는 민사판결문에 원고의 주장이 무엇이고 피고는 그 중 무엇을 인정하고 무엇을 부인하는지 등을 포함하여 우리나라의 민사판결문보다 훨씬 더 상세한 내용을 기재한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뼈를 부러뜨려40) 판결문을 쓴다”고 표현할 정도이다. 이 때문에도 법관이 아주 수고를 기울여 본안판결문을 써서 선고한 이상에는 소취하를 간접적으로 억제하고 소를 취하했다가는 재소를 못 하도록 제재를 가하겠다는 법관 중심의 발상이 생겨나고, 그런 발상에서 1926년의 민사소송법 개정이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나라 민사소송법을 2002. 1. 26. 전면개정할 때 판결서의 이유에 “당사자의 주장과 기타 공격 또는 방어 방법의 전부에 관하여 판단을 표시한다.”를 “당사자의 주장, 그 밖의 공격·방어방법에 관한 판단을 표시한다.”로 개정하여 “전부”를 삭제하였는데, “이(구법)에 따라 실무에서는 모든 주장 및 공격방어방법에 관한 판단을 판결이유에 설시하느라 법관이 판결이유의 작성에 들이는 노력이 전체 업무부담 중 절반 이상을 차지하여 정작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사건 심리절차의 충실화에 전력을 다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고 법원행정처 발행의 민사소송법 개정내용 해설이 언급할 정도인바,41) 일본의 현재 판결문 작성의 부담이 우리나라의 위 개정 전보다도 더하고 일본의 1920년대 판결문 작성의 부담은 일본의 현재보다 더하였으므로 1926년에 재소금지조항을 신설할 때의 일본 법관들의 사고방식을 알 수 있다.
일본은 소액사건의 판결문도 판결문이니까 그 이유의 기재를 전부 생략할 수는 없다는 사고방식에 쭉 사로잡혀 있다가, 우리나라에서 1981. 1. 29. 소송촉진 등에 관한 특례법으로 소액사건 판결문의 이유기재를 전부 생략할 수 있게 하여42) 소액사건의 처리가 매우 효율화되면서도 항소율이 높아지지 않은 오랫동안의 실적을 확인한 후에서야 일본에서도 간이재판소의 소액사건 판결문의 이유기재를 전부 생략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소액사건이 민사본안사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소액사건의 대부분에서 이유의 기재가 생략되는 것을 고려하면, 적어도 소액사건에 관하여, 나아가 민사본안사건의 상당 부분에 관하여, 제1심판결 선고 후 소취하를 해놓고 다시 소를 제기함에 대하여 제재를 가해야 한다는 법관들의 의식이 없거나 약할 것으로 생각된다.43)
시각을 바꾸어 원고가 판결을 선고받고 소취하로 그 판결의 효력을 소멸시킨 후 다시 소를 제기하는 것을 나쁘게 보아 제재를 가하려고 하더라도, 원고가 패소판결을 선고받은 경우에만 일부러 그 판결의 효력을 소멸시키려고 하지 원고가 승소판결을 선고받은 경우에는 일부러 그 판결의 효력을 소멸시키려고 할 리가 없으므로, 원고가 판결을 선고받고 소를 취하하는 모든 경우에 대하여 일률적으로 재소금지라는 강한 제재를 가할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하여 민사소송법 제267조 제2항을 ‘본안에 대한 패소의 종국판결이 있은 뒤에 소를 취하한 사람은 같은 소를 제기하지 못한다.’로 개정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원고가 제1심에서는 전부패소하였지만 항소심에서는 중요한 증거를 제출할 수 있게 되어 승소로 예상되는 경우도 있고(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사정 때문에 일단 소취하를 하는 사례들을 뒤의 5항에서 언급함), 원고가 전부패소는 아니지만 거의 전부패소한 경우에는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의 문제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패소자만 소취하 후 재소를 못하게 하는 입법례가 보이지 않는다.
요컨대, 소취하 후의 재소 자체에 대하여 판결이나 법원을 농락하는 것이라거나 소취하의 남용 내지 소권의 남용이라고 볼 것이 아니고, 제재를 가할 것이 아니며, 본안판결 선고 후에 소를 취하하였다는 이유만으로 일률적으로 재소를 금지할 것이 아니다. 재소로 인하여 피고가 부당하게 불리하지 않으면 재소를 금지할 것이 아닌데, 이에 관하여는 아래의 6항에서 언급한다.
