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간접정범은 통상 ‘다른 사람을 생명있는 도구로 이용하여 간접적으로 실행하는 범죄’로 정의되고,1) 그 핵심징표는 ‘피이용자에 대한 이용자의 의사지배’라고 한다.2) 가령, 의사가 특정 환자를 살해하고자 몰래 독극물을 혼입한 주사를 간호사에게 건네주며 그 환자에게 주입하게 하여 살해하는 경우가 그 전형적인 예이다. 의사가 아무것도 모르는 간호사를 마치 도구처럼 이용했다는 점에서, 몽둥이와 같은 생명없는 도구를 이용하여 범죄를 직접 실행하는 직접정범과 그리 본질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따라서 독일 형법 제25조 제1항은 범죄를 스스로 직접 실행한 직접정범과 다른 사람을 이용한 간접정범을 엄밀하게 구별하지 아니하고, 이들 모두를 정범으로 처벌한다고 규정하고 있다.3)
그런데 우리 형법 제34조 제1항은 간접정범이라는 제목 하에 “어느 행위로 인하여 처벌되지 아니하는 자 또는 과실범으로 처벌되는 자를 교사 또는 방조하여 범죄행위의 결과를 발생하게 한 자는 교사 또는 방조의 예에 의하여 처벌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피이용자를 ‘처벌되지 아니하는 자’와 ‘과실범으로 처벌되는 자’로 제한하고, 그 행위방법은 이용이 아니라 ‘교사 또는 방조’로 적시하고 있으며, 그 처벌 또한 정범이 아니라 ‘교사 또는 방조의 예’에 따르도록 하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사정이 이러하기 때문에, 이 조항이 간접‘정범’을 규정한 것으로 이해하는 입장(정범설)4)과 특수한 유형의 공범을 언급한 것으로 보는 입장(공범설)5)이 첨예하게 대립하여 왔다.
가령, 甲이 만12세의 乙을 사주하여 절도를 범하게 한 사안(이하에서는 이를 ‘만12세 사주사례’로 칭한다)에서 두 입장은 큰 차이를 내보인다. 정범설은 이른바 ‘정범 우위의 원칙’6)에 따라 먼저 甲이 간접정범의 표지인 의사지배를 충족했는지, 즉 甲이 乙의 의사를 지배하여 도구처럼 이용했는지를 묻는데, 만12세의 멀쩡한 사람에 대한 의사지배는 부정되므로 甲은 간접정범이 될 수 없다고 한다. 다만, 정범설은 공범종속성의 정도와 관련하여 “정범의 행위가 구성요건에 해당하고 위법하면 공범이 성립될 수 있다”는 제한종속형식을 전제로 하므로, 설령 乙이 면책되더라도 甲은 ‘자기 자신의 책임에 따라’(이른바 책임개별화원칙)7) 乙의 위법행위를 사주한 공범이 된다고 한다.
이에 반하여 공범설은 우리 형법이 공범 다음에 간접정범을 규정하고 있는 것처럼, 직접정범 이외의 경우에는 정범보다 오히려 공범이 성립하는지를 먼저 묻는데, 공범종속성의 정도와 관련하여 극단종속형식에서 출발하는 공범설에서는 乙이 면책되므로 甲은 공범이 될 수 없다고 한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우리의 입법자는 이 공범처벌의 공백을 보완하고자 제34조 제1항을 마련해 두었다고 한다.8) 다시 말하면, 처벌되지 아니하는 乙의 절도를 사주한 甲은 그 본질이 공범에 해당함에도 이를 공범으로 처벌할 수 없기 때문에, 이를 제34조 제1항의 간접정범으로 분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정범설과 공범설은 그 논의전제와 논의내용이 완전히 판이하다. 이에 혹자는 정범설이 초점을 맞추는 간접정범의 전형, 즉 의사지배형을 ‘도구형 간접정범’이라고 하고, 또 공범설이 주목하는 제34조 제1항의 간접정범을 ‘공범형 간접정범’으로 분류하기도 한다.9) 엄밀히 말하면, 이 공범형 간접정범은 도구형 간접정범과 공범의 중간적 성질을 갖는 범죄형상인데, 제34조 제1항은 이를 정범으로 분류하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제34조 제1항을 공범형 간접정범에 관한 규정으로 이해하면, 현행법은 도구형 간접정범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는 셈이지만, 공범형을 정범으로 보는 이상 도구형을 정범으로 다룬다고 하더라도 이는 결코 죄형법정주의에 반하는 해석이 아니라고 한다.10)
제34조 제1항의 성격 내지 간접정범의 본질에 관한 그간의 논의는 위에 언급된 것 이상으로 풍부하고 다채롭다. 그런데 최근에 이러한 이론적 논의를 얼어붙게 만드는 사례 2개가 등장하였다. 하나는 피해여성을 강요하여 음란영상 등을 전송받은 행위를 강제추행죄의 간접정범으로 본 사안이고,11) 다른 하나는 강간상황극에 속은 자가 상황극이 아닐 수 있음을 알고도 강간행위를 계속한 경우에 그 상황극을 꾸민 자는 강간미수죄의 간접정범이 된다는 판례이다.12) 전자에 대해서는 여러 맥락이 검토되고 또 찬반의견이 나뉘고 있다.13) 하지만 후자에 대해서는 학계가 사실상 무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간접정범에 관한 그 많은 이론적 논의들이 마치 랙(Lag)에 걸린 것처럼 숨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학계의 존경을 받아온 원로 교수 두 분이 아주 획기적인 주장을 하고 나섰다. 한 분은 ‘독일이론에 대한 맹신적 추종’에 ‘급진적으로 그리고 과격하게 저항’하는 차원에서 가해자-피해자 2인 구도에서는 간접정범이 성립할 수 없다고 역설한다.14) 다른 한 분은 이에 반대하면서 오히려 ‘이론 따로 실무 따로’의 소통부재가 문제라고 한다.15) 실무가 이론적 동면상태에서 벗어나면, 최근에 등장한 두 사례를 설명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는 취지이다. 이하에서는 위 강제추행죄 및 강간미수죄의 간접정범을 다룬 사례를 중심으로, 형법학계 두 원로의 주장과 고민을 살펴 보고, 아울러 간접정범의 문제해결을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한번 가늠해 보고자 한다.
