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본고의 목적은 2017년 6월 2일에 공포되어 2021년 4월 1일부터 시행되고 있는 일본의 개정민법 중 ‘채권의 효력: 채무불이행책임 등’에 관한 주요 개정사항의 입법취지를 검토하기 위한 것이다.
일본의 개정 전 민법은 채권총칙(제3편 채권 제1장 총칙)의 제2절에서 ‘채권의 효력’에 관하여 규정하고 있는데(이것은 한국민법도 같다), 그 아래에 3개의 관(款)을 두고 채무불이행책임 등(제1관), 채권자대위권(제2관), 사해행위취소권(제3권)에 관하여 각각 규정하고 있다.1) 후 2자(제2관, 제3관)가 이른바 ‘책임재산의 보전제도’에 관한 것임에 반해, 제1관(채무불이행책임 등)은 대체적으로 “채무불이행에 의한 손해배상책임의 요건과 효과”에 관한 것으로서, 여기에는 이행기와 이행지체(제412조), 채무불이행에 의한 손해배상(제415조), 손해배상의 범위(제416조), 손해배상의 방법(제417조), 과실상계(제418조), 금전채무[불이행]의 특칙(제419조), 배상액의 예정(제420조, 제421조), 손해배상에 의한 대위(제422조)에 관한 규정이 포함된다. 그 밖에는 수령지체(제413조)와 이행의 강제(제414조)에 관한 규정이 포함되어 있다.2)
개정민법은 채권총칙의 ’채권의 효력‘ 중 ‘채무불이행책임 등’의 관(제1관)에서 먼저 이행불능에 관한 규율을 신설(제412조의2 제1항)하여 이행지체에 관한 규율(제412조)과의 균형을 확보하고자 하였고, 아울러 원시적 불능의 경우에도 개정민법 제415조 소정의 손해배상청구가 가능하다는 취지를 신설하여(제412조의2 제2항) 이른바 ‘원시적 불능의 법리(=무효)’를 부정하였다. 또한 채무불이행에 의한 손해배상책임에 관한 제415조(한국민법상 제390조에 상당)의 요건을 수정하여 귀책사유의 판단기준으로서 이른바 ‘과실책임주의’로부터의 탈피를 시도하였고(제1항), 동조 제2항에 이행에 갈음한 손해배상청구(전보배상청구)에 관한 요건을 신설하였다(제2항). 나아가 채무불이행에 의한 손해배상책임의 효과에 관한 규정으로서 손해배상의 범위나 배상액 산정에 관한 규정들을 정비하였다. 즉, ‘예견가능성’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 손해배상의 범위에 관한 제416조의 요건을 보다 규범적인 내용이 되도록 수정하였고, 아울러 실무에서 활용되고 있는 중간이자의 공제에 관한 규율을 신설하고(제417조의2) 아울러 과실상계(제418조)나 손해배상액의 예정(제420조) 등에 관하여도 약간의 수정을 가하였다. 한편 이행불능의 효과로서 채권자에게 대상청구권을 인정하는 판례법리를 명문화하였다(제422조의2).
이들 개정사항은 편의상 3가지 내용으로 분류가 가능할 것으로 본다. 즉, 첫째, (원시적 불능을 포함한) 이행불능에 관한 규율의 신설, 둘째, 채무불이행에 의한 손해배상책임의 요건에 관한 제415조의 개정, 셋째, 채무불이행에 의한 손해배상책임의 효과에 관한 규율의 정비가 그것이다. 본고에서는 위 내용분류에 따라 각 주요 개정사항의 입법취지를 검토하기로 한다.
아래에서는 우선 이행불능에 관하여 신설된 제412조의2를 제1항(이행청구권의 한계사유로서의 이행불능)과 제2항(원시적 불능)으로 나누어 검토한다(Ⅱ). 이어서 채무불이행에 의한 손해배상책임의 요건에 관한 제415조의 개정내용을 제1항(요건의 명확화)과 제2항(전보배상 요건의 신설)으로 나누어 검토한다(Ⅲ). 나아가 손해배상책임의 효과에 관한 규율의 정비에 관해서는 특히 한국민법과의 비교라는 관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는 ‘손해배상의 범위’에 관한 제416조의 개정내용과 ‘대상청구권’에 관한 신설규정(제422조의2)의 내용을 검토하기로 한다(Ⅳ).
각 개정사항의 검토는 대체적으로 ① 개정 전 민법 -> ② 개정과정 -> ③ 개정민법(의 입법취지)의 순서로 진행한다. ①에서는 개정 전 민법의 입법취지와 학설·판례의 동향 등을 간단히 정리하고, ②에서는 개정과정에서의 논의상황을 소개한다. 여기서는 특히 (학자그룹에 의한) 「債権法改正の基本方針」3)(이하 “<채권법개정의 기본방침>”으로 표기한다)과 (법제심의회에 의한) 「中間試案」(이하 “<중간시안>”으로 표기한다)’에서의 논의상황을 주로 인용하고 있는데, 이들은 개정논의의 초창기(<채권법개정의 기본방침>)와 중간단계(<중간시안>)에서의 논의를 집대성한 중요한 자료이다.4) ③에서는 개정민법의 입법취지 내지 의의를 정리한다.
한편 각 개정사항을 위와 같은 순서대로 검토한 이후에는 한국민법과의 개략적인 비교를 시도한다. 여기서는 한국민법의 해당 조문을 확인하고, 나아가 해당 조문에 대하여 최근에 개정논의(2004년 법무부 민법개정안, 2014년 법무부 민법개정시안)가 있는 경우에는 그 내용을 간단히 정리한다.
Ⅱ. 이행불능에 관한 규율의 신설: 이행청구권의 한계로서의 이행불능, 원시적 불능
일본의 개정 전 민법은 채권총칙의 ‘채권의 효력’에 관한 절(제2절)에서 3개의 관(款)을 나누어 채무불이행책임 등(제1관), 채권자대위권(제2관), 사해행위취소권(제3권)에 관하여 각각 규정하고 있지만, 채무불이행 이전의 ‘채권의 효력’으로서 이행청구권이나 추완청구권 등 채권의 기본적 효력에 관한 내용은 규율하고 있지 않다.
개정민법은 채권의 기본적 효력에 관하여 채권의 청구력이나 채권자의 이행청구권에 관한 규정을 신설하지는 않고 있지만, ‘이행불능’에 관한 규정을 신설하여(제412조의2) 이행불능이 인정될 때에는 채권자가 이행청구를 할 수 없다는 취지(이행청구권의 한계)를 규정함과 동시에(동 제1항), 아울러 이행불능 중 이른바 ‘원시적 불능’의 경우에도 채무불이행에 의한 손해배상(제415조)의 청구가 가능하다는 취지를 규정하였다(동 제2항). 신설조문의 제1항은 채권의 기본적 효력 중 (이행청구권을 당연한 전제로) 이행불능의 경우에 이행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점(이행청구권의 한계사유로서의 이행불능)을 규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제2항은 이행불능 중 원시적 불능의 효과에 관하여 제415조에 따른 손해배상청구가 가능하다는 취지를 명문화한 것으로서, 기존 학설상의 원시적 불능의 법리(=무효)를 부정하는 의미가 있다. 한편 이행불능(원시적 불능 포함)에 관하여는 이행에 갈음한 손해배상(전보배상)청구가 가능하다는 점도 새롭게 규정되었다(제415조제2항)(Ⅲ. 3.에서 후술).
한편 개정민법은 이행의 강제(강제이행)에 관한 제414조를 대폭적으로 수정하고 있는데, 동조는 이른바 절차법의 규율내용인 민사집행에 관한 규정이라는 비판이 있었는바, 이를 받아들여 절차법에 해당하는 내용을 삭제하는 형태로 개정을 실현한 것이다.5) 이 조문은 채무불이행의 효과(구제수단)에 관한 규정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한편으로는 채권의 기본적 효력으로서 강제력 내지 집행력에 관한 내용이라고 볼 여지도 있다.6) 많은 해설서에서는 이행의 강제에 관한 제414조의 개정내용을 이행청구권의 한계사유(채권의 청구력) 내지 이행불능에 관한 규정의 신설과 함께 설명하는 것이 보통이다.7) 다만 어느 경우이든 이행의 강제(강제이행)에 관한 규정은 “채무불이행에 의한 손해배상책임의 요건과 효과”를 주된 검토내용으로 하는 본고의 목적과는 직접 관련되지 않으므로 여기서는 그 검토를 생략한다.
개정민법(신설) |
---|
제412조의2(이행불능) ① 채무의 이행이 계약 기타 채무의 발생원인 및 거래상의 사회통념에 비추어 불능인 때에는 채권자는 그 채무의 이행을 청구할 수 없다. |
개정 전 민법은 ‘채권의 효력’에 관한 절에 이행의 강제(제414조)나 채무불이행에 의한 손해배상(제415조) 등 채무가 임의로 이행되지 않는 경우에 채권자가 취할 수 있는 법적 수단에 관한 규정을 두었으나, 채권의 권능 내지 기본적 효력으로서 ‘청구력’이나 ‘소구력’에 관하여 또는 채권자가 채무자에 대하여 이행청구권을 갖는다는 점에 관하여 명시적인 규정을 두지는 않았다.8) 그러나 명시적인 규정이 없어도 채권의 효력으로서 채권자가 채무자에 대하여 그 채무를 임의로 이행하도록 청구할 수 있는 권능 내지 효력이 인정된다는 점에 대해서는 異論이 없었다.9)
<채권법개정의 기본방침>10)과 <중간시안>11)에서는 학설의 이러한 태도를 반영하여 채권에 내재하는 기본적 효력 내지 권능으로서 ‘이행청구권’에 관한 규정을 둘 것을 제안하였다.12)13) 또한 이것과 함께 이행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는 경우(이행청구권의 한계사유)에 대해서도 함께 규정을 둘 것을 제안하였다.14)15)
종래 ‘이행청구권의 한계사유’는 이를 ‘이행불능’이라고 통칭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16) 이행불능의 경우에 채권자는 채무의 이행을 청구할 수 없다고 해석되었는데, 이에 대해 개정 전 민법에 명문의 규정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같은 해석이 ①채무불이행에 의한 손해배상의 요건에 관한 규정(개정 전 민법 제415조 후단)이나, ②위험부담에 관한 규정(개정 전 제536조 제1항)에 표현된 “이행을 할 수 없게 된 때”의 해석으로서 도출되었다. 즉 채무이행이 불능이 된 경우에는 ①손해배상청구권의 발생이나 ②반대급부청구권의 소멸과 함께, 그 전제로서 “이행청구권의 소멸”이라는 효과도 당연히 생기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었다.17)
문제는 어느 경우에 이행이 ‘불능’한 것인지의 해석인데, 학설상으로는 이른바 ‘물리적 불능’ 외에도 이른바 ‘사회통념상의 불능’도 이에 포함되며, 후자(사회통념상의 불능)에는 예를 들어 이른바 ‘사실상 불능’(가령 반지를 호수에 빠트린 경우와 같이 채무이행에 요하는 비용이 채권자가 이행으로 얻는 이익에 비해 현저히 과다한 경우)과 ‘법률상 불능’(채무이행이 법률적으로 금지되는 경우)이 포함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었다.18) 한편 판례에서는 부동산의 이중양도에서 제2매수인이 소유권이전등기를 경료한 때에 제1매수인에 대한 매도인의 채무가 원칙적으로 이행불능이 된다고 판시한 것이 있었다.19)
이와 같이 이행불능에는 ‘사회통념상의 불능’과 같이 일상적인 ‘불능’이라는 표현으로는 읽어내기 어려운 사항도 포함되는 것이어서 이를 ‘불능’이라는 용어로 표현하는 것이 적절한 것인지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견해도 있었고, 이에 따라 중간시안에서는 이행불능에 갈음한 용어로서 ‘이행청구권의 한계사유’라는 용어를 잠정적으로 사용하였다.20)
개정민법은 ‘이행불능’이라는 표제 하에 “채무의 이행이 계약 기타 채무의 발생원인 및 거래상의 사회통념에 비추어 불능인 때에는 채권자는 그 채무의 이행을 청구할 수 없다.”고 규정한다(제412조의2 제1항). 이것은 전술한 이행청구권에 관한 개정제안은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지만, 이행청구권의 한계사유를 ‘불능’ 개념을 통하여 일원적으로 파악한 것이고, 아울러 그 ‘불능’ 여부의 판단이 “계약 기타 채무의 발생원인 및 거래상의 사회통념”에 비추어 이루어진다는 점을 명확히 한 것이다. 이 규정의 입법취지는 다음 3가지 관점에서 정리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첫째, 이행청구권에 관한 개정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이것은 개정민법에서도 당연한 전제로 되어 있다. 이행청구권에 관한 규정을 신설하지 아니한 이유는 위 조문의 내용이 “채무의 이행이 불능일 때에는 채권자는 그 채무의 이행을 청구할 수 없다”는 취지여서 이미 그 표현 속에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그 채무이행을 청구할 수 있다는 취지도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21) 즉 412조의2 제1항은 채권자가 채무자에 대하여 이행청구권을 갖는다는 것을 전제로 그 한계사유를 규정한 것이다.22)
둘째, 이행청구권의 한계사유를 ‘불능’ 개념을 사용하여 일원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중간시안>에서는 학설상의 논의를 참고하여 이행청구권의 한계사유를 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경우, 나. 채무이행에 요하는 비용이 채권자가 얻는 이익에 비해 현저히 과다한 경우, 다. 기타 계약의 취지에 비추어 채무이행이 상당하지 않은 경우로 유형화하여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있었으나,23) 개정민법에서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채무의 이행이 ∼ 불능인 때”라는 문언을 사용함으로써 일원적·통일적으로 파악하게 되었다.24) 따라서 <중간시안> 상의 유형(가, 나, 다)도 (후술하는 불능 개념의 판단기준에 따라) ‘불능’ 개념에 의해 파악하는 것이 예정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25) 그리고 여기서의 불능은 이른바 ‘후발적 불능’(계약 성립 후에 이행이 불능이 된 경우)뿐만 아니라 ‘원시적 불능’(계약 성립 당초부터 이행이 불능인 경우)을 포함하는 개념이다.26)
셋째, 이행불능의 판단기준으로서 “계약 그 밖의 채무의 발생원인 및 거래상의 사회통념”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채무의 발생원인이 ‘계약’이라면 그 채무의 이행이 불능인지의 여부는 “계약의 내용(계약서의 기재내용 등)뿐만 아니라, 계약의 성질(유상인지 무상인지를 포함함), 당사자가 계약을 한 목적, 계약체결에 이른 경위를 포함하여 계약을 둘러싼 일체의 사정을 고려하고, 거래통념도 감안하여” 판단되어야 함을 의미한다.27) 이것은 요컨대 채무이행이 불능인지의 판단이 채무의 발생원인인 계약의 성질 및 내용 등에 비추어 달라질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위 판단기준은 특정물채권에서의 채무자의 선관주의의무(개정민법 제400조)의 판단기준이면서,28) 후술하는 개정민법 제415조(채무불이행에 의한 손해배상)에서 면책사유를 판단하는 기준이기도 한다.