일본에도 ‘법원 자체는 재소의 허부에 대하여 당사자간의 이익을 넘어서 독자의 특별한 이익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는 견해가 있다.44) 이 견해에 의하면 재소의 허부의 판단에 있어서 법원의 농락 여부는 별 고려요소가 아니고 재소의 금지에 의한 원고의 불이익과 재소의 허용에 의한 피고의 불이익의 교량이 중요요소가 되며, 필자는 이런 사고방식이 국민주권국가에서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본안판결 후 소취하를 하여도, 전소의 변론기일조서, 증인신문조서, 증언의 녹음테이프, 검증조서, 감정서, 석명준비명령 등이 남아있고 특히 본안종국판결이 남아있으며 재소에서 그것들을 복사하여 활용할 수 있으므로 전소에서 판결에 들인 법원의 노력이 소취하로 무용화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소취하로 미확정판결의 효력이 법적으로 소멸하는 것 자체만으로 법원의 노력이 헛수고로 된다고 볼 것도 아니다. 본안종국판결문은 소취하에도 불구하고 재소에서 사실상 아주 중요한 증거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아울러 위 1.항 첫머리의 95다48599, 48605 판결은 법원의 노력이 무용화되는 것만 언급하고 당사자주의 아래에서 법원의 노력 이상으로 중요한 당사자의 주장증명 노력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는데, 전소에서 쌍방 당사자가 제출한 소장, 답변서, 준비서면, 서증, 증거신청서, 참고자료 등이 남아있고 재소에서 그것들을 복사하여 활용할 수 있으므로 전소에서의 당사자의 노력도 소취하로 무용화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행법처럼 본안판결 선고 후에 소취하는 할 수 있게 하면서도 재소는 못하게 하는 것은 당사자로 하여금 분쟁미해결의 교착상태로 계속 있을 것을 강요하는 것이고, 소송법상의 권리인 소권은 소멸하여도 실체법상의 권리는 소멸하지 않으므로 재소 금지된 채권자가 임의변제를 수령하여도 부당이득이 되지 않으며 저당권을 실행할 수 있고 재소 금지된 채권으로 상계할 수 있는바, 이처럼 소송법상의 권리와 실체법상의 권리의 괴리가 발생하는 것은 거시적으로 보아 사법(私法)질서의 통일과 경제적 효율에 마이너스이다. 예컨대, 토지소유자인 원고가 그 지상의 낡은 건물의 소유자인 피고를 상대로 건물철거 및 토지인도청구를 하였다가 본안판결 후 소를 취하한 경우에 현행법에 의하면 원고가 다시 건물철거 및 토지인도청구는 할 수 없지만 피고의 토지 사용수익으로 인한 부당이득의 반환청구는 할 수 있는바, 이런 어정쩡한 교착상태가 계속될수록 그 토지의 효율적 이용이 저해되고, 피고의 자력이 없으면 원고의 토지소유권은 허유권(虛有權)이 될 수도 있다.
재소금지의 입법취지로 전후판결 모순의 방지도 드는 견해가 있다.45)
그러나 전 판결이 이미 소취하로 소급하여 효력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판결로서의 효력을 가지는 것은 후 판결뿐이므로 전후 판결의 모순이란 것이 발생할 수 없다.46) 이 점을 의식해서인지 ‘실질적 모순’이 발생할 수 있다고 표현하는 견해도 있으나, 후소의 재판부가 전 판결의 내용을 알면서도 후소에서의 새로운 주장·증명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이미 실효된 전 판결’과 다르게 후 판결을 한 것을 두고 ‘실질적 모순’이라고 보기 어렵다.
