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는 말
법률은 사회적 현실에 대한 대응이기 때문에 입법자는 법률을 제개정할 때 사회현상과 사회과학에 관한 지식을 활용하기 마련이다. 입법자는 문제적 사회현상의 확인에서 출발하여 어떤 입법수단의 그에 대한 영향력을 예측적으로 평가하고 그 투입 여부를 최종 결정한다. 이와 같이 입법은 사회현상의 인식과 투입하고자 하는 입법수단의 효과 예측에 관한 경험적 지식을 필요로 한다. 오늘날 ‘좋은’ 입법이란 단순히 정치적 합의의 산물임을 넘어 정확한 사실인정과 합리적인 예측판단에 기초한 결정일 것을 요구한다.1) 법률의 위헌 여부를 판단하는 과정에서 헌법재판소 또한 이러한 입법자의 사실의 인정과 예측적 판단을 재검토하게 된다.
다른 한편, 전통적으로 법학에서 규범적 판단과 경험적 사실은 엄격히 분리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왔다. 법해석과 법형성을 포괄하는 의미에서의 법발견은 전적으로 규범적 판단으로 인식되었고, 전형적인 법적용 양식인 포섭(subsumption)에서 또한 소전제로서 사실의 확정과 대전제로서 법규범의 의미 확인은 철저히 분리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오늘날 범규범의 이해에 경험적 사실의 영향력을 인정하는 해석학적(hermeneutics) 법이론과2) 어떤 법해석 대안이 초래하게될 사회적 효과를 고려하는 결과고려적 법해석 방법이 등장하고,3) 법적용 양식으로 포섭뿐만 아니라 형량(balancing)이 중요한 의미를 획득함에 따라 규범적 판단에서 경험적 사실의 역할을 간과할 수 없게 되었다.4) 법률의 헌법 위반 여부를 판단하는 광의의 위헌법률심판에서도5) 헌법의 발견과 단계적 형량의 수행으로서 과잉금지원칙 적용에서 경험적 사실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입법의 기초되는 사회적 사실과6) 투입하고자 하는 입법수단의 장래에 대한 평가, 예측에 활용되는 지식을 다루는 입법사실론은 우리 헌법학계에서도 논의되어온 주제이다. 그간 우리 헌법학계에서 입법사실론은 때로는 입법재량을 논의하는 중에,7) 때로는 헌법재판의 증명책임을 논의하는 중에,8) 주로는 헌법재판의 심사강도를 논의하는 중에9) 산발적으로 다루어져 왔으나, 그 의미, 유형, 위헌법률심판에서의 취급 등에 대해서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접근이 시도된 바는 드물고,10) 그에 대한 관심 또한 상대적으로 부족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심 부족의 밑바탕에는 위헌법률심판에 변론주의가 아닌 직권탐지주가 적용되고 있는 법제도적 현실, 위헌법률심판은 사실과는 무관한 전적으로 규범적인 판단이라는 인식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헌법재판소 창설과 함께 민사소송법학이 헌법재판을 스스로의 이론체계에 포섭할 동기를 상실했다는 점과 함께, 헌법실무와 헌법학이 입법사실론보다는 심사기준론 그 자체에 관심을 두어왔다는 점 또한 그 원인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본고에서는 입법사실이 헌법재판, 특히 위헌법률심판에서 어떠한 함의를 갖고, 관련 쟁점들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접근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본고는 우선 경험적 지식의 규범적 판단에서의 활용 양상을 검토한다. (Ⅱ) 다음으로 입법사실의 의미와, 유형을 검토한다. (Ⅲ) 그런 연후에 위헌법률심판에서 입법사실이 문제되는 국면들을 포착하여 해당 쟁점과 입법사실의 상호 관련성을 고찰한다. (Ⅳ) 마지막으로 우리 헌법실무에 대한 제언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Ⅴ)
Ⅱ. 규범적 판단에서 경험적 지식의 역할
‘존재’(is)에서 ‘당위’(ought)를 곧바로 도출해낼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과 규범의 상호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다. 우선, 규범은 우리가 사회현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규정한다. 비유하자면, 야구의 규칙을 알고 있는 사람과 야구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이 같은 야구 경기를 관전한다고 하더라도 그 이해는 완전히 다를 것이다. 역으로, 사회현상은 우리가 규범적 판단을 내리는데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두 사람이 민주주의원칙이라는 동일한 규범적인 개념을 공유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위치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 따라 구체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는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11) 이와 같이, 사실과 규범은 상호 영향을 미치고, 규범적 판단에서 경험적 지식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오늘날 법과경제학파(law and economics school) 입장과 같은 공리주의적 관점(utilitarian approach)이 법적 사고에 투영됨에 따라, 경험적 지식이 규범적 판단에 미치는 영향력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공리주의적 사고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는 결과고려 논증 또는 법익형량은 수단과 결과 또는 수단과 효과간에 ‘인과관계적’ 추론을 요구하고,12) 그러한 인과관계를 판단함에 있어서 경험적 사실과 사회과학적 지식이 활용되고 있다.
