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문제의 제기
2021년 1월 8일 서울중앙지방법원 제34민사부는, 위안부 피해자 12명이 2013년 8월 조정을 거쳐 일본을 상대로 2015년 10월에 제소한 사건에서, 한일 양국의 2015년 12월 28일 위안부 합의에 배치되는 판결을 내렸다. 법원은 위안부 문제 같은 반인도적 범죄행위에는 국가면제(state immunity)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원고 측 청구를 인용하여, 피해자들에게 일본 정부가 1억 원씩 지급하라고 원고 측의 손을 들어줬다.1)
이 판결에서 제34민사부는 이 사건의 행위는 일본제국이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광범위하게 자행한 반인도적 범죄행위로서 강행규범을 위반한 것이며, 일본이 불법적으로 점령 중이던 한반도에서 피해자들에 대하여 자행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것은 국가의 주권적 행위(acta jure imperii)라 하더라도 국가면제가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대한민국 법원이 예외적으로 재판권을 갖는다고 판시했다.
또한 법원은 이탈리아 헌법재판소가 국제사법재판소(ICJ)의 판결을 부인한 2014년 10월의 결정을 참고하여 일본에 국가면제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2) 법원은 헌법과 세계인권선언에 따른 보호 및 침해됐거나 그럴 위험이 있는 기본권을 보장하는 재판권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재판권의 제한은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했다. 법원은 한반도에서 전쟁행위가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력충돌 행위에 대한 국가면제가 정당화되는, 예측 불가능한 피해를 가정할 수 없다는 점을 주목했다. 법원은 피해자들이 달리 보상받을 수 있는 수단이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3) 일본은 이를 국제법 위반이라고 항의하고 무대응으로 일관하여, 1심 판결이 그대로 확정됐다.
그런데 2021년 3월 29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이 판결과 관련하여 “일본으로부터 추심할 수 있는 소송의 비용 부분은 없다”고 결정했다. 재판부는 일본에 대한 추심의 결정은 비엔나협약 제27조 등 국제법에 위배된다고 판시했다.4) 그러나 2021년 6월 9일 법원은 일본이 강제집행을 위한 재산목록을 명시하여 제출해야 한다고 결정했다.5) 그렇게 법원이 외교관계를 고려하여 외국 재산의 강제집행을 막겠다는 결정을 법원 스스로가 번복했다. 외국 재산에 대한 강제집행은 우리가 비준한 ‘외교관계에 대한 비엔나협약’과 같은 국제법에 어긋나고 심각한 외교분쟁을 초래한다.
한편 서울중앙지방법원은 2021년 4월 21일 다른 피해자들이 별도로 제소한 위안부 소송에서 외국의 주권적 행위에 국가면제를 적용하여 원고의 청구를 각하했다.6) 그러나 2023년 11월 23일 서울고등법원은 항소심에서 원고 승소의 판결을 내렸다. 법원은 1심 판결을 취소하면서 국제관습법을 이유로 일본에 대한 국가면제를 인정하지 않았다.7) 일본은 한국 법원의 판결을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라 비난하고 재판에 불참했기 때문에 판결은 항소심에서 확정됐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법부의 판결은 법적, 정치적, 외교적 측면에서 많은 문제점을 제기한다. 특히 위안부 문제는 일본의 미해결 과거사 문제의 핵심 이슈로서 민족감정과 역사 인식이 복잡하게 착종하고 있어서 합리적인 해결이나 평가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섭외적 사건은 외교적 협상을 진행하면서 법적 가치를 소홀히 해서도 안 되기 때문에 법과 정치의 관계를 감안하여 접근할 수밖에 없다.
그런 맥락에서, 이하 이탈리아의 국가관할권 면제 사건에서의 핵심적 주장과 국가실행을 살펴보고,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일 간의 합의와 국내 판결의 쟁점을 검토하기로 한다. 국제법 측면을 고려하지 않은 섭외적 사건의 판단은 국제사회의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이탈리아 국내법원에서 시작된 강행규범과 국가면제에 대한 논란은 결국 국제사법재판소의 판단을 이탈리아가 수용하여 해결되었다.