이행불능에 관한 개정민법 제412조의2는 “제3편 채권 제1장 총칙 제2절 채권의 효력 제1관 채무불이행책임 등”에 관한 첫 번째 조문인 제412조(이행기와 이행지체)와 수령지체에 관한 제413조의 사이에 위치한다. 수령지체에 관하여는 제413조 다음에 제413조의2를 신설하여 “이행지체 중 또는 수령지체 중의 이행불능과 귀책사유”에 관한 규정을 신설하고 있다.29) ‘이행불능’에 관한 규정(제412조의2)의 신설로 채무불이행(제415조)의 유형으로서 ‘이행지체’에 관하여 제412조가 규정되어 있는 것과 균형을 맞추게 되었고, 이행지체 중 또는 수령지체 중의 이행불능에 관한 규정(제413조의2)을 신설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로써 개정 전 민법에 비교하여 전체적으로 채무불이행법의 체계성이 확보되었다고 할 것이다. 다만, 전술한 바와 같이 이행청구권에 관한 개정제안이 채택되지는 않았는바, 개정민법에서도 그것은 당연한 전제로 되어 있다고 할 수는 있지만, 이행청구권의 법적 성질에 관하여는 이를 채권의 기본적 효력으로서 위치 지울지, 채무불이행에 대한 구제수단으로서 위치 지울지는 여전히 학설에 맡겨져 있다고 할 것이다.30)
한국민법은 채권총칙(제3편 제1장)의 제2절에 ‘채권의 효력’에 관하여 규율하면서 채권의 기본적 효력이나 권능에 관한 규정을 두고 있지는 않다. 이것은 일본의 개정 전 민법과 같은 태도이다. 다만 학설상으로는 채권자의 ‘이행청구권’과 ‘추완청구권’을 채권총칙에 규정하여야 한다는 점에 수긍하는 견해가 유력하였는바, 2009년에 소집되어 2014년에 해산한 법무부 민법개정위원회에서 채택한 개정안(이하 “<2014년 법무부 민법개정시안>”이라 칭한다)에서는 채권자의 이행청구권과 추완청구권을 신설할 것을 제안하였다.31)32)
이 개정시안에 의하면 ‘이행청구권’의 신설제안은 전술한 일본에서의 개정논의(<채권법개정의 기본방침>, <중간시안>)와 대체적으로 같은 취지로 이해되지만, (“이행청구권의 한계사유로서의 이행불능” 형태로 간접적 내지 우회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행청구권을 직접 규정한다는 점이 일본 개정민법과 다른 점이며, 따라서 규정의 위치도 ‘이행기와 이행지체’ 관한 387조에 앞선 제386조의2로서 제2절 채권의 효력의 모두이다. 한편 ‘추완청구권’의 경우 불완전이행의 경우에 추완청구가 가능하다는 취지와 함께 그 한계사유가 단서에 함께 규정된 점이 특징적이다(이것은 일본 개정민법에서 매수인의 추완청구권에 관한 규정이 신설되고 이것이 다른 유상계약에 준용되도록 한 것과 다른 점이다).33) 이 추완청구권의 성격은 (<2014년 법무부 민법개정시안> 제395조에서 채무불이행에 대한 구제수단으로서 “불완전이행의 경우에 추완에 갈음하는 전보배상”을 규정하고 있는 것과 비교하여) 이행청구권의 변형 내지 연장으로 이해된다.34) 추완청구권의 한계사유에 대하여 위 개정시안은 “추완에 과다한 비용을 요하거나 그밖에 추완을 합리적으로 기대할 수 없는 경우”를 들고 있다. 이것은 추완이 불가능하지 아니한 경우에도 추완청구권에 있어서는 (그밖에 손해배상, 계약해제 등 다른 구제수단도 있다는 점에서) 이행청구권에 있어서보다는 배제사유가 넓게 인정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이유에서 이와 같이 결정되었다고 한다.35)
개정민법(신설) |
---|
제412조의2(이행불능) ② 계약에 기초한 채무의 이행이 그 계약의 성립 시에 불능이었다는 사실은 제415조의 규정에 따라 그 이행의 불능에 의해 발생한 손해의 배상을 청구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
원시적으로 불능한 채무를 내용으로 하는 계약의 효력에 대해서는 개정 전 민법에 명문의 규정은 없었다. 다만, 학설상으로는 독일민법(구 306조)의 영향으로 원시적 불능의 급부를 목적으로 하는 계약은 무효이고 따라서 당해 계약에 기초한 채권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해석하는 것이 종래의 통설적인 생각이었고(이를 ‘원시적 불능의 법리’36) 또는 ‘원시적 불능의 도그마’37)라고 한다), 일반론으로 이를 인정하는 판례도 존재하였다.38)
원시적 불능의 법리(도그마)가 통설적 지위를 차지하게 된 근거 내지 배경으로서 다음 세 가지가 지적된다.39) 첫째, 계약의 대상은 물질적으로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채무자가 이행할 수 없는 채무를 인정해도 의미가 없다)는 점, 둘째, 계약당사자의 합리적 의사로서 원시적 불능을 알았다면 계약을 체결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 셋째, 채권법의 체계성의 관점에서 전보배상청구권은 유효한 이행청구권을 전제로 하여 성립하는 권리라는 점이 그것이다. 셋째 논거는 “일본민법은 채무불이행에 기초한 손해배상채무를 일단 성립한 채무의 변형(전보배상) 또는 확장(지연배상)으로 보고 있다고 해석하여야 하므로..., 처음부터 불능인, 따라서 현실적인 이행청구권을 인정할 여지가 없는 채무에 대해 손해배상채무만을 발생시키는 것은 해석론으로서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다.40)
이와 같이 전통적 통설은 원시적 불능의 계약을 무효로 해석하였지만, 원시적 불능이라는 이유만으로 계약의 유효성을 신뢰한 당사자에게 일체의 법적 보호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즉 계약을 체결한 것에 대해 채무자에게 귀책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계약체결상의 과실책임’에 기초한 ‘신뢰이익’의 손해배상책임이 발생하는 것을 해석론으로서 인정하였다.41) 이것 역시 독일민법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독일 구민법 307조).42)
이러한 원시적 불능의 법리(도그마)에 대하여는 최근 비판적인 견해도 유력하게 전개되었는데, 여기에도 대체적으로 두 가지 입장의 차이가 존재한다.43) 첫째 견해는 원시적 불능의 계약을 항상 유효로 해석하는 입장이다. 이 입장은 우발적이고 외적인 사정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은 ‘불능’이라는 사태와 계약의 성부(또는 유효성)를 직결시키는 것은 법적 논리로서 필연적인 것은 아니며, 불능이 된 시기의 전후에 의하여 손해배상의 내용이 크게 달라지는 것, 즉 후발적 불능의 경우에는 이행이익배상이 인정됨에 반해 원시적 불능의 경우에는 신뢰이익배상에 머무르는 것은 부당하다고 해석한다. 이 입장에 의하면 원시적 불능의 경우에도 이행이익배상이 인정된다. 둘째 견해는 계약 당사자의 의사에 기초하여 원시적 불능의 문제를 처리하는 입장이다. 이 입장은 원시적 불능의 법리(도그마)를 부정하면서도 첫째 견해와는 달리, (즉 원시적 불능을 항상 유효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원시적 불능에서는 우선 계약의 유효·무효를 당사자의 의사에 기초하여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이해하는 입장이다. 즉 원시적 불능에서 계약의 효력이 항상 부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계약이 유효한지 여부는 일률적으로 정할 수는 없고 당사자가 이행청구의 가능성에 대해 어떠한 리스크 분배를 했는지에 의거하여 판단하여야 한다고 본다. 가령 원시적 불능의 사태가 계약이 유효하게 성립하기 위한 해제조건인 경우에는 그 계약은 무효가 되고[일본민법 제131조 제1항(한민 제151조 제2항) 참조] 또한 원시적 불능의 사태가 없다고 당사자가 믿고 계약을 체결하였다면 착오에 의해 당해 계약을 취소(개정민법 제95조) 할 수 있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채권법개정의 기본방침>과 <중간시안>은 위 비판적 견해 중 두 번째 입장에 의거하여 “원시적 불능이라는 사실만으로는 계약이 무효가 되지는 않는다”는 취지의 규정을 신설할 것을 제안하였다(규정의 위치는 채권각칙의 계약의 성립 내지 기본원칙에 관한 부분).44) 이러한 제안에는 비교법적으로 계약체결 시점에 채무의 이행이 불능이었다는 이유만으로는 계약은 무효로 되지 않는다는 취지의 규정을 두는 예가 최근에 다수 등장한 것(UNIDROIT(2004) 3.3조, PECL4:102조; 독일 신민법 제311a조 1항)도 그 배경에 존재하였다.45)
개정민법 제412조의2 제2항은 <채권법개정의 기본방침>과 <중간시안>의 제안을 받아들여 (원시적 불능의 계약도 유효하다는 것을 전제로) “계약에 기초한 채무의 이행이 그 계약의 성립 시에 불능이었다는 사실은 제415조[채무불이행에 의한 손해배상]의 규정에 따라 그 이행의 불능에 의해 발생한 손해의 배상을 청구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고 규정한다. 불능이 생긴 것이 계약성립의 전과 후라는 우연에 의해 그 유효성과 손해배상의 범위에 당연히 큰 차이가 생기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점, 당사자가 이행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여 계약을 체결하였다면 (제415조에 따른) ‘이행이익’의 손해배상이 인정되어야 한다는 점을 그 논거로 든다.46) 규정의 위치는 <채권법개정의 기본방침>과 <중간시안>과 같이 채권각칙의 계약의 성립이나 기본원칙에 관한 부분이 아니라 채권총칙의 채권의 효력에 관한 부분(제1관 채무불이행책임 등)에서 ‘이행청구권의 한계사유로서의 이행불능’에 관한 규정(개정민법 제412조의2 제1항)의 다음 조항(동 제2항)이다. 원시적 불능도 이행불능의 일 유형이기 때문에 제412조의2에서 이행불능이라는 표제 하에 제1항과 함께 규정하는 것이 가능하였기 때문이다.
개정민법은 원시적 불능의 경우에 이행이익의 ‘손해배상’의 청구가 가능하다는 취지를 규정하지만, 그것은 채무의 내용이 원시적으로 불능이더라도 계약이 유효하게 성립하였음을 논리적 전제로 하는 것이다.47) 다만 원시적 불능의 경우에 계약이 당연히 유효가 되는 것은 아니고 무효가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가령 계약의 취지가 원시적 불능의 경우에는 계약은 무효라는 취지였던 경우(원시적 불능이 계약이 유효하기 위한 해제조건이었던 경우도 같은 범주이다), 원시적 불능이 아니라고 믿고 계약을 체결한 경우로서 착오취소가 인정되는 경우(개정민법 제95조) 등이 그러하다.48)
원시적 불능의 경우에 계약이 원칙적으로 유효라고 한다면 그것은 원시적 불능이 후발적 불능과 구별없이 동일하게 규율됨을 의미한다. 원시적 불능의 법률관계는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채권자는 개정민법 제412조의2의 취지상 ① 이행청구는 할 수 없지만(개정민법 제412조의2 제1항), ②제415조에 의한 손해배상(이행이익배상)의 청구가 가능하다(동 제2항).49) 한편 채권자에게는 이행이익의 손해배상청구 외에도 ③계약해제권(개정민법 제542조), ④위험부담에 기초한 반대급부의 이행거절권(개정민법 제536조), ⑤대상청구권(개정민법 제422조의2) 등의 구제수단이 인정된다.50) ③계약해제권의 경우, 원시적 불능의 계약이 유효인 경우 채권자는 반대채무를 소멸시키기 위해 해제권을 행사할 실익이 존재한다. 계약해제권에 관한 개정민법 제542조의 문언도 개정 전의 “(이행의 전부 또는 일부가) 불능이 된 때(不能になったとき)”에서 개정 후에는 “불능인 때(不能であるとき)”로 수정함으로써 원시적 불능의 경우에도 해제권이 인정된다는 점을 명확히 하였다.51)
한국민법은 ‘원시적 불능’의 계약이 무효라는 취지의 규정을 직접적으로 두지는 않으나, (그것이 무효라는 것을 이론적 전제로 하여) 채무자에게 ‘계약체결상의 과실책임’으로서 신뢰이익의 배상책임이 인정된다는 취지를 규정한다(제535조).52)
이에 대하여는 우선 원시적 불능의 도그마를 청산하자는 견해(제535조의 삭제 또는 개정)가 <2004년 법무부 민법개정안> 작성 당시에 담당 소위원회에서 유력하게 제기된 바 있지만, 전체회의에서 제535조는 개정대상에서 제외되었다.53)
그 후 <2014년 법무부 민법개정시안>에서는 (개정 독일민법의 태도에도 영향을 받아)54) 원시적 불능의 도그마를 부정하는 개정제안을 채택하였다. 다만 입법의 방법으로서 (제535조를 삭제함으로써 원시적 불능과 후발적 불능을 구별하지 않고 제390조의 문제에 포함시키는 선택을 하지는 않고) 제535조를 유지하면서 (제390조에 따른) 손해배상책임의 발생요건을 특별하게 설정하는 선택을 하였다.55) 즉 제535조는 제1항에서 원시적 불능을 목적으로 하는 계약의 유효성을 선언하고,56) 제2항에서는 채무자의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하되 다만 과책의 근거가 특수한 것, 즉 급부의 불가능성의 不知에 대한 과실임을 천명하였고(단서 후단), 나아가 (채권자에게 악의 또는 과실이 있는 경우 책임발생을 부정하는) 현행 규정 제2항에 대해서는 (채권자의 무과실요건을 삭제하여) 악의의 채권자의 손해배상청구권만을 부정하는 구성을 취하였다(단서 전단).57) 또한 제535조의 표제를 ‘계약체결상의 과실’에서 ‘계약체결시의 불능’으로 변경하였다. 이것은 ‘이행불능’이란 용어가 통상 ‘후발적 불능’을 가리키는 것임을 고려한 표현으로서,58) ‘원시적 불능’의 의미를 나타내되 기존의 표제(‘계약체결상의 과실’)와의 절충을 시도한 결과로 이해된다.
