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문제 제기
한국의 법률가에게 루소(Jean-Jacques Rousseau)는 국민주권론의 역사에서 인민주권을 대표했던 사상가로 잘 알려져 있다.1) 자연법 사상사에 관한 연구가 대개 루소에 관한 언급을 빠뜨리지 않는 것에서 보듯, 루소는 자연법이론의 역사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다. 그러나 루소와 자연법의 관계는 분명하지는 않다. 박은정 교수는 루소가 그때까지 자연법이 담당했던 상위법 원리를 일반의지로 대체했다고 한다.2) 오세혁 교수는 루소가 고전적인 자연법론의 전통에서 분명히 벗어나 있지만 법실증주의자로 보기도 어렵고, 일반의지에 주목하면 절대주의자나 전체주의자로 해석될 여지도 없지 않다고 한다.3) 그렇지만 루소가 자연법 사상가라는 확실한 언급은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자연법론의 역사에서 루소가 기여한 공로가 정확히 무엇인지 물으면, 분명하게 대답할 수 없는 우리의 실정이다.
사실 자연법론의 역사에 관한 연구의 현실을 볼 때, 루소만 아니라 자연법론의 역사에서 비중 있게 다루어져야 할 인물들이 대체로 루소와 같은 형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선 개설서 수준을 넘어서 자연법이론의 역사를 상세하게 다룬 연구가 부족하다. 쉽게 구할 수 있는 자료로 벨첼(H. Welzel)의 자연법론 역사에 관한 번역서가 있다. 참고할만한 몇 안 되는 자료 중의 하나이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다지 정보가 풍부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상세한 소개에 초점을 둔 편이 아니라 그만의 해석과 평가로 주마간산하듯 언급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4) 그래서 충분한 배경지식을 가지고 있는 독자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은 독자는 추상적이고 모호한 서술 때문에 이해가 어렵고 저자의 해석과 평가에 대해 판단을 해보는 것은 더 어렵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자연법론의 역사의 내용을 풍부하게 만드는 노력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연법론의 역사나 개별 사상가에 관해 관심을 가진다면 대개 법학자들이 주류일 것 같지만, 최근의 경향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근대 초에 신학적 자연법론에서 벗어나 탈신학적 자연법론으로 변화를 보이는 대표적인 인물로 그로티우스(H. Grotius)를 드는데, 그에 관한 연구는 법학계 밖에서 많이 진행되고 있다.5) 신학적 자연법론은 최근에 집중적인 관심을 받는 점에서 운이 좋은 편인데, 피니스(J. Finnis) 등의 신자연법론의 영향으로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의 자연법이론에 대한 관심이 커졌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법학계보다는 철학이나 신학계의 관심이 더 큰 편이다. 근대 초기는 가히 자연법론의 격변기라 할 수 있는데, 이 시기 자연법론은 신학적 자연법론 전통을 계승한 경향(후기 스콜라학파 등)과 탈신학적인 자연법론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자에서는 종교개혁과 종파 논쟁의 영향이 크게 나타나고 후자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가 제시한 전통적인 목적론이나 형이상학의 탈피 경향이 두드러진다.6) 그리고 양자에 공통된 사정은 법학계의 연구가 빈약하다는 실정이다. 이 같은 연구풍토에 비추어볼 때 최근에 발표된 송시섭 교수의 개신교 전통 자연법에 관한 연구는 큰 가치가 있다.7) 근대 탈신학적 자연법론의 대표로는 홉스(T. Hobbes), 로크(J. Locke), 루소를 살펴야 하겠지만, 이들에 대해서는 개별 저술이나 전체적인 평가, 자연상태나 사회계약론의 관점에서 비교한 연구가 주를 이루고 자연법론의 관점에서 살펴본 연구는 적다.
다시 루소와 자연법 문제로 돌아와 보면, 우선 홉스, 로크, 루소가 전개한 사회계약론이 자연법사상을 수반하거나 자연법사상에서 탄생한 것이라거나 사회계약론이 이전까지의 자연법론과 결합해 일반에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언급이 있을 뿐8), 사회계약론이 어떤 점에서 자연법론과 연결된다는 것인지 상세한 설명을 찾기 어렵다. 루소가 ‘자연법이 담당했던 상위법 원리를 일반의지로 대체했다’라는 평가는 그나마 구체적인데, 여기서도 당장 이런 평가가 모호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루소가 자연법이라는 것을 완전히 폐기했으므로 자연법론자가 아니라는 것인지, 아니면 이전까지 자연법에 맡겨왔던 상위법 원리의 역할을 일반의지가 대신하게 함으로써 일종의 자연법 없는 자연법론을 완성했다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근대 자연법 철학자의 명단에 루소를 포함해 언급하는 일도 더러 볼 수 있는데9), 그 근거를 분명하게 알기는 어렵다. 대체로 루소가 전통적인 자연법론을 거부했거나 비판했다고 하면서도 그래도 나름대로 자연법론자로 분류할 수 있다는 것이 일반적 경향으로 보인다.10) 국내에서는 이런 정도로 지나치는 문제이지만, 국외 연구는 이 문제에 집중된 것이 많다. 본 논문의 목적은 루소가 자연법 사상가인가를 판단하는데 충분한 만치 그의 사상을 살펴보는 것과 이 문제에 관한 국외 연구를 소개하고 검토하는 것이다. 루소의 개별 저작이나 공화주의와 같이 큰 주제에 관해서는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 있으므로 이에 대한 소개는 생략하고, 이하에서는 루소가 자연법 사상가라는 전제에서(필자는 루소의 접근법을 사회계약론적 자연법론이라 명명한다) 사회계약론을 중심으로 자연법과 연관된 여러 면을 재해석해보기로 한다. 루소가 사회계약론을 통해 자연법이론을 구성하는 방식은 근대 이전까지 주류적 방식이었던 신학적 자연법론과 큰 차이를 보이는데, 먼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이어 루소식 사회계약론적 자연법론의 기본 구성과 의도를 개관한다. 다음으로 루소가 전통적인 자연법론의 내용을 어떻게 해체하고 재구성함으로써 사회계약론을 구성했는지 살펴본 다음, 루소 사상과 자연법의 관계에 관한 국외 논쟁을 검토한다.