Ⅱ. 自損行爲를 통한 ‘강제추행죄 간접정범’의 成否
피고인은 스마트폰 채팅방을 통하여 피해자 A(여, 22세)와 청소년인 피해자 B(여, 15세)를 알게 된 후 이들로부터 은밀한 신체 부위가 드러난 사진을 전송받았다. 그 후 페이스북을 통하여 피해자들 지인의 인적사항을 알게 되자,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전송받은 신체 사진 등을 유포하겠다’고 협박하여, ⑴ 이에 외포된 A로부터 총 11회에 걸쳐 나체 사진, 속옷만 입고 있는 사진, 성기에 볼펜을 삽입하거나 자위하는 동영상 등을 촬영하도록 하여 이를 전송받았고, ⑵ 같은 방법으로 B로부터 가슴, 성기, 나체 사진 및 속옷을 입고 다리를 벌린 모습의 사진, 가슴을 만지거나 성기에 볼펜을 삽입하여 자위하는 동영상 등을 총 7회에 걸쳐 촬영하도록 하여 이를 전송받았다.16)
피고인은 A에 대한 강제추행죄의 간접정범 및 B에 대한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위반(강제추행)의 간접정범으로 기소되었고, 1심과 대법원은 이를 유죄로 보았다. 강제추행죄는 자수범이 아니어서 타인을 도구로 이용하는 간접정범의 형태로도 범할 수 있고, 이 타인에는 피해자도 포함되므로 그 스스로 자기 몸을 만지도록 협박한 경우에도 강제추행죄의 간접정범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피고인의 소행은 일반적이고도 평균적인 사람으로 하여금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일으키는, 즉 선량한 성적 도덕관념에 반하는 행위라고 한다. 아울러 대법원은 피해자들의 신체에 대한 직접적인 접촉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달리 볼 것은 아니라고 강조하였다.17)
하지만 항소심은 강요사실을 예비적으로 추가하는 공소장변경을 거쳐 강요죄를 인정하는데 그쳤다. 강제추행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① 신체접촉이 있거나 혹은 그와 동등한 정도로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행위가 있어야 하는데, 이 사안의 피고인은 피해자들과 완전히 다른 장소에 있으면서 휴대전화로 협박하여 사진 및 동영상을 전송받은 것으로 ② 피해자들의 신체에 대한 즉각적인 접촉 또는 공격가능성이 있다고 보기 어려운 점, ③ 피해자들로서도 사법기관에 신고 등을 통하여 피고인으로부터의 위와 같은 요구나 상황을 피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을 종합하면, 피해자의 신체에 대한 접촉이 있는 경우와 동등한 정도의 침해행위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18)
이 사안의 피해자들은 피고인의 협박에 의해 그 의사가 제압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피고인의 요구에 따라 기존에 보낸 사진보다 더욱 심각한 자위동영상까지 송부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는 일반인의 관점에서는 합리적인 선택으로 보여지지 않을 수 있다. 피해자들이 더 심한 질곡으로 빠져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대법원은 피해자들에 대한 피고인의 의사지배를 인정하였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의사지배는 ‘실제로 의사가 제압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일반인이면 그러한 상황에서는 의사가 제압될 것이다’는 하나의 평가를 반영하는 것이다.19) 일반인의 관점에서 합리적으로 보이지 않는 행동을 두고, ‘일반인은 통상 그리 행동했을 것’이라고 평가한 것이다.
