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본 논문에서는 독일 연방헌법재판소의 사전심사 제도의 내용과 실무, 그리고 바람직한 발전방향에 대하여 살펴볼 것이다. 사전심사 제도는 단순히 사건부담을 경감시키는 장치가 아니라 헌법소원 제도의 본질과 정체성을 결정하는 제도라는 점에서 볼 때 이 제도의 내용과 운영실무의 문제는 헌법재판 전반에 파급력을 갖는 작지 않은 문제이다. 논문에서는 독일 사전심사제도를 비교하는 대상이자 분석하는 도구로서 미국의 사건선별 제도를 함께 살펴볼 것이다. 그것은 미국 연방대법원의 사건선별제도가 독일의 사전심사 제도의 도입 당시 유일한 모델이며 참고대상이었기 때문이며, 오늘날까지도 독일 사전심사 제도의 원형으로서의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후 독일 시민들은 헌법과 기본권을 최고규범으로 보장하고 실현시키는 것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들은 헌법을 통일적으로 해석하고 수호하는 재판기관으로서 연방헌법재판소를 설립하였고, 공권력의 행사로 기본권의 침해를 당한 시민이 헌법재판소에 직접 구제를 청구할 수 있는 헌법소원 제도를 도입하였다. 독일의 헌법소원 제도는 법원의 재판도 그 소원의 대상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헌법소원 제도는 사법부의 재판에서 발생하는 기본권 침해도 보장한다는 점에서 법치국가 원칙의 실현에 크게 기여했지만 헌법재판소에 과중한 사건부담을 안기게 되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도입된 제도가 사전심사 제도이다. 이 제도는 제기되는 무수한 헌법소원 가운데 본안의 심사에 적당하지 않은 사건들을 본안 심사에 앞서서 걸러냄으로써 헌법재판소의 과중한 사건부담을 경감하고, 헌재가 수행해야 할 본연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이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미국 사법체계의 최정점에 있는 최고법원이다. 헌법재판소와 달리 특정한 분야의 전문법원이 아닌 모든 사법분야를 아우르는 최고 상고심 법원이다. 하급심 법원의 재판을 다투는 상고 절차는 종국적으로 연방대법원으로 집중될 수밖에 없다. 연방대법원이 과중한 사건부담을 지게 될 것이라는 점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연방대법원은 1925년 입법을 통하여 사건선별 제도(System of Writ of Certiorari)를 도입함으로써 과중한 사건부담의 문제를 해결하였다. 이 제도는 연방대법원이 상고신청이 제기된 모든 사건에 대하여 심리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사건을 선별하여 심판할 수 있도록 한다. 연방대법원은 이로써 한정된 사법자원을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사건에 집중하여 사용하고, 그를 통하여 개인의 권리구제가 아닌 판례에 의한 규범형성 기능(rule making)에 진력한다.
독일 헌법재판소의 사전심사 제도는 애초에 미국 사건선별제도를 기본모델로 하여 구상되었다. 하지만 입법단계에서 독일 나름의 독자적인 설계가 채택되었으며 오늘날까지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문제는 그 제도의 운영과정에서 여러 문제가 불거지고 있어 그 설계의 타당성에 여러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본 논문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첫째, 독일의 헌법소원심판 범위 또는 그 청구의 경계 획정을 위한 공식들에 관하여 본다. 사전심사 제도가 구상된 것은 과중한 사건부담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사전심사 제도를 살펴보기에 앞서 독일 헌법소원 제도에서 사건의 과중한 부담 문제가 발생한 근본적 원인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이론적 노력에 관하여 살펴본다.
둘째, 독일의 헌법소원심판에 대한 사전심사 제도의 내용과 실무상 작동방식, 그 문제점에 관하여 본다.
셋째. 미국 연방대법원의 사건선별 제도에 관하여 살펴본다. 미국 연방대법원의 사건선별제도는 과중한 사건부담의 문제를 극복하는 방안으로서 도입되었다. 이곳에서는 그 제도의 내용, 실무상의 운영되고 있는 모습과 그것이 연방대법원의 정체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인지에 관하여 본다.
넷째, 독일 헌법재판소의 사전심사 제도의 결함, 그리고 그 운영의 문제점에 관하여 보다 상세히 살펴본다. 이곳에서는 미국 연방대법원의 사건선별 제도와 비교를 중심으로 하여 과연 두 가지 제도설계 가운데 어떤 설계가 바람직한 운영을 약속하는 것일까, 독일 사전심사 제도는 실제의 운영 속에서 어떤 결함을 나타내고 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결단이 필요한 것일까에 관하여 살펴본다.
Ⅱ. 헌법소원의 경계 획정을 위한 공식들
사전심사 제도의 논의에 앞서 헌법소원의 경계획정 논의가 필요한 이유는 이것이 사전심사제도가 해결해야 할 문제, 그리고 그 문제의 성격을 알려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헌법소원의 경계 불확정성이라는 문제는 재판소원 제도가 지고 있는 사건부담이 운명적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다양한 공식들이 경계획정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이것이 추상적이고 논리적인 법적 기준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고 하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헌법소원의 경계는 개별 헌법소원이 제기되었을 경우에 그 구체적 사건을 놓고 다양한 헌법적 가치를 형량하여 재판부의 토론과 결정으로 해결해야 하는 것이고, 그 과정을 담당해야 할 절차가 바로 사전심사 절차 제도인 것이다.
독일 기본법은 기본권 조항들이 직접적인 효력을 갖는 최고규범임을 규정하고 있다(기본법 제1조 제3항 및 제20조 제3항 참조). 1951년 제정된 연방헌법재판소법(BVerfGG)은 공권력에 의해 기본권 침해를 당한 시민들이 헌법재판소에 직접 구제를 청구할 수 있는 헌법소원 제도를 규정하였다(동법 제90조). 이로써 기본권 조항들은 직접적인 효력을 갖는 최고규범으로 실제로 작동하게 하는 장치를 갖게 되었다.
헌법소원 제도가 최초로 도입되면서 헌법소원의 대상과 관련한 논쟁이 벌어졌다. 가장 핵심적인 쟁점은 헌법소원심판 청구의 대상으로서 법원의 재판을 인정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찬성론 측에서는 재판에 의한 기본권 침해를 통제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헌법소원 제도의 실질적인 의미가 실현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반대하는 견해에서는 재판에 대한 헌법소원 제도를 인정할 경우 일반법원은 이미 기본권을 보호하는 역할을 다하도록 의무지워지고 있는데 그 재판에 대한 헌법소원을 인정하면 중복적인 구제절차를 인정하는 것이고, 이로써 헌법재판소는 과중한 사건부담을 안게 될 것을 우려하였다.1)
찬성론에 따라 재판에 대한 헌법소원을 포함한 헌법소원 제도가 도입된 이후 그 성과는 눈부셨다. 그러나, 반대론이 우려했던 사건부담의 문제도 현실로 입증되었다. 실제로 헌법재판소가 설립된 이후 재판부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사건이 접수되었고, 그 대부분은 헌법소원 사건, 특히 재판에 대한 헌법소원 사건이었다.2) 헌법재판소와 입법자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헌법소원에 대한 사전심사 제도를 도입하였다. 이곳에서는 사전심사 제도를 상세하게 논의하기에 앞서 재판에 대한 헌법소원 제도가 과중한 사건부담을 초래하게 되는 근원적인 이유를 살펴보기로 한다.
헌법소원 제도는 ‘기본권 침해’라는 특정한 상황을 조건으로 제기되는 소송이다. 하지만 기본권은 개방성을 특성으로 하기에 광범위한 해석 가능성을 갖고 있고, 기본권 침해로 주장할 수 있는 영역도 그에 따라 그 범위가 광대하다. 헌법재판소는 헌법소원이란 법원의 재판과 같이 일반적인 구제수단이 아니라, 예외적이고, 최후의 보충적인 구제수단이어야 하는 점을 거듭하여 밝히고 있다.3) 하지만 그 목표는 쉽게 달성하기 어려운 과제가 되었다. 헌법재판소는 스스로 자신의 판례를 통하여 기본권의 범위를 결정적으로 확장하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아래에서 살펴볼 이른바 Elfe 판결과 Lüth 판결, 두 판례가 결정적이었다.
첫째, 1957년의 Elfe 판결은 기본법 제2조 제1항의 ‘자유로운 인격 발현권’으로부터 ‘일반적 행동 자유’라고 하는 포괄적 기본권을 도출하였다. 그 결과 법원에서 위법한 판결을 통하여 불이익을 받은 당사자는 자신의 기본권이 정당한 근거없이 침해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떤 권리침해도 적어도 기본법 제2조 제1항의 인격권으로부터 도출되는 일반적 행동 자유권을 침해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되었기 때문이다.4)
둘째, 1958년 Lüth 판결은 기본권의 객관적 가치질서로서의 기능을 인정함으로써 기본권 적용범위를 사법관계를 포함한 모든 법률관계로 확장하는 판시를 하였다. 이에 따라 법관은 자신이 재판하는 사건에 기본권의 방사효과를 고려하여 판단해야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기본권을 침해하는 재판으로 판단받게 되었다.5)
이와 같은 헌법재판소 법리들은 종전의 단순한 ‘법률 위반’의 재판의 문제를 ‘기본권을 침해한’ 재판의 문제로 전환시키는 징검다리가 되었다. 이로써 재판에 대한 헌법소원의 가능 범위가 사실상 무제한으로 확대되었다.