헌법재판의 경우에도 경험적 사실이 적지않이 활용된다. 파이그만은 헌법재판에서 문제되는 사실을 3가지로 분류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헌법재판에는 전형적인 사법사실(adjudicative facts)로서 사안관련 사실(case-specific facts) 이외에, 헌법법리사실(constitutional doctrinal facts)과 헌법심사사실(constitutional reviewable facts)이 포함된다.13) 여기서, 헌법법리사실은 헌법발견에 활용되는 사실로, 헌법심사실은 헌법적용에 활용되는 사실로 각각 이해할 수 있다. 이하에서는 이 구도에 따라 헌법재판에서 경험적 지식이 규범적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양상을 헌법발견과 헌법적용으로 나누어 확인해본다.
헌법의 추상성, 역사성, 개방성을 고려해보면 헌법발견에 있어서도 경험적 지식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밖에 없다. 예컨대, 헌법 제36조 “혼인”의 외연에 동성혼을 포함시키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헌법해석이든 아니면 헌법형성(헌법변천)이든 간에, 혼인의 목적과 역사적 의미변천을 지지하는 사회적 사실을 제시하여 주장을 뒷받침할 것이다. 다른 예로, 헌법 제21조 제2항에서 절대적으로 금지하고 있는 사전“검열”에 상업적 광고표현에 대한 사전적 규제가 포함될 것인지 여부를 결정함에 있어서도 헌법제정권자의 의사나 그 규정의 목적, 그리고 허용 또는 불허용시 예상되는 결과 등에 대한 경험적 사실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14) 이와 같이 헌법형성을 시도하거나 헌법의 해석방법 중 역사적 해석, 목적론적 해석, 또는 결과고려 논증을 원용하는 경우 해석결과의 정당성을 경험적 사실에 의해 뒷받침하는 것이 불가피하게 된다.
이러한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그리고 역사적 사실은 헌법발견의 합리성을 뒷받침하는 사실이다. 헌법해석이 조문의 문의적 검토에 의하여만 관념적으로 수행되는 것을 피하고 충분한 사실에 기초하도록 하는 것은 헌법해석의 합리성 확보를 위해 요청되는 바이다. 사실로부터 규범이 곧바로 도출되는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규범의 형성이나 어떤 규범의 전향적 해석이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일정 부분 사실에 근거할 필요성이 있다. 파이그만은 헌법법리사실은 헌법상 교의(tenets)에 해당하는 헌법의 내용을 결정하는데 활용되는 사실이라고 한다.15) 미국 헌법학과 헌법실무에서 통용되고 있는 헌법 해석방법인 원의주의(originalism)의 경우,16) 원의를 특정하는 역사적 사실의 제시를 필요로 하고, 원의주의에 입각한 헌법해석은 그러한 역사적 사실에 기초해야만 설득력을 가질 수 있게 된다.
경험적 지식은 기본권의 보호영역을 획정하는 경우에도 문제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헌법 제21조 제1항 언론출판의 자유의 보호영역에 음란표현을 포함시킬지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서 전제로 고려되는 사실은 개별사건에 한정되는 구체적인 사실이라기보다는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사실이다. 이 경우에도 형량이 필요할 수 있는데, 이러한 형량을 정의(definition) 형량 또는 해석(interpretation) 형량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형량이란 구체적인 사안의 특수성에서 벗어나, 문제가 되는 추상적 이익을 미리 선별하여 형량하고, 헌법상 허용되는 범위, 혹은 금지되는 범위를 결정하는 작업이다.17) 이 경우에도 경험적 지식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헌법해석에서 경험적 지식이 활용되는 것보다 훨씬 더 빈번하게 헌법적용 단계에서 사회적 사실이 규범적 판단에 영향을 미친다. 우선, 헌법상 평등원칙을 적용함에 있어서 차별의 존재 여부 판단은 규범적 판단이다. 그런데, 이른바 간접차별이 문제되는 사안의 경우 차별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규범적 판단이지만, 그 과정에서 차별의 효과 판단이 필요하고 유의미한 차별 효과의 인정은 실증적이고 통계적인 데이터에 기초하지 않을 수 없다.18) 이와 관련하여, 널리 알려진 사례는 미연방대법원의 Brown v. Board of Education 사건이다.19) 이 사건에서 연방대법원은 선례인 Plessy 판결에서 확립된 “분리하되 평등한 법리”(separate but equal doctrine)를 파기하기 위해서, 분리 정책이 사회적 고정관념을 증폭시키는 차별 효과를 발생시키고 있다는 점을 심리학적 연구 결과를 토대로 인정했다. 간접차별의 판단은 차별의 확인이라는 규범적 판단에 경험적 지식이 활용되는 전형적인 예가 된다.20)
