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헌법국가에 있어서 주체의 문제, 우리는 국민인가 시민인가?
국가공동체의 구성원을 지칭하는 용어들은 국민, 시민, 주민 등 다양하게 존재한다.n1) 그리고 각국의 헌법의 주어로는 다양한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2) 예컨대, 미국 연방헌법에서 주어는 대부분 people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지만, 수정헌법의 일부 조항에는 citizen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독일 기본법은 인간, 독일 국민, 독일인 등 다양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반면 우리 헌법상의 주어는 대부분 국민이며, 다른 국가들에 비해 다양한 편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헌법상의 주체를 국민으로 한정하는 헌법 체계는 국가영토의 경계와 국민의 단위가 비교적 일치되었을 때에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국민의 개념과 범위 안에 담을 수 없는 국가의 구성원들이 등장하게 되면서 법규범과 사회현실이 괴리되는 문제들이 나타나고 있다. 가령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국민이지만 외국에서 활동하는 사람은 국내문제와 관련하여 어느 정도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지, 국내에서 거주하는 외국인은 자신의 삶을 결정짓는 국내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로 참여할 권리를 가지는지 등의 문제이다.
국민의 개념상 한계 때문에 헌법상 기본권 주체와 관련하여 헌법해석이 기이해지는 현상이 발생하게 되었다.3) 국민의 범주로 포괄할 수 없는 주체들이 사회적·법적으로 논란이 되면서 헌법상의 주어를 변경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다.4) 그리고 2018년 헌법개정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헌법상 기본권의 주체를 확대하여 국민에서 ‘인민’ 혹은 ‘사람’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는 데에 의견이 모아졌고, 이러한 내용이 대통령의 헌법개정안에 반영되어 추진된 바 있다.5)
그런데 헌법상 주체로 규정되어 있는 국민만큼 헌법적으로 중요한 ‘시민’이라는 용어가 있다. 시민은 헌법상의 용어는 아니지만, 정치적 주체를 일컬을 때 헌법학에서 자주 사용하는 용어라고 할 수 있다. 2022년 5월,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사에서 ‘국민’뿐만 아니라 ‘세계시민’이라는 용어가 여러 차례 언급되면서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6) 시민은 국민과 특별한 구분 없이 일상적·법적으로 혼용되기 때문에 시민의 의미가 무엇인지, 시민 내지 국민은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구분하기가 어렵다.
헌법적 주체의 문제, 즉 국민의 개념과 범위에 포함되지 못하는 사회구성원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헌법)학계에서는 다양한 각도에서 연구들이 진행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학계의 연구 동향을 정리하면, 크게 세 가지 방향에서 논의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첫째, 기존의 국민 개념을 탄력적으로 해석하는 방안이다.7) 둘째, 국민의 인접개념으로서 시민 개념을 법적 개념으로 도입하는 방안이다.8) 셋째, 시민도 국민도 아닌 주민 개념을 새롭게 형성하는 방안이다.9)
그러나 국민의 개념과 범위의 균열 현상을 회복시키려는 그동안의 논의들은 하나의 개념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에 일정한 한계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국민만큼 자주 사용됨에도 불구하고 헌법학에서 ‘주변부’에 위치하고 있는 시민 개념을 통해 헌법적 주체가 가지는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개념과 사회적 현상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시민과 국민의 관계적 접근방법이 필요하며, 이러한 방법을 통해 각각의 개념과 범위도 더욱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하여 먼저 시민과 국민이 혼용되고 있는 현실을 진단한 뒤 시민과 국민의 관계 정립의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논의를 시작한다(Ⅱ). 그리고 시민과 국민의 개념을 혼용하게 된 역사적 배경으로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과정에서 시민과 국민이 결합하였기 때문이라는 점을 확인하고(Ⅲ), 세계화 경향으로 시민과 국민 사이에 간극이 발생하면서 양자의 관계가 문제가 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Ⅳ). 이러한 역사적·이론적 연구를 토대로 하여 헌법국가에 있어서 시민의 개념을 정립하고, 시민과 국민의 올바른 관계를 모색(Ⅴ)하면서 논의를 마무리할 것이다.
Ⅱ. 시민과 국민의 개념 및 관계 정립의 필요성
시민은 영어로 citizen, 독일어로 Bürger, 프랑스어로 citoyen, 한자로는 市民 등의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시민과 연관된 명칭으로는 시민권(citizenship), 시민성(civility), 시민적 덕성(civic virtue), 시민사회(civil society, bourgeois society) 등이 있다. 국가마다 시민을 지칭하는 명칭이 존재하지만, 시민은 다양한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그 개념을 일반화하기는 어렵다. 미국, 프랑스의 경우 시민은 법적 개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독일, 우리나라의 경우 시민의 법적 개념은 확립되어 있지 못한 상황이다.10)
시민 개념을 일반화하기 어려운 이유는 시민이 고대에서 출발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긴 역사적 과정을 담고 있는 형성적 개념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고대 도시국가에서 시민은 도시라는 장소에서 거주하고 있는 사람을 뜻하며, 동시에 노예의 반대편에 있는 특정한 신분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고대의 시민은 스스로 무장능력을 갖추고 경제적으로 독립된 자유인으로서 주로 성인 남성이 그 대상이었고, 시민 신분을 가진 사람들은 자유롭고 평등한 ‘정치적 주체’로서 정치적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할 수 있었다.11)
중세시대에는 경제활동에 종사하는 상인, 수공업자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유형의 도시가 발달하면서 이들을 중심으로 시민이 형성되었다. 중세 도시의 시민은 봉건제도 하에서 세력을 확장하였고, 신분적 예속을 넘어 사회적·정치적 지위를 확보해 갔다.12) 경제적 부를 축적함으로써 자유를 획득한 ‘부르주아’ 시민들은 자유와 권리를 보장받기 위하여 정치영역에 대한 참여를 요구하였는데, 이러한 요구는 전통적인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다. 중세의 시민은 혁명을 통해 근대를 여는 주역이 되었다.