Ⅱ. 한일 양국의 위안부 문제 합의와 혼란
한국은 1991년 8월 위안부 문제가 정식으로 제기된 이후 일본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진상 규명과 사죄를 요구했다. 위안부 문제는 1952년 2월부터 1965년 6월까지 국교 정상화의 협상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일본은 이 문제가 ‘청구권협정’ 규정으로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됐다’고 주장할 수 없었다. 강제징용의 경우와 달리 위안부 문제는 ‘상대방의 모든 청구권에 대해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다’는 내용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기 힘들었다. 국내 시민단체는 책임자의 처벌과 배상을 요구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도 거세졌다.8)
마침내 일본은 위안부 문제에 대하여 여러 차례 사과했다. 우선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총리는 1992년 1월 17일 서울에서 한국인의 고통과 슬픔에 대해 반성하고 사죄하며, 특히 위안부 문제에 대하여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했다. 가토 고이치(加藤紘一) 관방장관은 1992년 7월 6일 일본의 사과와 반성을 담은 담화를 발표했다.9)
그리고 1993년 8월 4일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관방장관은 위안부의 모집, 이송, 관리에 ‘일본군의 강압’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며 이를 진심으로 사죄하고 반성한다고 했다.10)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총리는 1994년 8월 31일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힌 위안부 문제에 대하여 다시 진심으로 깊이 사죄하고 반성한다는 입장을 밝혔다.11) 고노 관방장관과 무라야마 총리의 담화는 일본의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사과의 기준이 됐다.
총리와 각료의 사과에 이어서 일본은 구체적인 조치를 취했다. 일본은 1995년 아시아 여성기금을 통해 한국, 필리핀, 대만의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총리의 사죄 편지와 함께 일인당 2백만 엔을 각각 지급했다.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郎) 총리는 진심으로 위안부 문제를 반성하고 사죄한다고 했다. 고이즈미 쥰이치로(小泉純一郎) 총리도 2001년 다시 이 문제에 대해 사과했다.12)
2007년 4월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도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사죄의 뜻을 기자회견에서 밝혔다. 다만 그는 일본군이 총칼로 위협해서 위안부를 강제 연행한 증거는 없다고 한발 물러섰다. 그러나 그는 2015년 12월 28일 한일 간의 위안부 합의에서 일본군의 ‘관여’와 일본의 ‘책임’을 정식으로 인정하고 사죄했다.13) 당시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외상은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의 합의에서 아베 총리의 사과문을 읽고 일본의 입장을 밝혔다. 또한 아베 총리는 위안부 합의 발표 당일 박근혜 대통령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정중하게 사과했다.14)
일본은 이와 같이 위안부 문제에 대한 공식적인 책임을 인정하고, 정식으로 사죄했으며, 실질적인 배상도 했다. 일본은 책임의 이행조치로 10억 엔을 한국에 설립되는 재단에 출연했다. 일본 정부가 제공한 자금은 2016년 7월 출범한 화해치유재단을 통해 2017년 12월까지 대략 생존 피해자와 유족 104명에게 50억 원 정도가 지급됐다.15)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후 화해치유재단을 해산해버렸다. 그는 2018년 9월 유엔에서 아베 총리에게 화해치유재단의 해산을 통고하면서, 한국의 조치가 일본에 대한 위안부 합의의 파기나 재협상의 요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것은 합의는 존속하지만 재단에 출연한 돈은 일본이 회수해가라는 요령부득의 주장이었다. 문 대통령은 2021년 1월 18일 신년 기자간담회에서 2015년 양국의 위안부 합의가 공식적 합의임을 인정한다고 했다.16)
헌법재판소는 2011년 8월 30일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정부의 부작위가 위헌이라고 결정한 바 있다. 이에 이명박 정부는 2012년 10월 일본의 민주당 정부와 잠정적으로 합의에 이르기도 했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에서 우여곡절을 겪은 후 2015년 12월 성립한 양국의 합의를 문재인 정부에서 실질적으로 번복해버렸다.
그런데 헌법재판소는 2019년 12월 27일 위안부 합의가 위헌이라는 헌법소원을 만장일치로 각하했다. 헌법재판소는 조약이 아닌 위안부 합의는 정치적 합의로서 헌법소원 심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결정했다. 헌법재판소는 위안부 합의가 기본권의 침해와 무관하다고 한 외교부의 손을 들어줬다. 헌법재판소가 피해자들을 대리한 민변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고 발을 빼면서 위안부 문제는 국내적으로 종결되는 듯했다. 그러나 전술한 것처럼 서울중앙지방법원이 2021년 1월 8일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승소 판결을 내리면서 문제가 복잡해졌다.
일본은 문재인 정부의 위안부 합의 번복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정부 간 합의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사법부의 판단도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국내 판결은 국가면제의 부인이라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가령 중대한 강행규범 위반이라는 명분이 국가면제라는 국제관습법을 부인할 정도로 정당화된다고 하더라도, 이를 집행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국가관할권 면제 사건에서 판시되었듯이, 실체적 진실과 절차적 정당성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국제사법재판소 판결이 주는 함의를 주목하여 위안부 문제의 진정한 해법을 판단해야 한다. 국제사법재판소 판결을 통해 이를 상세히 검토해보자.