그렇다면 대법원은 아마도 남녀를 합친 모든 사람들의 평균치, 즉 일반적 평균인이 아니라, 피고인들의 경험과 고통을 공유할 수 있는 여성들의 평균행동, 즉 경험적 평균인을 판단의 잣대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20) 이에 비해 항소심은 신고가능성이나 상황의 회피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반적 평균인을 끌어들인 것으로 보인다. 여성보호라는 시대적 요구를 감안하자면, 대법원의 입장이 선호될 수도 있다. 그러나 경험적 평균인을 끌어들인다고 하더라도, ‘여성들은 평균적으로 어떻게 행동할까“라는 판단이 그리 분명한 것은 아니다. 이처럼 흔들리는 판단에 따라 범죄의 성립여부가 결정되는 측면을 전적으로 부정할 수 없지만, 이는 처벌받는 자의 입장에서는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다.21)
이러한 우려를 감안하자면, ① 신고를 통한 상황의 (일반적) 회피가능성 외에 ② 즉각적인 접촉 내지 공격가능성을 들어 강제추행죄의 성립범위를 제한하려는 항소심의 입장은 상당히 의미가 있어 보인다. 일찍이 대법원도 엘리베이트 안에서 자위행위의 모습을 보여준 사안에서는 강제추행죄를 인정하였지만,22) 피해자를 뒤쫓던 도로변에서 자신의 성기를 보여준 사안에서는 강제추행죄를 부정하였다.23) 대법원은 이 후자에서 “피해자가 고개를 돌려 쉽게 상황을 외면할 수 있었던 점 및 주변의 도움을 청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는 점”을 언급한 바 있는데, 항소심이 말하는 즉각적인 접촉가능성 및 상황의 회피가능성은 이 엘리베이트 사례와 도로변 성기노출사례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과 마찬가지로 항소심도 신체적 접촉이 없는 강제추행죄를 인정하지만, 이 경우에는 ‘신체적 접촉이 있는 경우와 동등’하다는 판단, 즉 엘리베이트 사례와 같은 ‘즉각적인 접촉 내지 공격가능성’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가해자와 피해자가 완전히 다른 공간에 있는 나체사진 전송사례에서는 강제추행죄가 성립할 여지가 없다. 항소심의 이 거리기준은 강제추행죄의 성립범위를 제한하는 하나의 유효한 기준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즉각적인 접촉 내지 공격가능성에서 말하는 즉각성 및 접촉가능성에 관한 판단은 구체적 사례에서는 심하게 흔들릴 수 있다. 가령, 엘리베이트가 아니라 교실 혹은 강당 안이라면 각자의 판단이 서로 또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성범죄에 대한 사회의 차가운 시각이나 엄한 처벌수위를 감안하면, 그 성립여부를 가리는 기준들은 가능한 한 흔들리는 평가보다는 확실한 사실에 기반할 필요가 있다. 가령, 신체적 접촉이 없으면 아예 강제추행죄가 성립하지 않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24) 그렇다면 엘리베이트 사례에서도 강제추행죄(10년 이상의 징역)가 아니라 강요죄(5년 이하의 징역)가 성립할 수 있을 뿐이다.25) 물론, 행위불법에 비해 강요죄의 처벌수위가 너무 낮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죄형법정주의가 지배하는 형법에서는 그 처벌수위가 낮다는 이유로 강요행위를 강제추행에 쉽게 편입시키는 해석론을 전개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처벌수위를 조정하는 입법적 대책을 먼저 강구하여야 한다.26)
가령, 형법 제324조의 강요죄를 다음과 같이 개정하는 방안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형법 제324조(강요)
① 폭행·협박 또는 위계로써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하거나 의무없는 일을 하게 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② 단체 또는 다중의 위력을 보이거나 위험한 물건을 휴대하여 제1항의 죄를 범한 자는 1년 이상의 유기징역 또는 1억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③ 전2항의 방법으로 침해한 법익이 특히 중대할 때에는 2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행위유형에 위계를 포함시키고, 또 침해법익이 특히 중대한 경우를 가중처벌하려는 이유는 무엇보다 최근에 문제되고 있는 ‘위계에 의한 마약류 투여사례’를 염두에 둔 것이다.27) 사람을 속여 마약을 사용하게 하면 제1항의 강요죄로 처벌하되, 중독을 초래하는 등의 특이사항이 있으면 제3항으로 가중처벌하자는 것이다. 물론, 이를 마약류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로 규정하거나 혹은 독일 형법 제177조처럼 아예 형법 제32장 ‘강간과 추행의 죄’에 ‘성적 강요죄’를 신설하는 방안도 생각해 볼 수 있다.28) 입법방식은 논외로 하고, 위 개정법을 전제로 한다면, 신체적 접촉이 없는 엘리베이트사례나 나체사진전송사례에서 굳이 강제추행죄나 그 간접정범의 논리를 고안해 내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한편, 나체사진 전송사례에서 강제추행죄의 간접정범을 인정하는 대법원의 논리는 현행법과 충돌하기도 한다. 가령, 성매매여성이 하루 쉬고 싶어 하는데, 포주가 폭행·협박으로 그녀로 하여금 성을 파는 행위를 하게 한 경우, 대법원의 논리에 따르면 강간죄의 간접정범이 성립한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폭행·협박으로 여성이 스스로 가슴을 만지게 하면 강제추행죄의 간접정범이 되고, 자신의 성기에 손가락이나 도구를 넣게 하면 유사강간죄의 간접정범이 성립한다면,29) 다른 남성과의 성교행위를 하게 하면 강간죄의 간접정범이 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30) 그렇지만 현행법은 이를 성매매강요죄로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억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31)
뿐만 아니라 대법원의 논리는 실은 강제추행죄의 ‘추행’개념과도 잘 어울리지 않는다. 대법원은 강제추행죄가 자수범이 아니어서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릴 수도 있고, 이 다른 사람에는 피해자도 포함된다고 보고 있지만, 피해자의 손이 그의 몸에 닿는 것에서 추행을 읽어내는 것은 너무 부자연스럽고 억지스럽다.32) 나체사진 전송사례의 가해자를 강요죄가 아니라 강제추행죄로 처벌하기 위한 고육책일 뿐이다. 하지만 위에서 제시한 개정 강요죄를 전제로 한다면, 굳이 이런 억지스러운 해석을 할 필요가 없고, 형법상의 추행은 피해자를 제외한 다른 사람의 손을 필요로 한다고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강제추행죄는 자수범이 아니라, 오히려 타수범(他手犯)으로 칭해 볼 여지도 없지 않다.