Ⅱ.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자연법론 개관
루소의 저술을 보면 정교한 이론적 체계 없이 자유롭게 자기 사상을 전개해간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오페라 작곡으로 명성을 얻은 것도 특이하지만, 그는 당대의 시대적 흐름을 거스르고 유력 사상가들과 불화를 감수하면서 과감하게 문명을 비판했으며, 자기만의 비밀을 내면에 감추지 않고 고백이라는 형식으로 드러낼 줄도 알았다. 그런 정도로 자기 확신이 강한 인물이었으니 사상가로서 남긴 글도 고대 사상가의 권위에 구애받지 않고 상당한 자유를 누렸을 것이라 여기는 것은 당연하다. 「인간불평등기원론」(Discourse on the Origin and Basis of Inequality Among Men, 1754)이나 「사회계약론」(The Social Contract, or Principles of Political Right, 1762)과 같이 국가, 주권, 개인의 자유와 평등과 같은 주제를 다루는 루소의 방식은 그야말로 대담한 문학적 시도라는 점에서 감탄할만하다. 하지만 그를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한 문필가로만 여긴다면11) 큰 실수이다. 자연법론에 관한 한, 그는 그 시대까지 자연법론의 역사와 내용, 장단점을 정확하게 알고 있으며, 특히 푸펜도르프(Samuel von Pufendorf)와 그로티우스의 자연법론에 대한 비판을 통해 자신의 사회계약론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12)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나 아퀴나스로 대표되는 자연법 전통이 체계성과 풍부함을 가진 사실도 분명하기에 무엇이 그를 이토록 전통에서 멀고도 특이한 방식으로 주장을 전개하게 했을까 의문을 가지게 된다. 여러 사상가의 명단을 시대순으로 놓고 한 세대와 다음 세대를 비교해서는 금방 변화와 차이를 알아채기는 어렵지만, 수 세기까지 넓혀 여러 세대를 두고 한눈에 관찰하면 변화를 확연하게 알 수 있다. 그 변화를 이해하면, 루소의 출발점과 혁신도 이해할 수 있다. 이하에서는 아퀴나스 이후로 루소 이전까지 있었던 변화에 대해 살펴본다.
13세기에 아퀴나스의 중세적 자연법이론이 완성되던 즈음에 단테(Dante Alighieri)도 신학적 정치관을 문학적으로 구현했다.13) 곧이어 둔스 스코투스(John Duns Scotus)와 오컴(William of Ockham)이 아퀴나스와 다른 해석을 시도했지만, 이것은 이후에 일어날 일들에 비하면 그야말로 작은 변화에 불과했다.14) 14세기에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가 키케로(M.T. Cicero)를 중심으로 한 고전의 재발견에 앞장서고 다음 세기에 에라스무스(Erasmus of Rotterdam)가 이를 계승했지만, 더 큰 변화는 15세기 중반 이후로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를 비롯한 대양탐험가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16세기는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으로 시작되었고, 루터(Martin Luther)와 멜란히톤(Philipp Melanchton), 캘빈(John Calvin)이 나타나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흐름으로 시대를 흔들었다. 그 결과 16-17세기는 신대륙탐험과 식민개척, 그리고 미증유의 참극으로 점철된 종교전쟁으로 점철되었다. 여기에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의 지동설과 이를 지지한 브루노(Giordano Bruno)의 화형 사건이 일어났고, 이어 17세기까지 갈릴레오(Galileo Galilei)와 케플러(Johannes Kepler)에 의한 천문학의 혁신이 이루어진다. 이와 같은 일련의 발견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 방법과 아퀴나스의 신학이 결합해 만들었던 중세적 세계관을 붕괴시켰는데, 이제 제대로 사고를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형이상학이나 아퀴나스의 스콜라적 사유 방식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과감히 새로운 과학적 발견에 눈을 떠야 한다는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몽테뉴(Michel de Montaigne)가 회의론적 태도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바라볼 마음의 준비를 했다면, 베이컨(Francis Bacon)은 「신기관」(Novum Organum)을 통해 귀납에서 새로운 과학적 발견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리학이나 정치학에서는 16세기 초반에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가 새로운 시도를 시작했는데, 인간과 사회를 아리스토텔레스식으로 자연적 완성이라는 목적을 향한 존재로 보는 방식이나 아우구스티누스식으로 타락과 구원, 종말론적 역사관 속에서 보는 신학적 관점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인간과 사회, 정치를 관찰하는 방식과 현실의 필요를 중시하는 관점을 도입했다. 특히 종교개혁과 종교전쟁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안전의 보장과 관련해 정치적 권위의 정당성 또는 복종의무의 근거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이 문제에 대해 처음으로 체계적인 접근을 시작한 것은 홉스였다. 