서구의 역사적 과정에서 나타난 시민의 개념적 층위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 시민은 도시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을 의미하는데, 이 경우 공동체를 ‘구성하는’ 의미보다 그 지역에서 ‘생활하는(거주하는)’ 의미가 중요할 수 있다. 둘째, 시민은 ‘정치적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즉, 자유로운 신분이 보장되고, 정치적 주체로서 권리와 의무(책임, 덕성)가 동시에 요구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셋째, 시민 개념에는 기존의 권력(체제)에 ‘저항’함으로써 자신들의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힘과 의지가 잠재되어 있다.
한편, 한국사회에서도 시민이라는 용어는 오랜 역사를 지닌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전통적으로 시민은 도시의 거주인, 상업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용어로 존재하였다.13) 그러나 일제식민지와 남북분단이라는 현실적 상황 속에서 시민은 국민, 민족 등의 용어에 가려져 크게 주목받지 못하였다. 한동안의 잠복기를 거쳐 20세기 후반 이후 시민 개념이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정치적 자유의 주체이자 공동체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용어로 수용·적용되기 시작하였다.14)
국민은 영어로 nation, 독일어로 Staatsvolk, 프랑스어로 nation, 한자로는 國民 등의 명칭으로 사용된다. 국민 개념은 서구에서 18세기 이후 국가공동체의 형성과 함께 새롭게 창출되었기 때문에 근대국가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일반적으로 국민은 근대 이후 국가공동체의 주권을 보유한 구성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15) 다만, 국민이라는 용어가 영어 nation과 동의어로 사용됨에 따라 인접해 있는 인민, 민족 등의 개념과 구분하는 문제가 야기될 수 있다.16)17)
주권 보유자로서의 국민은 단순히 국가를 구성하는 개개인의 총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이념적 차원의 개념이다. 프랑스 혁명 이후 형성된 근대 헌법국가는 이러한 주권의 개념을 확립하였고, 동시에 주권의 주체로서 국민을 규정하였다. 근대 헌법국가는 출발점도 국민이며, 종착점도 결국 국민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헌법제정권력은 주권자인 국민에게 있으며, 헌법의 작동방식도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데 맞춰져 있다. 또한 헌법질서가 침해되었을 때 국민은 최후의 헌법보호수단(ultima ratio)으로서 저항권을 행사할 수 있다.18)
현행 헌법은 제1조에서 대한민국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가권력의 근거가 국민이라는 점을 밝히면서 출발한다. 그리고 헌법상 모든 권리와 의무 조항의 주어를 국민으로 규정하고 있다. 국가와의 관계에서 국민은 헌법상 주체로서 의미를 가진다.19) 헌법상 주체로서, 주권자인 국민은 국가권력의 정당성의 근거가 되며, 국가기관인 국민은 국가권력의 이념적 행사자로서 국가 활동을 가능하게 하며, 국가를 구성하는 개개의 자연인인 국민은 기본권을 향유하는 주체이자 헌법에서 요구하는 각종 의무들을 부담하는 주체가 된다.20)
누구를 국민으로 인정할 것인지는 개별 국가가 결정할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현행헌법 제2조 제1항은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는 요건은 법률로 정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국적법』에서는 국민자격의 취득과 상실에 관한 요건을 규정하고 있다.21) 국적(nationality)은 국민으로 인정되기 위한 법적 자격(지위)이기 때문에 국적을 가진 사람은 해당 국가의 국민이 되지만, 어떤 국적도 가지지 않은 사람(무국적자)과 다른 나라의 국적을 가진 사람은 외국인(alien)이 된다. 국적을 통하여 개인이 특정 국가의 국민이 된다는 것은 그 국가와의 법적 관계를 발생시키는 의미를 가진다.22)
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하면 시민과 국민은 다양한 개념적 층위를 가지는데,23) 역사적 전개과정에서 그 의미들이 중첩되면서 서로 비슷한 개념들이 섞이게 되었다. 이에 따라 오늘날 시민과 국민을 혼용(混用)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고, 시민과 국민의 개념이 가리키는 대상이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시민과 국민은 모두 정치적 주체를 대표하는 개념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며 혼용해서 사용되는 반면, 다양한 개념적 층위들 중에서 특정한 개념만 더욱 부각되어 나타날 수도 있다.