헌법적용 측면에서 경험적 사실이 규범적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전형적인 예는 과잉금지원칙의 적용 과정에서 나타난다. 흔히 규범통제는 법률의 헌법 위반 여부를 판단하는 순수히 규범적인 판단으로 이해되곤 하지만, 실상은 상위규범과 하위규범을 단순히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매개로 하여 하위규범이 상위규범에 위반되는지를 판단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21) 주지하다시피, 과잉금지원칙은 법률이 정당한 목적을 추구하고, 목적과 수단간에 합리적 연관성이 존재하며, 덜 제한적이면서도 동등한 수준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은 대안적 수단이 존재하지 않고, 기본권의 제한과 달성하려는 목적간 비례관계가 유지될 것을 요청한다.22) 우선, 수단적합성 단계에서 어떤 입법수단이 입법목적을 촉진하는지 여부의 판단은 상당 부분 경험적 지식에 의존한다. 다음으로, 침해최소성 단계에서는 선택된 입법수단과 대안적 입법수단간 비교가 수행된다. 이러한 비교는 원칙적으로 규범적 판단이지만, 그 전제로서 각 입법수단의 기본권 제한 정도 판단과 목적 달성 효과 판단의 경우에는 경험적 지식이 필요하다. 법익균형성 판단 또한 충돌하는 법익간 우선 순위 결정이라는 규범적 판단이 본질이지만, 침해되는 기본권의 정도와 달성되는 공익의 정도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경험적 지식의 활용은 불가피하다.23)
간통죄 사건을 예로 들어보면,24) 헌법재판소는 혼인제도 보호와 부부간 정조의무의 수호라는 입법목적을 달성하는데 형벌이라는 수단의 투입이 효과적인지, 민사적 제재라는 덜 제한적인 입법수단만으로 동등한 수준의 입법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지, 나아가 간통죄 형사처벌로 인해 초래되는 기본권 제한의 정도가 어떠한 수준인지 혹은 간통죄 형사처벌 폐지가 초래할 공익에 미치는 해악의 정도가 어떠한 수준인지 등에 관하여 구체적인 사실이나 경험칙에 입각하여 판단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헌법재판소가 과잉금지원칙을 적용하여 다투어지는 법률의 위헌 여부를 판단할 때에는 입법자가 인정하고 예측한 입법사실을 조사, 확인한 후 그에 기초하여 법적 추론을 수행하게 된다. 과잉금지원칙을 적용하는 위헌법률심판절차는 입법자의 ‘가치판단’에 대한 심사인 동시에, 입법자의 ‘사실인정’과 ‘예측판단’에 대한 심사이기도 하다. 위헌법률심판의 대상이 되는 법률은 입법의 기초되는 사실에 근거하여 합헌성 여부를 심사받기 때문에 입법사실은 헌법재판의 귀추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이처럼 위헌법률심판에서 논증의 질을 문제삼는 경우, 주로 문제되는 것은 헌법해석의 타당성보다는 올바른 입법사실의 확인과 그러한 사실을 기초로 한 예측적 평가의 합리성이라고 할 수 있다.
Ⅲ. 입법사실의 의미와 유형
국내 문헌에서 입법사실의 개념을 규정함에 있어서는 주로 데이비스의 사법사실(adjudicative facts)/입법사실(legislative facts) 준별론이 활용되고 있는 듯하다.25) 데이비스의 입법사실 이해방식은 우리 나라뿐만 아니라 커먼로 국가와26) 독일까지에까지 영향을 미쳤다.27) 이하에서는 입법사실론의 발원지라 할 수 있는 미국에서의 논의 상황을 검토함으로써 입법사실의 의미를 규정해보고, 위헌법률심판, 특히 과잉금지원칙 적용에서 문제될 수 있는 입법사실의 유형을 확인해본다.
연방대법원의 위헌심사에서 사회적 사실의 역할에 대해서는 Lochner v. New York 사건28) 이후 지속적으로 논쟁거리였지만,29) 입법사실이라는 용어 자체는 미국의 행정법학자 데이비스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다.30) 데이비스는 행정기관과 법원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법외적 자료가 사용된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에 따라 데이비스는 전형적으로 재판에서 문제되는 사법사실과 행정기관이나 법원의 법형성에서 문제되는 입법사실을 구별했다. 그에 따르면, 사법사실은 분쟁의 직접 당사자와 관련된 사실로서 “누가, 어디서, 언제, 어떤 동기나 의도를 가지고 무엇을 했는지”에 관한 사실을 의미한다. 이와 달리, 입법사실은 법률이나 정책의 내용 형성과 관련된 사실로서, 행정기관이나 법원이 “법이나 정책의 내용을 결정하거나 어떤 조치를 취할지 여부를 결정함에 있어서 판단이나 재량의 행사 여부를 결정하는데 도움이 되는” 사실을 뜻한다. 이러한 입법사실은 일반성을 갖는 것으로서 직접적인 소송당사자와는 관련이 없다.31) 이와 같이 데이비스는 입법사실을 ‘기능적 의미의’ 입법과 관련된 사실로서 법형성의 기초되는 사실로 규정했다.