그는 평화와 안전, 국가와 주권의 문제, 정부의 권한과 복종의 주제를 두고 자연 상태로부터 국가로의 이행을 사회계약론으로 설명하는 새로운 시도를 선보였다.15) 자연법론의 영역을 보면, 스페인의 신대륙발견과 식민개척(약탈) 시대에 활약한 비토리아(Francisco de Vitoria)와 수아레스(Francisco Suárez)와 같은 후기 스콜라학파가 아퀴나스의 세계관에서 인디언 개종 문제를 다루고자 했다면16), 17세기 자연법론자인 그로티우스나 푸펜도르프는 식민개척(약탈), 해상전투와 포획이 빈번했던 대항해시대에 로마법적 사유를 토대로 공해의 항해자유, 전쟁의 적법한 개시나 선전포고의 방식, 포획물 귀속과 같은 문제를 다루었다.17) 이들은 개별 주권국가 외에 국제영역을 통괄하는 권력체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국가 사이에 통용되는 국제법 원리를 도출하는 방법으로 자연상태 개념을 처음 도입했는데, 이후의 사회계약론자들도 대부분 이 방식을 수용했다.18) 17세기 후반이 되면 과학 영역에서는 뉴턴(Isaac Newton)이 「프린키피아」(Principia Mathematica, 1687)로 새로운 물리학적 세계관을 열었다. 정치와 국가론의 영역에서는 로크식 사회계약론이 나타나 국가의 성립과 개인의 자유, 정부의 권한과 복종의 문제와 같은 정치적 문제를 이전에 없던 방식으로 설명하려 시도했다. 18세기에 이르러 몽테스키외(Montesquieu)는 객관적 관찰을 통해 정부형태의 차이를 비교하고 설명했는데, 이런 시도는 사회학이나 비교정치론의 선구라 할 만한 것이었다.19) 이상과 같이 긴 세대를 걸쳐 계속된 변화와 단절의 결과를 놓고 보면, 루소가 주권과 시민의 자유와 같은 주제를 다루게 되는 18세기 후반에 이런 문제에 관해 아리스토텔레스나 아퀴나스의 견해를 추종하지 않고 푸펜도르프나 그로티우스가 선보인 자연상태 개념을 활용하고 또 홉스나 로크의 사회계약론과 유사한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대개의 자연법이론은 자연법의 근원과 발견 방법, 목적과 작동원리, 역할에 관한 설명을 포함한다. 이하에서는 이와 같은 요점을 중심으로 루소의 시도가 이전의 자연법 전통과 어떤 차이를 갖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아리스토텔레스나 아퀴나스의 전통적인 자연법론은 인간의 자연적 본성에서 출발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이성을 갖춘 존재로서 보존과 완성이라는 목적을 위해 사회를 구성한다고 보았다. 아퀴나스는 인간을 창조 질서의 일부로 보았는데, 이는 자연과 함께 창조된 피조물이면서 동시에 창조자로부터 그의 특성의 일부도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이성적으로 질서 잡힌 존재로서 인간은 존재의 위계질서로부터 실천이성의 계율을 얻으며 창조자를 바라보는 것에서 최고의 행복을 얻는다. 이들에게 자연법의 토대는 인간의 이성적 존재라는 자연적 본성이나 목적으로부터 마련된다.20) 모든 자연적 존재와 같이 인간의 자연적 본성이나 목적이 불변인 한 자연법은 영원하며 불변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이성을 통해 자연법을 발견할 수 있다고 했는데, 키케로나 아퀴나스는 이를 신적 이성에의 참여로 표현했다. 자연법은 공공의 선을 목적으로 하며, 실정적 힘을 가진 법이자 인정법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고, 각 개인은 인정법에 복종할 것인지를 양심의 법정에서 자연법에 비추어 판단할 수 있다. 이상이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전통적인 자연법론의 개요인데, 여기에는 정치공동체가 성립하는 원인이나 근거, 목적에 대한 설명은 있어도 종교나 교역, 재산과 과세 등 구체적인 통치 문제와 관련한 정부의 권한이나 복종의 문제를 중심에 두지는 않았다. 홉스 이후의 사회계약론적 자연법론은 여기에 중점을 두되, 전제는 시대의 변화와 필요를 반영하여 1) 목적적 관념이나 형이상학, 신학을 버리고 2) 계약이라는 법적 틀을 활용해 국가권력의 토대와 근거를 세우되 3) 지배와 복종의 범위를 분명하게 함으로써 국가권력의 범위와 한계를 확정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계약’이라는 법적 장치를 활용하는 방식이 근대에 등장한 자연법 전통의 특색이라는 것을 먼저 분명하게 지적할 필요가 있다.21)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라는 로마 만민법의 원리를 근대에 국가와 사회 조직의 근본적 원리로 격상시킨 것은 그로티우스였다.22) 근대 정치영역의 논쟁에 사회 ‘계약’론이 등장하여 힘을 얻게 된 이유는 국왕에 대한 복종을 논증하든 아니면 의회주권을 논증하든 어느 편이든지 일단 사회계약으로 주권체를 만들어낼 수만 있으면 그 이후에는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라는 자명한 만치 엄격한 도덕적 의무를 힘으로 강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23) 이를 두고 전통적으로 성서가 해오던 역할을 계약이 대신한다고 하는데, ‘계약은 지켜져야 한다’라는 것이 실천이성에 자명한 자연법 원리이므로 이를 두고 사회계약론과 자연법이 성서를 대체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단번에 서술의 표현이나 방식이 바뀌지는 않고, 논자에 따라 필요하면 유리한 성경 구절을 동원한 논증을 섞는 경우가 많았다. 