현행법상 시민과 국민이 어떤 개념적 의미로 사용되는지를 살펴보면, 법령의 제목에서 ‘국민’이라는 용어를 직접 사용하고 있는 경우는 다수이지만,24) ‘시민’이라는 용어를 직접 사용하고 있는 경우는 2020년 5월 26일 제정된 『시민사회 활성화와 공익활동 증진에 관한 규정』25)뿐이다.26) 이 시행령은 정부와 시민사회가 서로 소통·협력함으로써 시민사회를 활성화하고 공익활동을 증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이를 심의하기 위한 위원회에 관하여 규정하고 있다. 현행 법체계에서 시민은 정부 협력의 대상인 ‘시민사회’라는 영역으로 상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대법원 판례에서 시민 개념은 크게 네 가지 유형으로 해석되고 있다. 첫째, “서울시민”, “통행하는 시민들”, “시민휴식공간” 등의 경우처럼 도시에 거주하는 일반적인 사람들을 지칭하는 의미이다.27) 둘째, “미국의 시민권”, “외국 시민권자” 등과 같이 시민권제도를 두고 있는 국가들의 구성원을 일컫는다.28) 셋째,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처럼 특정기관, 지역, 규약 등의 명칭으로 사용된 경우이다.29) 넷째, “시민단체”, “시민사회단체” 등으로 표현하면서 주로 공무원의 직무수행에 대해 비판하고 감시하는 존재를 의미한다.30)
이러한 경향은 헌법재판소의 판례에도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헌법재판소도 마찬가지로 시민이라는 용어를 주로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 혹은 정부에 저항하는 단체로서의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31) 이에 더하여 헌법재판소는 국민과 시민이라는 용어를 함께 사용할 때, 시민이라는 용어를 “민주시민”, “건전한 시민”, “시민으로서의 책임성”이라는 식으로 표현하는데, 시민을 국민이 도달해야 할 지향점 내지 이상향과 연결함으로써 시민 안에는 어떤 이념이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32)
현행 법체계는 국민을 중심으로 편재되어 있고, 국민과 다른 주체로서 시민을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시민은 사회영역에 배치되어 있고, 역사적 의미(이념)가 배제된 채로 일반 시민과 동떨어진 시민사회로서의 의미가 두드러진 것으로 보인다. 국가와 사회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다각도로 변화하는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국민국가와 시민사회는 기존의 개념과 역할을 더 이상 고수할 수 없게 되었다.33) 따라서 오늘날의 현실에 맞는 시민의 개념 및 국민과 시민 사이의 관계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시민과 국민은 모두 이념성·역사성을 띠며, 고정불변의 개념은 아니다. 그래서 확정적인 개념을 정립하기가 어렵고, 범주화하는 것도 모두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헌법국가의 주체와 그 범위를 설정하는 문제는 역사적·구체적 현실의 전제조건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으며, 헌법 속에서 구체적인 형태와 의미를 찾아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역사적인 배경과 현실적인 조건들을 분석하여 시민과 국민이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 살펴봄으로써 시민의 개념 및 양자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방향성을 도출해낼 수 있을 것이다.
Ⅲ.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과정에서 시민과 국민의 근접성
오늘날 시민과 국민이 법적·사실적으로 혼용되며, 양자를 구분하기 어려운 이유는 근대 이후의 역사적 배경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 고대에도 국가(정치)공동체에서 제한된 형태로 사회계약에 참여하는 시민이 존재하였다. 그런데 고대 아테네의 시민은 경제적 이익이나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기 위하여 공적인 영역에 참여하는 것은 아니었다. 시민으로서 공적인 영역에 대한 참여는 ‘정치적 동물(homo politicus)’로서의 인간 본성을 표현하고 실현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34)
그러나 이러한 시민의 의미는 근대 이후 변화를 겪게 된다. 근대국가의 성립과정에서 시민은 부르주아를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특권층과 대립하는 계급이었다. 자유주의적 전통에서는 근대적 인간을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으로 전제하고, 개인의 이익은 공적인 영역에서보다 사적인(경제적) 영역을 통해 충족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시민으로서 공적인 영역에 참여하는 이유는 사적인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가치를 가지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35)
근대 이후 시민은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자유와 권리를 강조하였다가 점차 경제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측면으로 세력이 확대되었다. 부르주아 시민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최대한으로 보장하는 것이 주된 목표였기 때문에 이를 위하여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철저하게 분리하였다. 이에 따라 근대국가가 성립하는 과정에서 중세의 국가공동체가 ‘중앙집권화된 국가’와 ‘사적인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사회’로 분화되었고, ‘공적’ 영역으로서의 ‘국가’와 ‘사적’ 영역으로서의 ‘사회’의 대립구도가 설정되었다.36)
국가권력의 자의적 행사로부터 개인(사회)을 보호하기 위하여, 국가권력을 제한하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내용이 성문헌법으로 표현되었다. 사회 내의 구성원에게 중앙으로 집중된 국가권력을 제한할 수 있는 권한이 주권이라는 형태로 규정되었고, 시민들은 개인의 이익과 권리를 제도화함으로써 독립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국가와 사회의 분리를 전제로 근대적 입헌국가가 탄생하였고, 입헌국가는 국가-사회의 이분법적 구조의 역동성을 반영하여 발전하였다.37)