위 Ⅱ항의 입법례에서 본 바와 같이 소취하와 청구포기를 구별하는 법제에서 판결확정 전에 청구포기는 하지 않고 소취하만 한 사람에 대하여 재소를 금지하는 입법례가 일본과 우리나라 외에는 없다. 원래 소취하와 청구포기를 구별하는 징표로서 가장 큰 것이 소송물에 대한 포기의 유무이고 이는 바로 재소가 허용되는지 여부와 직결된다.47) 청구포기의 경우는 당사자가 소송물에 대한 처분을 하는 것이므로 재소가 허용되지 않지만 소취하의 경우는 당사자가 소송물을 전혀 처분하지 않고 법원도 아무런 확정적 재판을 함이 없이 단순히 소송을 종료시켜 처음부터 소송이 없었던 것으로 하는 것이므로 재소가 허용되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 민사소송법은 소취하와 청구포기를 명백히 구별하고 있고 원고가 본안판결 선고 후 어느 심급에서 소를 취하하든 소취하에 의하여 그 전의 본안판결이 소급하여 실효되므로 이미 실효된 본안판결 때문에 소취하 후의 재소를 금지할 것이 아님이 논리적 귀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사소송법 제267조 제2항이 본안판결 선고 후의 소취하에 대하여 재소금지라는 강한 제한을 가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모순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위 Ⅱ항에서 언급한 독일, 오스트리아, 미국의 입법례의 내용들을 종합하여 비교해 보아도 우리의 재소금지조항은 원고에게 지나치게 불리하며 법관의 권위를 위한 것으로서 타당하지 않다.
그리고 위 Ⅱ의 2항에서 본 바와 같이 오스트리아는 항소심과 상고심에서 그 심급의 절차의 대상이 된 부분에 관하여서만 소취하할 수 있고 청구포기 없는 소취하 후에 언제나 재소가 가능한바, 우리는 한편으로는 항소심과 상고심에서 그 심급의 절차의 대상이 되지 않은 부분에 관하여서도 소취하할 수 있을 정도로(상소불가분의 원칙 때문임) 소취하의 자유를 최대한 인정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청구포기 없는 소취하 후에 재소를 금지하고 있으니 입법의 부조화이다.
근대 이래 사인(私人)간 권리관계의 근본원칙은 사적(私的) 자치이고 사적 자치가 민사소송에서 처분권주의로 나타난다. 즉 소송의 개시와 판결 외의 소송종료를 당사자에게 맡기는 처분권주의가 민사소송의 대원칙이다. 따라서 충분한 근거 없이 제소의 자유와 소취하의 자유와 재소의 자유를 제한할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위 Ⅱ의 4항에서 본 바와 같이 일본이 제국주의시대에 소취하를 청구포기와 동일시하는 등의 명백한 오류에 터잡아 소취하자의 재소를 금지하고 이로써 간접적으로 소취하의 자유를 중대하게 제한한 것이다.
위와 같이 소취하, 청구포기, 재소에 관한 입법례와 법리에 비추어 보아도 재소금지조항을 삭제하는 것이 타당하다.
판례는 재소금지조항의 존재를 전제로 하여야 하므로, 권리보호이익도 동일해야만 재소금지된다는 제한적 해석방법으로 재소금지조항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있다. 그러므로 판례의 제한적 해석방법으로 재소금지조항의 문제가 잘 해결되는지와 관련하여 여러 사례를 살펴보기로 본다.
① 형이 동생을 상대로 소를 제기하여 제1심 승소판결을 받은 후에 아버지가 자기 자식들 사이에 소송이 벌어진 것을 알게 되자 격노하여 ‘내 자식들끼리 소송하는 꼴을 내 눈으로 보라고?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절대 안 된다’라고 말한 경우가 실제로 있었다. 이 경우에 원고가 청구권을 포기할 생각은 없이 피고의 동의를 받아 일단 소를 취하하여 휴전하였다가 아버지의 사망 후에 다시 같은 소를 제기하면 ‘소송에 반대하던 아버지가 사망한 것’ 때문에 피고인 동생에 대하여 원고인 형의 ‘새로운 권리보호이익’이 생겼다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현행법 아래에서 판례의 제한적 해석방법으로는 재소금지되는데, 이는 타당하지 않다.