이신론 위에 사회계약론을 세우는 것보다 사회계약론에 기독교 신앙을 결합하는 방식이 훨씬 많은 호응을 얻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천부인권을 자명한 원리로 선언한 미국독립선언은 사회계약론적 자연법론과 기독교 신앙을 결합한 예이다.24) 루소 역시 논증의 여러 기회에 사회계약과 정의를 뒷받침하는 데에 하나님의 권위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25) 또 같은 계약론이라 해도 논자에 따라서는 어떤 유형의 계약인지 그 차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잉글랜드에서는 찰스 2세 시절에 국왕의 권한을 강조하는 쪽은 국왕과 신민 사이의 계약을 ‘결혼’ 계약이라 말하는 것을 선호했지만, 의회 권한을 중시하는 이들은 ‘사회’ 계약을 선호했다.26) 홉스와 로크의 사회계약론도 ‘계약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라는 기본적 원리를 무기로 삼는데, 이 원리는 다름 아닌 자연법과 로마 만민법에 기원을 두고 있다. 따라서 자연법론적 사회계약론이라 하든 사회계약론적 자연법론이라 하든 사회계약론의 근간을 자연법에 둔 것이다. 이들은 사회계약 이전의 자연상태에서 인간이 어떠했는지, 춥고 배고프고 공포에 시달렸는지 아니면 따뜻하고 배부르고 평화로웠는지, 사교적이었는지 아니면 적대적이었는지를 비롯해 사회계약의 체결에 이르는 과정이나 그 결과 산출되는 권력에 관해 설명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어도, 인간이 자연상태에서 직면한 문제와 그 해결을 위한 필요에서 사회를 구성하기로 계약할 수밖에 없다고 자각한 결과 사회와 정치체를 만들었다고 보는 점에서 사회나 국가가 정의에 의한 연합이라는 한 아리스토텔레스나 계약론적 키케로의 자연법 전통과 다른 점은 없다. 차이라면 정치체 설립이 합의(단체결성 계약)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하면서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라는 논리를 동원해 이 합의가 이제는 파기될 수 없으며 준수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는 것이다(물론 이들 중에도 저항권이나 혁명권, 폭군살해까지 인정하느냐는 차이가 있다).27) 이들은 아퀴나스가 자연법론에서 실천이성이 자명한 원리로 도출하고자 한, 인간의 행동이 도덕성을 갖추기 위한 실천적 원리를 사회계약의 체결과 내용(보호받는 권리와 자유 및 통치권의 한계)이 자명하다는 것으로 변경했다. 사회계약론이 자연법론의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 보는 다른 이유는, 사회계약의 내용과 불가피성을 자연상태라는 가정적 상황에 놓인 인간의 자연적 본성에서 찾고, 또 사회계약의 산물인 국가와 최고통치권은 존립 근거가 되는 사회계약에 의해 평가받으며 그 한계를 넘어서는 경우 저항과 불복종이 정당화된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전의 전통적인 자연법론이 이성과 정의, 법률을 한 묶음으로 다루었다면, 사회계약론적 자연법론은 사회계약과 정의, 통치권을 한데 묶는다.28) 한편 루소의 경우에는 홉스나 로크와 비교해 눈에 띄는 차이점이 있다. 루소는 「학문예술론」(Discourse on the Arts and Sciences, 1750)에서 불평등과 재산, 사치와 나태, 예술과 과학 때문에 인간이 부패했다고 주장함으로써 이성과 문명을 불신하는 반계몽주의 사상가로서 경력을 시작했기에 자연상태에서의 인간을 더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사회계약에 의한 국가 이행을 다루어야 했기 때문이다.29) 이하에서는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전통적인 자연법의 내용이 어떻게 해체되고 재구성되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Ⅲ. 자연법론의 해체와 재구성
루소는 과격한 전도(轉倒)의 방법을 사용해 자신만의 독특한 사회계약론적 자연법을 구축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공동체가 인간의 ‘완성’을 향한 목적이라는 관점에서 필요한 것이라 보았지만, 루소는 자연상태에서 누렸던 본연의 훌륭함이 과학과 예술을 비롯한 소위 문명이라는 것에 의해 부패했다고 보고 이 훌륭한 본성을 ‘회복’하기 위해 국가가 필요한 것이라 보았다.30) 따라서 교육의 내용은 자연 본성을 회복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 되어야 하며, 법은 본연의 자유를 보장할 뿐 아니라 이를 잃는 일이 없도록 자유를 강제하는 것이어야 한다. 한편 아우구스티누스 이후의 신학적 자연법론은 아담 이후로 인간은 타락했고, 지상의 정치공동체 내에서 인간은 결코 자기 힘으로 완성될 수 없으며, 법은 선을 증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악을 억제하기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라 보았다. 루소는 반대로 인간은 자연상태에서 선했는데 자기애(amour propre)와31) 불평등과 재산, 사치 때문에 부패했으며 이를 회복하기 위해 사회계약을 체결해 통치권을 만들어내는 것이라 보므로 정치권력은 법으로 자연적 본성의 회복을 강제해야 한다. 