강제추행죄를 타수범으로 본다면, 그 간접정범은 최소 세 사람을 필요로 한다. 피해자가 곧 피이용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에 강제추행죄를 넘어 모든 범죄의 간접정범은 최소 세 사람을 필요로 하는지 여부가 논란이 되고 있다. 물론, 지금까지의 일치된 견해와 판례는 3인 구도에서는 물론이고, 2인 구도에서도 간접정범이 성립될 수 있다고 보아왔다. 이와 관련하여 가장 자주 언급되는 판례가 코절단사례이다. 피고인은 동거한 사실이 있는 여성의 부정행위를 추궁하다가 면도칼 1개를 주면서 “네가 네 코를 자르지 않을 때에는 돌로서 죽인다”고 협박하였고, 여성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그 면도칼로 콧등을 길이 2.4센치, 깊이 0.56센티 절단한 사안이다.33)
그런데 이 코절단사례나 나체사진 전송사례와 같은 2인 구도에서 간접정범을 인정하는 것은 독일 형법에 대한 맹목적 추종이고, 이에 대해서는 ‘급진적으로 그리고 과격하게 저항해야 한다’는 주장이 최근에 주장되었다. 우리 형법의 간접정범은 애초에 3인 구도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형법 제34조 제1항은 “...교사 또는 방조하여 범죄행위의 결과를 발생하게 한 자는...”이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자살이나 자상(自傷) 혹은 자기추행과 같은 자손행위(自損行爲)는 범죄행위도 아니고 또 그 결과도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그 결과는 ‘타인에 대한’ 결과를 지칭하고, 따라서 그 다음의 발생‘하게 한’이라는 표현도 피이용자와 피해자가 동일할 수 없는 것으로 읽어야 한다고 한다.34)
간접정범을 위해서는 최소한 세 사람이 필요하다는 이 3자 구도론에서는 코절단사례와 나체사진 전송사례에서는 각각 (중)상해죄와 강제추행죄의 직접정범이 성립한다고 하면서,35) 이 직접정범의 논거로 가해자의 ‘적극적 관여’를 들고 있다. 예컨대, 코절단사례의 가해자는 면도칼을 건네주었고 또 자상하지 않으면 돌로 죽이겠다고 협박하면서 돌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적극성을 보였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체사진 전송사례의 피고인도 피해자가 행하여야 할 자기추행의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명령했다는 점에서 그 적극적 관여가 인정된다고 하고, 이와 더불어 조심스럽게 강제추행죄의 ‘추행하다’에는 예외적으로 ‘추행하게 하다’를 포함시키는 해석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36)
요약하자면, ‘적극적으로 추행하게 한’ 경우는 ‘직접 추행한’ 것으로 보자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조심스러운 주장이라고 하더라도 ‘추행하게 하다’를 ‘추행하다’에 포함시킬 수는 없다. 이는 의미론적으로 불가할 뿐만 아니라, ‘추행하다’는 각론의 표현에 총론의 간접정범 규정을 통하지 아니하고 바로 ‘추행하게 하다’를 포괄시키는 것은 형법의 체계적 편성 자체를 무시하는 것이다. 게다가 피해자가 아닌 제3자에게 피해자를 ‘추행하게 한’ 경우는 아무리 적극성을 보였다고 하더라도 그 ‘직접 추행하다’로 볼 수 없다. 또 피해자에게 스스로를 ‘추행하게 한’ 경우에도 그 적극성이 인정되지 않을 때에는 ‘추행하다’가 아닌 ‘강요하다’로 분류할 수 있을 뿐일 것인데, 감내해야 하는 혼란이 너무 크다.
그리고 간접정범을 규정하고 있는 형법 제34조 제1항의 표현은 그리 매끄럽지가 못하다. ‘처벌되지 아니하는 자를... 교사 또는 방조하여’라는 표현과 공범규정 다음에 자리잡은 그 체계적 위치는 정범설과 공범설의 지리한 공방을 낳은 것처럼, 그 의도하는 바가 분명하지 아니하다. 죄형법정주의의 관점에서 매우 유감스러운 조문이고, 시급히 개정되어야 할 사항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 문제많은 조문으로부터 ‘간접정범은 최소한 3인을 필요로 한다’는 일반론을 끌어내려는 시도가 바람직한지도 의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이 일반적 언명 자체가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간접정범은 최소한 3인을 필요로 하는 것이 사실이고, 앞으로의 입법은 이러한 3인구도를 지키는 방향이어야 할 것이다.
3인구도론에 따르면, 형법상 피해자 없는 수많은 구성요건들의 경우에는 모두가 간접정범이 부정되게 되는 엄청난 후폭풍을 가져오게 되는데, 이러한 결론까지 수용할 것이냐고 되묻기도 한다.37) 사실, 현행법 하에서는 2자구도의 간접정범을 전적으로 부정할 수 없다. 나체사진 전송사례의 경우에도 강요죄보다는 차라리 강제추행죄로 처벌할 필요성이 인정된다. 하지만 이 처벌의 필요성을 이유로 강요죄를 강제추행죄로 둔갑시키는 해석은 자제되어야 하고, 이는 해석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입법을 통해서 해결되어야 한다. 본고에서 제시한 개정 강요죄 혹은 성적 강요죄의 신설을 전제로 한다면, 3인구도론도 그리 잘못된 주장은 아닐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이론과 실무의 소통도 중요하지만, 적어도 이 국면에서는 국회와의 소통, 즉 국회의 필요한 입법활동이 더욱 절실하다고 할 것이다.