헌법재판소는 재판에 대한 헌법소원으로 인한 과중한 사건 부담 속에서, 헌법의 해석 등 본래 수행해야 할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게 될 위험, 일반법원 재판의 오류를 정정하는 사법기관으로 변질되는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이러한 위험에서 헌법재판소를 구하기 위해 헌법소원심판의 작동가능 범위에 일정한 제한을 가하는 다양한 시도가 등장하였다.
1964년 연방헌법재판소 제1재판부는 자신의 결정을 통해 헌법재판소의 심사범위를 제한하는 공식을 발표하였다.6)
"소송절차의 진행, 사실의 인정, 법률의 적용은 일반법원의 과제이며 헌재의 심사로부터 제외된다. 오로지 특별한 헌법적 권리, 즉 기본권 침해 문제에 관하여 헌재가 개입한다. 단지 법률상 권리의 관점에서 잘못된 판단은 기본권 침해라고 할 수 없다."7)
Heck 공식에 따르면 사실인정의 문제나 법률의 해석과 적용 문제에 관하여 원칙적으로 심사하지 않는다. 다만, 기본권의 의미를 잘못된 관점으로 파악하거나, 특히 기본권의 보호범위를 잘못 판단하고 있을 때, 그리고 그 오류가 해당 사안에서 실질적인 중요성을 갖는 경우 기본권 침해의 문제가 된다.8)
이 공식에 대하여는 비판이 있다.
첫째, 막연하고 추상적이어서 개별 사건에서 충분하고 명확한 판단근거를 주지 못한다.9)
둘째, Heck 공식에서 헌법재판소가 개입해서는 안 될 영역의 기준으로서 명확한 것은 '사실인정'의 영역이다. 하지만, 헌법재판소는 구체적 사안에 따라서 기본권 보호를 위해 사실인정 분야에 개입할 필요를 인정하여 또 다른 공식들을 발전시키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공정한 절차의 보장 여부, 자의 금지 심사와 같은 것들이다.10)
Schumann은 일반법원의 법률의 해석, 적용과 관련된 헌재 심사의 한계를 입법에 대한 위헌심사와 연관시켰다. 문제된 재판이 단지 구체적인 사건에 법률을 해석, 적용한 경우라면 헌법소원의 심사범위에 포함되지 않는다. 하지만 법률의 해석, 적용을 통하여 법률규정을 보완하고 형성하는 기준을 세운 경우, 이것은 법관의 법정립작용이라고 할 것이므로 입법작용과 같이 헌법소원의 심사범위에 포함된다. 법원의 법률의 해석, 적용에서 도출되는 규범이 만일 입법자가 그것을 입법하였을 경우 위헌의 판단을 받지 않고 결정할 수 있는 경우라면, 그 결정은 일반법원이 헌법 합치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런 경우 법원의 재판은 합헌적이다.11)
슈만 공식은 헌재와 일반법원의 권한을 배분하기에 적절한 타협선을 찾으려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심사범위의 한계를 도출한 근거가 무엇인지에 관하여는 설명하지 않았다. 또한 민주적 정당성이 높은 입법자의 입법에 대한 위헌심사 기준과 상대적으로 낮은 법원의 판단이 왜 동일한 기준으로 평가되어야 하는지에 관하여도 설명이 필요하다.12)
연방헌법재판소는 그 밖에 침해의 진지성 이론과 자의금지 심사 이론 등 심사범위와 심사강도에 관한 다양한 공식을 사용하고 있다.
침해의 진지성 이론이란 구체적 사건에서 기본권이 제약되는 강도에 비례하여 법원의 재판에 대한 심사범위가 정해진다는 이론이다. 연방헌법재판소는 기본권 제약의 강도는 기본권의 특성에 의해 정해진다고 판시하며, 특히 언론출판의 자유와 망명권 등의 제약이 발생한 경우 침해의 진지성을 인정한다.13)
자의금지 심사 이론이란 헌법재판소가 재판의 오류에 개입하기 위해서는 그 법률해석 또는 적용의 오류가 ‘납득할 수 없다(nicht mehr verständlich)’거나,14)‘사리에 반하는 고려(sachfremden Erwägungen)’에 기초한 결론이라는 사정이 있어야 한다는 이론이다.15)
헌법소원 심판의 경계를 설정하기 위해 제안된 여러 공식들은 본질적으로 사건이 제기하는 문제가 헌법소원 제도의 본연의 기능에 부합하는 문제인가라고 하는 질문에 기초하고 있다. 공식들은 모두 일면의 타당성만을 갖고 있기에 어느 하나만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또한 구체적 사건은 기본권 침해에 관한 다양한 사정을 갖기 때문에 어떤 천재적인 기준이 제시된다고 하여도 그에 따라 일률적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이는 본질적으로 재판부가 구체적 사건을 살펴 탄력적으로 판단해야 할 문제라고 할 것이다.
한편, 공식들의 위상에 관하여도 논의가 필요하다. 과연 이 공식들은 구체적 헌법소원 심판에서 본안판단을 위한 심사의 범위인지, 재판소원 가능범위의 한계인지 명확하지 않다. 실무적으로 볼 때 이 공식들의 중요한 결함은, 이 공식들은 과연 어떤 절차 내지 심사단계에서 적용될 공식인가, 특히 사전심사 절차에서 불심사 결정의 기준으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인가에 관한 논의가 없다는 점이다.
Ⅲ. 헌법소원 심판청구에 대한 사전심사 제도
입법자는 헌법소원 제도가 도입된 직후부터 시작하여 갈수록 가중되는 헌재의 사건부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새로운 시도를 하였다. 1956년 헌법재판소법 §91a 조항의 개정을 통해서 사전심사제도를 도입한 것이다.16) 당시 도입된 최초의 헌법소원 사전심사 제도(Vorprüfungsverfahren)의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사전심사는 원칙적으로 3인의 재판관으로 구성된 소부(Ausschuss)에서 심판한다(당시 법 §91a 제1항). 소부의 재판관들은 전원일치 결정으로 사건을 받아들이지 않는 결정, 즉 심사의 거절결정을 할 수 있다. 심사에 대한 거절결정은 다음의 두가지 법적인 요건이 모두 갖추어진 경우이다. 첫째, 사건이 헌법문제의 해명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일 것, 둘째, 헌법재판소가 본안에 대한 결정을 하지 않는 것이 당사자에게 중대하고 회피할 수 없는 불이익을 초래하지 않는 경우일 것이다. 3인 재판부 사이에 의견이 일치되지 않을 경우 8인의 정식 재판부가 같은 법적 요건을 적용하여 심판한다. 정식재판부는 단순 과반수의 결의로 사건에 대한 심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결정을 할 수 있다(같은 법 §91a 제2항).
법은 사전심사의 기준을 정하면서 판단의 여지가 넓은 추상적인 요건을 규정해 놓았다. 헌법재판소의 실무에서는 이와 다른 별도의 요건이 중요한 기준으로 작동하고 있다. 즉, 주심재판관과 소부는 위 법적인 요건을 적용하기보다는 자신들에게 친숙한 별도 요건의 충족 여부로 사전심사의 방향을 맞추고 있다. 그것은 첫째, 사건이 적법성의 요건을 갖추었는가?, 둘째, 사건이 본안의 이유가 명백하게 없는 경우인가? 라는 요건이다.17)
헌법재판소법의 개정을 통해 도입된 사전심사 제도는 1969년 기본법 개정을 통하여 기본법에도 근거를 갖게 되었다(기본법 제94조 제2항 제2문 참조).18)
소부의 사전심사제도는 도입된 이후 여섯 차례 개정되었고, 그 전체적인 방향은 재판부의 부담을 줄여주는 쪽으로, 즉 재판부가 심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결정을 되도록 쉽게 할 수 있도록 방향으로 개정되었다.19) 오늘날의 사전심사 제도는 1993년 개정된 것이다. 연방헌법재판소법 93a-d에 규정되어 있는 현행 사전심사 제도의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헌법소원 사건이 헌법재판소에 접수되면 사건의 내용과 그 법적인 영역에 따라 미리 그 분야에 따라 정해져 있는 주심재판관에게 사건이 배당된다.20) 주심재판관은 자신의 재판관실(Dezernat)에 소속되어 있는 헌법연구관과 함께 사건에 대한 연구를 하고 그 연구가 마무리되면 소부에 사전심사의 심리를 회부한다. 이때 자신이 작성한 보고서를 소부의 구성 재판관들에게 회람시킨다.21) 사건을 받아들이지 않는 결론일 경우 주심재판관은 사건에 대한 보고서와 함께 불심사결정의 초안을 함께 회람시킨다.22)
사전심사는 3명의 재판관으로 구성되는 소부에서 판단한다. 소부는 사건을 받아들이지 않는 결정을 할 수 있다. 이 결정은 소부 구성 재판관들이 의견이 전원일치인 경우에 할 수 있다(제93d조 제3항). 소부를 구성하는 재판관들은 한자리에 모여서 하는 구두평의가 아니라, 서면으로 진행하는 서면평의를 하는 것이 실무 관행이다.23)
소부 재판관들의 의견이 일치되지 않아 심사거절결정을 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정식재판부로 보내진다. 사건에 대한 심사를 받아들이는 결정, 즉 사건에 대한 심판을 회부하는 결정은 오로지 정식재판부에서만 할 수 있다. 정식재판부는 3인 이상 재판관의 동의로 심판을 받아들이는 결정을 할 수 있다(제93b조, 제93d조 제3항).