법은 중한 악을 억제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회복을 위해 필요한 사소한 선이라도 증진하기 위한 것이다.32) 법의 목적이 공동선에 있다는 전통적인 자연법론의 요점은 그대로 유지되는데, 루소에게는 개개의 개인이나 집단이익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소극적 의미를 넘어 사적 이해관계를 떠나 보편적으로 합의할 수 있는 것이 일반의지로 인정되고 법은 이 일반의지의 표현이 된다. 개인은 누구든 그 자신이 될 자유를 누리지만, 그 자신이라는 것은 공동체를 떠나 생각할 수 없다.33) 자유와 평등, 박애와 같이 인간의 선한 자연적 본성이자 자연법이 가리키는 원리는 일반의지라는 형식으로 발견된다. 따라서 일반의지의 표현인 법은 단순한 외적 강제가 아니며 개인의 완전히 자유로운 동의에 의해서만 성립하는 강제이다.34) 일반의지를 도출하는 과정에는 유의할 점이 있지만, 인민이 상황을 잘 알고 심의한다든지 분파를 예방한다면 일반의지가 잘못 도출되는 일은 없을 것이며, 따라서 일반의지의 표현인 개별 입법을 오류가 없는 완전한 법으로 여겨도 무방할 것이다. 일반의지가 무엇인지 일반에 투명하게 잘 알려진 이상 개별 법률이 어려운 해석 문제를 제기할 일도 없고, 따라서 법관은 ‘법을 말하는 입’에 불과하지 재량이 주어질 일도 없다.35) 여기서 이전의 자연법론에서 자연법이 인정법에 대해 상위의 법으로서 평가적 기능을 했던 것을 염두에 두고 볼 때, 루소에게서 일반의지와 그 표현인 법률의 관계에서 인정법은 일반의지의 다른 표현일뿐 서로 같은 것이므로 일반의지는 인정법을 평가할 기준이라는 의미를 갖지 않으며 인정법에 대해 평가적 기능을 할 상위의 자연법을 별도로 상정할 필요도 없게 된다. 이런 관점은 이후에 지나치게 낙관적인 입장이라 비판을 받게 될 것인데, 루소는 일반의지를 무오류에 가깝게 상정함으로써 국가권력이나 개별법이 불완전하게 될 소지를 없애버렸다.36)
한편 루소는 사회계약론을 구성하면서 푸펜도르프와 그로티우스로 대표되는 그 시대의 자연법론을 비판했다. 특히 루소는 사회계약론의 구성에 자연법이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배격함으로써 자신의 사회계약론은 자연법의 산물이 아니며 전혀 무관한 것으로 보이려 했다.37) 여기에는 몇 가지 논점이 섞여 있는데, 명확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첫째, 루소가 기존의 자연법론자들에 대한 태도가 어떠했나, 둘째 루소는 자연상태에서 인간이 자연법을 인식할 수 있다고 보았나(달리 말해 국가와 강제력을 동원하지 않고도 이성에 의해 규율되는 상호간의 행동규범을 확립할 수 있었다고 보았나), 셋째, 루소가 말하는 사회계약은 자연법적 원리의 산물인가 하는 점이다. 세 논점에 대한 답은 루소는 푸펜도르프나 그로티우스의 자연법론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새로운 자연법론을 세우고 있다는 점은 감춘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앞의 두 논점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마지막 논점에서는 긍정적으로 답변할 수 있다. 첫째 논점에 대한 답변은 「인간불평등기원론」이나 「사회계약론」의 여러 곳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는데, 루소는 실정법에 대해 상위기능을 하는 자연법의 개념 자체를 긍정하며 대신 식민지 약탈이나 노예제와 같은 것을 자연법으로 정당화하는 논리를 비판한다.38) 둘째 논점은 인간이 자연상태에서 자연법에 따라 행동할 것을 기대할 수 있는가인데, 앞서 자연상태 개념을 처음 도입한 푸펜도르프나 그로티우스는 국제법 영역의 문제를 다루면서 개별 국가를 초월하는 정치체를 상정할 수 없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따라야 할 규범을 합의의 산물로 도출하기 위해 자연상태를 상정하고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라는 원리를 강조함으로써 합의에 의한 자연법의 성립 가능성을 긍정했다. 홀(J.C. Hall)에 의하면, 자연상태에서 자연법을 도출해 내는 과정에는 두 모델이 존재한다. 첫째 방식은 인간이 사교성을 갖추었다고 가정한 다음, 여기서 사회의 보존을 향한 경향성을 도출하고 또 그 연장에서 이성에 의해 자연법이라는 규범을 찾고 거기에 구속되는 길이다. 둘째 방식은 인간이 생존을 위해서든 행복을 위해서든 상호협력할 수밖에 없는 필요상태에 놓인다고 가정하고, 이기적인 계산의 결과 타인과의 합의에 구속되는 편이 차라리 안전에 유리하다는 자각으로부터 자연법이라는 규범을 승인하게 된다고 보는 방식이다(그로티우스는 첫째 방식을, 푸펜도르프는 둘째 방식을 사용했다). 첫째 방식은 상호협력의 성향을 전제로 하므로 자연법의 발견도 그만큼 쉽게 될 것이지만, 둘째 방식은 사람의 자연적 본성에서 자연법에 이르는 길을 설명해야 하는 점이 쉽지 않다. 둘째 방식에서 자연상태에 있는 개인은 각자 타고난 대로의 지력을 사용하고 또 자신을 포함해 모든 사람이 인간 본성에 관한 모든 사실(지력이나 타인을 억누를 힘 등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을 포함해서)을 계산에 넣고 행동한다고 가정해야 한다. 이런 가정으로부터 자연법의 발견에 이르는 길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 문제인데, 여기서 홉스는 자연상태에 있는 사람이 자신을 포함해 모든 사람에 구속력을 가지는 자연법을 발견하여 승인한다고 말하지 못하고 기껏해야 바람직한 삶의 방식을 권고하는 것 정도로 여길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39) 루소 역시 홉스와 마찬가지로 자연상태에서 개인이 자연법에 따라 행동할 것을 기대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면서40) 사회계약에 의한 국가설립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었다. 