Ⅲ. 강간상황극 사례와 간접정범의 성부
한편, 간접정범과 관련하여 나체사진 전송사례보다 훨씬 까다로운 사안 하나가 등장하였다. 피고인 甲(男)은 채팅 애플리케이션에 여성이라고 소개하고, 자신에게 ‘강간상황극’을 연출할 남자를 찾았다. 피고인 乙이 연락해 오자 甲은 자신의 집 맞은 편 빌라에 사는 피해자 A의 집 주소를 알려주었다. 乙의 노크에 A가 문을 열어주자 乙은 A의 목을 잡고 방으로 밀고 들어가 침대에 눕힌 후 A의 몸 위에 올라타 반항을 억압하고 강간을 시도하였다. A가 계속하여 손으로 乙의 가슴을 밀어내고 몸을 좌우로 크게 비틀어 이상한 감을 느꼈지만, 乙은 계속하여 A의 몸을 누른 채 강간하였다. 그 후 A를 거실로 끌고 나온 乙은 다시 A의 몸 위에 올라탄 후 반항하는 A의 입에 성기를 수회 삽입하였다.
검사는 乙을 성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위반(주거침입강간)죄로, 그리고 甲을 성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위반(주거침입강간)의 교사죄로 기소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1심은 乙에게 무죄를 선고하였다. 검사는 乙에게 강간의 미필적 고의가 있었다고 주장하였으나 법원이 이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또 甲과 관련하여 검사가 공소장변경요구에 불응하자 법원은 직권으로 성폭력처벌법위반(주거침입강간)의 간접정범을 인정하였다.38) 그러나 항소심은 乙에게 강간의 고의가 있었다고 보고 강간죄를 인정하는 한편, 甲에게는 간접정범에 의한 성폭력처벌법위반(주거침입강간)의 미수가 성립하는 것으로 보았다.39) 대법원은 상고를 기각함으로써 항소심의 판단을 그대로 수인하였다40).
1심과 항소심은 甲이 간접정범이라는 점에는 의견을 같이 하지만, 우선 乙의 죄책과 관련하여 정반대의 생각을 피력하였다. 아마도 1심은 이용자 甲을 간접정범으로 보려고 한다면, 제34조 제1항에 따라 피이용자 乙이 처벌받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아예 乙의 강간고의를 부정한 것으로 보인다.41) 그러나 항소심은 제34조 제1항에도 불구하고 乙의 강간고의를 인정하여 그도 강간죄로 처벌받아야 한다고 보았다.42) 피이용자가 고의의 정범으로 처벌받더라도 그 배후의 이용자도 간접정범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는 언뜻 학계에서 논의되어 온 이른바 ‘정범 배후의 정범’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항소심은 이 학계의 논의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자 하였다.
즉, 기존에 학계에서 ‘정범 배후의 정범’사례로 언급된 것들, 가령 ① 조직적 권력구조를 이용한 경우,43) ② 회피가능한 금지착오를 이용한 경우,44) ③ 피이용자의 객체착오를 이용한 경우,45) ④ 이용자가 의도하는 범죄를 숨기고 그보다 더 작은 범죄를 범하게 한 경우46) 등은 모두 피이용자에게 애초부터 범죄의 고의가 있는 사례들이다. 이에 비해 강간상황극의 피이용자 乙은 그 강간상황극을 하려다가 도중에 비로소 강간의 미필적 고의로 피해자를 간음하였고, 이로써 이용자 甲의 인식과 객관적 상황이 불일치하게 된 것이므로 정범 배후의 정범에 관한 학계의 논의와는 그 전제가 다르다고 한다. 즉, 항소심은 강간상황극 사례를 ‘정범 배후의 정범’ 문제로 보지 아니한 것이다.
그리고 항소심은 甲이 간접정범에 의한 주거침입강간죄의 ‘미수’가 되는 이유는 “피고인(甲)이 의도하였던 범행의 결과가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피이용자(乙)이 강간상황극 도중 피해자에 대한 간음이 실제 강간이 될 수 있음을 알고서도 피해자에 대한 강간을 계속하였다는 우연한 사정에 의한 것일 뿐”이라고 한다. 이 ‘우연한 사정의 개입’으로 ‘이용자의 인식과 객관적 상황의 불일치’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이 후자는 항소심이 인정하는 미수가 ‘불능’미수라는 인상을 풍기고, 전자는 인과관계 내지 객관적 귀속이 부정되는 ‘가능’미수의 하나를 인정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항소심은 자신이 말하는 미수가 그 어느 것인지 확실히 밝히고 있지 아니하다.
또 항소심이 인정한 ‘간접정범에 의한 미수’라는 개념은 제34조 제1항과 충돌하지 않느냐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47) 간접정범은 ‘범죄행위의 결과를 발생하게 한 자’를 말하는데, 미수는 그 결과가 발생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러 의문점에도 불구하고 대법원은 특별한 설명없이 항소심의 결론을 그대로 수용하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약 3년이 지나도록 학계에서도 이 강간상황극 사례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세 개의 논문이 나왔지만, 그 중 둘은 위법성조각사유의 전제사실에 관한 착오사례로 보아 간접정범의 성립을 부정하였고,48) 이 간접정범의 문제로 다룬 논문은 하나가 전부이다. 사안의 특이성을 놓고 볼 때, 학계의 이러한 침묵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로 보인다.