Ⅲ. 채무불이행에 의한 손해배상책임의 요건에 관한 제415조의 개정: 면책사유, 전보배상
개정 전 민법 제415조(한국민법 제390조에 상당)는 문언상 전단(1문)에서 채무불이행에 관하여 “채무의 본지에 따른 이행을 하지 아니한 때”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후단(2문)에서는 이행불능에서만 귀책사유를 필요로 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었으나(아래 <표> 참조), 종래의 통설은 독일민법의 이른바 학설계수의 영향으로 채무불이행을 ‘3유형론’에 따라 이해하고 아울러 그 3가지 유형에서 모두 귀책사유를 필요로 하는 것으로 해석해왔다.59)
그런데 이번 개정으로 제415조에 대한 중요한 변화가 실현되었다. 즉, 개정민법은 후술하는 바와 같이 종래의 통설에 대한 비판론의 입장을 받아들여 제415조를 채무불이행에 의한 손해배상책임의 발생에 관한 일반적·포괄적 규정으로 위치시킨 후, 채무불이행에 의한 손해배상책임의 발생요건으로서의 ‘귀책사유’에 관하여 종래의 통설의 입장인 이른바 ‘과실책임의 원칙’ 내지 ‘과실책임주의’(귀책사유=“고의·과실 또는 신의칙상 이와 동등시하여야 할 사유”)를 탈피하여 당사자가 합의한 계약내용에 따라 귀책사유의 존부를 판단하여야 한다는 새로운 입장을 입법에 반영한 것이다(개정민법 제415조 제1항).60)
나아가 개정민법은 제415조에 제2항을 신설하였는데, 여기에서는 채무불이행에 의한 손해배상책임으로서 전보배상청구권의 발생요건을 규정하였다(제2항). 이것은 일본민법이 지연배상청구권의 발생요건에 관한 규정(제412조)은 두고 있지만 전보배상청구권의 발생요건에 관하여는 명시적 규정이 없다는 점을 반영하여 채무불이행법의 체계화를 도모한 개정이다.
한편 개정민법 제413조의2는 이행지체 중에 당사자 쌍방의 책임없는 사유에 의한 이행불능이 발생한 경우 채무자의 귀책사유가 의제된다는 취지로 신설된 조문인데, 이것은 이행지체 중에 발생한 당사자 쌍방의 책임없는 사유에 의한 이행불능에 대하여 제415조 제1항 단서(면책사유)의 적용을 배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제415조 제1항의 개정과 관련되는 것이다.
개정 전 민법 제415조는 그 전단(1문)에서 채무자가 ‘채무의 본지(本旨)’에 따른 이행을 하지 아니한 경우에 채권자가 채무자에 대하여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음을 규정하고, 이어서 후단(2문)에서 채무자의 책임으로 돌릴 사유(責めに帰すべき事由=귀책사유)에 의하여 이행을 할 수 없는 경우(=이행불능)에도 채권자는 채무자에 대하여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음을 규정하고 있었다.
이 규정의 의의에 관하여는 다음 두 가지 점이 문제되었다.62)
첫째, “채무의 본지에 따른 이행을 하지 아니하는” 것(본지불이행)의 의미가 문제되었다. 이에 대하여는 우선 제415조가 채무불이행에 의한 손해배상청구의 요건을 포괄적으로 정하는 규정으로서 이행지체(제412조)63)도 제415조에 해당하는 것으로 설명되었다.64) 또한 제415조가 전단과 후단으로 나뉜 것도 “이행을 하지 아니하는”(전단)이라는 문언에서 “이행을 할 수 없는”(후단)의 의미를 읽어내기가 곤란하였기 때문으로 설명된다.65) 다시 말하면 포괄규정으로서의 전단에 후단의 의미가 포함되지 않는 것으로 해석될 위험을 피하기 위하여 후단을 주의적으로 규정한 것이다.66)
둘째, ‘채무자의 책임으로 돌릴 사유’(귀책사유)의 의미가 문제되며, 제415조 후단만이 채무자의 귀책사유를 요건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도 문제된다. 먼저 귀책사유의 의미에 관하여 기초위원 3인의 이해는 일치하지 않았고, 적어도 3인 모두 귀책사유를 고의·과실과 동의어로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67) 다음으로, 제415조 후단(이행불능)만이 채무자의 귀책사유를 요건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과 관련하여 제415조 전단에 기초한 손해배상청구에 대하여 채무자의 귀책사유가 요건인지 아닌지가 문제되는바, 기초위원들의 해석은 나뉘었고, 귀책사유가 채무불이행 일반의 요건인지는 입법 당시 반드시 명확한 것은 아니었다.68) 그리고 채무자의 귀책사유는 채무불이행책임을 면하려고 하는 채무자가 그 부존재를 증명할 책임을 지는 것으로 설명되었다.69)
개정 전 민법 제415조는 프랑스민법에 유래한다는 성립사70)로부터도 명확한 것처럼 3유형론을 채용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개정 전 민법 하의 통설은 채무불이행을 이행지체·이행불능·불완전이행(내지 적극적 채권침해)의 3유형으로 나누어 이해하고 있었다(이른바 3유형론 또는 3분체계). 3유형론은 개정 전 민법 제415조와는 관계없이 독일민법이론의 학설계수에 의해 도입된 것이다.71) 즉, 개정 전 민법 제415조로부터 채무불이행에는 이행지체, 이행불능 그리고 불완전이행(적극적 채권침해)72)의 3유형이 있다고 설명되었고, 더욱이 개정 전 민법 제415조에는 이 3유형의 채무불이행이 규정되어 있다고 설명되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일본민법 제415조 하에 3분체계 내지 3유형론으로 불리우는 분류법의 확립을 보게 되는바, 이후 이것이 통설적 지위를 점하게 되었다.
또한 ‘채무자의 책임으로 돌릴 사유’(귀책사유)의 의의에 관하여도 독일민법학의 영향 하에 통설이 형성되었다. 학설계수 당시 독일(구)민법 제276조는 “별단의 정함이 없는 한, 채무자는 고의 및 과실에 대해 그 책임을 진다”고 규정하고 있었는데, 여기서는 채무불이행을 이유로 하는 손해배상책임의 귀책사유(Vertretenmüssen)로서 유책성(Verschulden)이 관념되었고, 그 결과 동 책임은 ‘과실책임의 원칙’에 입각하고 있다고 설명되었다.73) 독일민법의 학설계수에 의해 이러한 설명이 일본민법의 해석에 영향을 미쳤는데, 이에 의하면 채무자의 귀책사유는 불법행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고의 또는 과실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채무자가 채무불이행에 의한 손해발생을 용인하고 있었던 경우에는 ‘고의’, 주의의 흠결이 있었던 경우에는 ‘과실’이 있는 것이다.74) 행위자에게 과실이 없는 한 손해배상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이를 ‘과실책임주의’ 내지 ‘과실책임의 원칙’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전통적인 통설은 채무불이행에 있어서 채무자에게 손해배상책임을 부과하기 위해서는 채무불이행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는 부족하고 여기에 ‘과실’이 추가됨으로써 비로소 손해배상책임을 부과하는 것이 정당화된다는 이해에 기초해 있었다.75) 이를 바탕으로 행위자의 행동의 자유의 보장과 결합한 과실책임주의를 채무불이행을 이유로 하는 손해배상책임의 정당화 원리(귀책근거)로 하는 입장이 채용되었고, 그것이 통설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76) 과실책임주의에 의하면, 명문의 규정이 있는 이행불능뿐만 아니라 채무불이행 일반에 채무자의 과실이 요구된다. 또한 (불법행위와는 달리) 채무자가 귀책사유(과실)의 부존재를 증명할 책임을 부담하고(무과실의 항변), 채무자의 무과실은 면책사유로 위치 지워지게 되었다.77)
한편, 전통적인 통설은 채무자의 귀책사유에 관하여 ‘채무자의 고의·과실’ 외에 ‘신의칙상 이와 동등시하여야 하는 사유’를 포함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구체적으로 채무자가 채무의 이행에 타인을 이용한 경우, 즉 이른바 ‘이행보조자의 고의·과실’을 채무자의 귀책사유로 동등시하여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통설에 의하면 채무자의 귀책사유는 “채무자의 고의·과실 또는 신의칙상 이와 동등시하여야 할 사유”78)로 정식화되었다.
이와 같은 통설의 해석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견해(비판론)가 대략 2차 대전의 終戰 이후부터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채무불이행을 이행지체·이행불능·불완전이행의 3유형으로 구별하여 이해하는 것은 이행지체와 이행불능의 규정만을 갖는 독일민법 특유의(특수 독일적인) 사정에 유래하는 것이고, 채무불이행에 관한 포괄적 요건(제415조 전단)을 갖는 일본법과는 전제가 다르다는 점이 지적되었다.79)
또한 3유형론의 해석론상의 의의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는 견해가 등장하였는데, 우선 이행지체와 이행불능의 구별의 의의에 관하여, 일반적으로 이행불능의 경우에는 채권자가 이행청구에 갈음하는 전보배상청구를 할 수밖에 없음에 반해, 이행지체의 경우에는 채권자는 이행청구와 함께 지연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한편 전보배상을 청구하기 위해서는 계약의 최고해제(개정 전 민법 541조; 한국민법 544조에 상당=필자 주)에 의해 이행청구권을 소멸시킬 필요가 있다고 설명된다. 그러나 판례·실무에서는 이행지체의 경우에 이행의 최고와 상당기간의 도과가 있으면 해제의 의사표시가 없어도 전보배상청구가 인정되고 있고,80) 학설도 이를 지지한다(이행지체에서 전보배상청구의 인정).81) 이 때문에 이행지체와 이행불능을 확연히 구별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82)
다음으로 불완전이행이라는 유형에 대해서는, 채권자가 채무자로부터 완전한 이행을 받음으로써 계약을 체결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면 이행지체에 준하여 생각하면 되고, 이미 계약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되었다면 이행불능에 준하여 생각하면 된다는 점이 지적되었다.83) 또한 불완전이행에는 다양한 사례가 포함될 수 있기 때문에 불완전이행 개념은 공허한 집합명사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도 지적되었다.84) 그밖에 3유형론에서는 모든 채무불이행 사례를 포섭할 수 없다는 점(가령 이행기 전 이행거절 사례 등) 및 하나의 채무불이행 사례를 복수의 유형으로 분류 가능한 경우도 있기 때문에 법기술적으로 부적절하다는 점,85) 3유형론은 이른바 ‘주는 채무’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하는 채무(작위채무)’나 ‘부작위채무’의 불이행에 대한 대응으로서는 취약한 것이라는 점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86)
이러한 의문과 함께 비판론은 오히려 채무불이행책임의 판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불이행의 태양이 아니라, ‘계약(합의)의 내용’이라고 하여야 하며, 따라서 채무불이행을 3유형으로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일원적’으로 이해하면서 계약의 내용에 비추어 무엇이 “채무의 본지에 따른 이행을 하지 아니한” 것에 해당하는지를 논의하여야 한다고 지적하였다.87) 이러한 지적은 이후 계약내용·채무내용의 확정 프로세스와 관련시켜 채무불이행을 ‘본지불이행’으로 일원화하고, 그 위에 필요한 한도에서 개개의 국면마다 유형적인 처리를 하는 방향으로 더욱 진화하였다(채무불이행 일원론).88)
통설에 대한 비판은 귀책사유의 의의에 관한 과실책임주의에 대하여도 이루어졌다. 즉 일본민법상 채무자의 귀책사유를 “채무자의 고의·과실 또는 신의칙상 이와 동등시하여야 할 사유”로 이해하여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없으며, 오히려 중요한 것은 채무자의 ‘책임으로 돌릴 사유’(귀책사유)의 내용을 계약(당사자의 합의)의 해석에 기초하여 명확히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등장하였다.89) 이후 이러한 생각을 계승하여 1990년을 전후하여 채무불이행을 이유로 하는 손해배상책임의 귀책근거는 채무자가 고의·과실로 행동하였다는 점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채무자가 계약에 의해 채무를 부담하였다는 점에서 구하여야 한다는 입장―손해배상책임의 발생근거는 계약이라는(채무자는 계약에 구속됨에도 불구하고 계약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손해배상책임을 진다는) 입장―90)이 유력하게 전개되었다. 그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인식이 존재한다.91)
채무자의 귀책사유에 관한 전통적인 통설의 입장인 과실책임주의는 채무자의 행동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관점에서 손해배상책임을 채무자에게 부과하는 것의 당부를 묻는 것이었다. 그러나 계약에 의한 채무에서 그 불이행이 문제가 되는 국면에서 채무자는 계약에 구속되는 것이어서 사람의 일반적인 행동의 자유가 타당한 상황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계약에 의해 채무내용을 실현하도록 의무를 부담한 채무자에 대하여 일반적인 행동의 자유에 기초한 과실책임주의를 채무불이행에 의한 손해배상책임에 대한 정당화원리 내지 귀책근거로 삼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오히려 채무불이행에 의해 채권자에게 생긴 손해에 대해 채무자에게 그 배상책임을 귀속시키는 근거는 ‘계약의 구속력’, 따라서 채무자가 채권자에 대하여 채무내용의 실현을 계약에 의해 인수하였다는 점에서 구하여야 한다. 채무자는 계약에 구속되는바, 계약을 지키지 않았다는 점에서 손해배상책임을 지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론에 의하면 손해배상책임의 귀책근거는 계약의 구속력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계약에서 채무자가 어떠한 내용의 채무를 부담한 것인지에 기초하여 그러한 합의의 내용으로부터의 일탈이 있으면 채무자에게 손해배상책임을 귀속시키는 것이 정당화된다(제415조의 요건과 관련하여 채무자의 귀책사유가 인정되게 된다).92)
그런데 채무자가 채무불이행을 이유로 하는 책임을 지는 것은 “채무자가 계약에 의해 채권자에 대하여 채무로서 부담한 것을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는 점을 의미하는 것일 뿐, 채무자는 채무불이행의 사실이 인정되어도 일정한 경우(면책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면책이 인정된다.93) 채무자의 면책을 정당화하는 근거 내지 (손해배상책임에 대한 소극요건으로서의) 면책사유는 채무자의 책임귀속을 정당화하는 근거 내지 (손해배상책임에 대한 적극요건으로서의) 귀책사유와 마찬가지로 계약 내에서 찾아야 한다.94) 즉, 채무불이행이 발생한 경우에도 그 채무불이행을 발생시킨 원인이 되는 사태(불이행원인·장애원인=채무의 본지에 좇은 이행이 이루어지지 않은 원인 내지 이유)가 계약에서 상정(예상)한 것이 아니고 또한 상정(예상)될 것도 아니었던 경우, 다시 말하면 계약의 내용에 비추어 양당사자가 채무불이행을 발생시킨 그와 같은 사태가 생기리라고 상정(예상)할 수 없었던 때에는 채무불이행에 의한 손해를 채무자에게 부담시키는 것은 계약의 구속력으로부터 정당화될 수 없다.95) 여기에서 채무불이행에는 해당하지만 계약내용에 비추어 채무자가 손해배상책임으로부터 면책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게 된다. 이 경우에 채무자의 면책을 불러오는 사유가 ‘면책사유’이다.96)97)
이와 같이 비판론은 채무불이행에 의한 손해배상책임에 관하여 통설의 과실책임주의 및 그 예외로서 과실없음을 면책사유로 하는 생각(무과실의 항변론)을 배제하고 손해배상책임의 귀책근거 내지 정당화원리를 ‘계약의 구속력’에서 구하며, 아울러 채무불이행이 인정되는 경우에도 예외적으로 당사자간에 합의된 리스크 분배 또는 계약유형과 결합된 리스크 분배를 넘는 장애에 대해서만 채무자의 면책을 인정하는 방향의 채무불이행책임론을 제시하였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비판론의 이러한 논의는 <채권법개정의 기본방침>98)과 <중간시안>99)에 반영되었고, 개정민법 제415조의 이론적 배경이 되었다.