근대 입헌국가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1789년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은 주권의 주체로서 국민을 규정하였다. 국민은 국가 경계선 안의 영토 내에서 국가를 구성하며 주권적 권한을 가지는 추상적인 단일체를 의미한다. 국민주권이 확립되면서 권력에 대립하던 개개인으로서의 시민이 국민으로 통합되었고, 주권 소유자로서의 국민과 사회계약의 참가자로서의 시민이 서로 결합하게 되었다.38) 시민과 국민이 결합한 근대적 의미의 시민, 즉 국가시민(Staatsbürger)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근대의 (국가)시민은 몇 가지 특징적인 개념적 징표들을 드러낸다. 첫째, 고대의 시민이 계급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던 것과 달리 근대적 시민에게 있어서 계급, 인종, 성별, 종교 등과 같은 사실적 요소들은 시민을 결정하는 주된 요소가 아니었다. 국적취득과 같이 법에서 요구하는 일정한 자격요건을 갖추면 누구든지 시민의 신분이 될 수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근대적 시민은 과거 시민 개념이 지니고 있던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고 시민의 자격을 확장하였으며,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평등한 기회를 획득하였다는 점에서 ‘보편적’ 성격을 가진다.39)
둘째, 천부인권설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권리를 현실에서 보장받기 위해서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였다. 근대적 시민은 법적·형식적 장치를 통해 정치적 주체인 동시에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한 핵심적인 주체로 부상하였다. 전근대적 국가의 신민이 국가에 대한 권리 없이 의무만을 부담하였다면, 근대적 시민은 ‘제도’를 통해 특정 국가에 소속되었다. 조세제도와 병역제도 등을 통해 시민으로서 국가에 필요한 자원을 제공하였으며, 그 자원을 바탕으로 국가로부터 안전과 거주권, 참정권 등의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게 되었다.40)
셋째, 고대와 중세시대 국가의 통치권은 왕 또는 군주에게 있었고, 정치적 주체로서의 시민은 정치에 참여할 수는 있었지만 권력 자체를 가지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근대 이후 시민은 ‘국가권력’의 보유자이면서 그 권한을 국가에게 위임하고 있는 것으로 설정되었다. 따라서 국가는 시민들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 가지고 서로 상충하는 다양한 이해관계를 합리적으로 조정하여 통합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고, 이에 대해 시민은 감시하고 통제하고 비판할 수 있게 되었다.
근대적 국가시민은 권리의 보편적 확산과 법·국가권력을 통한 권리의 공적 보장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지만, 그에 따른 한계도 분명하다. 첫째, 당시의 시민은 구체제를 무너뜨리는데 능동적인 역할을 한 남성 부르주아를 의미하였다는 점이다. 재산을 보유하고 병역을 제공할 수 있는 성인, 재산소유자, 남성에게 시민 자격을 부여함에 따라 여성, 노동자 등은 사회구성원으로서 자격을 인정받을 수 없었다. 즉, 근대적 시민은 보편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모든 공동체 구성원을 ‘포섭(inclusion)’하지는 못하였다.
둘째, 국가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제도를 통하여 공식적으로 인정받아야 했다. 근대국가는 시민과 비시민을 구분하는 작업으로서 신분제도, 등록제도 등 여러 제도들을 정교하게 발전시켰고, 시민을 포섭하는 동안 비시민에 대해서는 배척하는 모습을 보여줬다.41) 이에 따라 시민으로서 자격을 인정받은 자국 영토 내의 시민은 국가 안에서 정치적 권리 및 자유를 더욱 효과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었지만, 외국인은 자국 시민이 가지는 권리로부터 공식적으로 ‘배제(exclusion)’되었다.42)
셋째, 근대 이후 국가와 시민의 관계설정이 변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시민의 권리는 국가로부터 부여되는 개념이라는 점이다. 대의제 하에서 국민주권은 대표에 의해 행사되는데, 대표자는 무기속위임의 원리에 따르고 있다. 그리고 사회적 법치국가의 등장으로 국가의 개입 및 통제가 빈번해지고 있다. 따라서 시민적 권리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아래로부터 위로의 방향설정에 충실하지 않으면, 수동적 존재로서의 시민은 언제든지 국가에 의한 통치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다.
넷째, 근대적 시민은 자유주의적 전통에서 태동하였기 때문에 권리 개념에 한정되는 경향을 보여 왔다. 이에 따라 권리 개념만으로 환원될 수 없는, 시민 개념 안에 담겨진 가치와 이념들을 간과하는 문제가 지적될 수 있다.43) 물론 시민으로서의 권리가 객관화된 법적·정치적 영역의 문제라면, 시민으로서의 책무는 주관화된 사회적·문화적 영역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사회와 관계할 개인적·윤리적 선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44)
Ⅳ. 현대사회에서 시민의 범위 확장과 국민과의 거리감
근대적 국가시민은 경계화된 국가의 영역 내에서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근대적 시민의 조건이었던 현실적 환경이 변화하고 있다. 교통·통신이 발달하면서 전 세계가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되었고, 정치·경제·사회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국가들 사이의 교류가 활발해졌다. 국가 간의 교류가 증대하면서 개별 국가의 주권 및 영토의 경계가 약화되기 시작하였고, 전 세계적으로 상호 연관성 내지 상호 의존성이 심화되는 세계화(globalization)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다.45)
세계화 현상이 가속화되면서 국민국가를 단위로 구분되던 국제질서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먼저 세계화의 진전으로 근대 국민국가의 권력과 권위가 재편성되고, 국민국가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상황을 두고 국민국가의 위기 내지 종언으로 보는 견해들이 있다.46) 반면에 이에 맞서는 것으로 세계화 현상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여전히 국제관계에 있어서 주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견해들이 있다.47) 그리고 이러한 양극단의 견해와 대비되는 제3의 시각으로 다양한 종류의 견해들이 존재한다.48)
근대국가의 경계를 넘나드는 정치·경제·사회·문화적 현실은 국가와 사회의 역할과 기능 및 관계에 변화를 가져왔다. 이와 함께 전통적인 국가시민의 관념으로 설명 내지 해결할 수 없는 영역들이 확대되고 있다. 국경 안에 갇혀 있던 개인과 사회집단의 이민과 이주가 빈번해지면서 국가를 초월하여 사회적으로 긴밀한 관계가 형성되고 있고, 하나의 국가 안에 다양한 인종, 혈통, 문화적 전통을 지닌 집단이 공존하게 되면서 국가의 영토적 경계와 시민 자격의 필연성(연동성)에 균열을 일으키고 있다.