데이비스의 입법사실 개념은 법원의 증거조사에 있어서 사법사실과 다른 특수성을 확보하기 위해 도입되었다. 데이비스는 커먼로체계에서 법원이 법형성, 즉 사법적 입법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과 헌법해석에서 사회적, 경제적 사실자료를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32) 행정기관이나 법원이 ‘입법적’ 기능을 수행하거나, 헌법해석에 관여할 때 사회적 사실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사법사실에 적용되는 증거규칙이 이 경우 그대로 적용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것이다.33) 데이비스에 따르면, 입법사실을 인정하는 증거규칙은 특정 사례의 당사자에만 관계되는 사법사실을 인정하는 규칙과 달라야 한다. 데이비스는 법원에 현저한 사실(judicial notice)에 관한 증거규칙은 입법사실의 경우에는 그대로 적용될 수 없고, 법원은 당사자주의에 따른 증거 규칙에서 벗어나 입법사실을 자유롭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34)
이와 같이 미국에서 입법사실론은 ‘법의 기초를 형성하는 사실’이라는 의미로 도입되었고, 그러한 사실은 당사자주의적 구조에서 요구되는 증거의 수집과 인정 규칙에서 벗어나 법원이 자유롭게 그 사실을 확인하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실천적인 함의를 내포하고 있었다. 데이비스가 주장한 사법사실/입법사실 구별과 증거법상 특별한 취급은 그 이후 미국의 입법사실론 논의에서 큰 틀에서 변화없이 계승되고 있다. 데이비스 이후 그 밖에 주목해볼 만한 논의는 모나한과 워커의 연구와35) 파이그만의 연구에서 찾아볼 수 있다. 모나한과 워커는 입법사실의 인정을 위해서 사용되는 사회과학을 ‘사회적 권위’(social authority)라고 불렀다. 그들은 특정 사례에 국한되지 않고 미래지향적이고 일반성을 가진 사회과학적 지식을 법원이 법적 선례로 취급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법형성에 활용되는 사회과학적 연구는 사실보다는 법과 유사하기 때문에,36) 당사자가 제출하지 않은 선례를 법원이 자유롭게 찾아낼 수 있는 것처럼 법원은 사회과학 연구를 독자적으로 조사해서 인정할 권한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37) 입법사실을 사실과 법의 중간에 위치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던 셈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파이그만은 헌법재판에 활용되는 사실을 사안관련 사실, 헌법법리사실, 헌법심사사실로 세분화하고, 일반적인 사실이 헌법적용뿐만 아니라 헌법해석의 경우에도 문제된다고 보았다. 파이그만 역시 헌법법리사실과 헌법심사사실의 인정에는 전통적인 증거의 수집과 인정에 관한 규칙이 적용되어서는 안된다고 보았다.38)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미국에서 입법사실은 주로 법형성의 기초를 이루는 사실이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왔다. 헌법재판과 관련해서는 법률심인 연방대법원의 ‘사실’ 조사와 인정을 허용하고, 당사자주의 소송구조하에서 대법원에 의한 ‘직권’ 증거 조사와 인정을 허용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등장했다. 데이비스 이후 입법사실론은 미국 헌법학에서 지속적으로 논의되어온 주제이지만, 데이비스가 도입한 입법사실/사법사실의 구별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모노한과 워커의 연구는 사회과학적 지식이 법과 사실의 중간에 위치한 경험칙의 성격을 갖는다는 점을 지적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파이그만의 헌법법리사실/헌법적용사실 구별은 헌법해석이나 헌법형성(헌법변천)의 경우에도 경험적 지식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을 밝힌데 있어서 공헌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 미국의 논의를 참조하고, 다만 우리의 경우 위헌법률심판과 관련하여 입법사실의 개념과 유형이 주로 문제되고 있다는 점을 고러하여, 본고에서는 헌법해석사실을 전형적인 입법사실인 헌법적용사실과 구별하고, 후자만을 입법사실로 규정하기로 한다.39) 이에 따라, 본고에서는 입법사실을 ‘법률을 제개정하는 경우 그 배경이 되는 사회적 사실로서 법률의 합리성과 필요성을 뒷받침하는 사실’로 정의한다.40) 이하에서는, 이러한 개념을 전제로 논의를 이어가기로 한다.