개정민법 제415조 제1항은 “채무자가 채무의 본지에 따른 이행을 하지 아니한 때 또는 채무의 이행이 불능인 때에는, 채권자는 그로 인하여 생긴 손해의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다만, 그 채무의 불이행이 계약 기타 채무의 발생원인 및 거래상의 사회통념에 비추어 채무자의 책임으로 돌릴 수 없는 사유로 인한 것일 때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고 규정한다. 여기서 본문은 채무불이행을 이유로 한 손해배상책임의 성립요건을 정한 것이고, 단서는 채무불이행을 이유로 한 손해배상의 면책사유를 규정한 것이다.
본문은 개정 전 민법 제415조 전단에 “또는 채무의 이행이 불능인 때”(하선부분)가 추가된 형태인데, 이것은 일본민법 제415조의 입법 당시와 마찬가지로 오로지 “이행을 하지 아니한 때”라는 표현 속에 이행불능이 문언상 포함되기 어렵다는 점을 회피하기 위한 것으로(部会資料 83-2, 8항),100) 이행불능을 채무불이행의 독자의 유형으로 정립할 의도에서 규정된 것은 아니다.101) 또한 본문은 ‘채무불이행 일원론’의 입장을 채택한 것으로 설명되는데,102) 그 근거로서 위 단서 중 “그 채무의 불이행”(하선부분)이라는 표현이 사용된 것을 들 수 있다.103) 본문의 “채무의 이행을 하지 아니한 때” 또는 “채무의 이행이 불능인 때”를 통칭하여 ‘그 채무의 불이행(=채무불이행)’으로 표현하였기 때문이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따라서 개정민법 제415조 제1항 본문은 개정 전 민법 제415조에 대한 해석(비판론)에 변경을 가하는 것은 아니다.104)
한편 <채권법개정의 기본방침>과 <중간시안>에서는 개정 전 민법상 “(채무의) 본지에 따른 (이행)”이라는 표현이 생략되어 있는데, 개정민법에서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개정 전 민법의 표현(“본지에 따른”)을 유지하였다. <채권법개정의 기본방침>과 <중간시안>에서 ‘채무의 본지’ 개념을 삭제할 것을 제안한 취지는 ‘본지(本旨)’라는 표현이 오늘날 ‘본질(本質)’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는바, 이 표현으로 인해 손해배상책임의 요건으로서 채무불이행의 태양 등을 한정하는 취지로 오해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었다.105) 그런데 중간시안 이후 개정논의의 마지막 단계(요강가안 단계)에서 그동안 삭제에 대해 이견이 없었던 ‘채무의 본지’ 개념이 (사무국에 의한 요강가안 제출시) 별다른 설명없이 부활하였고 그대로 개정민법으로 되었다.106) 채무의 본지 개념이 부활·유지된 취지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가 문제되는데, 이에 대하여는 개정민법에 의하면 채무불이행이 성립하는지 아닌지는 “계약 (기타 채무의 발생원인) 및 거래상의 사회통념에 비추어”(제415조 제1항 단서) 확정되는 ‘채무의 내용’에 따라 판단되어야 하는바, ‘채무의 본지’는 바로 그와 같은 의미에서의 ‘채무의 내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견해가 유력하다.107)
제415조 제1항 단서는 “다만, 그 채무의 불이행이 계약 기타 채무의 발생원인 및 거래상의 사회통념에 비추어 채무자의 책임으로 돌릴 수 없는 사유로 인한 것일 때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고 규정한다. 이 규정은 손해배상책임의 면책사유를―그 주장·입증책임이 채무자에 있음을 나타냄과 동시에―정한 것이다.108) 개정 전 민법 제415조에 규정되었던 “채무자의 책임으로 돌릴 사유”(귀책사유)를 “채무자의 책임으로 돌릴 수 없는 사유”(면책사유)로 바꾸고 여기에 “계약 기타 채무의 발생원인 및 거래상의 사회통념에 비추어”라는 수식어를 명시적으로 부가함으로써 여기서의 면책사유가 채무의 발생원인(계약, 법률의 규정)에 입각하여 판단되어야 한다는 점, 따라서 계약의 경우에는 면책의 가부가 계약의 취지에 비추어 판단되어야 하며 “면책사유=과실없음(무과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과실책임주의의 부정)을 명확히 한 것으로 설명된다.109) 이것은 채무자의 귀책사유의 부존재를 면책사유로 이해하는 종래의 통설·판례의 입장과 일치하는 것이지만, 채무자의 귀책사유를 계약(당사자의 합의) 내용에 기초하여 판단하여야 한다는 비판론의 영향이 나타난 것이라고 평가된다.110)
한편 중간시안에서는 ‘계약 이외의 원인에 의한 채무’(법정채무)를 계약에 의한 채무(약정채무)와 분리하여 그 채무의 불이행에 의한 손해배상책임의 면책사유에 대해 규정하고 있었는데 개정민법에서는 양자를 통합하여 단서에서 함께 규정하였다(“계약 기타 채무의 발생원인”). 또한 ‘채무의 발생원인’ 외에 ‘거래상의 사회통념’이 면책사유를 판단할 때 고려하여야 할 요소로 병기(竝記)되었는데, 이것은 특히 계약책임과 관련하여 면책사유의 존부가 당사자의 주관적 의사만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계약의 성질, 계약의 목적, 계약체결에 이른 경위 기타 사정도 고려하여 정해질 수 있다는 점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111) 다만 (채무발생원인으로서의) ‘계약’을 고려함이 없이 ‘거래상의 사회통념’만으로 면책사유가 판단될 수 있다는 취지는 아니라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112)
개정민법 제415조 제1항 단서의 취지는 ‘손해배상책임의 요건’이라는 관점에서 논리적으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첫째, 개정민법 제415조 제1항 단서는 “귀책사유의 부존재 = 면책사유”라는 점을 명확히 한 것이다. 개정 전 민법에서는 전단(1문)과 후단(2문)의 병렬구조 하에 채무자의 귀책사유가 이행불능의 경우에만 손해배상책임의 요건인 것처럼 규정되어 있었지만(후단), 통설·판례는 독일민법의 학설계수의 영향으로 이행불능뿐만 아니라 채무불이행 전반에 있어서 손해배상책임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귀책사유=고의·과실’이 필요하며, 또한 채무자가 과실(=귀책사유)의 부존재를 증명할 책임을 진다고 해석하여 결국 채무자의 과실없음(무과실)을 면책사유로 이해하고 있었다.113) 개정민법은 통설·판례의 이와 같은 이해를 명문으로 규정하여 명확히 한 것이다.114)
둘째, 개정민법은 제415조 제1항 본문에서 귀책사유를 요건으로 규정하지 않고 그 단서에서 면책사유를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귀책사유를 요건으로 하지 않는 손해배상책임”을 채용한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으나 그렇게 해석할 것은 아니다. 이것은 (아래 다.에서) 후술하는 바와 같이 신설된 제413조의2(이행지체 중의 이행불능과 귀책사유)에서 채무자의 이행지체 중에 당사자 쌍방의 책임으로 돌릴 수 없는 사유로 인한 이행불능이 발생한 경우에 채무자의 귀책사유를 의제하는 조항(제1항)115)을 둔 것으로부터 유추할 수 있다. 이 조항은 표제에서 ‘귀책사유’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내용에 의하면 위와 같은 경우에 채무자는 개정민법 제415조 제1항 단서에 의한 면책을 주장할 수 없게 되고,116) 결국 이행불능에 의한 손해배상책임을 부담하게 되는데,117) 이것은 채무불이행을 이유로 한 손해배상책임은 귀책사유를 그 요건으로 한다는 점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정민법은 귀책사유를 채무불이행을 이유로 한 손해배상청구권이 발생하기 위한 요건이 된다는 점을 당연한 전제로 하고 있다고 이해할 것이다.118) 따라서 채무자가 채무를 부담하였지만 이를 이행하지 않았다면 (계약의 해석 또는 법률의 규정에 의하여) 원칙적으로 귀책사유는 존재하는 것이고, 다만 예외적으로 면책사유가 증명되는 경우에 한하여 귀책사유가 소멸하여 채무불이행책임이 성립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119)하는 것이 개정민법의 취지에 부합할 것으로 본다.120)
셋째, ‘채무자의 책임으로 돌릴 사유’(귀책사유)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조문상으로는 명확하지 않으나, “계약 기타 채무의 발생원인 및 거래상의 사회통념”에 비추어 면책사유의 존부를 판단하여야 한다는 점이 조문화되었다는 점에서 종래의 통설의 입장인 과실책임주의(귀책사유=고의·과실 또는 신의칙상 이와 동등시하여야 할 사유)는 부정된 것으로 해석할 것이다.121) 이것은 계약의 구속력을 손해배상책임의 귀책근거로 이해하는 비판론의 입장이 민법개정을 위한 논의과정에서 일관되게 유지되어 왔기 때문에 그러한 입법기초자의 의사가 입법에 반영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에 의한다면, 계약책임에서 귀책사유의 존부는 (과실의 존부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계약 및 거래상의 사회통념에 비추어”, 즉, 당사자가 합의한 채무의 내용이나 사정범위에 비추어122) 또는 불이행원인이 계약상 채무자에게 상정가능한 범위 내의 것이었는지 여부에 비추어123) 판단하게 될 것이다.