루소의 방식은 두 단계로 수행되는데, 첫 단계에서는 인간의 자연적 본성으로부터 최선의 사회라는 모델을 찾아내고, 두 번째 단계에서는 최선의 사회를 먼저 조직한 다음 그 사회에 대한 개인의 복종을 도출하는 것이다. 홀은 여기서 루소가 의도적으로 자연법이라는 단어를 누락시킨다는 점을 지적한다.41) 과거의 자연법론이 자연본성에서 사회제도나 자연법을 도출하는 단선적인 방식이라면, 루소의 방식은 한편에 자연본성을 다른 한편에 사회와 국가라는 두 극점을 두고 서로에 대해 목적을 지시하게 만든 쌍방향적 방식이다. 특히 루소가 푸펜도르프를 강력히 비판했다고 하지만, 사회와 정치체가 사람을 만들어낸다는 사고야말로 푸펜도르프의 지도적 아이디어였다.42) 루소는 개인에게 자연본성은 요구되는 사회제도와 법이 무엇인지 가리키고, 사회제도와 법은 회복해야 할 본연의 모습을 가리키게 하는 방식으로 자연상태와 사회를 두 극에 놓고 상호지시적 관계 속에 넣었다.43) 여기서 사회제도와 법은 자연상태의 인간이 이성에 의해 발견한 규범 또는 상호 합의로 도출하는 행동규범인 자연법과 같은 것이 결코 될 수 없으며 사회계약으로 도출해 낸 일반의지의 다른 형식이자 표현이다. 이와 같이 루소가 자연상태로부터 일반의지를 도출하는 방식을 두고 ‘자연법을 버리고 자연법을 사회계약과 일반의지로 대체한다’라는 표현하는 것이다.44)
루소의 시도를 새로운 유형의 자연법이론으로 평가할 수 있는지 고민이 필요한데, 루소는 자신의 사회계약론을 통해 주권국가와 그 권력을 세우는 과정에서 자신의 사회계약론이나 주권이론이 이전의 자연법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다고 여긴 나머지 이전의 자연법과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을 뿐 아니라 유해하다는 비판과 공격을 가했기 때문이다.45) 그러나 그의 사회계약론은 자연법적 원리가 현실의 주권국가와 입법을 통해 완전한 실정성을 갖추었다는 점에서 별도의 외적 자연법을 상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 루소식 사회계약론이 자연법적 원리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으로 볼 것은 아니다. 마스터스(R.D. Masters)에 의하면, 인민을 참되게 하나로 묶는 유일한 방법이 사회계약으로 정체체를 세우고 일반의지에 의한 입법을 하는 것인데, 이것은 모든 정치체에 대한 평가 기준이 되는 자연법의 출현을 당연히 내포한다. 그래서 마스터는 이를 두고 루소가 전통적인 자연법의 ‘뿌리를 거부해도 가지는 수용했다’라고 표현하는데, 자연법으로부터 사회계약을 도출하지 않으면서 사회계약을 통해 자연법을 그대로 수용하는 방식을 취하기 때문이다.46)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완성된 전체적인 구조에서 보면 루소의 자연법론은 키케로의 자연법론과 동일한 구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키케로의 접근방식과 차이라면, 키케로에게 자연은 정의의 원천이고 이성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진리를 발견하는 수단이 되며 로마 공화국은 자연법이 보장하는 최상의 정치체였다. 반면 루소에게는 자연은 인간이 회복해야 할 본성을 말해주고 이성은 이를 자각하지만 부패한 현실의 정치체는 그런 자연적 본성을 박탈하고 왜곡시키는 것이다. 키케로는 로마 공화정이라는 현재의 정치체는 보전되어야 할 것이며 여기서 모든 인간은 정의를 누리고 완성될 수 있었다고 믿었지만, 루소는 인간성의 회복을 위해서는 정치체를 재구성할 수밖에 없다고 믿었고, 사회계약론에 따라 재구성된 정치체는 자연법의 실정성을 구현할 것이다. 현대인에게는 상식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루소는 이 사회를 이루는 인간적인 모든 것, 즉 법과 사회구조, 국가는 사실상 인간적 산물이라 말한다. 인간이 이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기만 한다면 법과 제도, 국가 등 사회적 환경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재구성하는 것을 사람이 해낼 수 있는 가능한 일이라 보는 것이다.47) 따라서 사회계약을 통해 재구성해낸 법과 제도는 실정적인 자연법인 셈이다. 루소가 자연법을 거부한다고 말할 때 유의해야 할 점이 바로 이것인데, 루소는 이전의 자연법론을 비판함으로써 자연법을 배격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 자신이 새로운 자연법론을 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베스트팔(K.R. Westphal)은 루소의 사회계약론이 자연법 전통에서 생겨났고 발전한 것으로 평가하면서 루소의 방법을 자연법적 구성주의(Natural Law Constructivism)라 이름 붙인다.48) 사회적 환경은 물리법칙의 영향에 구속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어떤 자연법적 질서를 따른다고 보기에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실상 쇠사슬로 묶여 있다’라고 루소가 말한 것처럼, 지나치게 부조리한 현상을 정당화하기 어렵다. 전통적인 자연법론은 이를 부정의하다고 평가할 것이지만, 사회계약론은 더 나아가 ‘사람이 사회를 만들고 사회가 사람을 만든다’라는 양극의 논리에 따라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에서 답을 찾으려 한다. 