근대국가에서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국민 자격과 시민 자격이 대체로 일치하였다면, 세계화 이후 국민국가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국민과 시민 자격 사이의 불일치로 인하여 긴장관계가 형성되고 있다. 국가시민의 개념을 넘은 시민 즉, 국민이 아닌 시민이 등장함에 따라 이들의 지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와 관련하여 복잡한 문제가 야기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국가와 그 구성원들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 국가시민의 개념에 대해 재검토가 요구된다.
세계화 이후 근대국가의 영향력이 한계를 드러내는 대신에 지구 한쪽 편에서의 사건과 문화적 현상들이 지구 다른 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전 지구적 상호 연관성이 점점 커지는 현실 속에서 개별 국가의 능력을 벗어난 인류 공통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하여 다양한 논의가 전개되었다. 그 가운데에서 시민의 범위를 국가영역보다 확장하여 세계적인 영역으로 구상하는 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ism)에 대한 관심이 다시 부상하기 시작하였다.
세계시민주의는 새롭게 등장한 개념이 아니라 그 기원은 고대 그리스의 스토아학파로부터 유래한다.49) 오랜 전통만큼 다양한 형태로 발현되었는데, 고대 스토아학파의 사상은 근대 계몽주의 사상가들 가운데 칸트(I. Kant)의 사상에 반영되었다.50) 그리고 현대 미국 사회에서 애국주의와 세계시민주의 간의 논쟁 과정에서 재출현하게 되었다.51) 세계시민주의는 일반적으로 국가와 국민을 넘어 인간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가치를 존중받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특정 공동체의 울타리를 넘어선 ‘세계시민’으로서의 삶을 요구한다.52)
세계시민주의가 요구하는 세계시민은 다양한 의미와 유형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세계시민(global citizen)이란, 세계시민주의적 관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사람을 말한다.53) 지리적 경계의 한계를 넘어서 세계를 하나의 공동체로 인식하며, 국적·인종·성별·종교 등 서로를 구분 짓는 고정적인 정체성보다 다양성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지니며, 인류를 공동운명체로 간주함에 따라 지구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초국가적인 책임의식을 가지고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시민 담론은 세계화 현상에 따라 전 지구적 차원에서 나타나고 있는 변화의 요구를 수용하고, 보편적 인권의 확산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세계적인 규모의 문제들, 예컨대 기아, 환경, 식량, 전염병 등에 대해 국가들이 서로 협력해서 해결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인 역할에 대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세계시민은 현실화 방식에 따라 여러 가지 문제가 나타날 수 있고, 무엇보다 근대 이후 형성된 국민국가와의 관계에서 긴장과 충돌의 문제를 초래하고 있다.
근대 이후 개별 국가의 주권 하에서 국가시민은 안전과 자유를 효율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게 되었고, 공동체적(인간으로서) 삶의 조건들에 대해 국가(정부)에게 최종적인 책임을 물을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세계화 이후 재부상하게 된 세계시민은 거시적 상호의존성의 원리에 따라 보편적 인권의 확산에 기여하고 있다. 국가시민과 세계시민이 공존하는 상황에서 보편적 권리로서 시민의 확장이 지역적·특수적 성격을 가진 국민의 축소로 이어지는지, 국민과 시민의 정체성 및 법적인 권리가 분리될 경우 양자 사이의 비대칭성의 문제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고민을 던져주고 있다.
세계시민주의 담론 안에는 급진적 세계시민주의부터 온건한 세계시민주의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이 분포하고 있다.54) 급진적 세계시민주의는 근대 국민국가 체제의 종언을 주장하면서 세계를 하나의 국가 내지 정부로 수렴하려는 입장을 가진다. 반면에 반세계시민주의는 급진적 세계시민주의에 반대하며, 기존의 국민국가의 자율성을 강화할 것을 주장한다. 한편, 온건한 세계시민주의는 개별 국가의 자율성과 특수성을 인정하면서 세계시민사회와 조화시키려는 절충적 입장을 보이고 있다.
급진적 세계시민주의는 실현 가능성 측면에서 부정적이며, 전체주의로의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고 비판받는다. 반세계시민주의는 변화하는 현실을 수용하지 못하는 고지식함 때문에 지지하는 세력이 많지는 않다. 오늘날 대부분은 상대적으로 실현 가능성이 높은 온건한 세계시민주의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온건한 세계시민주의의 입장에 수긍하는 경우라도 국가시민의 특수성과 세계시민의 보편성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어렵다고 할 수 있다.