Ⅲ. 이탈리아 법원에서의 청구 내용과 정황
이탈리아는 영역적 불법행위 원칙(Territorial Tort Principle)에 이어서, 이탈리아 법원에 제기된 모든 청구에 국가면제의 거부가 그 청구의 내용과 그 청구가 이루어진 상황의 특별한 성격에 따라 정당화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 이탈리아는 청구의 원인이 된 행위는 무력충돌 행위에 적용되는 국제법 원칙에 대한 심각한 위반으로 전쟁범죄 및 반인도적 범죄를 구성하며, 둘째, 침해된 국제법 규칙은 강행규범에 해당하고, 셋째, 원고들은 다른 모든 형태의 구제 수단이 거부되었기 때문에 이탈리아 법원의 관할권 행사가 최후의 수단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국제사법재판소는 이탈리아가 구두절차에서 이탈리아 법원이 이들 세 가지 요소를 결합하여 국가면제를 거부했다고 주장한 것을 고려하여, 다음과 같이 이들 각 요소를 순차적으로 검토했다.17)
첫째 요소는 위반의 중대성이다. 이는 국제법이, 국가가 무력분쟁법(국제인도법)을 심각하게 위반한 경우, 그 국가에 국가면제를 부여하지 않거나 적어도 국가면제의 권리를 제한한다는 전제에 입각하고 있다. 이 사건에 있어서 재판소는 이탈리아 법원의 절차로 제기된 독일의 군대 기타 독일 기관의 행위는 무력충돌법에 대한 중대한 위반이며 국제법상 범죄가 된다는 것임을 이미 밝혔다.18) 문제는 그 사실이 독일의 국가면제 향유를 박탈하는 효력을 갖는지에 있다.19)
그런데 재판소는 우선 면제의 유효성이 어느 정도 불법행위의 중대성에 관련된다는 주장에 논리적 문제가 없는지 검토해야 한다. 재판권에서의 면제는 단순히 불리한 판결에서의 면제에 그치지 않고 소송절차에 따르는 의무로부터의 면제가 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필연적으로 예비적 성격을 가진다. 따라서 국내법원은 제기된 본안에 대한 조사에 앞서, 사실을 확정하기 전에 외국이 국제법상 면제를 향유하는지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만일 면제 여부가 그 국가가 실제로 중대한 국제인권법 또는 무력분쟁법을 위반한 것에 영향을 받는다고 하면, 국내법원은 관할권의 유무를 판단하기 위하여 본안에 대하여 조사해야 한다. 한편 한 국가의 면제를 박탈하기 위하여 그 국가가 그런 위법행위를 했다는 단순한 신고만으로 충분하다고 하면, 면제는 사실상 청구의 기교적 구성으로 용이하게 부정될 것이다.20)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사법재판소는, 국제인도법 또는 무력분쟁법에 대한 중대한 위반의 경우, 국가가 면제를 누릴 수 없다는 지점까지 국제관습법이 발전했는지를 검토해야 했다. 이 사건의 주제가 되어 있는 이탈리아 법원의 판단을 제외하고는, 그런 경우에 국가면제의 향유가 박탈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국가실행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 대법원이 디스토모 사건에서 그런 논법을 채택했지만, 특별최고재판소는 2년 후 마겔로스 사건에서 그것을 부인했다. 재판소가 제76항에서 지적했듯이, 그리스 법에 의하면, 후속 사건의 법원이 2002년 이후 국제관습법이 변화했다고 판단하지 않는 한, 마겔로스 사건의 판례에 구속되기 때문에, 그 후 국제관습법이 변화했다고 판단한 법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재판소는, 그리스의 실행은 전체적으로 보면, 영역적 불법행위 원칙과 마찬가지로, 이탈리아가 내세우는 견해가 국제관습법의 일부가 되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판단한다.
게다가 문제가 된 행위의 중대성이나 위반했다는 규칙의 절대적 성격이 국제관습법상 국가의 국가면제 향유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지 않는 다른 국가들의 국가실행이 많이 존재한다.21)
그런 국가실행은 국내법원의 판결에 특히 많이 보인다. 국제인권법에 대한 중대한 위반 또는 반인도적 범죄나 전쟁범죄로 기소된 경우, 국제법이 국가면제를 요구하고 있지 않다는 취지의 주장은 국내법원에서 부인되어왔다. 예컨대, 캐나다(2004년 온타리오 항소법원 부자리 대 이란이슬람공화국 사건; 고문에 대한 소송),22) 프랑스(브슈롱 사건에 관한 2002년 9월 9일 파리 항소법원 및 2003년 12월 16일 파기원 판결, 2004년 6월 2일 파기원 판결(X사건), 2006년 1월 3일 파기원 판결(그로스 사건);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소송),23) 슬로베니아(슬로베니아 헌법재판소; 전쟁범죄와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소송),24) 뉴질랜드(2007년 대법원 팽 대 장 사건 판결; 고문에 대한 소송),25) 폴란드(2010년 나토니에프스키 사건 대법원 판결; 전쟁범죄와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소송),26) 영국(2007년 귀족원 존스 대 사우디아라비아 사건 판결)의27) 경우가 그런 실례가 된다.28)
재판소는 재판관의 질문에 대하여 이탈리아 자신이 이탈리아 사건의 이런 측면에 대한 불확실성에 관하여 진술한 것을 유의한다. 이탈리아는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이탈리아는 전쟁범죄와 반인도적 범죄는 주권적 행위로 볼 수 없으므로 국가가 방어를 위해 국가면제를 원용할 수 없다는 견해를 갖고 있는데…이탈리아는 이 분야에서 국가면제의 법이 변화 과정에 있다고 인식하고 있지만, 현 단계에서 이 과정이 새로운 일반적인 면제의 예외, 즉 국제범죄로부터 발생하는 배상에 대한 모든 소송에서 면제를 부정한다는 규칙이 확립됐다고 볼 수 없다는 것도 인식하고 있다.”