개정민법에서 채무불이행과 관련한 조문 중에는 제415조에 앞서는 규정124)과 관련하여 두 가지 새로운 조문이 신설되었다. 즉, 전술한 ‘이행불능’에 관한 제412조의2와 ‘이행지체 또는 수령지체 중의 이행불능과 귀책사유’에 관한 제413조의2가 그것이다. 전자(제412조의2)는 (Ⅱ에서 상술한 바와 같이) ‘이행기와 이행지체’에 관한 제412조(한국민법 제387조에 상당)에 이어서 이행불능의 경우에 이행청구를 할 수 없다는 점(제1항) 및 이른바 ‘원시적 불능’의 경우에 제415조에 의한 손해배상청구가 방해받지 않는다는 취지(제2항)를 규정한 것이다.125) 후자(제413조의2)는 이행지체 중에 이행불능이 발생한 경우에는 그 이행불능이 당사자 쌍방의 책임으로 돌릴 수 없는 사유에 의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 이행불능이 채무자의 귀책사유에 의한 것이라는 점(제1항) 및 채권자가 수령지체에 빠졌는데 이행제공 이후에 당사자 쌍방의 책임으로 돌릴 수 없는 사유로 발생한 이행불능은 채권자의 귀책사유에 의한 것이라는 점(제2항)을 규정한 것이다.126)
이 중에서 제413조의2 제1항은 이행지체 중의 이행불능에 대하여 당사자 쌍방의 책임으로 돌릴 수 없는 사유(불가항력 기타 우발적 사고 등)로 채무의 이행이 불능이 된 경우에 그 이행불능이 “채무자의 책임으로 돌릴 사유(=귀책사유)”에 의한 것이었다고 의제함으로써 이행불능을 이유로 하는 손해배상청구권을 채권자에게 부여하는 것이다.127) 이 조항은 개정 전 민법(메이지민법)의 기초과정 이후 실무·학설이 전제로 해온(지금까지 異論이 없었던) 해석을 명문화한 것이라고 설명되는데,128) 한국민법상으로는 ‘이행지체 중의 책임가중’에 관하여 규정한 제392조(이행지체 중의 손해배상)에 상당한 조항이다. 다만 ‘의제’의 대상은 채무자의 귀책사유에 한정되기 때문에, ⅰ) 이행지체에 빠지지 않았더라도 같은 결과가 되는 경우(채무불이행(이행불능)과 손해발생 사이에 인과관계가 없는 경우)나, ⅱ) 이행불능이 채권자의 귀책사유에 의해 발생한 경우에는 이행불능에 대한 손해배상책임은 발생하지 않는다.129)
이와 같이 제413조의2 제1항은 이행지체 중에 채무자에게 귀책사유가 없는 이행불능이 발생한 경우에도 채무자는 원칙적으로 그 이행불능에 대한 책임을 부담한다는 취지를 규정한 것이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제415조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귀책사유’가 채무불이행에 의한 손해배상책임의 성립요건이라는 점을 전제로 하는 조항이라는 점에서도 그 의의를 발견할 수 있다.
한국민법은 제390조에서 ‘채무불이행과 손해배상’이라는 표제 하에 “채무자가 채무의 내용에 좇은 이행을 하지 아니한 때에는 채권자는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그러나 채무자의 고의나 과실 없이 이행할 수 없게 된 때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고 규정한다. 이것은 일본의 개정 전 민법 제415조와 유사하지만 형식과 내용 양면에서 차이가 존재한다. 즉, 일본의 개정 전 민법과 같이 “채무의 내용(본지)에 좇은 이행을 하지 아니한 때”와 (귀책사유에 의해 수식되는) ‘이행불능’을 구별하는 구조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형식적으로 전단(1문)과 후단(2문) 형태의 일본의 개정 전 민법과 달리 본문과 단서의 형식으로 되어 있고, 내용적으로도 (단서에서) “채무자의 책임으로 돌릴 사유”(=귀책사유)를 ‘고의나 과실’로 바꾸어 표현하고 있고 나아가 ‘고의나 과실’이 없는 경우의 이행불능의 면책을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후단에서) 귀책사유에 의한 이행불능이 전단과 같이 손해배상청구권의 발생요건이라는 점을 규정하는 일본의 개정 전 민법과 다르기 때문이다.130)
그러나 이러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종래 우리민법의 해석상으로도 채무불이행에는 3유형이 존재하며 귀책사유(고의나 과실)는 이행불능뿐만 모든 유형에서 채무불이행책임의 성립을 위해 필요하다는 해석이 지배적이었다. 이러한 해석은 독일민법의 학술계수의 영향을 받은 일본의 종래의 통설과 같은 것이다.131) 다만 최근에는 제390조의 일반규정적 성격 내지 이른바 ‘열린 유형론’에 따라 채무불이행의 유형이나 체계를 파악하는 견해가 유력한데,132) 이것은 일본의 종래의 통설(3유형론)에 대한 비판론(채무불이행 일원론)의 문제의식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2004년 법무부 민법개정안>에서는 제390조가 채무불이행에 의한 손해배상책임에 관한 일반규정을 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을 전제로,133) 특히 단서가 이행불능의 경우(“이행할 수 없게 된 때”)에만 면책된다는 취지를 규정하고 있는 것은 적절치 않고 채무불이행 일반의 면책사유를 정하는 것으로 수정할 필요가 있다는 이유에서, 단서의 표현을 “그 이행이 이루어지지 아니한 때”로 수정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134)135)
이러한 생각은 <2014년 법무부 민법개정시안>에서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즉 현행민법 제390조 단서는 이행불능의 경우에만 채무자의 고의⋅과실을 요구하고 있지만, 통설은 제390조를 채무불이행에 관한 일반조항으로 이해하고 있는바, 동조 단서도 이행불능뿐만 아니라 모든 채무불이행에 적용될 수 있도록 표현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136) 이에 따른 개정제안의 법문표현도 <2004년 법무부 민법개정안>과 완전히 같다.
다만 2004년과 2014년의 개정제안은 본문과 단서의 조응이 적절하지 않다고 볼 여지가 있다는 점에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즉 제390조 단서의 표현을 “그 이행이 이루어지지 아니한 때”로 수정함으로써 모든 채무불이행 유형에 타당한 면책사유를 규정하고자 한 취지는 이해할 수 있으나, 본문은 여전히 “채무의 내용에 좇은 이행을 하지 아니한 때”로 규정되어 있어서 ‘채무불이행’ 전체가 아니라 ‘이행지체’의 경우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2004년 법무부 민법개정안>의 담당위원은 “현행 제390조 본문에서 채용된 ‘채무의 내용에 좇은 이행을 하지 아니한 때’라는 채무불이행의 객관적 요건에 관한 문언은 이행지체나 이행불능은 물론 불완전이행, 이행거절, 나아가 부수의무위반 등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채무불이행요건을 포괄하기에 충분히 탄력적이라고 생각되므로 유지되어도 좋을 것”이라고 하여 본문의 표현을 수정할 필요는 없다는 점을 피력하고 있다.137) 이러한 생각이 최종적인 개정안으로 연결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에 따른다면 제390조 단서의 표현도 본문의 표현과 조응할 수 있도록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할 수도 있다. 실제로 <2004년 법무부 민법개정안>을 작성할 당시에도 단서의 표현을 “그러나 채무자가 고의나 과실 없이 이행하지 아니한 때”로 수정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제안이 이루어진 바 있다.138)
이러한 문제의식은 <2014년 법무부 민법개정시안>을 작성할 당시에도 존재하였다. 즉 당시 제390조의 검토를 담당한 제2기 제2분과위원회에서는 제390조 본문의 표현이 이행지체에는 적합하지만 이행불능과 특히 불완전이행에는 맞지 않는다는 점에서 동조를 “채무의 내용에 좇은 이행이 이루어지지 아니한 때에는 채권자는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그러나 채무자의 고의나 과실 없이 이행이 이루어지지 아니한 때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하선은 필자)라고 수정하기로 합의하였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139) 또한 같은 취지이지만 제390조의 본문과 단서의 표현을 각각 “채무의 내용에 좇은 이행이 없는 때”와 “그 이행이 없는 때”로 수정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견해도 있다.140)
우리 민법 제390조에 대한 개정논의는 동조가 채무불이행에 의한 손해배상책임에 관한 일반규정이라는 점을 전제로 본문과 단서의 조응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에 따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일본 개정민법 제415조의 개정과정에서도 이점이 논의되어 결국 개정 전 민법 제415조의 단서에서 ‘이행불능’의 표현은 삭제되었고 본문에서 양자를 포괄하는 형태로 조정이 이루어진 것(“채무의 이행을 하지 아니한 때”에 ‘이행불능’이 포함된다는 점이 명확하지 아니하므로 전자에 이어 후자를 병렬구조로 표현)은, 적어도 같은 문제의식에 입각한 입법논의의 결과라고 할 것이다.
한편 우리 민법 제390조에 대한 개정논의에서 과실책임주의에 입각한 귀책사유의 판단구조를 일본 개정민법과 마찬가지로 계약의 구속력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변경을 가할 필요가 있는지에 관한 논의는 적어도 주된 논점은 아니었고 개정제안으로 연결되지도 않았다.141)
개정 전 민법에는 이행에 갈음한 손해배상청구 즉 전보배상청구의 요건에 관한 명시적 규정은 존재하지 않고, 다만 해석론에 의하여 논의되고 있을 뿐이었다. 개정 전 민법 하에서 전보배상청구권은 기본적으로 채무자의 귀책사유로 이행불능이 된 경우와 (계약채권에서) 계약이 해제된 경우에 한정된다고 해석되었다.143)
다만 개정 전 민법 하에서도 채무자가 이행지체에 빠진 상황에서 채권자가 상당한 기간을 정하여 이행을 최고하고 그 기간 내에 이행이 이루어지지 아니한 경우에 채권자는 이행을 거절하고 전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는 취지의 판례가 있었다.144) 그리고 이를 지지하는 입장에서는, 채권자가 상당한 기간을 정하여 이행을 최고하고 그 기간 내에 이행이 이루어지지 아니한 경우에 채권자에게는 ‘(이행을 거절하고) 전보배상을 청구’하거나 ‘계약을 해제’하는 선택지가 주어져야 한다고 해석되었다.145)
개정민법 제415조 제2항은 (이행불능을 포함하여) 채권자가 채무의 이행에 갈음한 손해배상(=전보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요건을 새롭게 정한 것이다. 이것은 채무불이행에 의한 손해배상의 유형에는 ‘지연배상’(이행과 함께 하는 손해배상)과 ‘전보배상’(이행에 갈음한 손해배상)이 포함되는바, 전자에 관하여는 민법 제412조(이행기와 이행지체)에서 그 요건을 규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자에 관하여는 그 요건에 관한 명시적 규정이 존재하지 않고 해석론에 맡기고 있었던 것을, 이행불능을 포함하여 전보배상이 인정되기 위한 구체적 요건을 정함으로써 입법적으로 해결한 것이다.
개정민법 제415조 제2항은 “전항의 규정에 의해 손해배상의 청구를 할 수 있는 경우에 다음 중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때에는 채권자는 채무의 이행에 갈음한 손해배상의 청구를 할 수 있다.”고 규정하면서, 채무의 이행에 갈음한 손해배상(전보배상)의 청구권이 발생하는 사유로 다음 3가지를 규정한다. 즉, 이행불능(제1호),146) 확정적 이행거절(제2호), 계약이 해제되거나 해제권이 발생한 경우(제3호)가 그것이다. 여기서 제3호는 계약이 해제된 경우(전단)와 채무불이행에 의한 계약의 해제권이 발생한 경우(후단)를 하나로 통합한 것이므로, 제415조 제2항은 결과적으로 전보배상청구권이 발생하는 요건으로 4가지 사유를 규정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채권법개정의 기본방침>147)이나 <중간시안>148)의 입장과 기본적으로 같은 것이다(다만 규정의 순서와 요건의 통합 여부 및 약간의 표현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149)
채무불이행에 의한 계약의 해제권이 발생한 경우(제3호 후단)의 대표적인 예는 이행지체 후에 채권자가 상당한 기간을 정하여 이행을 최고하였으나 그 기간 내에 채무의 이행이 없는 경우(개정민법 제541조)로서,150)151) 채권자가 아직 계약을 해제하지 않고 있는 경우를 상정한 것이다(이행지체를 이유로 한 전보배상).152) 한편 계약이 해제된 경우(제3호 전단)는 채무불이행에 의해 계약이 해제된 경우를 의미하는데(제415조제2항 본문 참조), 이미 채무불이행에 의해 해제권이 발생한 경우(제3호 후단)가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서 계약이 해제된 경우란 “채무불이행에 의해 해제권이 발생하고 또한 해제가 이루어진 경우”(제3호 후단)를 제외하고 계약이 해제된 경우를 의미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한 경우의 예로 채무자가 그 채무의 본지에 따른 이행을 하지 아니하는 경우(제415조제1항 본문)에, 채권자가 (개정민법 제541조에 의한 법정해제가 아니라) 약정해제권을 행사한 때, 당사자가 합의해제를 한 때, 또는 채권자에게도 불이행이 있어서 채무자가 해제한 때를 들 수 있다.153)
개정민법은 전보배상청구권이 발생하는 경우를 구체적으로 규정하였지만, 이론상 이행이 가능한 경우(이행불능이 아닌 경우, 계약이 해제되지 아니한 경우)에는 전보배상청구권과 이행청구권이 병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게 되었다. 이에 관하여 종래 이를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유력하였는데, 이행청구권은 이행불능 또는 계약해제를 이유로 전보배상청구권으로 전화(轉化) 또는 전형(轉形)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이른바 ‘전형론’).154) 이에 대해 <중간시안>에서는 채권자가 이행에 갈음한 손해배상의 청구를 한 후에는 이행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취지가 명문으로 규정되었다(제10.3.(3)). 이행청구권과 전보배상청구권이 병존하는 경우, 본래의 이행청구와 전보배상청구의 어느 쪽을 이행할지가 불확정하다면 채무자가 불안정한 지위에 놓여지게 된다는 점을 고려하였기 때문이다.155)
그러나 개정민법에서는 <중간시안>의 위 규정을 삭제하였다. 따라서 양 청구권이 병존하는 경우에 채권자가 이행에 갈음한 손해배상(전보배상)을 청구한 경우라도 이행이 가능하다면 채권자는 채무자에 대해 채무의 이행을 청구할 수 있다고 해석할하게 될 것이다.156) 채무자에 대하여 전보배상을 청구하였다는 사실만으로 자기의 이익의 만족을 얻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채권자가 이행청구권을 상실한다고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기 때문이다.157) 다만 양 청구권의 병존이 인정되는 경우에도 양 청구권을 중복적으로 행사할 수는 없기 때문에 그 조정이 문제된다. 이에 대해서는, 양 청구권의 병존을 인정한 위에 하나의 청구권이 실현되면 다른 청구권도 소멸하는 것으로 해결하자는 견해가 유력하다. 즉, 이행청구권이 소멸하는 것은 채무자로부터 채권자에 대하여 전보배상이 현실로 이루어진 때이고, 전보배상청구권이 소멸하는 것은 채무자로부터 채권자에 대하여 이행이 현실로 이루어진 때이다.158)
주의할 점은 개정민법에서 이행청구권과 전보배상청구권의 병존이 실무상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채무불이행으로 해제권이 발생하였으나 계약을 해제하지 아니한 경우(제3호 후단)로 한정된다고 해석된다는 점이다. 이행불능의 경우(제1호)에는 (이행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개념상, ‘확정적 이행거절’의 경우(제2호)에는 (채무자가 임의로 이행할 가능성이 낮기 때문에) 사실상, 계약을 해제한 경우(제3호 전단)에는 (계약이 해제되어 이행청구권이 소멸하였기 때문에) 이론상, 이행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거나 행사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이다.159)
한편 추완청구의 경우에 개정민법 제415조 제2항이 (유추)적용되는지에 관하여 동항에는 명문의 규정이 없다. “이행청구권과 이행에 갈음하는 손해배상청구권의 관계”와 “추완청구권과 추완에 갈음하는 손해배상청구권의 관계”가 동질적이라는 점을 전제로 이를 긍정하는 해석론도 있으나,160) 개정민법 (제415조 제2항이 아니라) 제415조 제1항에 의한 손해배상청구를 인정하면 족하다는 점(추완청구를 하지 않아도 손해배상청구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이를 부정하여야 한다는 견해도 유력하다.161)
한국민법 제395조는 이행지체의 경우에 채권자는 일정한 요건 하에 전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는 취지를 규정한다.162) 이에 대해 <2014년 법무부 민법개정시안>에서는 전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요건을 확대하고, 나아가 불완전이행이 있는 경우의 이른바 추완청구에 대해서도 전보배상청구에 관한 규정을 준용할 수 있도록 하는 개정안을 채택하였다163)(<2004년 법무부 민법개정안>에서는 개정제안이 없다).