법 93a조 제1항은 헌법소원은 사전심사를 통과하였을 경우에만 심판에 회부된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제2항은 어떤 경우에 사건이 심판에 회부되는 것인지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헌법소원은 다음 각호의 경우에 심판에 회부하여야 한다.
a) 헌법소원에 원칙적인 헌법적 중요성이 있는 경우
b) 제90조 제1항에 열거된 권리(기본권과 기본권 유사의 권리)를 관철하기에 적절한 경우; 본안재판의 거절로 인하여 청구인에게 특별히 중대한 손실이 발생할 경우도 이에 해당한다.
소부의 사전심사에서 불심사결정을 하는 경우 그 결정의 이유를 적시할 필요가 없다(헌재법 제93d조 제1항, 제2문). 이것은 헌법재판소의 사건부담을 경감시키는 결정적인 제도이다. 이 제도의 덕으로 소부의 사전심사 평의는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이뤄지게 된다. 하지만 자의적 판단의 위험이 높다. 청구인은 이유를 쓰지 않는 심판회부 거부 결정을 받고 과연 어떤 이유로 자신의 사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는지 알 수 없고, 그 결과도 신뢰하지 못하게 된다. 이는 헌법소원 심판청구에 대한 결정을 받을 권리를 모든 시민들의 주관적 권리로 이해하는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제도이다. 소부는 청구인에게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또한 장래의 청구인들에게 사전심사 기준에 관한 지침을 제공하기 위한 목적에서 종종 상세한 이유를 밝히는 결정을 하기도 한다.24)
사전심사 절차가 헌법소원 심사절차의 입구 단계에서 이뤄지는 절차이기 때문에 헌법소원 심판청구에 대한 적법성 통제와 구분이 쉽지 않다. 헌법소원의 심판청구가 적법하기 위해서는 자기관련성, 직접성, 보충성 등 여러 가지 적법성의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논리적으로는 사전심사와 적법성 심사는 구분되는 것이지만 현재 연방헌법재판소의 실무에서는 사전심사절차 단계에서 바로 적법성 심사를 결합하여 진행한다.25)
헌법재판소의 사전심사 절차의 실무에서 적법성 요건 심사는 그 비중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사전심사 절차에서 청구가 부적법하다고 판단하면 그에 대해서는 부적법 각하 결정이 아닌 심사거절결정, 즉 불심사결정을 받게 된다. 사전심사에서 적법성 심사를 한다면 소부에서 판단하고, 결정의 이유를 작성할 필요가 없는 등 훨씬 간이한 방식으로 처리할 수 있으므로 현재 적법성 요건의 심사는 사실상 사전심사의 부분으로만 진행될 뿐, 독립적으로 진행되고 있지 않다.26)
한편, 사전심사 단계의 적법성 심사에서 가장 엄격하게 심사되는 요건은 보충성(Subsidiarität)과 이유제시(Substantiierung)의 요건이다.
2002년부터 2014년까지 헌법재판관을 지낸 Getrude Lübbe-Wolff는 그녀의 논문 "헌법소원에서의 보충성과 이유제시의 요건”에서 이 두 가지 적법요건은 청구인의 심판청구를 제한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으며, 사전심사단계에서 가장 강력한 작용을 발휘하고 있다." 고 하였다.27) 또한 그녀는 사전심사절차에서 적법성의 요건에 대한 요구가 점차 강화되고 있다고 하면서 "이 요건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한 걸음씩, 청구인들이 법의 문구를 읽어서는 예상할 수 없었던 곳으로, 점차 멀리 떨어져 나왔다.”고 하였다.28)
Rainer Wahl은 헌법재판소의 사전심사 제도 실무와 적법성의 요건의 강화의 관계에 관하여 "헌법재판소는 사전심사실무에서 적법성의 요건에 대해 더 높은 정도의 기준을 적용하고 있으며, 이는 재판소의 사건부담을 조절하는 도구로 사용한다."29) 고 설명하였다.
연방헌법재판소법은 청구인은 권리의 구제를 위한 다른 구제절차가 있는 경우에는 그 절차를 모두 거친 후가 아니면 헌법소원을 청구할 수 없다고 규정함으로써 적법요건으로서 보충성의 원칙을 요구하고 있다. (법 제90조 제2항 제1문).30)
보충성의 원칙은 헌법재판소와 법원이 기본권 구제의 책임을 어떻게 조화롭게 실현시킬 것인가 하는 고민에서 나온 원칙이다. 그 책임수행의 방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일반법원이 우선 첫 번째의 책임을 부담한다. 그럼으로써 스스로의 독립성을 지키고, 헌재의 과중한 업무부담을 방지한다. 둘째, 일반법원이 법적, 사실적 관점에서 일차적으로 판단하도록 함으로써 헌재의 심리에 도움을 얻도록 한다. 헌법소원 심리이전에 이뤄진 일반법원의 법적, 사실적 판단은 헌법재판소 판단의 부담을 결정적으로 경감시켜 주며, 헌재가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확고하고 안전한 기초를 제공한다.31)
그런데 헌법재판소는 판례를 통하여 본래의 보충성의 원칙(Rechtswegerschöpfung)으로부터 그보다 훨씬 엄격한 요구를 하는 새로운 원칙, 즉 넓은 의미의 보충성 원칙 (Grundsatz der Subsidiarität)을 도출하였다. 권리구제를 위한 소송수단이나 심급절차를 거쳤을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애초의 보충성 원칙인 데 대하여, 확장된 원칙은 질적으로 다른 요구를 추가하였다. 그것은 청구인이 헌법소원에서 주장할 기본권 침해에 관한 법적, 사실적인 법적 주장을 일반법원의 소송절차에서 했을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32) 만일 재판의 절차위반의 문제를 애초에 다툴 수 있었던 최초의 소송절차에서 다투지 않았다면 이를 이유로 헌법소원을 제기하는 것은 적법하지 않다.33)
헌법재판소가 해석을 통해 발전시킨 보충성의 원칙에 대하여는 법관의 법해석 권한의 범위를 벗어난 해석이라는 비판이 있다.34) 이는 또한 헌법소원 청구인의 법적 지위를 불안정하게 하는 것이고, 헌재의 자의적 판단으로 청구인에게 불이익을 줄 수 있는 것이다.35)
독일 헌재법은 제90조 제1항에서 헌법소원을 청구함에 있어 구체적으로 공권력에 의해 침해된 기본권에 관한 주장을 할 것을, 제92조에서는 헌법소원의 청구와 관련하여 청구의 이유를 제시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36) 연방헌법재판소는 이들 조항에 근거하여 해석으로서 '이유제시의 요구(Erfordernis der Substantiierung)'라고 하는 특별한 헌법소원의 적법요건을 도출하였는바,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37)
청구인은 침해된 기본권과 공권력의 작위나 부작위를 명시하여야 하고, 그 청구이유와 함께 그 충분한 근거를 제시할 것까지 요구하고 있다. 가령, 침해된 기본권과 기본권을 침해하였던 공권력을 포함한 사안의 전체적인 경과, 기본권 침해의 과정과 사실관계에 관한 설시가 필요하다.38) 기본권을 침해한 공권력의 주체도 설시해야 한다. 만일 심급절차의 여러 법원들이 기본권을 침해하는 판결을 하였을 경우에는 그 판결들과 함께 판결을 내린 여러 법원들을 적시해야 한다.39)
모든 적법요건 및 사전심사의 기준을 충족하였음에 관한 설시, 본안의 이유 유무에 관한 설시까지 충분하게 작성되어야 한다. 청구인은 기본권 침해와 관련하여 자신의 주관적 생각과 판단을 주장하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관련 헌재의 판례가 있다면 그 판례를 검토하고 그것에 근거하여 자신의 권리침해를 논증해야 한다.40)
이 적법요건이 가장 충족시키기 어려운 요건이 되는 경우는 헌재의 판례가 요구하는 바와 같이 보충성의 원칙과 이유제시의 요구를 결합시키는 경우이다. 법원의 판결을 다투는 경우, 심급절차 내에서 적법하게 상소를 제기했어야 하고, 상급법원에 대한 상소가 허가되지 않았을 경우 적법하게 그 결정을 다투었어야 한다(보충성의 측면).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상소진행의 경과가 헌법소원 심판 청구서에 충분하게 ‘설시’되어야 한다는 점이다(이유설시 요구의 측면).41) 또한 청구인은 자신의 목적, 즉 권리침해방지 또는 권리구제에 도움이 되었을 수 있는 상정 가능한 모든 절차방법 내지는 신청을 모두 사용했었다는 점을 ‘설시’해야 하고, 그 점을 자료를 통해 소명해야 한다(이유설시 요구의 측면).42)
이유제시의 요건은 현재 재판에 대한 헌법소원의 제기에서 가장 중요한, 그리고 청구인의 입장으로서는 충족시키는 것이 가장 어렵고, 투명하지 않은 적법성의 요건이 되었다.