유사한 불확실성은 만텔리 대 마이에타(Mantelli and Maietta) 사건의 이탈리아 파기원 명령에서도 현저하게 나타난다(2008년 5월 29일 명령).29)
재판소는 페리니 사건에 대한 이탈리아 파기원의 판결에서 근거로 거론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2000년 피노체트 사건(3)에 대한 영국 판결은 이 사건과 관련성이 없다고 생각한다.30) 피노체트 사건은 전 국가원수의 타국에서의 형사소송 면제에 관한 것이며, 손해에 대한 책임을 결정하기 위한 절차상 국가 자체의 면제에 관한 것이 아니다. 전자의 유형인 정부 고위관리의 면제와 후자의 국가면제의 구별에 대해서는 피노체트 사건에서 몇 명의 재판관이 강조하고 있다.31) 귀족원은 나중에 2007년 존스 대 사우디아라비아 사건에서 이 구별을 더욱 명확히 설명했는데, 빙햄 경은 형사소송과 민사소송의 구별을 피노체트 사건 판결의 핵심이라고 했다(para.32). 게다가 피노체트 사건 판결의 논리는 1984년 유엔고문방지협약의 특정 문언에 의거했는데, 그 협약은 이 사건과는 관계가 없다.32)
국내법과 관련하여 이탈리아는 미국의 외국국가면제법(1996년 제정)의 개정을 언급했다. 이 개정으로 특정한 행위(예를 들면 고문이나 초법규적 살해)가 미국 정부에 의해 ‘테러 지원국’으로 지정된 국가가 자행했다고 기소된 경우, 그에 대한 면제가 부여되지 않는다. 재판소는 이 개정이 타국의 입법에 유례가 없다는 것에 유의한다. 국가면제에 관한 국내법을 제정한 국가 중에서 문제가 된 행위의 중대성에 따라 면제를 제한한다는 조항을 갖는 국가는 없다.33)
더욱 유의해야 하는 것은, 유럽협약, 유엔협약 그리고 미주협약 초안에서는 위반의 중대성이나 침해된 규칙의 절대적인 성격을 근거로 국가면제를 제한하는 규정이 없다는 점이다. 유엔협약에 이런 조항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특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조약 초안의 검토 과정에서 이런 조항의 필요성에 대하여 문제가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1999년 국제법위원회는 유엔총회 제6위원회에서 지적된 국가면제에 대한 몇 가지 문제에 관한 국가실행의 발전을 검토하기 위한 워킹그룹을 설립했다. 워킹그룹은 그 보고서 부록에서 추가 사항으로서 ‘강행규범적 성격을 가진 인권규범의 위반으로 인한 국가에 의한 인간의 살상의 경우’에 대한 청구와 관련된 국가실행의 발전을 언급하며, 이 문제는 무시해서는 안 되겠지만, 국제법위원회의 조문에 대한 개정을 권고하지는 않는다고 했다.34) 그 후 이 문제는 유엔총회 제6위원회가 설립한 워킹그룹에 의해 검토됐다. 1999년에 이 문제는 “아직 워킹그룹이 성문화 작업을 할 만한 정도가 되지 않아서” 거론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했다고 보고되었고, 만약 어떠한 조치가 필요하다면 어떤 행동 방침을 취할지 제6위원회가 결정하는 것으로 정해졌다.35) 이어서 제6위원회의 논의 과정에서 강행규범 위반에 의한 면제의 제한을 조약에 도입해야 한다고 제안한 국가는 없었다. 이러한 역사는, 2004년 유엔협약의 채택 당시, 각국이 이탈리아가 주장하는 형태로 국제관습법이 국가면제를 제한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재판소는 판단했다.36)
유럽인권재판소는 국제인도법 또는 인권법에 대한 중대한 침해에 관한 경우 국가가 면제를 누릴 수 없다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2001년 같은 재판소 대법정은 9대 8의 근소한 차이로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국제법상 고문 방지라는 특별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재판소는 제출된 국제문서, 사법 당국 또는 기타 자료 중에서 국가가 고문 행위를 이유로 제기된 외국의 민사소송에서 면제를 누릴 수 없다고 결론지을 국제법상 확고한 근거를 찾지 못했다.”37)
다음 해 칼로게로풀루 외 대 그리스·독일 사건에서 유럽인권재판소는 디스토모 판결의 집행과 관련하여 그리스 정부가 허가를 거부한 데 대한 청구를 기각하고 다음과 같이 판시했다.