<2014년 법무부 민법개정시안>에 의하면 제395조에서 채권자에게 전보배상이 인정되는 것은 ① 이행지체의 경우(제1항)에서 ② 채무자의 명백한 이행거절(이행기 전의 그것도 포함)이 있는 경우로 확대된다(제2항). 또한 ①(제1항)도 기존의 ⅰ) 상당한 기간을 정한 이행의 최고에도 불구하고 이행하지 아니할 것(제1호) 및 ⅱ) 지체 후의 이행이 채권자에게 이익이 없을 것(제3호 전단)이라는 요건에서 나아가, ⅲ) 채권자가 상당한 기간을 정하여 이행을 최고하더라도 그 기간 내에 이행되지 아니할 것이 명백할 것(제2호)과 ⅳ) 지체 후 이행이 채권자에게 불합리한 부담을 줄 것(3호 후단)으로 확대된다. ⅱ)와 ⅳ)는 (이행의) 최고가 없어도 전보배상청구가 인정되는 경우이다. 한편 <2014년 법무부 민법개정시안>은 ③불완전이행의 경우에 추완에 갈음하는 전보배상청구권에 관하여 이행지체에서의 전보배상청구권에 관한 규정(제1항)을 준용하도록 하는 규정을 두었다(제3항).164)
이와 같이 위 개정시안은 전보배상청구권에 관하여 그 인정범위를 확대하는 선택을 한 것인데, 이것은 최근의 국제적인 동향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다만 불완전이행의 경우에 추완에 갈음하는 전보배상청구권에 관하여 이행지체에서의 전보배상청구권에 관한 규정을 준용토록 한 것(제3항)에 대하여는 민법개정위원회의 담당 분과위원회에서도 다른 의견이 유력하게 제기된 바 있다. 즉 위 개정시안에 의하면 불완전이행에서 추완을 청구할 수 있는 경우에 채권자가 추완에 갈음한 손해배상(전보배상)을 청구하기 위해서는 원칙적으로 먼저 상당한 기간을 정하여 추완을 청구하여야 하는바(개정시안 제395조제1항제1호 참조), 일단 이행을 하였지만 하자 있는 이행이 된 불완전이행과 이행이 전혀 없는 이행지체와는 달리 취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점에서 이러한 입법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165) 이 견해에 의하면 채권자에게는 추완청구를 할 수도 있고 ‘바로’ 전보배상을 청구할 수 있도록 선택권을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166) 또한 (전보배상청구를 위하여 추완청구를 할 것을 전제로 하지 않는 이상) 채무자에게 스스로 추완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기 위하여 채무자에게 추완권을 부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167) 이러한 견해의 대립은 추완청구의 경우에 일본 개정민법 제415조 제2항이 (유추)적용되는지에 관한 일본에서의 논의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Ⅳ. 채무불이행에 의한 손해배상책임의 효과에 관한 규율의 정비: 손해배상의 범위, 대상청구권
채무불이행에 의한 손해배상책임의 효과에 관한 규정으로서 개정 전 민법은 손해배상의 범위(제416조)와 손해배상액의 산정에 관한 제 조문[손해배상의 방법(제417조), 과실상계(제418조), 금전채무[불이행]의 특칙(제419조), [손해]배상액의 예정(제420조, 제421조)] 및 손해배상에 의한 대위(제422조)에 관한 규정을 두고 있었다.
개정민법에서는 손해배상의 범위(제416조)에 관한 문구의 조정이 있는 외에, 손해배상액의 산정에 관하여 중간이자의 공제(제417조의2)168)에 관한 규정을 신설하였고 나아가 과실상계(제418조),169) 금전채무의 특칙(제419조)170) 및 배상책의 예정(제420조)171)에 관한 개정이 있다. 또한 대상청구권에 관한 규정을 신설하고 있다(제422조의2).
여기서는 특히 한국민법과의 비교라는 관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는 손해배상의 범위에 관한 제416조와 대상청구권을 신설하는 제422조의2를 검토하기로 한다.172)
개정 전 민법(메이지민법) 제416조는, 손해배상의 범위는 ‘통상 발생하는 손해’(통상손해)를 원칙으로 하며(1항), 나아가 ‘특별한 사정에 의한 손해’(특별손해)라도 당사자가 예견했거나 예견할 수 있었던 경우에는 손해배상의 범위에 포함된다(2항)는 취지를 규정한다. 이와 같이 개정 전 민법은 채무불이행에 의해 배상하여야 할 손해는 통상손해에 한정되며, 특별한 사정에 의한 손해에 대해서는 당사자의 예견가능성이 있는 사정에 의해 생긴 손해만을 배상하면 족하다는 생각(‘제한배상주의’)을 명문화한 것이다. 당사자의 예견가능성을 손해배상의 범위를 획정하는 기준으로 삼는 생각은 16세기 프랑스 학설에 유래하며, 18세기의 프랑스의 학설을 거쳐 프랑스민법전에 채용되었다고 설명된다.173) 이것이 1854년 영국의 판례174)에 영향을 미쳤고, 개정 전 민법은 이 영국의 판례법리를 직접적으로 참조하여 입안된 것이다(개정 전 민법 제416조를 기초한 것은 영국유학을 했던 호즈미(穂積陳重)였다).175)
그러나 민법 제정 후의 학설에서는 독일민법의 학설계수의 영향을 받은 생각이 (전통적) 통설로서 확립하여 판례와 실무에 침투하게 되었다. 여기서는 채무불이행이 없으면 생기지 않았을 (인과관계가 있는) 모든 손해가 배상의 대상이 된다는 생각(‘완전배상주의’)를 전제로 하여, 손해배상의 범위를 상당인과관계 개념에 의해 한정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상당인과관계에 의한 손해’란 “당해 채무불이행에 의해 현실로 생긴 손해 중, 당해 경우에 특유한 경우를 제외하고, 그러한 채무불이행에 있으면 일반적으로 생기는 것으로 인정되는 손해”로서 제416조 제1항은 이 상당인과관계의 원칙을 정한 것이고, 제2항은 상당인과관계 판단의 기초가 되는 특별한 사정의 범위를 명확히 한 규정(인과관계의 상당성을 판단할 때 어느 범위까지의 사정을 기초에 두어야 할 것인가를 정한 규정)이라고 이해한다.176) 그리고 “당사자가 예견하였거나 예견할 수 있었을” 사정은 “채무자가 예견하였거나 예견하였어야 할” 사정으로 규범적으로 판단되어야 하는 것으로 해석되기에 이르렀다.177)
나아가 전통적 통설은 제416조가 계약에 기초한 채무불이행뿐만 아니라 불법행위에도 (유추)적용된다고 한다. 즉. 상당인과관계설은 채무불이행과 불법행위에 공통하는 손해배상의 범위 일반을 획정하는 생각으로서, 제416조는 그와 같은 상당인과관계설을 체현한 규정이라고 이해되었기 때문이다.178) 판례도 일찍이 동조가 상당인과관계의 범위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이해하게 되었다.179)
그러나 종래의 통설에 대하여는 2차대전 이후(특히 1970년대 전후에) 이를 비판하는 견해가 유력하게 전개된다. 우선 ‘완전배상주의’를 전제로 상당인과관계에 의하여 손해배상의 범위를 제한하려고 하는 독일민법의 ‘상당인관관계설’에 의하여 (독일민법이 부정한 프랑스법과 영국법에 입각하여) ‘예견가능성’으로 손해배상의 범위를 제한하는 ‘제한배상주의’를 취하는 일본민법 제416조를 해석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점이 지적되었다.180) 이어서 비판학설은 일본에서 상당인과관계 개념으로 해결해온 문제는, ①사실적 인과관계, ②보호범위(손해배상의 범위), ③손해의 금전적 평가라는 3가지 문제를 포괄하는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였다.181) 손해배상의 범위는 가해행위(불이행행위)와 사실적 인과관계(①)가 있는 손해 중에서 법적으로 보호할 만한 손해의 범위를 획정하는 문제(②)이고,182) 개정 전 민법 제416조는 이 범위를 획정하는 기준이다.183) 나아가 제416조는 보호범위의 문제 중 ‘계약’에 기초한 채무의 불이행에 관한 준칙을 정한 규정이다. 따라서 불법행위에는 적용이 없다.184) 한편 손해의 금전적 평가(③)는, 획정된 범위 내의 손해를 금전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금전배상의 원칙(제417조)에 따라 필요하게 된다. 이것은 재판관의 재량적·창조적 평가에 의해 이루어지는 작업이다.185) 이 견해는 요컨대 개정 전 민법 제416조는 위 세 가지 문제 전체에서 상당인과관계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상당인과관계의 일부인 ‘보호범위’를 정하는 규정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보호범위설’).186)
일본에서 상당인과관계에 3가지 문제가 포함되어 있고 개정 전 제416조는 가해행위와 사실적 인과관계가 있는 손해 중에서 법적으로 보호할 만한 손해의 범위를 획정하는 기준이라는 보호범위설의 생각은 동설을 지지하든 하지 않든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이윽고 보호범위설은 상당인과관계설의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는 유력한 견해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187) 한편, 이에 대해서는 상당인과관계설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독일과는 손해배상법의 구조가 다르다고 하더라도 일본에서는 개정 전 민법 제416조에 의해 정해지는 손해배상의 범위를 상당인과관계라고 부르면 족하다든가, 개정 전 민법 제416조를 상당성의 관점에서 파악하면서 공평이나 규범의 보호목적의 관점을 부가함으로써 해결하고자 하는 견해도 등장하였다.188)
다른 한편, 보호범위설의 문제제기를 수용하면서 나아가 개정 전 민법 제416조를 불법행위에 의한 손해배상의 경우에 (유추)적용하는 판례·학설을 비판하고 동조를 계약채무가 불이행되는 경우의 규율로서 이해하고자 하는 동설의 입장을 발전시킨 견해가 등장하였다. 이 견해는 계약에 의한 채권에서 계약규범에 의해 보호받는 채권자의 이익은 무엇인가라는 관점에서 손해배상의 범위를 획정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계약이익설).189) 즉, 보호범위설에 의하면 채권자와 채무자 쌍방이 계약체결시에 예견가능한 사정이 보호범위에 포함되는바(平井), 계약이익설에서는 계약체결시부터 채무불이행시까지 예견할 수 있었던 사정에 유래하는 리스크를 채무불이행을 한 채무자가 아니라 채권자에게 부담시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고려로부터, 예견의 당사자는 채무자, 예견의 시기를 채무불이행시로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한다.190) 구체적으로는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계약이익의 실현을 보장한 채무자는 계약체결 후에도 계약이익이 채권자에게 실현되도록 성실히 행동할 의무(손해회피의무)를 부담하는바, 이 의무위반을 이유로 한 손해배상을 인정할 수 있다고 한다.191) 이러한 생각은 후술하는 바와 같이 <채권법개정의 기본방침>과 <중간시안>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와 같은 계약이익을 중시하는 입장(계약이익설)에서는 예견 또는 예견가능성의 존부가 계약이익을 위한 적절한 기준이라고는 할 수 없고 오히려 예견가능성의 요건은 규범적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192)(다만 이것은 보호범위설에서도 인정되는 바이다). 이러한 생각이 개정 전 민법 제416조를 개정하는 하나의 추진력이 되었다.193)
<채권법개정의 기본방침>에서는 ‘계약’(=당사자의 합의)에 기초한 채무의 불이행을 이유로 하는 손해배상의 범위를 확정하기 위한 준칙을 정한다는 관점에서,194) 상당인과관계론을 배제하고 나아가 통상손해·특별손해를 구분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개정 전 민법의 ‘예견가능성’ 요건에 일정한 변경을 가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195) 예견의 주체는 (변경 없이) 계약의 ‘당사자’로 하되, 예견의 기준시는 (보호범위설에 따라) ‘계약체결시’로 하고, 예견의 대상은 ‘사정(事情)’에서 (구체적 사안에서 결론에 차이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을 반영하여) 단적으로 ‘손해’로 변경하며, 나아가 ‘예견할 수 있었던’을 ‘예견하였어야 했던’으로 변경하여 예견가능성의 판단이 (예견가능하였는지 아닌지의) 사실인정의 문제가 아니라 규범적 평가의 문제라는 점을 명확히 하였다.196) 또한 (계약이익설에 입각하여) 계약체결 후 채무불이행시까지 발생한 손해에 대해서도 채무자가 손해회피를 위한 합리적 조치를 취하지 아니한 경우에는 그 배상청구가 가능하다는 제안도 추가하고 있다.197)