② 형이 동생을 상대로 소를 제기하여 제1심에서 증거부족을 이유로 패소판결을 받은 후에 결정적인 처분문서(예컨대 각서)를 발견하여 항소심에서는 승소할 것이 확실하게 되었는데 형의 딸의 혼인이 거의 성사되어 가다가 형제간에 소송을 하고 있다는 것이 총각 집안에 알려져서 난처하게 되었기 때문에 형이 피고의 동의를 받아 일단 소를 취하하였다가 딸의 혼인신고 후에 다시 같은 소를 제기하는 경우에 ‘딸의 위와 같은 사정’ 때문에 피고인 동생에 대하여 원고인 형의 ‘새로운 권리보호의 이익’이 생겼다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현행법 아래에서 판례의 제한적 해석방법으로는 재소금지조항에 저촉되어 타당하지 않다.
③ 공직선거후보자가 친구나 친척이나 선거구민을 상대로 제소하여 제1심판결 선고 후 그 소송의 소문이 나기 시작하자 선거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기 위하여 일단 소취하를 하였다가 선거 후 재소하는 경우에도 위 ①과 마찬가지로 현행법 아래에서 판례의 제한적 해석방법으로는 재소금지되어 타당하지 않다.48)
④ 원고가 제1심에서 패소하거나 일부승소하였는데 항소심에서 보다 유리한 판결을 받기 위한 새로운 증거(예컨대 외국에 있는 증인의 출석)를 확보함에 시간이 꽤 걸릴 것으로 예상되어 피고의 동의를 받아 소취하를 하였다가 새로운 증거가 확보되자 다시 소를 제기한 경우는 어떨까? ‘새로운 증거가 확보된 것’을 ‘새로운 권리보호이익’의 발생으로 보기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에도 현행법 아래에서는 위 ①과 마찬가지로 재소금지되어 구체적 타당성을 꾀하기 어렵다.
⑤ ‘친구 사이에 또는 이웃집 사이에 꼭 소송으로 승부를 내야겠냐, 좋은 게 좋은 것 아니냐, 내가 잘 주선하여 소송외에서의 화해를 이루어 주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어서, 또는 소송외에서의 화해가 좋겠다는 생각을 원고 스스로 하게 되어서, 원고가 제1심판결 후 일단 소취하를 하였는데 소송외에서의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에도 대법원판례에 의하면 재소가 금지될 것으로 생각된다. 소송외에서 화해를 할 생각으로 소취하를 하였으면 소송외에서 화해로 해결해야지 재소에 의지할 수 없고 ‘새로운 권리보호이익’이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 소송외에서 화해를 하겠다는 선의에서 소취하를 한 사람이, 즉 사회적으로 권장받을 행동을 한 사람이49) 큰 손해를 보게 되는데 이는 재소금지조항의 존재 때문이다. 재소금지조항이 존재하는 이상에는 억울한 원고를 아무리 해석으로 구제하려고 하여도 이러한 한계가 있다.
⑥ 항소심에서의 소의 변경과 재소금지가 결합되어 어려운 문제들이 발생한다. 대법원 1987. 11. 10. 선고 87다카1405 판결은, 소의 교환적 변경은 신청구의 추가적 병합과 구청구의 취하의 결합형태로 볼 것이므로 본안에 대한 종국판결이 있은 후 구청구를 신청구로 교환적 변경을 한 다음 다시 본래의 구청구로 교환적 변경을 한 경우는50) 종국판결이 있은 후 소를 취하하였다가 동일한 소를 다시 제기한 경우에 해당하여 부적법하다고 판시하는바, 항소심에서의 소의 교환적 변경에서 구소를 취하한다는 의식이 당사자에게 없거나 얇기 때문에 위 판례에 의하면 원고가 억울하게 재소금지되는 경우가 실제로 발생한다. 한 발 더 나아가면, 대법원 1975. 5. 13. 선고 73다1449 판결처럼 재소금지조항의 존재 때문에 거꾸로 소의 변경을 가급적 교환적 변경이 아니라 추가적 변경으로 보라고 하면서 항소심판결을 파기환송한 경우도 있다.51)
⑦ 형이 동생을 상대로 소를 제기하여 제1심 승소판결을 받은 후에 동생이 어머니를 모시겠다고 약속하여 소를 취하하였는데 그 후 동생이 어머니를 모시지 않은 경우에는 어떨까? 대법원 2000. 12. 22. 선고 2000다46399 판결이, 부동산의 명의신탁자가 명의수탁자를 상대로 명의신탁해지를 원인으로 한 소유권이전등기청구의 소를 제기하였다가 제1심판결 후에 명의수탁자가 그 부동산을 매각하여 돈으로 주겠다고 약정하여 소를 취하하였는데 그 후 명의수탁자가 위 약정을 이행하지 아니하여 다시 같은 소를 제기한 사안에서, 종국판결 후에 소를 취하하였다가 피고가 그 소 취하의 전제조건인 약정을 위반하여 약정이 해제 또는 실효되는 사정변경이 생겼음을 이유로 다시 동일한 소를 제기하는 것은 재소금지의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판시한 것에 비추어 볼 때, 동생이 어머니를 모시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경우에도 재소금지의 원칙에 위배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기는 하지만, 재소금지 해당 여부에 관하여 법률가가 아닌 일반 국민은 알 수 없고 법률가도 비슷한 사안에 대한 판례를 검색하여 정밀하게 비교검토해 보기 전에는 확신을 가지기 쉽지 않다.