사전심사 절차에서 대다수의 사건에 대하여 사건을 받아들이지 않는 결정을 하게 되는 실제의 기준이 되는 것은 사전심사의 기준이 아니라 바로 이 적법요건인 것이다. 헌재가 사전심사 과정에서 이 적법성의 요건들을 사용하는 것은 엄격성을 조절하여 접수되는 사건의 수와 내용을 조절하는 필터로서 사용하는 것이다. 판례가 해석을 통해 도출한 요건이 성질상 다른 적법요건과 달리 헌재에게 넓은 판단의 여지를 부여하기 때문이다.43)
사전심사과정에서 적법성 요건의 심사가 어떻게 진행되는가를 전면적으로 파악하기 쉽지 않다. 법이 헌법재판소에게 사전심사결정의 이유를 발표하지 않을 것을 허용하고 있고, 실제로 절대적 다수의 사전심사 결정이 그 이유를 제시하지 않은 채 선고되기 때문이다. 적법성 요건 심사가 초래하는 문제는 몇몇 판례의 잘못된 판단이나 방향에 있는 것이 아니다. 본질적인 문제는 재판부가 그 요구의 강도를 수시로, 자의적으로 강화할 수 있다는 것이며, 이는 사전심사의 결정에서 그 이유를 밝히지 않는 제도와 결합하여 재판부에게 사전심사에 관한 광범위한 재량을 부여한다는 점이다.
연방헌법재판소의 재판실무에 관한 한 현장(인터뷰) 연구에 따르면 적법성 요건에 관한 사전심사가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와 과정, 그리고 그 실무관행을 알 수 있게 해주고 있다.44)
첫째, 헌법재판관들은 구체적 사건의 사전심사에서 해당 사건의 보고 책임을 맡는 주심재판관들이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특히 대다수의 사건들이 받게 되는 불심사 결정을 결론으로 제안할 때는 통상 별다른 이견없이 결론에 대한 동의를 받게 된다.45)
둘째, 주심재판관들이 각 적법성 요건의 엄격성에 관한 다른 기준을 갖고 있다.46) 한 한 전직 재판관은 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적법성 요건에 관해 엄격한 요구를 하는 재판관들이 있다. 반대로 그에 대해 관대한 기준을 적용하는 재판관들이 있다. 원래 적법성의 요건은 사건을 재판소에서부터 떨어내버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적법성은 오히려 법적 안정성(청구기간의 경우)에 기여하거나, 재판부에 충분한 자료를 제공하게 함으로써 재판부가 판단을 내리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유제시의 요구의 경우) 존재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적법성의 요구는 지나치게 높은 정도이어서는 곤란하다. 그런데 이에 관하여는 여러 재판관들마다 그 기준이 다르다.”47)
헌법연구관을 지낸 경험이 있는 헌법소송법 학자이며 코멘타르의 저자인 Tristan Barczak은 사전심사단계에서 적법성 요건, 특히 이유제시의 요건의 요구는 지나치게 광범위하여 ‘각 재판관들의 창의적 내지는 자의적 판단에 의해 탄력적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하였다.48)
Ⅳ. 미국 연방대법원의 사건선별 제도
미국 연방대법원은 연방법원으로서 연방하급법원과 주 최고법원을 아우르는 최고 상고심 법원이다. 오늘날 연방대법원은 상고를 신청한 당사자의 권리구제 또는 하급심의 오판의 교정을 위한 법원이 아니라, 연방헌법의 보장과 연방법의 통일을 목적으로 하는 법원으로 기능한다.49) 헌법의 보장과 연방법의 통일이란 헌법적 쟁점에 대한 해석, 하급심 법원의 서로 충돌된 법 해석을 정리하는 판단을 의미한다. 이것은 연방대법원은 자신의 정체성을 하급심의 오판을 교정하는 법원이 아니라 신중한 규범 형성을 최고의 과제로 삼는 법원으로 정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은 연방대법원의 정체성을 현실에서 실현하는 수단이 바로 사건선별 제도(System of Writ of Certiorari)이다. 이하에서는 과연 사건선별 제도란 어떤 제도이며, 그 구체적인 절차와 방식은 어떤 것인지에 관하여 본다.
연방대법원의 사건선별 제도란 연방대법원에 접수된 사건 가운데에서 중요한 사건을 선별하여 심판하는 제도를 의미한다.50) 오늘날 연방대법원의 상고관할 사건은 실질적으로 거의 모두 사건선별 관할에 속해 있다. 따라서 사건선별 관할은 그것이 바로 연방대법원의 상고관할(appellate jurisdiction) 그 자체라고 말해도 틀린 표현은 아니다. 연방하급법원 및 주 최고법원의 재판에 불복하여 연방대법원의 재판을 받고자 하는 당사자는 사건선별의 허가라고 하는 관문을 통과하여야 연방대법원의 심사를 받을 수 있다.
연방대법원이 사건선별 관할 제도를 도입한 것은 1925년이었다. 과중한 사건부담으로 고통받던 연방대법원은 스스로 입법안을 마련하여 연방의회에 관할의 전면적인 개혁을 요청하였고, 그것이 법원조직법(Judiciary Act)의 입법으로 결실을 이루었다. 종전에 연방대법원이 접수하는 사건 가운데 약 4분의 3에 해당하는 사건이 심판이 강제되는 관할로부터 연방대법원의 재량에 의하여 심판여부를 결정하는 사건선별 관할로 변경되었다.51)
1988년 연방의회는 일명 ‘연방대법원의 사건선별을 위한 법률(Supreme Court Case Selections Act of 1988)'을 통과시켰고 이로써 연방대법원이 필요적으로 심사하여야 하는 관할은 실질적으로 폐지되었으며, 연방대법원의 거의 모든 상고관할은 사건선별 관할 대상이 되었다.52) 연방대법원은 사건을 선별하는 사건선별 심사절차에서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여 극히 적은 비율의 사건에 대하여만 심사를 받아들이는 결정을 내린다. 가령, 2010년 회기 동안 연방대법원에 접수된 사건은 총 9,062건이며, 그 가운데, 정식의 사건심리가 허가된 건수는 모두 90건, 2012년의 회기 중 접수된 총 건수는 8,803건이며, 그 가운데 정식의 사건심리가 허가된 사건은 93건, 2013년 회기 동안 접수된 총 건수는 8,575건이고, 그 가운데 연방대법원이 사건심리를 허가하였던 건수가 모두 76건이다.53)
사건선별 여부의 평의는 전원재판부의 평의에서 이뤄진다. 4명 이상의 대법관이 찬성할 경우 사건에 대한 정식심사의 허가 신청을 받아들여 사건심리를 허가하는데, 이를 4표의 법칙(Rule of Four)이라고 부른다.54)
사건을 정식으로 심사할 것인지 결정하는 사건선별 절차는 일종의 사전심사 절차이다. 접수되는 모든 사건에 대한 사전심사 절차를 전원재판부가 평의를 통해 결정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단이다. 연방헌법재판소의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사전심사의 단계에서는 그 심리의 효율성을 위하여 소부 재판부로 나누어 심리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사건선별절차의 전원재판부 평의와 4표의 법칙에 관한 논의는 제도가 최초로 도입되었던 1925년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대법원장 William Howard Taft는 1921년 William R. Day, Van Devanter, James Clark McReynolds 등 3명의 연방대법관에게 연방대법원의 관할 개혁을 위한 입법안을 마련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들이 제안한 입법안은 연방대법원의 개혁안으로서 1922년 연방의회에 제출되었고, 연방대법관과 연방의회 의원들은 그 입법안의 내용에 대한 토론을 진행하였다.55)
연방의회 의원들은 연방대법원이 사건선별 절차를 위하여 소부 제도를 도입할 것을 의심하였다. 이에 대하여 연방대법원은 전원재판부 평의에서 심사할 것임과 4표의 찬성표만 있으면 사건선별을 할 것임을 밝혔다.56)
사건선별 절차의 설계에서 전원재판부의 평의는 매우 중요하다. 사건선별 절차 제도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인 다음에서 보는 사건의 선별 여부에 관한 재판부의 재량권이다. 재량권은 자의적 결정의 위험성에 노출되어 있다. 따라서 전원재판부의 평의라는 절차적인 방법으로서 그 자의적 결정 가능성을 통제하는 것이다. 평의에 참여한 9인 재판관은 전체 접수되는 사건 속에서 사건의 부담 정도와 구체적인 사건의 중요성을 형량하여 사건의 선별 여부를 결정하고 있다.57)
연방대법원은 당사자들이 자신의 주장을 밝히는 의견서를 두 단계로 분리한다. 첫 번째는 사건선별의 단계에서 제출하는 서면이며, 두 번째는 사건에 대한 심사가 받아들여진 후 본안에 관한 심사를 하는 단계에서 제출하는 서면이다. 두 의견서가 담고 있는 내용은 명확하게 구분된다. 그 이유는 연방대법원의 심리의 대상과 관점이 각 단계에 따라 명확하게 구분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연방대법원이 두 단계의 각기 다른 질문을 던지는 것과 같다. 사건선별 절차에서의 질문이 ‘당신의 사건에서 판단받고자 하는 쟁점은 무엇인가? 그 쟁점은 왜, 어떤 관점에서 중요한가?’ 이라면, 본안단계에서의 질문은 ‘당신이 승소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이다.