위헌법률심판에서 입법사실에는 엄밀한 의미에서 두 유형이 존재한다. 통상 “실존하는 특정 사실 상태에 대한 입법자의 주장”을 사실발견(Tatsachenfeststellung)으로 정의하고, “미래의 사실관계에 대한 입법자의 기대”를 예측판단 (Prognoseentscheidung)이라고 표현한다.41) 여기서 사실발견 층위에서 문제되는 입법사실과 예측판단 층위에서의 문제되는 입법사실은 그 성격을 달리 한다. 전자의 입법사실이 입법의 합리성과 필요성을 뒷받침하는 협의의 입법사실이라면, 후자는 그러한 협의의 입법사실을 전제로 하여 장래의 경과에 대한 평가, 예측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문제되는 일종의 경험칙으로서의 입법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42) 예를 들어, 국민의 건강 보호를 목적으로 약국간 거리제한을 수단으로 하는 입법이 도입된다고 할 경우, 약국간 과도한 경쟁으로 약의 난매(亂賣)로 인한 오남용이 발생하고 있다는 사회적 사실은 협의의 입법사실에 해당한다. 이러한 입법사실은 법률의 필요성과 합리성을 뒷받침하는 입법의 기초되는 사실이다. 문제는 국민의 건강 보호 목적으로 도입된 거리제한이라는 입법수단이 약국간 과도한 경쟁을 억제하여 약의 오남용을 방지하게 되리라는 장래 경과의 예측을 정당화하는 경우에는 협의의 입법사실을 넘어서 그러한 예측을 뒷받침하는 별도의 사실이 요구된다는 점이다.43) 이러한 규범적 판단을 정당화하는 입법사실은 통상 경험칙에 속하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위헌법률심판에서 전형적으로 문제되는 헌법적용 양식은 형량이며, 형량을 단계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과잉금지원칙이다. 과잉금지원칙에서 형량의 각 단계는 종국에는 포섭의 구조를 취하게 된다.44) 수단적합성은 입법목적에 대한 입법수단의 효과 판단으로서 일정한 사실에 근거한 ‘인과관계’ 판단이며, 침해최소성 또한 일정한 사실에 근거하여 경합하는 입법수단들간 ‘비교’ 판단을 수행하는 것이고, 법익균형성은 충돌하는 법익간 ‘우선순위’ 판단 중에 사실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인과관계, 비교, 우선순위 결정은 그 자체로는 법적용으로 규범적 판단이고 법적 문제이지만, 그 전제로 활용되는 사실이나 그러한 사실을 기초로 규범적 판단을 하는데 활용되는 경험칙은 사실의 문제로서 증명의 대상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수단적합성, 침해최소성, 법익균형성은 일종의 ‘규범적 요건’에 해당하고, 그 충족 여부 판단에는 기초사실과 경험칙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규범적 요건과 그 인정의 기초사실, 그리고 경험칙을 동원한 그 인정의 구조가 여실히 관찰되는 것이 민사소송법상 이른바 일반조항의 경우이다. 예를 들어, 불법행위책임의 요건으로서의 과실 같은 규범적 요건은 그 충족 여부를 기초짓는 한층 더 구체적인 기초사실로서 평가근거사실 또는 평가장애사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충족 여부를 결정한다.45) 예를 들어, 음주운전을 했다는 사실은 평가근거사실로서 이른바 준주요사실에 해당하고, 이러한 준주요사실로부터 경험칙에 의해 과실이라는 주요사실 내지 규범적 요건 충족을 인정하는 경우가 그것이다.46) 기초사실로서 평가근거사실과 평가장애사실 그 자체의 존부 판단이 사실 문제에 해당하는 것임에는 다툼이 없지만, 평가근거사실과 평가장애사실을 기초로 하여 규범적 요건 충족 여부를 판단하는 작업이 사실 문제인지 아니면 법률 문제인지는 불분명하다. 판단 그 자체는 규범적 속성을 갖지만 판단에 활용되는 경험칙은 원칙적으로 사실 문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경험칙은 규범적 요건 인정에 있어서 기초사실을 토대로 평가적 판단을 하는데 활용되는 지식을 의미한다. 과잉금지원칙 적용 국면으로 되돌아와 보면, 과잉금지원칙의 세부원칙 충족 여부 판단은 법적용으로서 법률 문제이지만, 그 과정에서 협의의 입법사실을 평가하고 그 충족 여부를 판단하는데 활용되는 지식은 경험칙의 성격을 갖는 입법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위헌법률심판에서 입법사실에는 위헌성(또는 합헌성)을 기초짓는 구체적인 평가근거사실/평가장애사실 수준에 속하는 협의의 입법사실과 규범적 요건 충족 여부를 판단하는 과정에서 활용되는 경험칙 레벨에 속하는 입법사실이 존재한다.47) 평가근거사실/평가장애사실에 해당하는 협의의 입법사실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증명이 필요하고, 공지의 사실과 법원에 현저한 사실의 경우에만 증명이 불필요하다. 반면, 경험칙으로서 입법사실의 경우에는 일반상식에 해당하는 경험칙은 증명의 대상이 되지 않지만, 전문적, 학리적 지식에 속하는 전문경험칙의 경우 원칙적으로 증명의 대상이 된다고 보아야 한다.48) 물론, 이러한 구별이 항상 명확한 것만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법사실이 사실 문제와 법률 문제의 중간에 위치한다고 하는 애매모호한 태도를 견지하기보다는 입법사실을 협의의 입법사실과 경험칙으로 구분하고, 각각에 합당한 증거조사와 증명 문제를 고민하는 것이 적절한 접근법이라고 할 수 있다.