“재판소는 국가가 외국에서 제기된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배상을 청구하는 민사소송에서 면제를 누릴 수 없다는 주장의 국제법적 수용에 대한 확립을 인정하지 않는다.”38)
재판소는 현존하는 국제관습법하에서 국가가 국제인권법 또는 무력분쟁법에 대한 중대한 위반으로 제소당했다는 이유로 면제를 박탈당하지 않는다고 결론짓는다. 그렇게 결론 내리면서, 재판소는 이것은 외국법원의 재판권에서의 국가 그 자체의 면제에 관한 것에 불과하고, 면제가 국가의 고위관리에 대한 형사소송에서 적용되는지, 적용된다면 어떤 범위인지에 대한 문제는 이 사건의 쟁점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했다.39)
국제사법재판소는 이어서 이탈리아가 강조하여 주장한 두 번째 요소, 즉 독일이 1943년부터 1945년까지 위반했다는 강행규범 문제를 검토했다. 이러한 주장은 무력분쟁법의 일부를 이루는 강행규범 규칙과 독일에 대한 국가면제 부여가 저촉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에 따르면, 강행규범은, 조약상 규칙인지 국제관습법상 규칙인지 불문하고, 그와 모순되는 국제법 규칙에 항상 우선한다. 그리고 어느 국가의 타국 법원에서의 면제의 향유라는 규칙은 강행규범이 아니기 때문에, 면제 규칙은 강행규범에 길을 양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40)
그러므로 이러한 주장은 국가의 타국에 대한 면제의 부여를 요구하는 관습법과 강행규범 사이에 저촉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재판소의 견해로는 그런 저촉은 존재하지 않는다. 점령지에서의 민간인 학살, 노예노동을 위한 민간인 이송, 노예노동을 위한 전쟁 포로의 이송을 금지하는 무력분쟁법이 강행규범이라고 가정하더라도, 이들 규칙과 국가면제 사이에 저촉은 존재하지 않는다. 두 규칙은 다른 사항을 다루는 것이다. 국가면제 규칙은 절차적 성격이며, 그 효력은 어느 국가의 법원이 다른 국가에 대해 재판권을 행사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것에 한정된다. 이 규칙은 절차의 원인이 된 행위가 적법인지 불법인지의 문제와 상관없다. 재판소가 58항에서 설명했듯이, 현재의 국가면제 법이 1943년부터 1945년에 일어난 사건의 소송절차에 적용되더라도, 이것이 적법성과 책임의 판단에 있어서 법이 소급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는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 이유다. 같은 이유로, 국제관습법으로 외국에 면제를 인정하는 것은, 강행규범 위반으로 발생한 상황을 적법하다고 인정하거나 그 상황의 유지를 위해 지원과 원조를 제공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므로, 국제법위원회의 국가책임 초안 제41조의 원칙에 모순되지 않는다.41)
이 사건에서 학살, 추방, 노예노동의 금지 규칙에 대한 위반은 1943년부터 1945년에 걸쳐 발생했다. 이들 행위의 위법성은 모든 관계자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들 위반을 이유로 하는 청구에 대해 이탈리아 법원이 재판권을 갖는지 결정하기 위한 국가면제 규칙의 적용은 침해된 규칙과는 어떤 저촉도 생길 수 없다. 또 원래의 불법행위보다 불법행위를 한 국가의 배상 의무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주장이 강화되지도 않는다. 배상 의무는 그것을 이행하는 규칙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규칙이다. 국가면제에 대한 법은 후자에만 관련된다. 외국에 면제를 부여하겠다는 결정이 손해배상 의무와 저촉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이 원래의 위법행위를 금지하는 규칙과 저촉되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더구나 거의 모든 평화조약이나 전후 합의에서 배상금 지급을 요구하지 않기로 결정하거나 포괄적 합의 및 상계 방식을 채용해온 한 세기 동안의 관행을 고려하면, 모든 개별 피해자에게 전액 배상을 지급해야 한다는 규칙이 국제사회에서 일탈이 허용되지 않는 규칙으로 받아들여져서 국제법에 포함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42)
재판소는, 강행규범 이외의 모든 규칙은, 그것이 적용되면 강행규범의 집행을 방해할 가능성이 있을 경우, 직접적인 저촉이 없어도 적용돼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강행규범은 일탈이 허용되지 않는 규칙인데, 그러나 관할권의 범위와 정도 및 행사의 시기를 결정하는 규칙은 강행규범을 포함하는 근본적인 규칙으로부터 일탈이 허용되지 않는다. 또한 이들 규칙의 수정을 요구하거나 적용을 대신하는 효력이 강행규범 개념에 내재하는 것도 아니다. 재판소는 실행할 수 있는 강행규범 규칙을 실행할 수 없게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접근법을 두 사건에서 채용했다.