국민이지만 생활영역이 외국에 있으면서 국내의 문제나 발전에 기여하지 않는 사람과 외국인이지만 생활영역이 국내에 있으면서 국가발전에 기여하는 사람을 구분하는 것이 타당한지 문제가 될 경우, 이러한 국민과 시민의 비대칭성 속에서 국가시민으로서의 역할과 세계시민으로서의 역할이 분명하게 구분된다면 비교적 문제가 적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시민과 세계시민의 영역은 대부분 중첩되기 때문에 양자 사이에서 다양한 갈등이 발생하게 되고, 국가시민 내지 세계시민으로서의 요구가 서로 충돌할 경우 어느 쪽을 우선할 것인지는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세계화 이후 국가들은 국가의 경계를 넘는 세계시민의 현실을 인정하면서 국가시민을 포기할 수 없는 딜레마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55) 이러한 상황에서 세계시민의 보편성과 국가시민의 특수성(개별성), 세계정치의 이상과 개별정부의 현실이라는 양쪽 축을 상극의 관계로 바라보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관점으로는 어떠한 문제도 해결할 수 없고, 두 축은 서로의 연결성을 상실할 때 오히려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56) 여기서는 국가시민과 세계시민이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건강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57)
Ⅴ. 헌법국가에 있어서 시민과 국민의 올바른 관계 모색
세계시민적 보편성과 국가시민적 특수성 사이에서 조화를 이루는 방법은 양자가 서로에게 위협이 되지 않고, 상승작용(보호·기여·증진)을 일으킬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헌법국가의 주체와 그 범위를 설정하는 문제에서 결론을 맺게 된다. 이 문제는 우리가 새롭게 창조하고 유지하기를 원하는 헌법국가가 어떤 모습과 역할을 해야 하는지, 그 헌법국가의 인간상 내지 주체가 누구인지를 형성하는 과정과 분리될 수 없다. 이에 따라 새롭게 헌법국가를 구상하고, 헌법적 주체의 구체적인 형태를 재생산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국민 내지 시민의 개념에는 공동체 주체로서의 자격은 물론 보다 나은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유토피아 정신”이 내재되어 있다.58) 따라서 국민 내지 시민을 헌법적 주체로 자리매김하기 위하여 헌법이 지향하는 가치를 찾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헌법적 가치와 관련해서는 정치철학적 관점의 도움이 필요한데, 과거에는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가 치열하게 대립하였다. 그러나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면서 공동체의 발전을 위하여 일정한 책임(의무)를 요구하는 공화주의적 관점으로 정향(定向)할 필요가 있다.
공화주의적 헌법국가는 국가권력의 한계이자 지향점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존엄과 자유, 평등 등 기본적 인권의 보호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인정한다. 또한 모두의 공존공영의 삶을 지향하기 때문에 상호인정을 바탕으로 다양성을 추구하며, 타자에 대한 도덕적 의무(책임)를 통한 연대를 도모하게 된다. 헌법에서 전제하고 있는 이러한 가치들은 인류 공통이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라고 할 수 있다.59) 그러므로 계급, 인종, 성별, 종교 등 사회적·문화적 차이가 공동체의 통합을 방해하는 요인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헌법은 시대적·사회적 요청에 따라 공동체 구성원의 통합이라는 이념을 실현하는 법규범이기 때문에 헌법국가를 구성하는 국민 내지 시민은 끊임없는 재생산의 과정을 거쳐 구성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국민 내지 시민이 고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면, 그 개념을 구성하는 과정에서는 목적지를 설정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국민 내지 시민의 개념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올바른 방향성은 우리 헌법을 지키면서 세계화의 흐름을 수용하는 것이 되어야 하며, 우리의 역사적·현실적 배경을 지키고 헌법적 정체성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한 국가의 헌법적 주체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권리와 의무를 포함하는 법적 지위를 형성하는 의미뿐만 아니라 법치주의, 민주주의 등 그 국가의 합헌적 법질서에 대해 동의하고 수용하는 것을 의미한다.60)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제도는 물론 그 공간에서 축적된 삶의 방식과 전통을 받아들이고, 소극적으로 용인하는 것에서 나아가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수호하려는 의지를 확립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61) 그리고 개별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삶의 경험과 과정으로부터 출발하여 전 세계적으로 확장해 나아갈 수 있게 된다.62)
헌법적 주체로서 규범화된 국민에 대응하여 공화주의적 헌법국가에서 시민의 개념을 구성해보면, 첫째, 시민이란 현존하는 생활양식을 바탕으로 하는 공동체의 거주자를 말한다. 다만, 임시적 혹은 영구적으로 생활기반의 주축이 되는 공동체의 거주자 모두가 시민이 아니라 헌법(정치)공동체의 발전을 위하여 애정을 가지고 공적 사안을 해결하려는 의지가 요구된다. 둘째, 시민은 타인의 지배에 종속되지 않으며, 평등한 지위를 확보한다. 특히 비지배적 자유를 실현하기 위하여 공동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협력)하며, 예속적 권력에 저항하는 것도 포함한다.
헌법과 법체계가 국민을 중심으로 되어 있는 현실에서 이러한 시민의 개념을 기준으로 하여 국민과의 관계를 모색해볼 수 있다. 시민의 개념에서 ‘생활공동체’, ‘정치적 주체’, ‘참여(협력)’라는 표지에 주목하면, 시민 개념은 공간적 범주로서의 시민과 법적 지위로서의 시민으로 정리될 수 있다. 이에 따라 시민이 생활세계의 개념일 때 시민과 국민의 관계를 구분하고, 시민이 권리와 의무의 개념일 때 시민과 국민의 관계를 구분하여, 각각의 구체적인 문제들과 과제를 제시해볼 수 있을 것이다.