Ⅳ. 입법사실의 위헌법률심판에서의 취급
헌법재판소법 제30조 제2항은 위헌법률심판의 경우 서면심리에 의하고, 재판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에는 변론을 열어 당사자, 이해관계인, 그 밖의 참고인의 진술을 들을 수 있다고 규정한다. 동법 제31조 제1항은 재판부는 사건의 심리를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에는 직권 또는 당사자의 신청에 의하여 증거조사를 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아울러, 동법 제32조는 재판부는 결정으로 다른 국가기관 또는 공공단체의 기관에 심판에 필요한 사실을 조회하거나, 기록의 송부나 자료의 제출을 요구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헌법재판소는 이러한 제반 규정들이 직권탐지주의를 전제하고 있는 것으로 새기고 있다.49)
헌법재판에서 증거조사라 함은 재판관의 심증형성을 위해 법정의 절차에 따라 인적, 물적 증거의 내용을 오관(五官)의 작용에 의하여 깨닫게 하는 헌법재판소의 소송행위이다.50) 헌법재판소는 입법자가 수행한 형량과 평가를 무조건 올바른 것으로 수용하여야 할 의무가 없으며, 위헌법률심판중 입법자의 사실확인 내지 예측평가에 원칙적으로 구속되지 않는다. 직권탐지주의가 지배하는 헌법소송에서 헌법재판소는 스스로 그리고 독립적으로 증거조사를 통해서 입법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헌법재판소는 과거에 발생하였거나 현재 진행중인 사건이나 사실관계를, 다시 말해 심판대상이 된 법률적 규율의 기초가 되는 협의의 입법사실을 전면적으로 심사할 수 있다.51) 반면, 입법자의 장래 예측과 관련해서는 아래 입법사실의 증명 부분에서 살펴보는 바와 같이 헌법재판소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입법자가 평가, 예측을 위해 활용한 전문경험칙을 신뢰할 수 없는 경우 헌법재판소는 독자적으로 사회과학적 지식을 조사하고 인정할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와 같이 미국에서 입법사실론이 대립당사자주의와 변론주의하에서 대법원의 증거 조사와 인정의 재량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에서 발전했던 것과 달리, 우리의 경우 헌법재판소의 독자적 증거 조사와 인정을 위한 직권탐지주의라는 법제도적 기반은 이미 마련되어 있는 셈이다. 다만, 아래에서 검토하는 바와 같이, 우리의 경우에는 역으로 심사강도론을 통해 입법자의 인식론적 재량(epistemic discretion)을 적정한 선에서 존중하는 것이 쟁점이라고 할 수 있다.52)
위헌법률심판에 직권탐지주의가 적용되는 결과 헌법재판소는 독자적으로 입법사실을 조사할 수 있으며, 민사소송에서 인정되는 당사자의 증거제출의무로서의 주관적 입증책임은 문제될 여지가 없다. 소송관계자에게 자료제출 책임이 인정되더라도, 그것은 기껏해야 ‘헌법재판소 심판 규칙’ 제42조 제1항이 규정하는 협력의무에 지나지 않는다.53) 다만, 직권탐지주의가 적용되는 경우에도 입증을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요증사실이 불명한 경우가 있을 수 있고, 이때 그 위험부담을 누가 질 것인가 하는 문제, 즉 객관적 증명책임(objektive Beweislast)의 문제는 발생한다.54) 문제는 위헌법률심판에서 대립당사자를 상정하기 어려운 이상, 진위불명상태의 경우 위험을 누구에게 부담시키느냐 하는 점이다. 위헌법률심판에서 주로 문제되는 요증사실은 입법사실인데, 이는 특정한 사실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여부라는 질문을 넘어 입법자의 입법사실 확인과 예측이 합리적인지에 대한 평가 문제를 포함한다. 이 때문에, 위헌법률심판에서 객관적 증명책임의 문제는 입법사실의 인정과 그에 기초한 예측판단에 대한 입법자의 논증과 추론의 밀도 문제로 전환된다고 할 수 있다.55)
무엇보다 경험칙으로서 입법사실의 진위가 불분명할 때, 입법자의 평가 우선권을 존중하고 “입법자에게 우호적으로”(in favorem legis) 판단을 내릴 것인가, 아니면 “의심스러울 때에는 자유의 이익으로”(in dubio pro libertate) 입법자에게 불리한 판단을 내릴 것인가 문제된다. 헌법재판소에서 재검토하는 입법사실의 경우 문제되는 것은 개별적 사법사실과 같이 ‘진실성’이라기보다는 입법자의 현실인식과 예측판단의 ‘합리성’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경우 객관적 증명책임의 문제는 입법자의 ‘설명책임’ 또는 ‘논증책임’으로 전환된다고 보아야 한다. 실체법적 비례원칙과 절차법상 입증책임 분담의 결합으로서 심사강도론은 헌법재판소가 입법자의 사실인정을 존중하는 것, 입법자의 사실인정 결과를 존중하되 그 경과를 문제삼는 것, 독자적으로 사실을 조사하여 헌법재판소의 판단으로 대체하는 것과 관련된다. 위헌법률심판에서 이른바 객관적 증명책임 문제는 헌법재판소 입장에서는 이와 같은 심사강도의 선택문제로 전환된다고 할 수 있다. 민사소송에서 주로 개인간 법률관계가 문제되는 국면과 달리, 헌법재판에서 개인과 국가가 얽히는 순간, 개인과 국가의 대립만이 아니라 국가기관 상호간 적정한 권한분배를 통해 개인의 자유를 보호해야 하는 과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과잉금지원칙 적용과정에서 헌법재판소는 분야의 특성, 입법자의 정확한 판단 가능성, 분쟁에서의 법적 이해관계의 중요성과 개별사례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입법자의 입법사실 인정과 평가에 대해 논증과 추론의 밀도를 달리 요청하여야 한다. 입법자의 입법사실에 대한 평가와 장래 예측과 관련하여 입법자에 대한 존중 정도를 결정하기 위해 동원되어온 관념이 심사강도론인 셈이다.56) 입법자가 한 예측에 대한 가장 낮은 심사강도는 ‘명백성통제’(Evidenzkontrolle)이다. 이 경우에는 헌법재판소가 입법자의 예측이 입법의 근거를 전혀 뒷받침할 수 없을 정도로 명백히 잘못되었는지 여부만을 심사한다. 이른바 ‘납득가능성통제’ (Vertretbarkeitskontrolle)의 경우에는 헌법재판소가 입법자가 입수할 수 있는 자료에 기초하여 사실상황을 적정하게 판단하였을 것을 요구한다. 그와 같은 자료에 기초한 입법자의 예상이 객관적으로 유지될 수 없는 것으로 밝혀질 경우에만 헌법재판소는 그 예측은 탄핵될 수 있다. 가장 엄격한 통제는 ‘강화된 내용통제’(intensivierte Inhaltskontrolle)이다. 이 경우 헌법재판소는 입법자가 고려하지 아니한 자료에도 기초하여 독자적인 예측을 하고, 입법자의 예상이 잘못된 것으로 판단된 경우에는 입법자의 예측을 탄핵할 수 있다.