이 강간상황극 사례를 위전착의 문제로 보는 학자 중 한 명은 우선 ‘강간 및 성적 동의’의 의미에 초점을 맞춘다. 형법 제297조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간음’한 경우가 아니라 ‘폭행 또는 협박으로 강간’한 경우를 처벌하는데, 이 강간은 ‘no means no’를 의미하는 것으로 반드시 폭행·협박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고 한다. 따라서 강간상황극에 동의하는 경우에는 그 동의가 양해에 해당되어 강간죄의 구성요건에는 해당하지 않지만, 폭행·협박부분과 관련하여서는 그 동의를 피해자의 승낙으로 보아야 한다고 한다. 이처럼 강간부분은 양해로 구성요건해당성이 배제되고, 폭행·협박은 피해자의 승낙으로 위법성이 조각되는 경우에는 이 전체를 하나의 ‘승낙’문제로 보아야 한다고 한다.49)
따라서 강간상황극에 대한 피해자의 동의가 있는 것으로 믿은 乙은 실은 위법성을 조각할 전제사실(피해자의 승낙)을 오인한 것이고, 다만 그 오인에 정당한 이유가 있다고 볼 수 없어서 乙은 피해자 A에 대한 강간죄의 정범으로 처벌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주거침입 부분에 대해서는 乙이 강간상황극이라고 착오한 이상, 주거침입에 대한 양해가 인정되므로 이 부분은 무죄가 된다고 한다. 반면에 甲은 주거침입과 강간부분을 모두 사주하였으므로 주거침입강간죄의 교사범이 되어야 하나, 정범인 乙이 교사한 내용에 미달하는 강간죄만 범하였기에, 주거침입강간을 교사한 甲도 정범인 乙이 실행한 범위 내에서의 교사범, 즉 ‘강간죄의 교사범’으로서의 죄책을 진다고 한다.50)
그러나 폭행·협박과 강간을 분리하여 그 폭행·협박이 없는 강간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피고인이 강간상황극을 믿은 경우 이미 강간고의가 부정되어 강간죄는 고려대상에서 사라지고, 폭행·협박에 대한 피해자의 승낙을 오인한 문제만 남게 된다. 따라서 피고인의 이 오인에 정당한 이유가 없다면, 그는 폭행·협박죄로 처벌될 수 있을 뿐일 것이다. 그럼에도 승낙을 오인했다는 이유로 피고인의 사라진 강간고의가 어떻게 되살아나는지 의문이다. 게다가 이 견해는 1심의 사실인정을 전제로 하는데, 항소심의 사실인정을 두고도 같은 결론, 즉 ‘乙은 강간죄, 甲은 그 교사범’을 인정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간접정범에 의한 미수’를 인정한 항소심의 고민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일이 될 것이다.
한편, 강간상황극 사례를 위전착의 문제로 보는 또 다른 학자는 우선 기존의 범죄체계론을 아주 기민하게 넘나든다. 즉, 고의는 죄를 적극적으로 근거짓는 사실에 대한 인식만이 아니라, 그 죄를 소극적으로 배제하는 위법성조각사유의 부존재에 대한 인식도 필요하다고 함으로써 신고전적 범죄론체계의 총체적 불법구성요건을 전제로 하는 것처럼 보이다가51) 어느새 고의·과실은 책임요소라고 하여 고전적 범죄론체계로 회귀해 버린다.52) 이러한 전제에서 강간상황극의 사례는 강간죄의 구성요건을 모두 충족한다고 하고, 다만 그 상황극에 대한 합의가 있으면 피해자의 승낙에 의해 위법성이 조각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 합의를 오인하게 되면, 이는 바로 위전착의 문제로 귀착된다고 한다.
그리고 위전착은 제한책임설에 따라 해결되어야 한다고 보고, 1심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즉, 강간상황극의 乙이 위전착에 빠진 경우에는 그 착오에 정당한 이유가 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乙의 강간고의가 부정되어 무죄가 되고, 乙의 행위를 사주한 甲이 주거침입강간죄의 간접정범이 된다는 것이다.53) 반면에 항소심이 인정한 것처럼 乙에게 강간에 대한 미필적 인식이라도 있었다면, 乙은 주거침입강간죄로 처벌되어야 하고, 또 이를 사주한 甲은 그 교사범이 된다고 한다.54) 그리고 강간미수는 어쨌거나 간음에 성공하지 못했을 때 성립하는데, 강간상황극의 乙은 피해자를 간음하였기 때문에, 항소심처럼 ‘간접정범에 의한 강간미수’를 인정하는 것은 미수의 개념범주에 대한 오해라고 한다.55)
물론, 乙이 자행한 강간과 관련하여 甲에게 그 기수 혹은 미수 중 어떤 책임을 묻는 것이 옳으냐에 대해서는 각자의 생각이 다를 수 있다. 하지만 甲에게 미수책임을 묻는 것은 미수개념에 대한 오해라고 한다면, 오히려 이 주장이 간접정범에 대한 짧은 이해를 반영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가령, 강간상황극의 甲에게는 ‘乙의 강간고의라는 우연한 사정’을 이유로, 혹은 그 우연한 사정의 개입으로 ‘甲의 인식과 객관적 상황이 불일치’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가능 혹은 불능미수를 인정하는 것이 불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강간상황극 사례를 위전착의 문제로 다루고자 여러 범죄체계론을 너무 분주하게 넘나들다가 乙에게는 주거침입의 고의가 없었다는 점을 간과한 것도 매우 아쉬운 측면이다.