군사활동 사건에서 재판소는, 강행규범의 성격을 갖는 규칙이 그렇지 않았다면 없었을 관할권을 재판소에 부여하는 것은 아니라고 판시했다(콩고 영토에서의 군사활동 사건(콩고민주공화국 대 르완다) 판결).43) 체포영장 사건에서 재판소는, 강행규범 개념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외교부 장관이 명백한 강행규범적 성격의 규칙을 위반한 혐의로 기소됐다고 해서 콩고민주공화국이 그를 위하여 면제를 요구하는 국제관습법상 특권을 박탈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2000년 4월 11일 체포영장 사건(콩고민주공화국 대 벨기에) 판결).44) 재판소는 타국의 소송절차에서의 국가면제에 관한 국제관습법의 적용에 대해서도 같은 논리가 적용된다고 판시했다.45)
강행규범의 효과가 국가면제에 대한 법을 대신한다는 주장은 다음과 같이 국내법원에서 부인되어왔다. 영국(귀족원 존스 대 사우디아라비아 사건 판결),46) 캐나다(온타리오 항소법원 부자리 대 이란이슬람공화국 사건 판결),47) 폴란드(대법원 나토니에프스키 사건 판결),48) 슬로베니아(슬로베니아 헌법재판소 No. Up-13/99),49) 뉴질랜드(대법원 팽 대 장 사건 판결),50) 그리스(특별최고재판소 마겔로스 사건 판결)의 경우가 대표적이다.51) 또한 전술한 것처럼 유럽인권재판소도 알 아사니 대 영국 사건과, 칼로게로풀루 외 대 그리스·독일 사건에서 상세한 검토 끝에 그렇게 판단했다.
또한 재판소는 프랑스 파기원의 2011년 3월 9일 레우니온항공 대 리비아(La Réunion Aérienne v. Libyan Arab Jamahiriya) 사건 판결이 위와 다른 결론을 뒷받침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파기원은 이 판결에서, 가령 강행규범이 국가면제에 대하여 적법한 제한을 구성한다고 해도, 그런 제한은 이 사건의 사실에 대하여 정당화될 수 없다고 했을 뿐이다. 따라서 본 소송의 대상이 되는 이탈리아 법원의 판결은 이탈리아의 두 번째 주장의 이 부분의 근거가 되는 논리를 받아들인 유일한 국내법원의 판결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위에서 검토한 국가면제에 관한 국내법 중 어느 것도 강행규범 위반이 주장되는 경우 면제를 제한하지 않고 않다. 그러므로 재판소는 만일 이탈리아 법원의 절차에 강행규범 위반이 관련됐다고 하더라도 국가면제에 관한 국제관습법의 적용은 이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결론짓는다.52)
이탈리아의 주장의 세 번째 요소는, 배상을 받기 위한 다양한 피해자 그룹의 이탈리아 소송절차에서의 모든 시도가 실패로 끝났기 때문에, 독일이 누려야 할 면제를 거부한 이탈리아 법원의 판단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이에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이, 당시의 경제적 현실을 반영하여, 복잡한 일련의 국제협정에 따른 배상을 위해 막대한 재정적 및 기타 희생을 치렀으며, 어느 연합국도 그 국민이 입은 손해에 대한 완전한 배상을 받지 못했다고 반박한다. 또한 독일은 1961년의 두 협정에 따른 이탈리아에 대한 배상금과, 독일에 강제노동을 위해 불법으로 이송된 다양한 이탈리아인에 대한 2000년 연방법에 의한 보상금이 지급된 것을 지적한다. 이탈리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이탈리아인 피해자가 어떤 배상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한다.53)
재판소는 독일이 전쟁범죄와 인도에 반한 죄의 이탈리아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 조치를 확립하기 위해 중요한 대책을 취해왔다는 점을 주목했다. 그러나 독일은, 전쟁포로가 강제노동의 배상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국가배상의 계획에서 이탈리아 군인 수용자들의 청구 대부분을 제외하기로 결정했다.54) 압도적 다수의 이탈리아 군인 수용자들은 실제로 나치 당국으로부터 전쟁포로로서의 대우를 거부당했다. 그런 역사에도 불구하고 2001년에 독일 정부는 이들 수용자들이 법적으로 전쟁포로의 지위를 가졌기 때문에 보상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결정했다. 재판소는 독일이, 당시 전쟁포로 지위의 승인을 거부하고 전쟁포로에 보장된 법적 보호를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피해자들이 그런 지위를 가질 자격이 있다는 이유로 보상을 부정한 것은 놀랄 만하고 또 유감스럽다고 생각했다.55)