심사강도론의 문제는 헌법소송법상 중요한 쟁점일 뿐만 아니라, 헌법실체법 측면에서 헌법재판소와 입법자간 권한의 긴장 관계를 내포한다. 한편으로, 헌법재판권은 권력분립원칙과 민주주의원칙에 입각하여 입법자의 형성의 자유와 입법사실에 대한 평가, 판단의 우선권을 존중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위헌법률심판을 통해 헌법의 우위와 기본권보호를 담보하기 위해 헌법재판소는 적절한 수준에서 입법자의 인식론적 재량을 통제할 필요가 있다. 입법자의 사실인식과 예측판단에 대한 존중과 통제의 조화적 균형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서 심사강도론은 헌법재판권과 입법권간 기능적으로 적정한 권한분배를 도모함으로써 헌법재판에서 객관적 증명책임의 문제를 일정 부분 대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회적 사실과 사회과학적 지식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한다. 이에 따라 법률의 제개정 당시 또는 헌법재판소의 선행 결정 당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입법사실이 그 이후에 변동되는 경우가 적지않다. 입법사실의 측면에서 위헌결정이 내려지는 이유를 시계열적으로 검토해보면, 입법 당시부터 입법사실에 대한 잘못된 확인과 부적절한 평가, 예측이 존재했던 경우와, 입법 당시에는 입법사실의 인정과 평가, 예측에 오류가 없었지만 그 이후에 비로소 입법사실에 변동이 발생하여 위헌성의 의심이 생긴 경우로 나누어볼 수 있다. 전자의 경우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 시점에는 물론이고 입법 당시에도 위헌이기 때문에 헌법재판소가 위헌결정을 선고하는데 큰 문제는 없다. 반면, 후자의 경우 위헌판단의 기준시점과 소급효의 인정범위가 문제될 수 있다. 우리 헌법재판소는 위헌판단의 기준시점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밝힌 바 없다.57) 다만, 동성동본금혼규정 사건과58) 호주제 사건59) 등에서 ‘사회적 상황 변화’를 근거로 위헌성을 인정했다는 점에 비추어보면, 이른바 후발적 위헌의 경우 심리종결시를 위헌판단의 기준시점으로 보고 있는 듯하다. 위헌판단의 기준시점을 행정법상 취소소송의 경우와 같이 처분시(법률제개정시)로 보게 되면 민주주의원칙이나 권력분립원칙 측면에서는 적절할 수 있겠지만,60) 기본권보호 측면에서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실효적인 기본권보호를 위해 위헌판단의 기준시점은 심리종결시라고 보아야 한다.61) 다만, 법적안정성을 담보하기 위해서62) 헌법재판소는 주문을 선택함에 있어서 입법자가 소급범위를 결정할 수 있도록 헌법불합치결정을 선고하거나 위헌결정을 유보하면서 장래 위헌결정을 예고하는 형식의 결정을 선고할 필요성이 있다.63) 이와 같은 후발적 위헌의 경우 헌법재판소는 입법 당시와 비교하여 변화된 입법사실이 무엇인지 제시하고, 입법권 존중의 필요성과 즉시 위헌결정의 필요성을 형량하여 주문을 선택해야할 것이다.
입법사실의 변동은 판례변경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판례례변경이 이루어지는 계기는 크게 두 경우이다.64) 우선, 선행결정의 법판단에 원시적으로 규범적 오류가 있는 경우이다. 이 경우, 헌법재판소는 그 규범적 오류의 내용이 무엇인지 제시하고 논박하여야 한다. 다음으로, 선행결정 당시 그 법판단에는 규범적 오류가 없었지만, 그 이후 사실상태 변화로 인하여 다른 법판단이 필요하게 된 경우이다. 이 경우, 선행결정에 대한 논박의무에는 선행결정을 현시점에서 변경하여야 하는 근거 내지 이유를 제시하고, 그 근거가 선행결정을 변경할 만큼 중대한 것인지를 고려하는 형량의무가 추가된다. 판례변경의 근거가 되는 입법사실의 변화는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는데, 주관적인 것은 다름 아닌 법감정 등을 뜻하고, 객관적인 것은 전문경험칙으로서 사회과학적 지식의 발전 등을 뜻한다. 이와 같은 사회적 사실의 변화에 따른 판례변경의 경우에도 헌법재판소는 변화된 입법사실을 제시하고 판례변경의 필요성에 대해 엄밀한 논증을 수행하여야 한다.