여하튼 강간상황극 사례를 위전착의 문제로 다루기 위해, 한 분은 폭행·협박이 없는 강간을 주장하는 등 현재의 학문수준을 훨씬 앞서나가고, 다른 한 분은 이제 극복된 것으로 여겨지는 저 과거의 고전적 혹은 신고전적 범죄체계론으로 회귀해 버렸다. 그렇지만 이 두 분이 반드시 지키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피이용자가 처벌받지 않아야 간접정범이 성립하고, 그가 고의범으로 처벌받으면 이용자는 교사범이 될 수 있을 뿐이다”는 오늘날 널리 퍼진 ‘간접정범 도그마’이다. 달리 표현해 보자면, 제34조 제1항에서 유래한 이 간접정범의 도그마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대가를 지불하여야 하는지, 두 분의 시도가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엄청난 대가를 놓고 보더라도 이제 제34조 제1항은 시급히 개정되어야 한다.
강간상황극 사례를 다룬 마지막 한 분은 - 위 두 분이 과거 혹은 미래로의 여행을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끌어오려고 하는 것과는 달리 – 현재의 학문적 논의에 이미 그 해결책이 잘 준비되어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간접정범의 징표로 널리 알려진 ‘의사지배’가 그 문제해결의 열쇠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의사지배는 실행정범과 무관한 간접정범의 독자적 불법표지로서 그 적극적 처벌근거이고, 또 ‘이용자의 독자적 불법을 구성하는 실질적 표지를 담는 그릇’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실무는 이 표지를 외면하고 의사강압적 사례 외의 다른 사례들을 포섭하기 어려운 ‘도구적 이용’이라는 일상적 용어를 사용해 왔는데, 이러한 ‘이론 따로 실무 따로’의 현실이 개탄스럽다고 한다.56)
물론, 실무에서도 가끔 ‘의사의 자유를 상실케 함’이라는 표현을 언급하기도 하는데,57) 이것과 ‘도구적 이용’을 합쳐서 읽으면 의사지배의 맹아가 엿보이기도 하지만, 의사지배에 함축된 학문적 성과를 과감하게 원용하지 못하는 점을 안타까워 한다. 물론, 의사지배의 일정한 한계도 시인한다. 가령, ‘목적없는 고의있는 도구사례’에서는 사실적 측면에서의 의사지배를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한계사례를 포섭하기 위해서는 그 의사지배가 규범적으로 재구성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하면서, 규범화된 표지 ‘우월적 의사지배를 통한 행위지배’라는 표현을 제시한다.58) 의사지배는 이용자의 지배의사라는 주관적 불법과 피이용자가 지배된 사실이라는 객관적 불법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강간상황극 사례에서는 甲의 지배의사는 인정되지만, 乙의 강간고의로 인해 그에 대한 지배사실은 인정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이는 행위자는 범죄를 하려고 하나 객관적으로 그 결과발생이 불가능한 불능미수와 구조적으로 유사하다고 보고, 간접정범에 의한 주거침입강간죄의 ‘불능’미수라는 결론에 이른다.59) 그럼에도 이론적 동면상태에 빠져있는 실무는 乙이 강간의 미필적 고의를 가지고 강간으로 나아간 ‘우연한 사정’에 초점을 맞추어 행위와 결과 사이에 인과관계가 부정된다는 생각으로 ‘가능’미수를 인정한 듯하지만, 여기에서는 인과관계의 단절을 말할 수 없다고 한다. 인과적 진행경과가 달라진 것이지, 존재하는 인과관계가 단절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60)
탁월한 분석과 실무에 대한 준엄한 꾸짖음이 돋보인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지적해 보자면, 우선 가능미수를 염두에 둔 실무가 그리 잘못된 것은 아니다. 이 사안에서의 강간이라는 결과발생은 사전 혹은 사후 어느 관점에 따르더라도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지 않기 때문이다. 乙의 강간고의라는 ‘우연한 사정’과는 별개로, 짜여진 각본에 따른 강간이 발생가능하고 또 실제로 발생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는 乙의 책임영역에서 일어난 만큼 乙은 그 책임을 피할 수가 없다. 물론, 그 강간이라는 결과를 甲에게도 귀속시켜 그에게도 같은 책임을 물을 것이냐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것처럼 각자의 생각이 다를 수 있겠지만, 적어도 항소심과 대법원은 그 결과를 甲에게는 귀속시킬 수 없다고 보고 미수를 인정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실무가 외면한 것은 간접정범에 관한 학문적 성과가 아니라, 오히려 이미 오래전부터 학계에서 잘 다듬어져 온 객관적 귀속론으로 보인다.61)
그리고 의사지배라는 표지가 규범적 개념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의사지배 여부는 이미 언급한 것처럼 일반인을 기준으로 평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서두에서 언급한 ‘만12세 사주사례’에서는 사실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의사지배가 불가하다’고 보아 왔는데,62) ‘목적없는 고의있는 사례’에서 사회적·규범적 의사지배를 언급하는 것63)과 비교할 때, 일관성에 문제가 없지 않다. 물론, 이 일관성을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간접정범의 사례유형이 매우 다양하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규범적 개념인 의사지배를 사안에 따라 다시 규범화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이 다양성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64) 이를 놓고 보자면, 간접정범을 도구형과 공범형으로 나누려는 시도도 그리 탓할 일은 아닐 것이다.65)