사건선별 절차는 상고 신청인의 상고신청(petition for writ of certiorari)으로 개시된다. 이 단계에서 신청인과 상대방 당사자는 사건선별 단계의 의견서(Brief on Certiorari) 제출한다. 이들 의견서에서 신청인은 해당 사건이 중요한 쟁점을 가지고 있는 사건이라는 점을, 상대방 당사자는 다양한 이유를 들어 그것이 중요한 쟁점이 아니며, 따라서 본안의 심사가 필요하지 아니하다는 점을 주장하게 된다. 사건이 선별되어 본안의 심사가 개시되면 양측 당사자는 본안이 이유있는지 여부에 관한 주장을 담은 본안의 의견서(Brief on Merits)를 새로이 제출한다.
재판부가 사건선별 절차에서 어떠한 내용을 갖는 사건을 어떠한 기준으로 선별할 것인지에 관하여 입법은 아무런 규정도 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재판부는 사건선별에 관한 재량권을 갖는다.
1925년 제도 도입 당시에 재판부의 재량권에 관한 문제도 논란이 되었다. 의원들은 ‘법률에 사건선별의 기준을 미리 정해 놓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 아닌가?’ ‘재판부의 자의의 위험성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으로 보이는데 왜 채택하지 않았는가?’ 를 질문하였다. 연방대법원 대법관들은 ‘중요한 사건’의 선별이란 구체적 사건을 살펴보아야 가능한 것이기에 그것을 결정하는 요건과 기준을 법으로 정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하였다.58) 입법안 마련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던 Van Devanter 대법관은 연방대법원이 사건선별과 관련하여 견지할 기준은 공적으로 중대한 사건, 국민 일반이 이해관계를 갖는 사건, 통일적 해결에 중대한 이해가 있는 사건 등이라고 밝혔다.59)
오늘날 연방대법원은 그 동안의 경험적인 사건 선별의 기준을 연방대법원 규칙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규칙에서는 사건을 선별하는 것은 연방대법원의 재량이며, 불가결한(compelling) 이유가 있는 경우에만 받아들여진다는 점을 명확하게 하고 있다. 또한 하급심의 사실인정이 잘못되었거나, 법 적용이 잘못되었다는 점 때문에 연방대법원이 정식심사의 허가 신청을 허가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는 점을 확실히 하고 있다.60) 그러나 구체적인 기준으로 제시된 법원 간의 판단의 저촉, 연방대법원의 선례의 잘못된 적용, 사건의 중요성 등은 추상적인 참고기준일 뿐이며 그것이 재판부를 기속하는 것은 아니다. 결정적인 기준은 재판부의 평의와 4표의 법칙일 뿐이다.
독일의 사전심사 제도는 독일 헌법소원 제도의 뜨거운 감자이다. 제도를 도입한 이후 여러 차례 법을 개정하였음에도 그 제도는 여전히 원활하게 작동하지 못하고 있으며, 수 많은 비판론에 시달리는 골치덩어리 제도로 남아있다. 독일의 사전심사 제도를 설계하는 과정, 개정안에 대한 논의, 새로운 제도의 제안 등에서 연방대법원의 사건선별 제도는 항상 중요한 연구와 참고대상이 되었다. 수십년의 연구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논의에 잘 소개되지 않은 장치가 사건선별 제도의 ‘쟁점사항’이다. 이는 연방대법원이 사건선별 신청이 된 사건들을 소부가 아닌 전원재판부의 평의를 통하여 결정할 수 있도록 하는 결정적인 장치이다.
연방대법원에 상고를 신청하는 서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쟁점사항(Question Presented)’이다. 그것은 신청인이 연방대법원으로부터 판단을 받으려고 하는 법적 쟁점을 말한다. 연방대법원 규칙 14. 1(a)는 상고 신청서에 반드시 기재해야 하는 필요적 기재사항으로서 쟁점사항을 규정하면서 쟁점사항은 신청서의 첫째 면에 기재하고, 그 첫째 면에는 오로지 쟁점사항만을 기재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61)
쟁점사항이 중요한 이유는 연방대법원 사건의 실질적인 심판대상은 당사자가 다투고 있는 하급심의 재판 자체가 아니라 신청인이 상고 신청서에 작성한 쟁점사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쟁점사항을 재판부가 아닌 상고신청을 한 당사자가 결정한다는 점은 의미가 깊다.62) 연방대법원은 사건을 선별하여 심사를 받아들이는 기준으로서 쟁점사항의 중요성을 그 결정적인 잣대로 삼고 있다. 따라서 신청인은 쟁점사항을 신중하게 선택하고 작성하게 된다.
쟁점사항은 법적인 쟁점을 중립적인 내용으로 기재한 것이어야 하지만 해당 사건의 사실관계와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또한 쟁점사항의 쟁점은 하급심에서 정당하게 제기되어 판단 받았던 쟁점일 것이 필요하다. 하급심 판단에서 주장하고 제기하지 아니하였던 쟁점을 연방대법원에서 새로이 제기하여 주장할 수는 없는 것이다.63)
쟁점사항은 짧고 간략하게 기재되어야 한다.64) 신청서에 기재되는 쟁점사항은 통상적으로 한 두 개 정도이다.65) 연방대법원은 “재판부에 가장 도움이 되고 설득력이 있는 신청서는 한 개 또는 두 개 정도의 쟁점사항을 제시하고, 그 쟁점사항이 왜 그렇게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 왜 하급법원들의 판단이 갈리고 있는지 등에 관하여 집중적으로 논의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쟁점사항을 많이 나열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을 경고하였다.66)
쟁점사항은 사건선별 절차 단계에서뿐 아니라 본안심사 절차에서도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쟁점사항은 연방대법원의 본안판단의 실질적인 심판대상으로서 기능한다. 당사자는 상고신청에 대해 승인이 내려진 경우, 즉 사건의 심사가 받아들여진 이후에 새로이 본안 의견서(Briefs on merits)를 제출하게 된다. 당사자는 이 의견서에서 쟁점사항에 관하여만 주장해야 하고, 구두변론에서도 쟁점사항 이외의 사항을 주장하거나 다투어서는 안 된다.67)
4명의 대법관이 신청을 받아들일 것으로 판단한 경우에는 심사를 받아들이는 결정이 내려진다. 이로써 구술변론을 포함한 연방대법원의 정식심사가 개시된다. 반면 4명의 찬성을 받지 못한 경우에는 심사를 받아들이지 않는 기각 결정이 내려진다. 이 결정은 신청인의 상고신청을 기각하는 재판으로서 해당 사건에 대한 하급심 판단을 확정하는 힘은 갖고 있다. 따라서 그 실질적 효과는 상고기각 재판과 다름없다.68)
사건에 대한 심사를 받아들이지 않는 기각결정의 판단에 단지 결론(Certiorari Denied)만을 기재할 뿐 아무런 이유를 기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연방대법원 내부의 확고한 관습규범이다. 이는 연방대법원이 파악하는 자신의 정체성에 기반한다. 당사자에게 연방대법원의 본안 심리와 판단을 받을 권리는 없기에 그 기각 결정의 이유를 알릴 것이 강제되지 않는 것이다.
다만, 연방대법원은 사건을 받아들이지 않는 기각 결정을 하는 경우, 그에 대하여 반대의견을 공개하는 관행을 형성하고 있다. 이는 대법관들이 사건선별의 절차의 평의에서 소수의견의 대법관들에게 자신들의 입장을 관철시킬 수 있는 효과가 큰 지렛대를 주는 효과를 가져온다. 실제로 많은 경우 반대의견의 대법관들이 자신들의 사건선별 절차에서의 결론을 관철시켜 마침내 사건은 정식심사를 받고, 그로 인해 반대의견도 발표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69)
V. 독일 헌법재판소의 사전심사 제도에 대한 비판적 고찰
독일 헌법재판소의 사전심사 제도는 최초로 도입될 당시부터 연방대법원의 사건선별제도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1954년 12월 연방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은 연방정부에 헌법재판소 명의로 된 자신들의 의견서(Denkschrift)를 통해 ‘미국 연방대법원의 사건선별 제도(System of Writ of Certiorari)’를 구체적으로 적시하며 이를 모델로 한 사전심사제도를 마련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헌법재판소는 의견서에서 이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사전심사제도의 기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이 사전심사 제도는 실질적인 중요성이 크지 않은 사건들을 제거하고, 헌법재판소가 심판을 할 의미가 있는 실질적인 가치가 큰 사건들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이 심사절차에서는 사건의 적법성이나 이유있는가 여부에 관하여 심사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헌법소원이 - 그것이 객관적인 측면에서 이건 또는 청구인의 주관적 측면에서 이건 -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사건인지 여부, 그리하여 절차법적인 차원에서나 또는 실체법적인 차원에서나 심사가 이루어져야 하는 중요한 경우인 것인지 여부를 심사하는 절차이다.”70)
독일의 사전심사 제도와 미국의 사건선별 제도는 ‘재판기관에게 재판을 거절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고 하는 동일한 구상에 기초하고 있다. 과중한 사건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한 목적이라고 하여도 매우 이례적인 구상임은 부인할 수 없다. 법치국가 원칙을 존숭하는 독일법의 전통에 비추어 볼 때 적법성 요건을 갖춘 소송임에도 본안심판을 하지 않고, 심지어 본안심사를 거절하는 결정을 할 수 있는 제도가 도입될 수 있었던 것은 미국 사건선별 제도의 영향을 배제하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한편, 독일 헌법재판소의 사전심사 제도에서 불심사결정의 이유를 기재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규정도 연방대법원 제도를 모델로 한 것이다. 심사를 거절하는 결정의 이유는 다양하며 재판부를 구성하는 각 판단자들의 의견도 다양하다. 만일 심사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를 공식적으로 기재해야 한다면 무엇을 공식적인 이유로 할 것인지에 관하여 판단자들 사이에서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 이것은 사전심사 제도를 받아들이는 취지를 몰각시키는 비효율과 어려움을 초래할 것이다. 하지만, 재판기관이 심사 자체를 거절하면서 그 이유 조차 알려주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이례적이고 기이한 제도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것을 설명하는 것은 어떤 논리를 가져온다고 해도 쉽지 않은 문제이다. 어쩌면 중요한 것은 논리보다는 실제 운영이다.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정당한 제도 운영, 헌법재판 제도 전반에 대한 신뢰만이 이 제도를 정당화할 수 있다.