헌법재판소의 법률에 대한 위헌결정이 ‘원칙적으로’ 입법자를 구속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입법자는 헌법재판소 위헌결정의 취지를 존중하고 입법개선을 해야할 의무를 부담한다. 문제는 위헌결정 이후 상당한 시간이 흐르고 사회상황이 변화하여 위헌결정된 입법과 동일한 입법이 필요하게 되는 경우 기속력의 예외를 인정하여 그러한 입법을 허용할 것인지 여부이다. 관련하여 헌법재판소는 선행 위헌결정의 기속력에 국회가 구속되는지 여부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후행 입법이 반복입법에 해당하는지 여부만을 검토한 바 있다.65) 그러나, 헌법재판소의 판단에 영구적인 효력을 부여한다면 급속도로 이루어지는 현대사회의 사회적 요구나 질서의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국회가 광범위한 입법형성권에 기하여 사회적 요구나 질서의 변화에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있고 주권자 국민의 견해 변경을 민감하게 파악할 수 있는 기관이라는 지위를 갖는다는 점을 감안하여, 종전 위헌판단의 기초가 된 입법사실의 근본적인 변화에 기인하는 특별한 정당화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기속력이 미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66) 이 경우 입법자는 입법사실의 근본적 변화와 반복입법의 필요성을 설명하여야 하고, 헌법재판소 또한 변화된 입법사실을 제시하고 그것이 기속력의 예외를 인정할 필요성이 있을 만큼 근본적이고도 중요한 변화인지를 논증하여야 할 것이다.
미국의 경우 Brown v. Board of Education 사건에서 사회심리학적 연구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67)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헌법재판에서 사회과학적 지식의 중요성은 모노한과 워커의 연구에서 강조되었다. 모노한과 워커는 입법사실의 증명에 활용되는 사회과학적 지식은 단순한 사실임을 넘어 법원이 직권으로 발견할 수 있고 또 구속을 받는 일종의 선례로서의 지위를 갖는 것으로 보았다.68) 그러나, 사회과학적 지식의 헌법재판에의 활용에 대해서는 비판 또한 적지않다. 사회과학적 판단과 법적 판단의 인식론적 이질성뿐만 아니라, 하나의 사회현상에 대해 정반대의 사회과학적 연구들이 경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헌법재판소는 자신의 논증을 지지하는, 입맛에 맞는 사회과학적 연구를 자의적으로 원용할 수 있고, 그러한 경우 사회과학적 지식은 편향성을 객관적 과학으로 은폐하는 엄폐물이 될 수 있다.69)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법재판소가 규범적 판단을 이끌어내는데 있어서 전문경험칙으로서 사회과학적 지식을 제시하는 대신에 단순히 사회통념 등과 같은 모호한 수사로 그것을 대체하는 것은 바람직한 논증의 방식이 아니다. 헌법재판에서 사회과학적 지식을 절대시할 수는 없지만, 과학적 근거가 결여된 판단, 예측은 법적 타당성을 잃는다는 점에서 적절한 사회과학적 지식의 원용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사회과학적 지식들이 경합하는 경우, 그 선택에 있어서 또한 민주적 정당성을 갖는 입법자에게 인식론적 우선권이 주어질 것이다. 다만, 헌법재판소 스스로 전문경험칙으로서 사회과학적 지식을 조사하고 인정하는 것이 부적절한 경우에도, 헌법재판소는 적어도 입법자가 그러한 전문경험칙을 선택하고 그에 기초하여 합리적으로 예측, 판단을 수행하고 있는지 여부와 관련하여 절차 내지 과정의 통제를 수행할 필요성이 있다.70)
Ⅴ. 결론
입법사실의 조사와 인정에 있어서 헌법재판소의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할 경우 사법적극주의(judicial activism)를 초래하고 헌법상 권한배분의 ‘기능적’ 적정성을 훼손할 우려가 있다. 반면, 입법자의 인식론적 재량을 제한없이 승인할 경우 위헌법률심판제도의 존재이유가 몰각되고 기본권보호에 역행할 수 있다. 헌법재판소의 적절한 역할은 이 양극단 중간 어딘가에 위치할 것이다. 헌법재판소가 균형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심사강도론이 일정할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음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다. 여하한 경우라도, 헌법재판소는 객관적인 입법사실에 기초하여 판단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최소한 특정한 심사강도를 선택한 근거를 제시하고, 어떤 입법사실로부터 그러한 규범적 판단에 이르게된 추론 과정을 명확히 밝혀야 한다. 헌법재판소의 결정문에 이러한 경과가 명시되지 않는다고 해서 곧바로 헌법재판소가 입법사실의 인정과 그로부터 법적 추론을 자의적으로 수행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태도는 입법자와 국민들로 하여금 헌법재판소의 논증을 이해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을 곤란하게 만든다.71)
입법사실론은 규범과 사실, 입법과 헌법재판, 실체법과 절차법의 교차점에 위치하는 쟁점이다. 입법사실론은 헌법상 권한배분의 문제, 헌법재판에 있어서 사회과학적 지식의 활용과 그 한계 문제, 헌법재판에서 증거조사의 방법과 증명책임의 문제, 헌법재판소의 논증의무의 내용과 정도 문제 등 헌법실체법과 헌법소송법상 많은 논점들과 연결되는 주제이다. 본고에서 검토한 논점들과 그와 관련한 제언들이 부족하나마 이 분야의 후속 논의를 촉발하고 헌법실무를 개선하는데 있어서 ‘작은’ 디딤돌이 되기를 희망하면서 글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