<중간시안>은 <채권법개정의 기본방침>과 마찬가지로 개정 전 민법 제416조를 ‘계약’에 의한 채무의 불이행에 대한 손해배상의 범위를 정하는 규범으로 위치시킨다는 관점에서 입안되었다. 여기서는 제416조 제1항의 문언(“통상 발생하는 손해”)을 기본적으로 유지하면서, 제2항의 ‘예견’의 대상을 변경함과 동시에 그 주체·시기를 명시하는 등 규정내용의 구체화·명확화를 도모하고 있다.198) 즉, 종래의 통설·판례에 따라 예견의 주체를 ‘채무자’로, 예견의 기준시를 ‘채무불이행시’로 하는 한편, 예견의 대상은 (<채권법개정의 기본방침>과 마찬가지로) 단적으로 ‘손해’로 하였다.199) 또한 예견가능성의 판단은 (<채권법개정의 기본방침>과 마찬가지로) 규범적으로 이루어지도록 그 표현을 변경하되(“예견하였어야 했던”), “예견하였어야 했던 손해”인지 여부는 ‘계약의 취지’(계약 및 거래상의 사회통념)에 비추어 판단된다는 점이 명시되었다(이상 (1)). 또한 (2)에서는 상기 (1)의 손해가, 채무자가 계약을 체결한 후에 처음으로 당해 불이행으로부터 생긴 결과로서 예견하였거나 예견하였어야 했던 것인 경우, 채무자가 손해회피를 위한 상당한 조치를 강구한 경우에 배상책임을 면한다는 점을 추가하고 있다. 이것은 (1)의 규율만을 두게 될 경우에는 계약체결시와 이행시가 분리되었다면 계약체결 후에 예견하였거나 예견하였어야 했던 손해를 전부 배상하여야 하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생긴다는 점을 반영하여 배상범위의 확대를 방지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둔 것이다.200)201) 나아가 불법행위 등 계약 외의 원인(법률의 규정)으로 발생한 채무의 불이행에 의한 손해배상의 범위에 관하여는 특별한 규정을 두지 않고 해석론에 맡기는 것으로 하였다.202)
그러나 최종적으로 개정된 조문에서는 최소한의 문언수정에 그쳤다. 개정 전 민법 제416조의 제1항은 유지되었고, 제2항도 “예견하였거나 예견할 수 있었을”이라는 문언이 “예견하였어야 했던”으로 수정된 것에 불과하다. 이것은 개정 전의 표현을 ‘규범적 개념’으로 변경하고자 한 것이다.203) 즉, “현행 민법 제416조 제2항의 채무자의 ‘예견’에 관한 요건이, 채무자가 현실적으로 예견하고 있었는지 아닌지라는 사실의 유무를 문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채무자가 예견하였어야 했는지 아닌지라는 규범적인 평가를 문제로 하는 것이라는 점이 조문상 명확하지 않다는 문제가 있는바, 적어도 그 점에 대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개정을 할 필요가 있다”204)는 문제의식에 따라 이를 입법에 반영한 것이다.205) 다시 말하면 ‘예견할 수 있었다’(예견가능하 였다)고 하더라도 ‘예견하였어야 했던’ 손해가 아니라면 배상의 범위에서 제외된다는 취지에서 마련된 것이다.206) 개정의 결과, 가령 “계약의 체결 후에 채권자가 채무자에 대해서 어느 특별한 사정이 존재한다는 점을 알리기만 하면 특별한 사정에 의해 생긴 손해가 모두 배상의 범위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채무자가 예견하였어야 한다고 규범적으로 평가되는 특별한 사정에 의해 통상 발생하는 손해만이 배상의 범위에 포함된다”(하선은 필자)고 해석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 입안담당자의 설명이다.207)208)
이러한 평가에 대해 개정 전 민법 제416조 제2항의 ‘예견가능성’이 규범적 개념이라는 점은 전통적 통설이나 비판학설에서 모두 전제로 하는 것이어서, 다툼의 대상이 없는 점만이 개정의 대상이 된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적인 견해도 있다.209) 이러한 견해에 의하면, 개정 전 민법 하에서 전개된 해석론의 대립 상황(특별손해에서 예견의 대상210)·주체 및 기준시211) 등) 은 개정 후에도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212) 특히 <중간시안>에서는 “예견하였어야 했던 손해”인지 여부가 ‘계약의 취지’에 비추어 판단된다는 점이 명시되었으나 이 부분도 삭제됨에 따라 전술한 바와 같이 개정민법상 이행불능(제412조의2)의 판단기준으로서 또한 채무불이행에 의한 손해배상책임의 요건으로서의 귀책사유 또는 면책사유(제415조제1항)의 판단기준으로서 “계약 및 거래상의 사회통념”(<중간시안>까지는 ‘계약의 취지’로 표현되었다)이 명시(제415조)된 것과 마찬가지로 손해배상책임의 효과로서의 손해배상의 범위에 대해서도 같은 판단기준에 따른 판단이 가능할 것인지는 규정상 명확하지 않게 되었다.213) 그러나 명문의 규정은 없어도 예견가능성의 ‘규범적 평가’라는 기준이 명시됨으로써 예견가능성의 판단도 개정민법상 이행불능이나 귀책사유(면책사유)의 판단과 마찬가지로 “계약 및 거래상의 사회통념”에 비추어 (계약의 해석에 의하여)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214)
한국민법 제393조는 ‘손해배상의 범위’에 관하여 “채무불이행으로 인한 손해배상은 통상의 손해를 그 한도로 한다”고 규정하고(제1항), 나아가 “특별한 사정으로 인한 손해는 채무자가 그 사정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을 때에 한하여 배상의 책임이 있다”고 규정한다(제2항). 이것은 일본민법(제417조)과 마찬가지로 손해배상의 방법으로 금전배상을 원칙으로 하면서(제394조) 예견가능성에 의해 손해배상의 범위를 한정하는 ‘제한배상주의’를 명문화한 것으로 이해된다215)(다만 제2항에서 예견가능성의 주체는 일본민법과 달리 ‘당사자’가 아니라 ‘채무자’로 규정되어 있다). 제393조의 해석에서도 일본의 전통적 통설과 마찬가지로 독일민법과 같이 해석하여 제393조를 채무불이행과 손해 사이의 상당인과관계를 규정한 조문으로 이해하는 것이 지배적인 학설과 판례의 태도이다.
<2004년 법무부 민법개정안>과 <2014년 법무부 민법개정시안>에서는 제393조에 관한 개정제안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손해배상의 방법에 관한 제394조에서 금전배상을 원칙으로 하되, 원상회복이나 정기금의 지급에 의한 배상을 인정하거나216) 금전배상에 갈음하거나 금전배상과 함께 다른 적절한 방법에 의한 배상을 인정하는 취지의 제안이 있을 뿐이다.217)
개정민법(신설) |
---|
제422조의2(대상청구권) 채무자가 그 채무의 이행이 불능으로 된 것과 동일한 원인에 의해 채무의 목적물의 代償인 권리 또는 이익을 취득한 때에는, 채권자는 그 받은 손해액의 한도에서 채무자에 대하여 그 권리의 이전 또는 그 이익의 상환을 청구할 수 있다. |
일본의 개정 전 민법(메이지민법)은 대상청구권에 관한 규정을 두고 있지 않다. 구민법(브와소나드민법) 재산편 제543조218)는 프랑스민법(2016년 개정 전 제1303조) 및 이탈리아 구민법(제1299조)을 참조하여 대상청구권에 관한 규정을 두고 있었는데, 메이지민법 기초과정에서 불필요하다고 생각되어 삭제되었다.219) 채권자가 목적물을 소실시킨 불법행위자 등의 제3자에 대해 직접 손해배상을 청구하면 족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富井政章).220)
그러나 메이지민법의 성립 후 학설은 채무자가 얻은 대상의 인도에 대해 규정하는 독일민법(구 제281조, 현 제285조)을 참조하여 일본에서도 해석론으로서 이를 인정하여야 한다고 기술하기 시작하였고,221) 이것이 통설이 되었다(다만, 반대의 견해도 있었음).222) 한편 판례도 이를 정면에서 인정하기에 이르렀는데,223) 개정민법은 이 판례법리를 명문화한 것이다.224)
개정민법은 전술한 바와 같이 이행불능과 동일한 원인에 의해 채무자가 이익을 얻은 때에는 채권자는 자기가 얻은 손해의 한도에서 채무자에 대하여 그 이익의 상환을 청구할 수 있다는 판례법리를 명문화한 것이지만, 대상청구권의 요건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가 개정제안 초기부터 반드시 명확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대상청구권을 이해하는 관점의 차이에도 기인하는 것이었는데, 여기에는 3가지 정도의 입장의 차이가 존재하였다.
첫째, 채무자가 이행의 목적물에 갈음하는 가치대체물(대상)을 취득한 경우에 채권자에게 목적물을 얻는 것과 동등의 가치적 상태를 실현하도록 함으로써 채권자의 이익(급부이익)을 확보하여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대상청구권의 목적에 비추어 보면 채무자가 얻은 대상이 목적물의 가치를 상회하지 않는 한도에서 대상의 이전을 인정하는 것이 상당하다. 또한 채권자가 채무자에 대하여 이행에 갈음한 손해배상(전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지 여부에 관계없이(전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경우에도) 대상청구권이 인정된다(귀책사유불문설).225) 개정논의의 초기단계인 <채권법개정의 기본방침>은 이러한 입장에 따라 입안되었다.226)
둘째, 동등가치의 실현이라는 점에서는 첫째 견해와 같지만, 대상청구권의 인정은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전보배상을 청구할 수 없는 경우(채무자에게 면책사유가 있는 경우)에 한정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대상청구권의 보충성을 인정하는 견해). 아무리 대상이라 하더라도 본래의 급부와 다른 재화를 이전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은 채무자의 재산관리권에 대한 간섭이 되기 때문에 그 행사의 기회는 가능한 한 제한되어야 한다는 이유에서 대상청구권은 전보배상청구를 할 수 없는 경우에 한하여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 이유로 한다.227) <중간시안>은 이러한 입장에 따라 입안되었다.228)
셋째, 쌍무계약에서 일방채무의 이행이 불능한 경우에 채권자가 계약을 유지한다(해제를 하지 않는다)는 결정을 하였다면 채권자에게는 자기의 반대채무를 이행할 의무가 남게 되는바, 이와 같은 경우에 쌍무계약에 있어서의 대가적 균형(급부와 반대급부의 균형)을 확보하기 위하여 채무자에 대한 대상청구권을 인정하여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 입장에 의하면 대상청구권은 쌍무계약의 경우에 한하여 인정되며, 채권자가 이행에 갈음한 손해배상청구권을 갖는 경우에는 대상청구권을 인정할 필요가 없으며, 이전되는 가치에 관하여 목적물의 가치를 상한으로 할 필요도 없다.229)230)
첫 번째와 두 번째 입장은 채권자가 얻는 목적물과 동등가치를 실현한다는 관점에서 “대상의 가치가 목적물의 가치를 상회하지 않는 한도에서”(<채권법개정의 기본방침>) 또는 “채권자가 받은 손해의 한도에서”(<중간시안>) 대상청구권이 인정된다는 점에서는 공통하지만(그 점에서는 대상이 목적물의 가치를 상한으로 할 필요가 없다는 세 번째 입장과 구별된다), 채무자에게 귀책사유가 인정되지 않음(면책사유가 인정됨)으로써 채권자가 전보배상청구권을 갖지 않는 경우에만 대상청구권이 발생하는지에 관하여는 관점의 차이가 존재한다. <중간시안>에서는 <채권법개정의 기본방침>과는 달리 그와 같은 한정을 둠으로써 대상청구권의 보충성을 인정하는 선택을 하였다.
개정민법은 동등가치의 실현이라는 관점을 따랐지만 구체적으로는 두 번째 입장(<중간시안>)과 마찬가지로 “채권자가 받은 손해액을 한도로” 하여 대상청구권이 인정된다는 점을 명시하였다. 이것은 전술한 판례법리를 명문화한 것으로, 이행불능을 계기로 채권자가 이득을 얻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231) 그러나 채무자의 귀책사유(면책사유)의 요부(要否)에 관하여는 두 번째 입장(<중간시안>)과 달리 명문의 규정을 두지 않는 선택을 하였다. 이것은 (형식적으로는) 채무자에게 귀책사유가 인정되어 채권자가 전보배상청구권을 갖는 경우에도 대상청구권이 (널리) 인정된다는 선택을 한 것(귀책사유불문설의 채택)으로 해석될 여지도 있으나,232)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간시안>에서 면책사유가 있을 것(귀책사유가 없을 것)을 요건으로 하는 문언을 삭제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므로 귀책사유의 요부에 관한 이론적 대립은 향후의 해석론에 맡겨져 있다는 것이 입안담당자의 입장이라는 견해도 있다.233)
한국민법에는 대상청구권에 관한 명문의 규정은 없으나, 다수의 학설과 판례가 이를 인정한다.234) <2004년 법무부 민법개정안>에서는 대상청구권에 관한 규정의 신설 제안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채무불이행에 관한 부분(391조의2)과 채무자위험부담주의에 관한 부분(제537조의2)에서 대상청구권의 신설에 관한 논의는 있었다.235) 결국 대상청구권 신설에는 대체로 동의하나 대상청구권의 인정요건과 범위에 관한 논의가 입법에 이를 정도로 성숙되지는 않았다고 보아 개정대상에서는 제외되었다.236) 한편 규정의 위치에 관하여는 제537조에 관련시키지 말고 채무불이행과 관련한 일반규정으로 인정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의견이 우세하였다.237)
<2014년 법무부 민법개정시안>에서는 대상청구권을 (채무불이행으로 인한 손해배상에 관한 마지막 조문인 제399조의 다음에) 제399조의2로 신설하는 개정제안이 채택되었다.238) 이에 따르면 대상청구권의 요건은 “채무의 이행을 불가능하게 한 사유로 채무자가 채권의 목적인 물건이나 권리를 갈음하는 이익을 얻은 경우”로 대단히 포괄적으로 규정되었다(제1항). 즉 채무자의 귀책사유 여부는 묻지 않으며(귀책사유불문설), 채무자가 채무를 이행할 수 없게 된 사유가 수용 등 법률의 규정에 따른 것인지 법률행위에 따른 것인지도 묻지 않는다.239) 따라서 채무자에게 귀책사유(고의나 과실)가 있는 경우에도 (손해배상청구권 외에) 대상청구권이 인정되며, 매매 등 법률행위에 따라 채무를 이행할 수 없게 된 경우에도 대상청구권이 인정된다.