헌법재판소의 사전심사 제도는 미국 연방대법원의 사건선별 제도로부터 영향을 받아 설계된 제도이다. 양 제도는 추구하는 목적과 그것을 달성하려는 수단이 유사한, 그 본질에서 깊은 유사성을 갖는 제도이다. 즉, 양 제도는 모두 헌법재판소와 연방대법원이라는 두 최고 재판기관이 본래 담당해야 하는 법 해석과 헌법보호기능을 충실히 달성하고, 과중한 사건부담을 경감하여 재판능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제도이다. 또한 그 수단은 두 재판기관의 기능과 과제를 최대한 실현하기 위해서 실질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없는 사건을 걸러내어 본안심판의 대상에서 제거하는 것이다.
사전심사 제도의 본질은 미국의 사건선별 제도와 같이 적법한 소송에 대한 재판을 거절하는 것이라는 점은 위에서 살펴보았다. 이 제도의 기초에는 소송을 제기한 당사자의 권리를 존중하기보다는 최고재판기관의 재판기능을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있다. 이러한 이례적인 제도가 공정하게 운영될 것이라는 것을 약속하기 위해서는 정당한 판단의 보장장치, 즉 재판부의 자의적 판단 가능성을 배제하거나 축소할 장치가 필요하다.
독일 헌법재판소의 사전심사 제도는 소부에서 담당한다는 점에서 전원재판부에서 담당하는 미국 연방대법원의 사건선별제도와 다르다. 소부에서 하는 재판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장치로 전원일치의 판단을 요구하였다. 과연 이것이 자의적 판단에 대한 충분한 견제장치가 될 것인지에 관하여는 의문이 있다.71)
독일의 사전심사 설계의 타당성에 대한 궁극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그것은 소부에 의한 사전심사 사건의 비중이 많아지면서 소부가 점차 헌법재판소의 중심 재판부로 등장하였다는 점 때문이다. 2020년도 통계에 따르면 헌법재판소가 처리한 헌법소원 사건의 99.5%를 소부에서 불심사결정으로 처리하였다. 총 처리건수 5,361건 가운데 소부의 불심사결정의 건수가 5,248건이며, 소부에서 헌법소원에 대한 인용판단을 한 건수가 90건이다. 두 개의 정식재판부에서 처리한 것은 23건에 불과하다.72)
소부가 헌법재판소의 중심 재판부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소부가 내리는 결정의 건수가 수량적으로 많기 때문만이 아니다. 더욱 문제되는 것은 헌법재판관들과 그들을 보조하는 헌법연구관들의 가장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부의 사전심사 사건을 처리하는 것에 투여되고 있다는 점이다.73) 헌법재판소가 담당해야 하는 임무의 본령이 헌법을 해석하고 기본권과 헌법을 수호하는 것이라는 점, 그와 같은 임무는 정식재판부의 판단으로 제대로 수행될 수 있다는 점에서 봤을 때 이와 같은 소부가 중심을 차지하는 관행이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임은 분명하다.
사전심사 제도는 주관적 또는 객관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사건을 찾아 선별하는 것이 주목적이다. 그런데 이 심판을 소부에서 하는 것이 과연 적절할까? 독일 헌법재판소가 이것을 소부에서 판단하도록 한 것은 효율성 때문이다. 하나의 정식재판부(Senat)을 구성하는 헌법재판관들은 세 개의 부를 구성할 수 있다. 정식재판부는 여덟명의 재판관이 합의를 해야 하기에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드는 데 대하여 세 명의 재판관으로 구성되는 소부는 능률적으로 사건을 처리할 수 있다. 게다가 그 재판부의 숫자가 두 개(정식재판부)에서 여섯 개(소부)로 늘어나니 그 점에서도 소부에서 담당하는 것이 훨씬 능률적이다. 하지만 때로는 능률과 효율이 다양성과 깊이 있는 논의를 위해 양보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어느 사건이 중요한 사건으로 인정된다는 것은 그 사건이 제기하는 문제와 주제에 관하여 헌법재판소가 본안의 심판을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건의 중요성이란 사건을 보는 관점과 가치관에 따라 좌우될 수 있는 판단이다. 어느 소부에서 판단했는가, 어느 재판관들이 소부를 구성했는가에 따라서 그 판단이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단순히 심판청구를 한 당사자에 대한 기본권 구제에 공백이 생기는 문제가 아니다. 일부 재판관들의 주관적 편견과 가치관 때문에 헌법재판소가 심판하는 주제를 잘못 결정하게 되는 문제, 헌법재판소가 담당하는 헌법의 보호와 기본권 해석 기능에 공백이 생기는 문제이다.
‘재판을 거절하는 재판’을 하는 재판부는 정식재판부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정식재판부가 확보할 수 있는 다양한 구성 때문이며, 오로지 정식재판부만이 전체적인 관점에서 사건의 중요성을 제대로 형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식재판부에서는 서로 다른 가치관과 의견을 갖는 헌법재판관들이 사건의 중요성에 관하여 토론할 수 있으며, 종전에 사전심사에서 심사를 받아들이는 결정을 했던 다른 사건과 비교하고 형량하여 균형잡힌 사전심사의 결정을 할 수 있다.
사전심사 재판을 하기에 보다 적합한 재판부는 정식재판부라는 점을 살펴보았다. 문제는 과연 헌법소원의 사전심사를 정식재판부가 담당하도록 하였을 때 그것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 오히려 사전심사 제도가 없을 때보다도 사건부담이 더욱 과중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문제이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이 문제를 아래에서 살펴볼 ‘재판부에 대한 재량권 부여’, 그리고 다음에 보게 될 ‘쟁점사항’의 장치로서 해결하였다.
사전심사를 담당하는 재판부에게 재량을 부여할 것인가 하는 것은 사전심사 제도 설계의 가장 어려운 주제이다. 재판부에게 재량을 부여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재판부가 입법자가 마련해놓은 법적인 기준을 따르도록 하는 방법이 좋을까?
재판부에 재량을 부여한다고 할 때는 그것이 과연 법치주의 원칙과 조화될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여러 의문이 제기된다. 재판부에게 재량을 주어 판단하도록 한다면 청구인의 심판받을 권리를 임의로 박탈하는 것은 아닌가, 재판부가 자의적으로 결정할 우려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미국 연방대법원의 사건선별제도는 전원재판부에게 사건선별을 담당하도록 하는 반면, 재판부에게 광범위한 재량을 부여한다. 사건선별 절차에서 사건을 받아들이는 기준은 사건이 제기하는 법적 쟁점의 중요성이다. 전원재판부를 구성하는 대법관들은 각자 다양한 관점에 기초하여 사건과 쟁점의 중요성을 판단하고, 평의에 모여 주장하고 토론한다.
독일 헌법재판소의 사전심사 제도는 재판부(소부)에게 재량을 부여하지 않는 제도이다. 재판부는 입법자가 정해 놓은 법적 기준 – 재량이 아니라 - 에 따라 사건에 대한 심사를 받아들일 것인지 여부를 심판한다. 하지만 원칙을 정해 놓는 것과 원칙이 실제로 실현되는가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사전심사의 기준을 입법자가 정해 놓았지만 그것은 법적인 요건으로 작동하기 어려운 추상적 기준이다. 재판부에 재량을 부여하지 않는 법적인 판단이라는 점을 강조하지만 이는 수많은 고려요소와 재판부가 넓은 판단여지 속에서 사건의 중요성(쟁점의 헌법적 중요성 또는 그 결과가 당사자에게 미치는 주관적 중요성)을 판단할 수 밖에 없는 사전심사 제도의 현실과 조화되지 아니한다.
이런 상황에서 사전심사를 담당하는 헌법재판관들은 쉽지 않은 판단을 해야 한다. 사건을 받아들이지 않는 판단을 할 때 사전심사의 추상적 기준을 적용하는 자신의 심판이 과연 객관적인 판단이라는 확신하기 어렵다. 사전심사의 불심사결정의 기준으로 입법된 것은 아니지만 논리적으로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적법요건은 재판부가 안심할 수 있는 확고한 법적 판단의 기초를 제공한다. 헌법재판소의 사전심사의 실무가 적법성의 엄격한 심사로 전환되고 있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현상이다.