‘생활세계’는 개인이 일상적으로 활동하고 살아가는 장소로 해석될 수 있다.63) 현실적인 삶을 포함하는 세계, 직관적으로 경험하는 세계, ‘나’와 ‘타자’가 만나 함께 공존하는 세계이기 때문에 다양한 문화가 혼종되고 새롭게 형성되는 공간이 된다. 그리고 개인에 앞서 존재하는 ‘사회’로서의 세계이자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해 개인적 욕구를 실현하는 장소이기도 하다.64) 생활세계적 시민의 개념은 삶의 공간을 기준으로 구성되는 자격이라는 점에서 기존의 국민의 범주를 확대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65)
현행법상 헌법적 주체로서 국민의 자격은 국적취득을 요건으로 하며, 국적을 취득함으로써 국가와 국민 사이에서 법적 계약이 성립된다. 그런데 법적 차원에서 성립된 국민과 문화적 차원인 생활관계에서 구성되는 시민의 범위가 일치하지는 않는다. 시민과 국민이 서로 교차하는 영역들은 공간적으로 시민이 국민보다 넓은 영역과 좁은 영역으로 구분해볼 수 있다. 이에 따라 국민이 아닌 시민, 시민이 아닌 국민, 그 밖에 제3의 영역 각각의 경우에 있어서 대상 범위에 따라 시민과 국민의 관계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지 논의가 필요하다.
먼저 법적 차원에서 국민은 아니지만, 생활의 중심이 국내에 머문 경우의 대표적인 예로 정주외국인 내지 재한외국인을 들 수 있다.66) 현행 『재한외국인 처우 기본법』은 결혼이민자, 영주권자 등을 포함한 재한외국인에 대해 법적 지위를 보호하고 있다. 또한 『공직선거법』에 의하면, 외국인이라도 주민으로서 일정자격을 갖춘 경우 지방자치단체선거에서 선거권을 가진다.67) 현행법체계는 외국인 가운데 삶의 기반이 국내에 머무는 외국인의 시민 자격을 인정하여 교육, 의료, 경제활동, 선거권 등을 보장함으로써 ‘잠정적 국민’으로 대우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국적을 취득한 국민이지만, 국내에서 생활하지 않아 생활관계적 시민의 개념을 충족하지 않는 국민으로 재외국민이 있다. 재외국민은 외국의 영주권을 취득하거나 영주할 목적으로 외국에 거주하고 있는 자를 말하는데,68) 일상적으로 생활하는 장소가 영주하는 국가이며, 거주국에서 임시적 내지 영구적으로 생활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시민의 자격은 없다. 그러나 현행법상 국적을 보유한 국민으로서 대한민국 안에서 법적 지위가 보장되며, 대통령과 국회의원 선거에서 투표를 할 수 있다.69) 일상적 삶을 영위하는 공동체는 아니지만, 국적자는 ‘계속적 국민’으로 인정받게 된다.
한편, 과거 국민이었지만, 지금은 국적을 보유하지 않아 국민이 아니면서 생활권이 국내가 아니기 때문에 시민도 아닌 자로 외국국적동포가 있다.70) 외국국적동포는 출생에 의하여 대한민국의 국적을 보유한 적이 있거나 대한민국 국적보유자의 직계비속으로서 외국국적을 취득한 사람이 해당하는데,71) 공동체 구성원의 자격을 법적·문화적 차원에서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혈통을 주된 기준으로 한다.72) 현행법상 이들은 기본적으로 외국인으로 취급되지만, 출입국과 체류자격, 건강보험의 적용 등에 있어서 외국인과 다른 혜택을 받는다는 점에서 ‘유대(紐帶)적 국민’의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생활세계적 시민 개념은 국민의 개념만으로 포착할 수 없는 공동체 구성원의 자격으로 일상적 장소, 공동체에 대한 애정과 의지, 문화적 관점의 중요성을 부각하는데 의미가 있다. 그리고 시민이 생활세계적 개념일 경우 국민과의 관계에서 시민의 범위가 국민보다 넓은 경우도 있지만, 계속적 국민, 유대적 국민과 같이 오히려 국민이 더 많은 구성원을 포괄하는 경우도 있다. 세계화로 인하여 ‘작은 세상’이 현실화되는 가운데 국가가 보다 많은 구성원을 포괄하게 되면 국가의 영역이 확장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지만, 동시에 사회분열의 우려가 커질 수 있다.