⑧ ‘새로운 권리보호이익’이 있는지 여부의 판단이 쉽지 않은 경우들이 대법원 1985. 3. 26. 선고 84다카2001 판결,52) 대법원 1991. 5. 28. 선고 91다5730 판결,53) 일본 최고재판소 1977. 7. 19. 판결54)을 비롯하여 판례에 많이 나타나 있다.
⑨ 대법원 2002. 5. 10. 선고 2000다50909 판결을 살펴본다. 원고가 피고를 상대로 각서상의 보증채무금 청구의 소를 제기하여 제1심에서 각서의 진정성립을 인정할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청구기각 판결이 선고되자, 원고가 항소를 제기하면서 피고가 그 각서금 2,000만 원을 매월 50만 원씩 40개월 동안 분할하여 지급하기로 약정하고 이에 따라 피고가 원고에게 1회분으로 50만 원을 지급하기까지 하였다고 주장하였는바, 이에 대하여 항소심은 피고의 새 주장을 받아들여 위 약정은 원고의 소취하를 조건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그 때까지 원고가 소를 취하하지 아니하여 그 조건이 성취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원고의 항소를 기각하는 판결을 선고하였고, 그러자 원고는 위 판결의 확정 전에 위 소를 취하하였으나, 피고가 위 소의 취하에 이의한다는 서면을 법원에 제출하였고, 그 후 상고기간 내에 상고가 제기되지 않았다. 원고가 신소로 위 약정금 청구를 하면 재소금지에 저촉되고 전소의 기판력이 신소에 미칠까? 위 대법원판결은 신소의 소송물이 전소와 동일하다 하더라도, 권리보호의 이익이 달라 재소금지의 원칙이 적용될 여지가 없고, 전소의 기판력이 미칠 수 없다고 판단하였는바, 그러한 판단을 예상하기 쉽지 않다.
⑩ 다종다양한 소취하의 사정이 일본에서도 언급되고 있다.55) 원고가 패소한 하급심판결의 효력을 소멸시키고 재소하려는 경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일본에서 원고가 제1심 승소판결을 받았지만 항소심 재판장이 ‘제1심에서 피고에게 소장 송달이 되지 않은 채로 결석판결을 했기 때문에 항소심에서 제1심판결이 취소될 것이 명백하니까 일단 소를 취하하고 다시 소를 제기했으면 한다’라고 말하여 소를 취하하고 재소한 사례에서, 최고재판소 1980. 1. 18. 판결56)은 소취하에 의하여 재판이 헛수고로 돌아간 것이 원고의 귀책사유에 의한 것이 아니고 원고가 소송제도를 농단하는 부당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재소금지되지 않는다고 본 원심판단이 정당하다고 하였다. ‘새로운 권리보호이익이 생겼는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원고의 귀책사유에 의한 것인지’와 ‘원고가 소송제도를 농단하는 부당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지’라는 다른 기준에 의해서 재소금지 여부를 판단하였고, 이것도 재소금지 여부의 판단이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
위 여러 사례들은 재소금지조항을 존치한 상태에서의 판례의 제한적 해석방법만으로는 원고의 헌법상의 기본권인 재판청구권을 부당하게 박탈하여 타당하지 아니한 경우들도 있고 권리보호이익의 동일 여부의 판단이 어려운 경우들도 있으므로 위 조항을 삭제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아예 재소금지조항을 삭제하면 위 문제들이 원천적으로 해소되는 것이다.