나찌의 전체주의 권력과 인권의 전면적 박탈을 경험하였던 독일인들에게 기본권과 그 기본권을 보장하는 최후의 수단인 헌법소원 제도는 남다른 의미가 있다. 사전심사의 재판부에게 헌법소원의 심사 여부를 재량으로 결정하는 권한을 인정한다고 할 때 독일의 법률가들이 극복하기 어려운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기본권 침해의 구제를 요청하는 청구인의 헌법소원은 적법한 청구인 이상 심사해야 한다. 그런데 그 심사를 법에 정한 기준도 아닌 재판부의 재량으로 거절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런 제도가 과연 기본권 보장을 위한 헌법소원 제도, 그리고 그 헌법적 가치와 조화될 수 있는가의 문제가 발생한다.
문제는 재판부에게 재량을 부여하지 않는 현재의 사전심사 제도의 운영상황이 어떠한가 하는 곳에서 출발해야 한다. 헌법재판소가 감당할 수 있는 심판의 수는 한정되어 있다. 뒤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 사전심사 제도의 운영은 여러 측면에서 왜곡되어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적법성의 요건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방식으로 대부분의 헌법소원 심사를 거절하고 있다는 점이다. 과연 재판부에게 재량권을 부여하고, 그 대신 기본권 침해와 기본권 관련 쟁점의 중요성을 중심으로 논의하도록 하는 제도와 재량권을 부여하지 않는 대신 적법성에 관한 엄격한 심사를 통해 심사사건의 수를 통제하는 제도 가운데 과연 어떤 제도가 기본권 보장을 위해 나은 제도일까?
사전심사 제도의 본질적인 기능은 객관적으로 또는 당사자 주관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을 판별하는 절차이다. 그 판단을 입법자가 정해 놓은 법적 기준으로 결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어떻게 정해 놓는다고 하여도 구체적 사건을 결정하기에는 지나치게 추상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재판부가 구체적 사건을 보고 여러 요소를 고려해서 심판해야 하는 문제이다. 구체적인 요건 규범을 만들어내어 실체적인 기준으로 권리를 보장하기 어려울 때에는 절차적인 장치를 통해 권리를 보장하는 방법도 있다. 가령, 공정한 심판관들로 구성된 위원회를 구성하고, 그들이 공정하게 심의할 수 있는 일정한 절차와 그 심의기준을 만들어 그 절차 속에서 논의하고 결정하도록 하는 방법이다.
헌재에는 다양한 전문성, 헌법과 기본권에 대한 각기 다른 관점과 가치를 갖는 16인의 재판관이 있다. 헌법재판이 갖는 형량의 요소는 법의 적용을 주안으로 하는 일반법원의 재판과 달리 다양한 가치와 철학이 개입된다. 재판부 구성원마다 다른 철학과 의견에 기초하여 다른 형량에 관한 의견을 가질 수 있으며, 이들은 토론과 설득을 통하여 판단하고 결정한다. 이것이 다양한 관점을 갖는 다수의 헌법재판관들이 헌법재판소를 구성하도록 한 이유이다. 이미 이런 조건이 갖추어져 있다면 헌법재판소의 공정하고 다양한 구성을 활용하는 절차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나쁘지 않은 대안이 될 수 있다.
과연 어떤 사건이 헌법소원심판의 정당한 대상인가에 관하여 개별 재판관들이 갖고 있는 기준은 다양하다. 추상적으로는 동일할지라도 구체적으로 사안에 적용하여 내리는 판단은 각자 다를 경우가 많다. 개별 재판관들의 형량 판단에는 각자 자신의 헌법적 가치판단이 개입되는 것이며 이들 각기 다른 가치판단이 서로 고립적으로 표시되고 마는 것이 아니라, 토론하고 설득하는 등 하나의 집합체로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이다. 헌법소원심판의 대상인가는 재판부가 그에 관하여 실질적으로 토론하고 논의하여 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구조와 방식을 갖추고 있는 것인가 하는 절차적인 기준이 중요한 조건이 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아래에서는 독일 헌법재판소의 사전심사 제도에서 나타나는, 제도의 왜곡된 운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특이한 현상을 살펴볼 것이다. 그것은 헌법소원의 사전심사를 3인의 소부 재판부에게 맡기고, 사전심사에서 불심사 결정을 내릴 때 재판부에게 재량을 부여하지 않으며, 또한 그 결정을 소부 재판부를 구성하는 3인 재판관의 전원일치로 결정하도록 하고 있는 사전심사제도의 무리한 설계와 무관하지 않다.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사건선별 절차를 전원재판부에게 맡기는 제도, 그리고 그 재판부를 구성하는 아홉 명 대법관이 평의를 하여 사건선별 여부를 재량으로 결정하도록 하는 제도가 갖는 가치를 다시 한번 고려하고, 평가할 필요가 있다.
정식 재판부가 심판하는 사건의 수는 헌법재판소가 설립된 이래 큰 변화없이 유지하고 있다. Korioth는 접수되는 사건 수가 지속적으로 증가하였다는 점을 감안하다면 이것은 헌재가 정식재판부의 사건의 수를 조절하고 있음을, 사건의 중요한 의미를 기준으로 사건을 선별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추론하였다.74)
만일 헌법재판소가 사건의 중요성을 기준으로 하여 사건을 선별한다고 하면 미국 연방대법원과 사건선별제도와 비슷한 방식으로 제도를 운영하는 것인가? 그렇다고 보기 어렵다. 문제는 의사소통의 주제와 초점, 그리고 의사소통의 진실성이다.
사전심사 단계에서 97% 이상의 사건들이 탈락하고 있으며, 외부적으로 드러난 중요한 관건이 적법성이라고 한다면 당사자와 대리인은 적법성의 요건을 충족하였음을 열심히 주장하고 다투게 된다. 이는 사전심사를 담당하는 재판부의 논의 또한 마찬가지이다. 주심재판관과 그를 보조하는 헌법재판관의 논의와 보고가 적법성의 요건이 요구하는 기준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작성된다. 지정재판부의 평의도 역시 적법성의 충족 여부에 맞춰지며 그 결론에 따라서 사건이 처리되는 것이다. 결국 사전심사에서 지정 재판부가 현실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적법성의 충족 여부(보충성과 이유제시의 요건에서 요구하는 내용들, 당사자가 일반법원의 소송수행과정에서 그 소송절차, 구제절차를 제대로 진행했는지 여부, 헌법소원의 청구서에 여러 가지 사유를 제대로 설시했는지 여부 등) 이다.
질문은 힘을 갖고 있다. 어떤 질문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답과 결과가 나올 수 있다. 헌법재판의 주제를 결정하는 중요한 단계인 사전심사단계에서 사건의 중요성을 기준으로 선택이 이뤄질 수밖에 없다면 그 과정에서의 핵심적 질문은 과연 당신이 제기하는 사건은 왜, 어떤 관점에서 헌법적 중요성을 갖는가, 당신의 기본권 침해가 중대한 이유는 무엇인가 라고 하는 질문이어야 한다. 이러한 질문들이 제기될 때 헌법재판에 합당한 논의와 토론이 진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연방대법원의 사건선별 제도에서는 사건선별 단계의 심리를 본안의 심리와 분리하여, 이 단계에서는 오로지 사건, 특히 당사자가 제시한 가장 중요한 문제인 쟁점사항의 헌법적 중요성을 중심으로 주장하고 토론하게 한다. 물론 사건선별 단계에서 사건이 적법성 요건을 갖추고 있는가 하는 것도 검토되지만, 그것은 부수적이고 기술적인 사항일 뿐, 심사의 본령이 아니다. 따라서 적법성의 요건이 추가된다거나 강화되는 현상은 나타나지 않는다. 사건의 필터링과 선별에서 중요한 것은 적법성의 요건이 아니라 사건과 쟁점이 갖는 중요성이기 때문이다. 당사자와 대리인은 바로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것이고, 재판부의 논의와 평의도 바로 이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독일 헌법재판소의 사전심사 제도는 단지 수단을 가리지 않고 사건을 버리기 위한 제도가 아니다. 사건의 내용을 살펴, 그 헌법적 중요성과 헌법재판소가 담당해야 할 헌법적 과제 등 다양한 요소를 형량하여 헌법재판소가 심판할 사건을 판단하는 제도이다. 적법성 요건의 판단으로 이 형량을 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적절하지 않다.
현재 독일 헌법재판소의 사전심사 제도는 적법성의 요건 심사와 결합하여 작동하고 있으며, 그 요건은 점차 강화되어 헌법재판소의 사건의 부담을 조절하는 제도로 변모하였는바, 이는 사건의 헌법적 중요성을 토론을 통해 발견해야 하고, 헌법적 과제와 당사자의 권리구제를 형량하여야 하는 사전심사 제도의 본래 과제와 거리가 있는 왜곡된 제도 운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기본권 침해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한다고 하는 헌법재판소의 책임은 헌재에게만 부여된 것이 아니라, 일반법원에도 동일한 강도로 맡겨져 있는 책임이다. 어느 기관이 일방적으로 위에 있거나, 어느 한 기관이 책임을 독점하는 관계가 아니라 ‘과제에서 동등하고 평행한 관계(Aufgabeparallelität)’이다. 연방헌법재판소는 헌법소원의 심사범위와 권한을 확정할 때 헌법재판소의 기능, 일반법원과의 헌법적인 분업관계를 고려해야 한다고 판시하고 있다.75) 일반법원과 헌법재판소의 조화로운 분업관계를 실현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독일 헌법재판소가 해석을 통하여 기본권의 범위를 확장함에 따라 재판에 대한 헌법소원심판은 종전의 기본권 침해에 대한 통제에서 일반적 합법성 통제로까지 확장되었다. 헌법재판소가 헌법의 수호자로부터 개별법 적용의 감시자, 나아가 일반법원 재판의 오류를 정정하는 사법기관으로 변질되면서 일반법원의 기본권 보호자로서의 역할은 위축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하급심의 오판을 시정하는 통상의 상고심 법원이 아니라고 하는 점을 자신의 분명한 정체성으로 선언하고 있다. 그 정체성을 실현하는 수단이 바로 사건선별 제도인 것이다.76) 이와 같은 연방대법원의 태도는 연방대법원의 역할과 다른 하급법원의 역할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게 할 뿐 아니라 여러 법원의 다양한 법해석이 서로 경쟁하게 함으로써 공동체의 법치주의 실현에도 기여한다.