이성이 정의와 같은 자연적 질서를 발견하고 나아가 정치체 속에서 사람의 완성을 돕자고 하든지 아니면 잃었던 자연적 본성의 회복을 돕자고 하든지 어떻게든 하자면 이성은 반드시 정의로운 사회와 국가가 필요함을 알게 되며, 따라서 사회와 국가를 정의롭게 조직할 방법을 찾아내려 할 것이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이 자연법론의 특징을 가진 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인간 이성에 바탕을 둔 자연법이 인정법에 대해 상위규범으로서 역할을 맡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자연법의 역할을 대신할 무엇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자연본성의 회복을 위해 주권국가를 세운다는 사회계약이 모든 국가권력에 정당성을 근거짓는 역할을 맡음으로써 입법을 넘어 국가권력에 대해 상위의 준거로서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루소는 개별 법률을 두고 자연법에 부합하느냐를 따지는 입장이 아니라 국민주권주의나 공화주의 같은 국가의 근간이 자연법적 원리, 즉 인간의 자연의 본성으로부터 요청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논의한 바를 바탕으로 루소가 자연법을 일반의지로 대체했다는 점에 대해 정리해본다. 첫째, 앞서 본 것처럼 인정법의 평가 기준이라는 점에서 볼 때 루소의 일반의지는 이전의 자연법과 같이 개별 법률에 대해 직접적인 평가기능을 하지 않는다. 법률은 일반의지의 표현일 뿐이며 일반의지에 오류를 상정할 수 없는 이상 개별 법률의 오류도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일반의지가 자연법의 역할을 대신한다고 할 때 이전의 자연법처럼 일반의지가 인정법에 상위기능을 맡는다고 여기는 것은 오류가 될 수 있다(이런 귀결이 루소의 일반의지에 대한 과신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은 앞서 언급했다). 여기서 ‘일반의지가 자연법을 대체했다’라는 표현은 나중에 보언((C.E. Vaughan))이 우려한 것처럼 일반의지를 견제할 원리의 부재로 인해 루소의 사회계약론이 집단주의로의 변질을 막을 수 없다는 해석 또는 비판을 의미하게 된다.49) 둘째, 이와 같은 우려는 오해일 수 있는데,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이전의 자연법과 같은 역할을 하는 요소가 전혀 없지 않기 때문이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적 자연법론은 개별 법률이 아니라 더 넓게 주권국가의 설립과 권력의 근거에 대한 이론이므로 국가권력의 정당성의 근거와 한계를 정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국가권력과 일반의지는 독자적인 별도의 목적을 갖지 않으며 오직 그것을 탄생시킨 사회계약의 기준에서 평가될 것이다. 실베스트리니(G. Silvestrini)에 의하면, 루소와 자연법의 관계에 관한 해석은 위 두 입장을 양극에 두고서 다양한 견해들이 그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양상이다.50)
루소가 자연법 이론가인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견해가 나뉘어왔다. 렘(M. Rehm)은 루소가 역사적으로 자연법 전통이 강하던 시기에 활동했고 그로티우스나 푸펜도르프, 홉스 등 자연법 사상가들을 인용하는 등 이들의 저술을 잘 파악하고 있었으며, 자연상태나 사회계약론과 같이 근대 초기의 자연법 전통의 철학자들이 즐겨 사용하던 개념을 활용하고 있어 자연법 전통의 철학자처럼 보이지만, 대개의 연구가 이 문제에 대해 부정적인 답변을 내놓는다고 한다. 이성으로 자연법을 발견한다는 전통에서 볼 때 루소는 자연상태에서 인간에 여러 한계를 지워서 그런 자연법을 발견하기 어렵게 만들었고, 하나님과 같은 입법자를 통해 자연법이 주어진다고 여기는 전통에서 볼 때 루소는 외부에서 자연법을 제시해 줄 존재를 상정하지도 않는다. 또 국가 이전의 선재적인 기준에 따라 국가를 모델짓는 것 같지도 않으니 어떤 관점에서 보더라도 자연법 전통에서 벗어나 있는 사상가로 여기기 쉽다는 것이다.51) 렘은 이성으로부터 자연법을 도출하는 방식만 자연법 전통이라 할 수는 없다는 전제에서 루소가 그런 자연법 전통에는 작별을 고했어도 새로운 자연법 전통을 만들어내었다고 본다. 렘은 루소가 인간이 자연상태에서도 오직 자연법을 통해 자유를 누린다고 본 것, 자연상태에서 상호간의 자유를 보장할 방법이 없어 사회를 구성함으로써 자유에 대한 보장책을 찾는 것이므로 결국 주권적 권력을 도출한 목적이 자유를 확보하기 위함에 있다고 본 것에 유의한다. 이런 관점은 인간의 자연적 본성을 이해하는 방식에서는 전통적인 자연법과 차이가 있지만 인간의 자연적 본성을 자유로 규정하고 그 자유가 법을 통해서 보장되며 또 보장되어야 된다고 본 것에서는 자연적 본성에 바탕을 두고 이를 보장하는 새로운 자연법 전통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52)