재소금지조항을 삭제해 놓고 원고의 재소가 소권남용에 해당하거나 권리보호이익이 없는 경우에는 소권남용이나 권리보호이익에 관한 일반이론에 따라 재소를 각하하면 된다.57) 이렇게 처리하는 것이 굳이 특수한 재소금지조항을 존치시켜 놓으면서 그 조항에 규정되어 있지도 않은 ‘새로운 권리보호이익’의 유무에 의하여 소의 각하 여부를 결정하는 것보다 이론적 일관성, 예측가능성, 구체적 타당성에서 좋다.
호문혁 교수가 “결국 이 조문은 권위주의적으로 운용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고, 의미가 있게 권위주의적으로 운용하면 개인의 소권을 부당하게 박탈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 규정이 없으면 오히려 쓸모없는 재소만이 선별적으로 통제되어 개인의 소권이 부당하게 박탈되는 일이 생기지 않으리라 생각된다.”고 통렬하게 재소금지조항을 비판하고 “이러한 규정은 두지 않는 것이 타당하다”고 결론짓고 있는 것58)을 필자는 적극 지지한다.
재소의 금지로 인한 원고의 불이익과 재소를 금지하지 않음으로 인한 원·피고의 불이익을 비교해 보아도 전자가 후자보다 크다. 재소금지조항이 있을 경우에 원고의 불이익은 재소를 못하게 되어 권리구제수단을 박탈당함으로써 권리가 있어도 헛된 권리로 되어버리는 치명적인 것임에 비하여, 재소금지조항이 없을 경우에 피고의 불이익은 재소를 당하여 시간과 비용을 지출하는 정도에 불과하고, 그것도 피고가 소취하에 동의하였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며, 피고가 재소에서 승소하면 재소의 소송비용도 종국적으로 원고로부터 상환받는다.
재소금지조항이 없을 경우에 원고의 이익은 재소를 하여 승소하면 엄연히 실존하는 원고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정당한 내용이고 원고가 부당하게 이익을 취할 수는 없음에 비하여, 재소금지조항이 있을 경우에 피고의 이익은 엄연히 실존하는 피고의 의무의 이행을 면제받는 부당한 내용이다.
헌법 제27조 제1항의 ‘재판을 받을 권리’는 국민이 수동적으로 제소된 경우에 제대로 된 재판(헌법과 법률에 정한 법관 및 절차에 의한 재판)을 받을 권리만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능동적으로 재판을 청구하여 적극적으로 재판을 받을 권리인 ‘재판청구권’도 포함하고, 헌법이 국민의 기본권으로서 재판청구권을 보장하는 것은 소송을 통하여 사권의 보호를 꾀하려는 정신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는데, 재소금지조항은 헌법상 보장되는 기본권이며 사권보호 장치인 재판청구권을 부당하게 내지 과도하게 제한하는 것이며 재판청구권을 포기할 의사가 없는 국민이 재판청구권을 포기한 것으로 간주되어 버리는 경우들(위 5항의 사례들)을 만들어내는 악법(최소한, ‘바람직하지 않은 법’)이라고 할 것이다.