게다가 정부 고위관리의 형사소송에서의 면제라는 다른 맥락이지만, 재판소가 이미 판시한 바와 같이, 면제가 특정 사건에 대한 관할권의 행사를 막을 수 있다는 사실은 실체적 국제법 규칙의 적용 가능성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56) 그런 맥락에서 재판소는 국가가 타국의 법원에서 면제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은 그 국가가 국제책임과 배상 의무를 지는 문제와는 전혀 다른 문제라고 지적했다.57)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소는 이탈리아인 피해자에 대한 독일의 배상 대책의 결함이 독일의 관할권 면제를 박탈하는 권한을 이탈리아 법원에 부여한다는 이탈리아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소는 국제법상 국가면제의 향유가 보상의 확보를 위한 효과적인 대체 수단의 존재에 달려 있다는 국제관습법에 대한 국가실행의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이 문제에 관한 국내법이나, 면제에 입각한 항변에 직면한 국내법원의 사법적 판단에서, 면제의 향유가 그런 전제 조건에 달려 있다는 어떤 증거도 없다. 유럽협약에도 유엔협약에도 그런 조건은 포함되지 않았다.58)
게다가 그런 조건이 존재한다고 가정하면, 특히 이 사건과 같이 청구가 광범위한 정부 간 협상의 주제가 된 경우에 그 적용은 극히 실행하기 힘들다는 것을 재판소는 간과할 수 없었다. 이탈리아의 주장에 따르면, 그러한 협상이 진행되어 성공적 타결이 기대될 때는 면제의 적용이 유력하지만, 국가 간 합의의 기대가 사라졌다고 예측되는 시점에서 면제의 적용은 정지될 것이다. 그러나 관련국 중 한 국가의 국내법원이 언제 그런 시점이 도래했는지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더구나 이탈리아도 인정하듯이, 전쟁 직후 통상적 국가실행이었던 일괄 타결(lump sum settlement)에 의한 해결이 이루어진 경우, 특정한 청구인이 여전히 배상받을 자격이 있는지는 그런 타결의 상세한 내용과 자금 수령국(이 경우에는 법정지국)이 그것을 어떻게 배분했는지에 대한 법원의 조사가 필요하다. 전쟁 직후 포괄적 타결(comprehensive settlement)에 의해 자금을 수령한 국가가 그 자금을 국민인 피해자 개인에게 분배하지 않고 국가경제와 사회적 기반의 재건을 위해 사용하기로 한 경우, 피해자 개인이 그 자금의 분배를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왜 피해자의 국적 국가에 자금을 지급한 국가에 대한 청구 이유가 되는지 이해하기 곤란하다. 그래서 재판소는 이런 근거로 독일의 면제가 거부될 수 있다는 이탈리아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59)
이런 결론에 이르는 과정에서, 재판소는 국제법에 의한 독일의 관할권에서의 면제가 관련 이탈리아 국민에 대한 법적 보상을 불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99항에 언급된 이탈리아 군인 수용자들의 대우로 인해 발생한 청구권과, 해결되지 않은 것으로 주장되고 이탈리아 소송절차의 기초가 된 이탈리아 국민들의 다른 청구권은 문제 해결을 위한 관련 양국 간의 추가 협상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60)
구두절차 과정에서 이탈리아 측 대리인은 이탈리아의 두 번째 주장의 세 가지 요소를 함께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위반의 중대성, 위반된 규칙의 현상(現狀) 및 대체적 구제 수단의 부재라는 누적 효과 때문에 이탈리아 법원의 독일에 대한 면제의 거부가 정당하다는 것이다.61)
재판소는 이미 이탈리아의 두 번째 주장의 세 가지 요소 모두가 그 자체로서는 이탈리아 법원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런 요소들을 복합적으로 보면 그런 효과가 생긴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국가실행을 검토하더라도, 이런 두 가지 또는 세 가지 요소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전제가, 그렇지 않았다면 향유할 수 있었던 피고국의 국가면제에 대한 거부를 정당화하지 않는다.