그런데 간접정범의 이 다양한 사례유형을 논의하는데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이 바로 현행 형법 제34조 제1항이다. 그 체계적 위치, 사용된 용어들의 문제점 등은 이미 충분히 지적되어 왔는 만큼,66) 이제는 시급히 개정되어야 한다. 이 잘못된 조문을 전제로 이론과 실무가 소통하려고 하더라도 그것은 짜맞춘, 비틀어진 소통일 수밖에 없기에, 지금은 입법자와의 소통이 더욱 강조되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독일의 입법방식이 참조되어야 한다. 혹자는 독일에 대한 맹신으로부터 과격하게 벗어나야 한다고도 하지만, 그렇다고 독일 입법자들의 고민까지 외면할 이유는 없다. 충분한 고민 끝에 그저 ‘이용한다’는 말만 언급하여 다양한 사례들을 포섭할 길을 열어놓은 독일의 입법방식도 참작할 만하다는 것이다.67)
Ⅳ. 결 어
실무의 법해석은 현행법이 봉쇄적 완결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여야 한다. 그리고 나체사진 전송사례나 강간상황극 사례와 같은 매우 이례적인 사안이 등장하여도 그것이 현행법의 어느 규정 또는 어떤 맥락과 맞닿을 수 있는지를 찾아내어야 한다. 당벌성이 있는 사안의 처벌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나체사진 전송사례와 강간상황극 사례에서 보여준 실무의 판단을 그리 나무랄 일은 아니다. 나체사진 전송사례에서는 강제추행죄 정도로 처벌할 필요성이 있고, 또 강간상황극 사례의 이용자(甲)에게는 간접정범으로서의 죄책을 묻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무의 판단을 비판할 때에도 실무의 이러한 제약사항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론가들의 법해석은 실무와 다를 수 있다. 이론가들은 현행법을 하나의 봉쇄적 완결체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죄형법정주의와 같은 법원칙이나 원리들을 더 중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론가들은 실무의 법해석이 이러한 법원칙들과 충돌하는 것은 아닌지를 살펴보고, 이 충돌지점에서는 해석의 중단을 선언하여야 한다. 그 이상은 입법자의 입법영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령, 나체사진 전송사례에서와 같이 신체적 접촉이 전혀 없어도 추행이라고 하고 또 피해자의 손이 자신의 신체에 닿아도 추행이라고 할 때에, 그 어느 지점에서는 해석의 중단을 선언하고 입법적 해결책을 촉구하여야 한다. 본고가 제시한 ‘강요죄의 개정 혹은 성적 강요죄의 도입’이 그 예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론가들은 실무에 아쉬움을 토로할 수 있다. 이른바 공모공동정범이나 합동범의 공동정범처럼 실무가 이론적 맥락을 철저히 외면하는 경우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간상황극 사례와 관련하여서는 학계가 지금까지 실무가 참고할 만한 어떤 깔끔한 이론적 맥락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특히, 정범 배후의 정범과 관련한 논의를 살펴보면, 이론가들이 마치 실무가의 처지에 놓인 것처럼 제34조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래서 가령, 현주건조물을 일반건조물로 속여 방화하게 한 경우에는 “이용자가 생각한 범죄로 처벌받지 않는 자를 이용”한 것으로 보는 약간의 꼼수가,68) 또 조직적 권력구조를 이용한 경우에는 저 문제많은 공모공동정범의 논리로 풀려는 무리수69)도 제시되어 있다.
상황이 이러하기에, 강간상황극 사례의 항소심은 아예 ‘강학상의 논의와 그 전제가 다르다’며 ‘정범 배후의 정범’에 관한 논의와는 미리 선을 긋고, 피이용자에게 강간의 고의가 생겨났다는 ‘우연한 사정’을 이유로 ‘간접정범에 의한 주거침입강간의 미수’를 인정하고 말았다. 그러나 현조건조물방화 사례의 피이용자는 애초부터 고의를 가지고 있었고, 강간상황극 사례의 피이용자는 범행 도중에 고의를 갖게 되었다. 전자의 경우에 이용자에게 현주건조물방화의 기수책임을 묻는다면, 후자의 경우에도 간접정범에 의한 주거침입강간죄의 기수책임을 물을 여지가 없지 않다. 물론, 두 사안의 차이점을 중시하여 다른 주장도 할 수 있겠지만, 여하튼 이용자의 계획이 실현되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이렇게 본다면, 실무는 ‘의사지배의 규범력’에도 유의해야 했지만, 그 이전에 ‘정범 배후의 정범’에 관한 학계의 논의에 좀 더 진지하게 접근했어야 한다. 물론, 이미 언급한 것처럼 그에 관한 논의는 형법 제34조 제1항과 제2항 때문에 심하게 왜곡되어 있다.70) 심지어 그것은 독일의 고유문제이고, 우리의 경우에는 ‘필요없는 논의’라고 하는 시각이 우세하다.71) 이러한 기류로 인해 강간상황극이라는 아주 특이한 사례가 등장하였음에도 학계가 사실상 침묵을 지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제는 저 문제 많은 제33조와 제34조 등 공범 관련 규정들을 시급히 개정하여야 한다. “스스로 혹은 다른 사람을 이용하여 범죄를 실행한 자는 정범으로 처벌한다”는 규정이 그 예가 될 것이다.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