더구나 원고가 하급심판결과 상급심법관의 태도가 원고에게 불리하여 소취하로 하급심판결의 효력을 소멸시키고 다시 제소할 목적인 경우 등 피고가 원고의 소취하를 수용할 수 없고 재소의 허용이 싫은 경우에는 피고가 소취하에 대하여 이의를 하면 된다. 피고가 이의를 하면 소취하의 효력도 발생하지 않고 원고가 재소할 수도 없다. 피고가 이의제도를 몰라서 이의하지 아니하여 재소가 너무 반복되면 재소금지조항 없이 재소를 소권남용으로 보아 각하할 수 있으므로 굳이 재소금지조항을 존치할 것이 아니다.59)
재소금지는 한정된 사법자원을 다른 사건에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합리적인 제도라는 견해가 있다.60)
그러나 본안판결 선고 후의 소취하가 위 Ⅰ항에서 본바와 같이 2011년부터 2019년까지 연간 약 2,000건인데 그 중 절반 훨씬 넘게는 분쟁이 실제로 끝나서 소취하되므로 그 중 재소된 사건은 절반이 훨씬 되지 않아서 연간 1,000건을 훨씬 밑돌았을 것이다. 그런데 연간 민사본안 신건이 2011년부터 2019년까지 매년 103만 건을 넘었으므로61) 그 기간에 재소금지조항을 위반하여 재소된 사건은 전체 민사본안 신건의 1,000분의 1을 훨씬 밑돌았을 것이다. 따라서 한정된 사법자원을 재소금지로 다른 사건에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측면은 미미하다. 앞으로 재소가 허용되어도 승소가능성과 소송비용부담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재소의 건수가 대폭 증가하지는 않을 것이다.
더구나 재소사건은 전소의 소송기록과 본안판결문이 있기 때문에 심리와 판결에 사법자원이 많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리고 유효한 판결이 없어서 판결을 받겠다는 국민에 대하여 한정된 사법자원을 다른 사건에 효율적으로 활용하자는 이유로 재소를 금지할 것이 아니다.
원고가 하급심에서 받은 원고패소판결의 효력을 소취하에 의하여 소멸시키고 다시 소를 제기할 가능성이 있으면 피고가 원고의 소취하에 대하여 이의하여 소취하의 효력발생과 원고의 재소를 막을 수 있다. 그러나 원고의 소취하서 부본을 송달받은 피고가 그 소취하서의 제출 자체로 소송이 궁극적으로 끝난 것으로 오해하고 ‘피고가 2주일 내에 이의를 하지 않으면 소취하는 되지만 원고가 다시 소를 제기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경우가 꽤 있을 것이다. 이런 피고로서는 다시 소가 제기되었을 때 황당한 심경일 것이다.
이런 경우에 대비하여 독일 민사소송법 제269조 제2항 제4문은 “피고가 소취하에 대하여 서면을 송달받고 2주간의 불변기간 안에 이의를 하지 않으면 동의한 것으로 본다. 단, 피고에게 사전에 이러한 효과에 대하여 알려주어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62) 앞으로 우리나라도 독일 민사소송법과 같이 피고에게 효과를 고지할 것을 규정하고, 민사소송규칙으로 법원이 피고에게 소취하서 부본을 송달할 때 “피고가 이 소취하서 부본을 송달받고 2주 안에 소취하에 대하여 이의를 하지 않으면 소취하에 피고가 동의한 것으로 보아 소취하의 효력이 발생하며, 그 후 원고가 다시 같은 소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라는 안내문도 송달하도록 규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독일에서 소취하 및 재소와 관련하여 피고의 보호를 위하여 소가 구술변론 중에 취하되면, 소송상의 불확실을 피하기 위해서 피고의 동의는 같은 기일에 이루어져야 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소취하가 거부된 것으로 보고 있고,63) 재소금지로 국가의 이익을 보호할 것인지에 관하여는 독일 민사소송법 제269조에 관한 40쪽에 걸친 주석을 통틀어 언급이 없다.64) 국민주권국가에서 이처럼 소취하 및 재소와 관련하여 소취하의 효과를 국민인 피고에게 고지하고 소취하의 효과의 발생 여부에 의하여 국민인 피고의 보호방안을 강구할 것이지 국가의 입장에서 ‘판결의 농락’을 이유로 재소를 금지할 것이 아니다.
그리고 독일 민사소송법 제269조 제6항은 “소가 새로 제기되면 피고는 비용이 상환될 때까지 응소를 거부할 수 있다.”라고 규정하고 있는데,65) 우리나라도 피고를 위하여 그런 규정을 둘 필요가 있다. 미국 연방민사소송규칙에도 이와 비슷한 규정이 있음을 위 Ⅱ의 3항에서 언급하였다.