끝으로 루소의 사회계약론이 자연법과 무관하다는 주장에 대해 살펴본다. 이와 같은 주장은 오래전에 제기된 것이다. 보클러(R. Wokler)에 의하면, 20세기 초에 루소의 정치저술 선집을 출간한 보언은 루소가 ‘자연법의 관념을 뿌리와 가지에 이르기까지 싹 제거해버렸다’라고 말했다.53) 보언의 표현은 사람이 자연상태에 있을 때 자연법의 원리인 타인에 대한 의무에 대해 인식할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로크는 긍정적으로 보았지만 루소는 그런 환상을 가지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나온 것이다. 즉 자연상태에서 사람이 자연법을 인식하고 타인에 대한 의무감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논점에서 루소가 부정적으로 평가했다는 것이지 루소가 사회계약론의 구성에서 자연법을 완전히 뿌리 뽑았다는 논지는 아니다. 하지만 보언의 의도가 꼭 거기까지만 말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보클러는 보언의 입장에 부연 설명을 덧붙였는데, 루소가 개인의 자연적 본성을 정치체가 규정짓는다고 말한 부분을 두고 보언은 루소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정치체의 통제로부터 자유로운 상위영역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 것이며, 따라서 정치적 권위를 통제할 상위의 자연법 개념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라 해석했다고 본다. 즉 로크가 개인주의적 자유를 옹호했다면 루소는 이런 식의 집단주의로 로크에 대응했다는 것이 보언의 해석이라 한다.54) 그러나 보언의 우려는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자연상태와 일반의지가 서로를 지시하는 두 개의 극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정치체가 인간 본성을 규정한다는 것은 무제약적인 것은 아닌데, 적어도 정치체가 루소가 희망하는 대로 자연본성에 의해 요청되는 최선의 것으로 조직되기만 한다면 그 정치체는 완전한 자연적 본성의 회복을 목적으로 할 것이기 때문이다.55) 여기서 개인이 자연본성에 대한 강제로부터 벗어날 자유가 있는지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진정한 자유를 거부할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고 여기는 사람은 이것을 조금 어리석은 질문처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자유를 부정하는 것이 전체주의나 집단주의적 성향과 다르지 않다고 비난하는 사람은 루소를 전체주의의 이데올로기를 아름답게 포장한 사상가로 분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56) 보언의 비판을 간단히 지나치기 어려운 이유는, 루소가 시민교육을 강조하는 부분에서 섬뜩함을 느낄 때도 많은데다57), 인간본성의 자연적인 완전함이 무엇인지 우리가 분명하게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정치체가 강제하는 인간본성의 완전성에 대한 확신도 가질 수 없으며, 따라서 루소의 계획은 처음부터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호프만(S. Hoffmann)은 ‘일반의지’가 한편에 우려와 의문을, 다른 한편에 대단한 명예를 만들어내어 이제는 신화(myth)가 되었다고 하고, 신화에는 이상과 신기루 두 종류가 있는데 자신이 보기에 루소의 경우는 다가설수록 그만큼 멀어지는 신기루 쪽이라 한다. 이는 일반의지를 실현하려는 꿈이나 어떤 시도도 결국 망상이라는 것이다.58) 이렇게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한계가 있음은 눈치챌 수는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완성이라는 목적을 상정하고 자연법을 논한 아리스토텔레스나 온전한 이성에 입각해 정의를 행해야 한다고 말한 키케로나 하나님을 온전히 아는 것을 인간의 지복으로 여겨야 한다고 말한 아퀴나스나 어떤 자연법론 전통에든 인식 너머의 궁극적인 것을 상정하는 사유방식에 늘 내재한 한계이고, 이것이 루소 사회계약론이 자연법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는 결론을 유도하지 않는다.59)
Ⅳ. 결론
자연법의 역사를 돌아보면, 어느 시대든 새로운 자연법이론의 등장에는 그 시대가 제기하는 문제에 대해 동시대인의 언어와 논리로 설명하는 방식이 늘 결합해 있음을 보게 된다. 루소는 그때까지 사람들이 자연법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방식을 바꾸어버렸다. 그는 이성으로 행위규범인 자연법을 발견하는 방식 자체를 거부했다기보다는 자연적 본성에서 자유와 평등을 제거해버리는 식으로 자연법을 도출하는 특정한 유형의 자연법이론을 거부했다고 생각된다. 루소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자연적 본성을 되찾고 보장할 수단으로 사회계약과 주권체를 요구했으며, 국가는 오직 그런 목적으로만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렇게 함으로써 자연적 본성을 직접 법과 주권체와 맞대응시키고 말았다. 자유와 평등이 가지는 정치적 중요성을 그만큼 중시한 사람도 없을 것이지만 동시에 정치가 인간본성을 재창조할 수 있다는 위험한 생각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도 그였다.60) 렘이 국가권력이 관심 가질 자연적 본성을 자유에 한정한 것은 현명한 생각이지만, 약점을 감추는 방식이기도 하다. 자연본성에 대해 정치의 우선성을 강조할수록 그의 전체적인 기획이 파멸할 위험도 같이 힘을 키워갈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에 롤즈(J. Rawls)가 자유와 평등을 우선시하되 그 외의 것들에 대해 공적 이성에 의한 중첩적 합의라는 방식으로 다룬 것은 루소의 과격함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