근대 이후 서구에서 시민은 혁명을 통해 권리를 쟁취하였기 때문에 시민의 개념은 권리를 중심으로 인식되어 왔다. 시민의 권리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시민적 권리, 정치적 권리, 사회적 권리 등으로 단계화되면서 발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73) 그러나 시민은 권리의 개념과 함께 의무의 개념을 포함한다. 공화주의적 헌법이론에 따르면, 법적 자격으로서 권리와 의무는 상호 연계성을 띠는데, 총괄적으로는 대칭 구조를 하고 개별적으로는 비대칭 구조의 관계에 놓여 있는 것으로 파악될 수 있다.74)
현행헌법은 기본적 권리와 의무를 대등한 두 축으로 구성하고, 기본적 권리의 주체도 “모든 국민”이며 기본적 의무의 주체도 “모든 국민”임을 선언하고 있다.75) 헌법적 주체인 국민은 헌법상의 자유권, 평등권, 사회권 등의 기본권을 향유하며, 납세 의무, 국방 의무 등의 기본의무를 진다. 그러나 국적을 가진 국민이지만, 소위 “2등 국민”이라 불리는 사회에서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 되는 국민들이 존재한다. 시민이 권리와 의무의 개념일 경우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가 인정되는 않는 국민과 관련하여 양자의 관계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먼저 국민이지만 연령상의 이유로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가 배제된 예로써 아동·청소년을 들 수 있다. 아동·청소년은 법적 성년이 아니기 때문에 대부분의 권리를 주체적으로 행사할 수 없다. 국가와 부모의 법적 보호의 대상으로 존재하며, 『아동 복지법』, 『청소년 기본법』 등을 통해 제도적으로 보호된다. 연령을 이유로 참정권을 갖지 못하는 시민 아닌 국민에 해당하는 이들의 정치적 권리를 향상시키기 위하여 사회적으로 다양한 논의가 이어져 왔다.76) 시민을 권리와 의무의 개념으로 이해할 때 아동·청소년은 지금은 시민이 아니지만,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가 잠재되어 있는 ‘잠재적 시민’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음으로 국민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차별과 배제를 받아 온 사회적 약자들은 시민으로서 법적 지위를 동등하게 보장받지 못하였다.77) 여성, 장애인, 북한이탈주민 등은 국민이기 때문에 참정권은 물론 국민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하지만 시민으로서의 평등권과 사회권을 완전하게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타인의 지배에 종속될 위험성이 높고, 공동체에 대한 책임 내지 의무에서 배제되는 경우도 있다.78) 이런 의미에서 사회적 약자들은 ‘불완전한 시민’으로서의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현행법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과 배제를 막기 위하여 『양성평등기본법』,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 등 여러 가지 법률적 근거를 마련해두고 있다. 그런데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실질화하기 위한 정책들은 오히려 역차별의 논란을 불러올 수 있다.79)80) 평등권의 실현은 평가관점에 따라 달리질 수 있고, 사회권의 실현은 국가의 재정 능력과 공동체 구성원의 배려 내지 이해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러한 전제가 충족되지 않을 때에는 사회갈등과 분열을 심화시킬 우려가 있다.
권리와 의무의 총체로서 시민 개념은 국민의 이름으로 호명되지만, “정상적”인 국민으로서 법적 지위와 권한을 가지지 못하는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시선을 두게 한다. 시민 개념이 법적 지위일 경우 국민이면서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었던 잠재적 시민, 불완전한 시민의 권리의 ‘틈’을 좁히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다만, 국가공동체는 모두를 위한 모두의 협력으로 유지된다는 점에서 시민으로서 권리의 확장은 시민으로서 의무 내지 책임과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Ⅵ. 결론: ‘시민 = 국민’의 지향과 헌법적 통합의 실현
근대 이후 헌법적 주체로서 국민과 시민은 불가분적 관련성 속에서 유동적인 관계를 형성해 왔다. 국민과 시민의 결합 계기였던 근대국가는 오늘날 내부적·외부적으로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국가 내부적으로는 다양한 문화를 가진 구성원들에 의해 갈등과 분열이 생기고 있고, 외부적으로는 초국가적 위기와 초국가적 기구들이 국가의 권위를 위협하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pandemic)으로 전 세계적인 초연결성을 직시하게 된 지금, 헌법적 주체로서 시민과 국민의 관계는 현실 위기를 극복하고 발전하는 방향으로 재정립될 필요가 있다.
헌법국가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개인들의 집합체이기 때문에 ‘통합’을 실현하는 것을 과제로 한다. 헌법적 과제로서 통합은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영역 등 모든 영역에서의 통합을 포함한다. 개별성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하여 다양성의 보장을 조건으로 하며, 배제와 동화를 지양(止揚)하는 진정한 의미의 통합을 목적으로 한다.81) 세계화 이후 국가공동체의 구성원이 더욱 다양화되고 있고, 문화적 집단화로 인한 사회분열의 가능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와 헌법의 통합적 역할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헌법적 통합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종전의 공적 영역/사적 영역, 정치적인 것/사회적인 것, 국민국가/시민사회와 같은 이분법적 구분은 유용하지 않다. 이러한 구분적 사고를 극복하면, 헌법적 주체를 재생산하는 작업에서 국민 내지 시민, 어느 한쪽으로 무게중심을 이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헌법적 가치와 시민의 역사적·이념적 가치를 담아 ‘시민=국민’을 지향(志向)하게 된다. 그리고 잠정적 국민, 계속적 국민, 유대적 국민과 잠재적 시민, 불완전한 시민을 공동체 구성원으로 모두 포용하고 지원하는 정책들의 근거를 마련할 수 있다.
헌법국가의 주체를 형성하는 법·제도들은 국민의 법적 지위 및 범위가 생활세계로서의 시민, 권리와 의무의 총체로서의 시민과 일치할 경우 문제의 소지가 적지만, 서로 불일치할 경우 정당성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헌법적 주체를 결정짓는 법적 장치들은 공간적으로는 ‘개인-가족-지역-국가-세계’로 중첩되는 상호관계를 고려하고, 시간적으로는 ‘과거-현재-미래’로 연결되는 축에 대한 세심한 판단을 반영해야 할 것이다. 지금 발을 딛고, 매일 숨 쉬고 있는 ‘헌법’적 ‘공간’ 안에서 우리는 모두 ‘국민이면서 시민’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