원고를 위하여 재소금지조항을 삭제함과 동시에 위와 같이 피고를 위한 두 보완책을 강구하면 원고와 피고 사이의 형평을 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민사소송법 제267조 제2항의 재소금지조항은 주권자인 국민의 소취하의 자유와 재판청구권을 권위주의적인 법관의 입장에서 과잉제한하는 것이므로 이를 삭제하는 것이 타당하다. 위 조항의 삭제와 동시에 독일 민사소송법 제269조 제2항 제4문 및 제269조 제6항과 같이 규정하여 원고와 피고 사이의 형평을 꾀할 필요가 있다.
위와 같은 입법은 보수진보, 여야와 관계없다. 위와 같은 입법에 대하여 민사소송법 학자들과 민법 학자들과 헌법 학자들의 다수가 반대할 것 같지 않으며, 법무부와 대한변호사협회가 반대할 것 같지 않다. 법관들의 다수가 반대하지만 않으면 위와 같은 입법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한다.
Ⅳ. 결론
소취하와 재소금지의 입법례를 살펴보면 소취하와 청구포기를 구별하는 법제에서 판결확정 전에 청구포기는 하지 않고 소취하만 한 사람에 대하여 재소를 금지하는 입법례가 일본과 우리나라 외에는 없다. 일본에서 국민이 주권자가 아니라 신민(臣民)이던 1926년에 본안판결 후의 소취하는 원고패소의 경우에만 한다는 오류와 소취하가 청구포기와 같다고 보는 오류를 전제로 하여 법원이 국민 위에 군림하는 권위주의적인 사고방식으로 신설된 재소금지조항이 우리 민사소송법에 무비판적으로 도입된 것이다.
판례와 다수설은 재소금지조항이 소취하로 인하여 종국판결이 당사자에 의하여 농락당하는 것과 그 동안 판결에 들인 법원의 노력이 무용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제재적 취지의 규정이라고 보지만, 이는 법관 중심의 권위주의적인 일본 판례를 답습한 것이다. 국가의 주권자이며 민사소송제도의 이용자로서 법원의 고객인 국민이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 소를 취하할 수 있다고 민사소송법 제236조 제1항에 명시되어 있고 소를 취하하여 판결의 효력이 소급하여 소멸한 상태에서 다시 제소하는 것을 이미 효력이 소멸한 판결에 대한 농락으로 볼 것이 아니다. 유효한 판결이 없는 상태에서 판결을 받겠다고 하는 것을 사법제도의 농락으로 볼 것도 아니다.
설령 본안판결 후의 소취하에 판결농락의 성격이 조금 있다고 보더라도, 본안판결 후의 소취하를 허용하는 실정법에 따라 소취하를 하는 것이 위법하지 않고 비난가능성이 크지 않으므로 그런 소취하에 대하여 재소를 금지해 버리는 것은 실용적이지도 않고 합리적이지도 않으며 원고에 대한 과잉제재이다.
피고가 원고의 소취하를 수용할 수 없고 재소의 허용이 싫은 경우에는 피고가 소취하에 대하여 이의를 하면 되고, 피고가 이의제도를 몰라서 재소가 너무 반복되면 재소금지조항 없이 그 소를 소권남용으로 보아 각하할 수 있으므로 재소금지조항을 존치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후소에서 전소의 기록과 판결문을 활용할 수 있으므로 소취하가 전소의 판결에 들인 법원의 노력을 무용화하지 않는다.
민사소송법 제267조 제2항의 재소금지조항을 존치한 채로 권리보호이익도 동일해야만 재소금지된다는 제한적 해석방법만으로는 원고의 헌법상의 기본권인 재판청구권을 부당하게 박탈하는 경우들도 있고 권리보호이익의 동일 여부의 판단이 어려운 경우들도 있으므로 위 조항을 삭제함이 타당하다. 그 삭제와 동시에 독일 민사소송법 제269조 제2항 제4문 및 제269조 제6항과 같이 규정하여 피고의 불이익이 없도록 할 필요가 있다.
소액판결 이유의 생략을 우리나라가 먼저 하고 일본이 우리나라를 따랐던 것과 마찬가지로 재소금지의 폐지도 우리나라가 먼저 하고 일본이 우리나라를 따르게 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