대상청구권의 요건이 충족되면 “채권자는 그 이익의 상환을 청구할 수 있다.” 상환청구의 범위나 한도를 채권자의 손해로 한정할 것인지는 논란이 되었는데, 결국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았기 때문에 손해 한정의 제한을 두지 않은 채 향후 해석론에 맡기기로 하였다.240) 다만 이에 대해서는 민법에서 대상청구권을 손해의 한도로 행사하도록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손해를 초과하는 부분도 대상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241)
한편 (귀책사유가 있는) 채무불이행의 경우라면 채무자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도 인정되기 때문에 대상청구권과의 관계가 문제될 수 있다. 이에 대해 개정시안은 “채권자가 채무불이행을 이유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경우에, 제1항에 따라 이익의 상환을 받는 때에는 손해배상액은 그 이익의 가액만큼 감액된다.”고 규정하였다(제2항). 반대로 손해배상을 받은 경우에 대상청구권의 반환범위에서 이를 감액하여야 하는지는 명시하지 않은데, 해석상 이를 긍정하여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242)
나아가 개정시안은 채무자위험부담에 관한 제537조에 제3항을 신설하여 대상청구권에 관한 제399조의2에 상응하는 규정을 두었다.243) 즉 쌍무계약에서 당사자 쌍방에게 책임없는 사유로 채무자가 자신의 채무를 이행할 수 없는 경우에 채권자가 대상청구권을 행사하면 위험부담에 관한 현행 규정이 그대로 적용될 수 없기 때문에 이에 대비하여 제3항을 마련한 것이다.244)
Ⅴ. 결론
이상, 채권총칙(제3편 제1장)의 ‘채권의 효력’(제2절) 중 ‘채무불이행책임 등’(제1관)에 관한 일본 개정민법의 주요 개정사항을 검토해왔다. 3개의 장에서 각각 검토한 내용을 요약한 후 한국민법과의 비교 및 전망이라는 관점에서 한국민법에 대한 시사점에 관하여 간단히 사견을 언급함으로써 결론에 갈음하고자 한다.
우선, 이행불능에 관한 규율이 신설되었다(제412조의2). 여기서는 채권의 기본적 효력으로서 이행청구권에 관한 규율을 직접 두지는 않았으나, 이행청구권의 한계사유를 이행불능 개념을 사용하여 일원적으로 파악함으로써 이행청구권이 당연히 인정되는 채권자의 권리라는 점을 암묵적으로 표현함과 동시에, 이행기와 이행지체에 관한 제412조(한국민법의 제387조에 상당)의 다음에 ‘이행불능’을 표제로 하는 규율을 위치시킴으로써 전체적으로 채무불이행법의 체계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한편 이행불능이 전보배상청구권을 발생시키는 사유의 하나라는 점을 신설된 제415조 제2항에서 확인하고 있다). 또한 이행불능의 판단기준이 “계약 그 밖의 채무의 발생원인 및 거래상의 사회통념”이라는 점을 명확히 하였는데, 이것은 채무불이행의 귀책사유(면책사유)의 판단기준과 일치하는 것이다(제1항). 나아가 여기서의 이행불능에 이른바 ‘원시적 불능’이 포함된다는 점 및 그 경우 제415조에 따른 손해배상청구가 방해받지 않는다는 점을 명시함으로써 원시적 불능의 도그마를 극복하였다(제2항). 다만 당사자의 합의내용 및 계약의 취지에 비추어 볼 때 원시적 불능이 항상 무효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다음으로, 채무불이행에 의한 손해배상책임의 요건에 관한 제415조를 개정하였다. 여기서는 첫째, 제415조의 성격을 채무불이행에 의한 손해배상책임의 발생에 관한 일반적·포괄적 규정이라는 점을 명확히 함으로써 종래의 3유형론을 극복하고 채무불이행 일원론의 입장을 확고히 하였다. 둘째, 제415조를 (전단·후단의 병렬구조에서) 본문과 단서의 구조로 변경하고 단서에서는 채무불이행책임의 발생요건으로서의 귀책사유 대신에 채무불이행책임을 면하기 위한 요건으로서의 면책사유를 규정하는 체제로 변경하였다(이로써 한국민법 제390조의 구조와 같아지게 되었다). 셋째, 귀책사유 내지 면책사유에 관하여 종래의 통설의 입장인 ‘과실책임주의’를 탈피하여 당사자가 합의한 계약내용에 따라 귀책사유(면책사유)의 존부를 판단하여야 한다는 새로운 입장(이른바 ‘규범적 합의주의’245))을 입법에 반영하였다(이상 제1항). 넷째, 제415조의 제2항에 채무불이행에 의한 전보배상청구권의 발생요건을 신설함으로써, 지연배상청구권의 발생요건에 관한 규정(제412조)과 아울러 채무불이행법의 체계화를 도모하고자 하였다(제2항).
이어서, 채무불이행에 의한 손해배상책임의 효과에 관한 규율을 정비하였다. 먼저 손해배상의 범위에 관한 개정 전 민법 제416조에 관하여 종래의 통설은 (완전배상주의에 입각한) 상당인과관계 개념에 의해 손해배상의 범위를 획정하고 있었으나, 개정민법에서는 예견가능성을 기준으로 제한배상주의에 입각한 제416조는 불이행행위와 사실적 인과관계가 있는 손해 중에서 법적으로 보호할 만한 손해의 범위를 획정하는 기준이라는 입장(보호범위설)을 이론적 전제로 하여 손해배상의 범위를 획정하는 기준을 설정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특별손해(제2항)에 관하여 예견의 대상·주체·시기 등에 관한 콘센서스를 얻는데 실패하였고 최종적으로 개정된 조문에서는 예견가능성의 문언(“예견하였거나 예견할 수 있었을”)을 ‘규범적 개념’인 “예견하였어야 했던”으로 수정하는데 그쳤다. 다만 명문의 규정은 없어도 예견가능성의 ‘규범적 평가’라는 기준이 명시됨으로써 예견가능성의 판단도 개정민법상 이행불능이나 귀책사유(면책사유)의 판단과 마찬가지로 “계약 및 거래상의 사회통념”에 비추어 (계약의 해석에 의하여)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는 견해가 유력하게 등장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개정민법은 종래의 판례법리를 명문화하여 이행불능에서 대상청구권에 관한 규정을 신설하였다(제422조의2). 판례법리를 명문화하여 “채권자가 받은 손해액을 한도로” 대상청구가 인정된다는 점을 명시하였고, 채무자의 귀책사유(면책사유)의 요부(要否)에 관하여는 명문의 규정을 두지 않은 점이 특징이다.
본고에서 검토한 일본 개정민법상 ‘채무불이행책임 등’에 관한 6가지 규율내용은 최근의 한국민법 개정작업의 결과물인 <2004년 법무부 민법개정안>과 <2014년 법무부 민법개정시안>에 대부분의 경우 그에 상응하는 개정안이 완결된 형태로 제시되어 있다.246) 그것은 당시 우리나라의 학설과 실무의 사고체계 및 문화수준 등을 종합적으로 반영한 집단지성의 산물이기 때문에, 설사 일본민법이 우리민법과 유사한 체계와 내용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민법에 대한 개정논의와 일본민법상의 그것을 평면적으로 단순비교할 수는 없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고에서 검토한 일본 개정민법상의 6가지 규율내용과 그에 관한 개정논의로부터 우리민법에 대한 시사점을 도출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우리민법의 개정논의에서는 검토가 반드시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었던 다음 2가지 논점이 될 것으로 본다.
첫째, 채무불이행에 의한 손해배상책임의 성립요건으로서의 귀책사유 내지 면책사유의 판단과 관련하여 이른바 과실책임주의를 탈피하고 계약의 구속력에 입각한 귀책사유(면책사유)의 판단기준을 제시하였다는 점이다.
일본의 개정민법 제415조는 귀책사유의 판단구조를 기존의 과실책임주의(귀책사유=고의·과실)에 따른 과실의 존부 판단에서 “계약 및 거래상의 사회통념”이라는 기준에 따른 귀책사유의 존부 판단으로 개정한 점에 특징이 있다.247) 개정민법에 의하면 계약상 채무의 불이행에 대한 귀책사유는 채무자에게 과실이나 주의의무 위반이 존재하는지 여부가 아니라 당사자가 계약에서 합의한 내용과 계약의 성질, 계약을 한 목적, 계약체결에 이른 경위 등 계약을 둘러싼 일체의 사정과 함께 거래상의 사회통념에 따라 채무불이행을 채무자의 책임으로 귀속시키는 사유가 존재하는지 여부가 규범적으로 판단된다.248) 종래의 통설에서의 과실 판단이 채무자의 직업이나 그가 속하는 사회적·경제적 지위 등에 있는 자로서 일반적으로 요구되는 정도의 주의(선량한 관리자의 주의)를 결여하였는지(=추상적 과실이 존재하는지) 여부가 문제되는 일반적·추상적인 판단이었다면 개정민법 하의 귀책사유의 존부 판단은 계약에서 당사자가 합의한 내용을 중심으로 책임귀속을 정당화하는 사유의 존부에 관한 개별화·구체화된 판단이라는 점에 차이가 존재한다.249)
물론 한국민법은 일본민법과는 달리 채무불이행책임에 있어서 ‘과실책임주의’를 ‘명문’으로 인정하고 있다고도 해석될 수 있다는 점(제390조 단서, 제391조, 제392조, 제397조제2항, 제401조 등)에서 일본민법과의 차별성을 발견할 여지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최소한 계약책임에서의 과실의 표준(=추상적 경과실)을 불법행위책임에서의 그것과 동등시하는 현재의 논의상황이 타당한 것인지는 의문이 없지 않다.250) 일본 개정민법상 채무불이행책임의 귀책구조가 불법행위법상의 귀책구조와 차별화되었다는 지적251)은 한국민법(계약법)의 현대화와 관련하여 음미해 볼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계약책임의 귀책구조에 관한 논의가 진전되기를 기대해본다.
둘째, 손해배상의 범위에 관한 개정논의를 통하여 일본민법 제416조는 사실적 인과관계가 있는 손해 중 그 배상의 범위를 정하는 문제라는 점이 명확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일본 개정민법 제416조의 의의에 관하여 이른바 상당인과관계설에 입각한 이해는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더 이상 존립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416조에 관하여 종래의 통설은 (원상회복주의에 입각한) 이른바 ‘완전배상주의’의 입법인 독일민법에서의 인과관계의 제한이론인 상당인과관계설에 의해 손해배상의 범위를 획정하고 있었다. 민법의 개정과정에서는 ‘예견가능성’을 기준으로 한 제한배상주의의 입법인 일본민법 제416조는 채무불이행행위와 사실적 인과관계가 있는 손해 중에서 법적으로 보호할 만한 손해의 범위를 획정하는 기준이라는 입장(보호범위설)을 이론적 전제로 하여 손해배상의 범위를 획정하는 기준을 설정하고자 하였다. 비록 최종적으로는 예견가능성을 규범적 요건으로 수정하는 선에 머물렀지만, 개정논의를 통하여 제416조를 반드시 상당인과관계설에 결부시킬 필연성은 없다는 점이 명확해졌다고 생각한다.252)
이에 반해 우리나라의 종래의 통설은 제393조를 상당인과관계 개념과 연결시켜 이해한다. 즉 제393조 제1항을 상당인과관계의 원칙을 선언한 것으로 이해하고, 제2항은 (‘채무자’라는 한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채무자뿐만 아니라 일반인(통상인)의 견지에서(절충설) 고찰의 대상으로 삼은 사정의 범위를 규정한 것(채무자와 일반인을 기준으로 예견가능한 특별한 사정의 범위를 획정한다는 점을 규정한 것)이라고 이해한다.253) 손해배상의 범위가 결정되면 그 금전적 평가가 필요하게 되는데, 이 견해는 손해의 금전적 평가의 문제 역시 상당인과관계의 이론을 통하여 해결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254) 요컨대 손해배상책임의 성립의 문제와 손해배상의 범위 및 손해의 금전적 평가의 문제를 제393조에서 상당인과관계 개념을 통하여 함께 처리하는 구조이다(일본의 종래의 통설과 같다). 물론 최근에는 손해배상책임의 성립의 문제와 손해배상의 범위의 문제를 구별하는 유력한 견해가 등장하고 있다.255) 그러나 여기서도 논자에 따라 인과관계와 손해배상의 범위 획정에 관한 구체적 이해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이론적으로 단순한 문제는 아니지만 적어도 채무불이행에 의한 손해배상책임의 성립에 있어서의 인과관계(=사실적 인과관계)의 문제(제390조)와 그 손해배상의 범위를 획정하는 문제(제393조)를 구별하는 것이 채무불이행법의 이론적 체계화를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256) 또한 계약채권에 관한 한 당사자가 합의한 내용(계약의 취지)에 비추어 손해배상의 범위를 획정하고자 하였던 일본민법의 개정과정에서의 논의는 (비록 개정으로 연결되지는 않았지만) 우리민법의 해석론과 입법론에서도 음미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향후에 관련되는 논의가 전개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