헌법재판소의 사전심사 제도가 당사자의 권리침해 또는 하급심 재판의 잘못된 법률해석과 적용을 중요한 판단기준으로 삼는다면, 그리하여 헌법재판소가 하급심의 오판을 일일이 교정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자임한다면 일반법원과 헌법재판소 상호 간에 대등한 협력관계에서 누릴 수 있었던 다양한 법치주의적 이익이 손상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법 해석에 관한 서로 다른 관점을 제시하는 일반법원과 헌재 사이의 대화가 단절될 위험이 크다. 헌법재판소와 일반법원 사이에서 시민들의 기본권 보호라는 과제를 적절하게 분배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는 사전심사 제도의 운영에서 일반법원의 재판을 존중하는 원칙과 관행을 만들어내어야 한다. 헌법재판소가 자신의 역할의 본령인 헌법의 해석의 중요쟁점과 심각한 기본권 침해 문제에만 개입한다면 일반법원도 헌법재판소의 그러한 판단과 기본권 존중의 가치를 실현시키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헌법재판소가 일반법원을 일일이 감독하여 수동적인 관계의 사법기관으로 만들기보다는 일반법원이 스스로 기본권 보장의 보루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구도를 만들어내는 것이 기본권 보장을 위한 바람직한 방향인 것이다.
독일 헌법재판소의 헌법소원 심판청구에서는 ‘쟁점사항’과 같은 구체적 쟁점을 한정하고 확정하는 장치가 없다. 당사자는 자신이 주장하고 싶은 모든 사항을 망라적으로 나열할 수 있고, 그 사건이 사전심사를 통과한 이상 재판부는 그 모든 사항에 대하여 심판해야 한다. 사전심사의 심판에서도 사건 전체를 살펴서 판단할 수밖에 없다. 대리인들은 사전심사를 통과하기 위해서 최대한 많은 쟁점을 문제 삼고 다투게 되기에 이를 심리하고 판단해야 하는 재판의 비효율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쟁점사항’이라고 하는 연방대법원의 제도적 장치는 현재 독일 사전심사 제도가 겪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장치이므로 그 도입을 적극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
첫째, 이 장치는 당사자로 하여금 사건에서 판단받고자 하는 쟁점을 청구단계에서부터 확정하게 함으로써 사건선별 절차의 진행이 효율적으로 진행되도록 도와줄 수 있다. 재판부는 당사자가 정한 쟁점사항으로 한정하여 선별할 사건의 중요성을 판단한다. 이는 사전심사의 효율을 극대화하여 사전심사의 재판을 정식재판부가 담당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하는 장치로서 기능할 수 있다.
둘째, 쟁점사항 제도가 재판부의 사건부담을 줄여줄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쟁점사항을 통하여 본안의 심판의 대상을 확정하기 때문이다. 한 사건이 갖는 수 많은 쟁점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하나의 쟁점만을 판단할 수 있다면 본안을 판단하는 정식재판부의 부담을 대폭 줄여줄 수 있다. 또한 심판대상을 좁게 확정하는 효과를 통하여 본안판단의 논의를 집중시키는 효과도 낳는다. 심판의 대상, 즉 쟁점사항을 확정하는 것이 청구인이므로 재판부에 의한 자의적인 심판대상의 확정이라거나 심판누락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청구인은 쟁점사항을 신중하게 결정하게 되고, 당사자들을 비롯한 모든 소송관여 주체들이 중요한 쟁점사항을 중심으로 모든 노력을 집중하여 논의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쟁점사항 제도는 사회적 관심을 재판 논의의 초점에 맞출 수 있도록 하여 헌법재판을 통한 민주적인 여론형성과 토론이 가능하도록 해 준다. 헌법재판의 대상이 기본권과 관련된 구체적 쟁점인 것이므로 시민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다양한 관점을 가지고 있는 시민과 단체들이 헌법소원 심판을 계기로 해당 쟁점에 관하여 토론하고 논쟁할 수 있다.
Ⅵ. 결어
현재 우리 헌법재판제도는 헌법재판소법을 통해 재판에 대한 헌법소원을 금지하고 있다.77) 대법원을 중심으로 하는 우리 법원은 합헌적 법률해석, 헌법재판소의 기본권 해석의 판단을 받아들이는 것에도 주저하거나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법원의 재판에 대한 헌법소원 제도를 도입하는 것은 우리 법치주의의 제고를 위해 필요한 과제이다.78) 하지만 재판에 대한 헌법소원을 도입한다는 것은 헌법재판제도의 실무 측면에서 극복하기 쉽지 않은 도전과 직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재판에 대한 헌법소원이 도입될 경우, 일반법원의 최종심에서 패소한 당사자들은 재판에 대한 헌법소원을 통해서 마지막 승소 기회를 찾으려고 할 것이다. 만일 이러한 심판청구를 제도적으로 대비하지 않는다면 헌법재판소는 과중한 사건부담으로 그 기능의 한계에 이르게 될 것이 자명하다. 재판소원 제도 도입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 도입의 취지가 제대로 실현되어야 하며, 헌법재판소가 담당해야 할 본연의 역할 수행과 잘 조화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청구인의 기본권 구제와 헌법재판소가 담당해야 하는 본연의 역할을 형량할 수 있는 사전심사 제도가 필요하다. 독일 헌법재판소의 사전심사 제도에 대한 연구는 그런 의미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문제는 독일 헌법재판소의 사전심사제도의 제도설계와 실무 진행 상황이 그다지 이상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독일 헌법재판소의 전현직 재판관을 비롯한 많은 실무가들과 학자들이 사전심사 제도의 설계와 실무관행에 관한 여러 가지 문제와 비판점을 제기하고 있다. 본 논문에서 미국 연방대법원의 사건선별 제도와 비교하는 연구를 진행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독일 헌법재판소는 사전심사 제도를 운영하면서 모든 헌법소원심판 청구인의 심판받을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는 입장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고 있다. 그러면서 헌법과 법의 통일적 해석, 그리고 기본권과 헌법의 보호라는 임무 역시 소홀히 하지 않으려고 한다. 양자 모두를 완벽하게 수행하는 것은 애초에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시도였기에 실무상 여러 가지 문제와 어려움이 초래될 수밖에 없다. 결정적으로 독일의 사전심사 제도는 정식재판부(Senat)가 아닌 소부(Kammer)에서 사전심사를 담당하도록 하고 있는데, 이것은 헌법소원의 사전심사가 갖는 중요한 의미를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헌법소원 사건에 대한 사전심사의 판단은 헌법재판소의 판단주제를 결정하는 문제이기에 본안에 대한 심판 못지 않은 중요성을 갖는다. 따라서 사전심사는 정식재판부 또는 전원재판부에서 담당하도록 해야 한다. 다양한 관점을 갖고 있는 여러 헌법재판관들이 진지하고 열린 토론을 통하여 중요한 기본권 쟁점을 갖고 있는지에 관하여 심리해야 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미국 연방대법원의 사건선별제도는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비록 헌법재판소의 헌법소원과 관련한 제도가 아니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미국 연방대법원의 사건선별 제도는 사건의 심사 여부에 관한 헌법적 형량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관한 여러 시사점을 제공한다.
한 나라의 최고법원과 헌법재판소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임무를 수행한다. 첫째는 하급심과 일반법원의 위법하고 잘못된 판단을 통제하는 책임이고, 둘째는 헌법을 포함한 규범의 유권적 해석을 통해 판례를 형성하는 책임이다. 최고법원과 헌법재판소의 사법자원에는 한계가 있기에 이 두 가지 책임을 모두 완벽하게 달성할 수는 없다. 두 가지 책임은 서로 상충하는 성질을 갖고 있고, 어느 한편을 달성하면 다른 한편은 소홀해지는 긴장관계에 놓여 있다. 결국, 한 나라 헌법재판소와 최고법원의 역할은 이 두 가지 책임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점을 찾는가에 따라 결정되며, 사전심사 제도와 사건선별제도는 이 균형점을 찾아가는 가장 중요한 제도이며 절차인 것이다. 우리 헌법재판제도의 이상적인 모델인 독일 헌법재판소가 사전심사제도에서 만큼은 우리가 본받을 만한 실무를 만들어내고 있지 못하다는 점은 우리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준다. 재판에 대한 헌법소원 제도의 도입을 위해서는 사전심사 제도의 설계에 관한 충분한 숙고와 정성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