사정의 복합적 효과라는 주장이, 국내법원이 한편으로 관할권의 행사를 정당화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사정과, 한편으로 면제의 보호에 수반되는 이익이라는 다른 요소를 가중치와 함께 비교 형량해야 한다는 뜻이라면, 그런 접근법은 국가면제의 본질을 무시하는 것이 된다. 56항에서 설명한 것처럼 국가면제는 그 근거가 되는 국제법에 의하면 외국의 권리다. 또한 82항에서 살펴본 것처럼 국내법원은 본안의 검토 전 소송절차의 서두에서 면제에 관한 문제를 판단해야 한다.62) 그러므로, 면제가 다루어지는 국내법원에 계류된 각 사건의 특별한 사정을 비교 형량하여 그 결과에 따라 국가면제 여부가 결정될 수는 없다.63)
그러므로 재판소는 이 재판소가 국제관습법에 의해 향유한다고 판단하는 국가면제를 이탈리아 법원이 부정하는 행위는 이탈리아가 독일에 대해 부담할 의무를 위반한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당사국들이 상당히 자세하게 다룬 몇 가지 논점을 재판소가 언급할 필요는 없었다. 특히 재판소는 국제법이 무력분쟁법 위반의 피해자인 개인에게 직접 보상을 청구할 권리를 부여한다는 이탈리아의 주장에 대해 판단할 필요도 없었다. 또한 평화조약 제77조 제4항 및 1961년 협정의 조항이 이탈리아에서 소송절차의 주제였던 청구에 대한 구속력 있는 면제라는 독일의 주장에 대해서도 판단할 필요도 없었다. 물론 이는 이들이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 사건의 범위 내에서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 중의 전쟁범죄와 반인도적 범죄와 관련하여 이탈리아와 이탈리아 국민 개인에 대하여 여전히 책임이 있는지의 문제는 독일의 면제 향유 여부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면제 문제에 대한 재판소의 판단은 독일이 질 수 있는 어떠한 책임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64)
Ⅳ. 결론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국 사법부의 판단은 페리니 사건에서의 법리나 국제사법재판소의 국가관할권 면제 사건에서 이탈리아의 주장을 대부분 원용하고 있다. 특히 중대한 인권의 침해, 강행규범과 국가면제의 관계는 법원이 강조한 핵심적 법리를 구성한다. 그러나 본문에서 소개한 것처럼, 국제사법재판소의 입장은 결국 강행규범이라는 법적 당위와 국가면제라는 절차적 문제를 엄격하게 구분하여 현실의 국제정치 질서를 그대로 인정했다.
국제사법재판소는 2012년 판결에서 구체적으로 국가면제의 인정은 절차적 문제이고, 강행규범에 대한 위반은 실체적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런 이유로, 독일군의 행위가 강행규범에 반하더라도, 국제관습법상 국가면제의 부여와 강행규범 위반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65) 그러나 이탈리아의 법원과 헌법재판소가 국내 정치적 사정으로 국제사법재판소 판결을 부인하는 판결과 결정을 계속 내리자, 2022년 4월 독일은 이탈리아를 국제사법재판소에 다시 제소했다.
결국 이탈리아는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기금의 조성에 대한 법을 제정하여 독일과의 갈등을 해결했고, 이탈리아 헌법재판소는 2023년 7월 이 법이 합헌이라는 것을 최종적으로 확인했다. 이탈리아와 그리스의 피해자들이 과거 독일의 전시 위법행위에 대하여 국내적으로 제소했던 강행규범과 국가면제의 충돌 문제는 그렇게 일단락되었다.66)
국제사법재판소는 전후 수많은 협정과 각국의 사법부가 내린 판결을 통해 국가실행을 설명했다. 국제사법재판소는 위반의 중대성(gravity of the violations) 및 강행규범과 국가면제의 충돌(clash between jus cogens and state immunity) 그리고 마지막 수단으로서 국가면제의 부인(denial of state immunity as a last resort)이라는 이탈리아의 주장을 모두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소는 판결을 내린 시점에 이탈리아가 주장한 것처럼 국가면제를 부정하는 국제관습법이 성립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 맥락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내적 논란도 현실의 국제관계와 현재의 국제법(lex lata)을 고려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인권의 보호라고 하는 중차대한 가치와 목표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굳이 국제법의 발전 방향을 거론하지 않아도, 심각한 인권의 침해는 당연히 강행규범의 위반이 된다. 국가주권이 과거처럼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에 인권의 보호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67) 다만 전시 국제인도법 위반을 이유로 교전 당사국의 국가면제를 부인하기 위해서는 국제관습법에 대한 국제사회의 합의와 책임의 이행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확립돼야 한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현재 상황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심각한 인권 침해에 대한 책임과 배상은 국제정치적 현실을 고려하여 미래의 법(lex ferenda) 내지 명분론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독일은 관할권 면제 사건에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만행에 대한 위법성을 분명히 인정했다. 국제사법재판소도 판결에서 이 점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일본도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군의 관여와 책임을 2015년 12월에 분명히 인정하고 사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 판결을 통해 일본에 반복적 사죄를 요구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국제사회에 대한 설득력이나 명분도 약하다.
서울고등법원이 2023년 11월 항소심에서 국제관습법을 이유로 일본에 대한 국가면제를 인정하지 않고 시효와 영역적 불법행위 원칙을 부인한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법원은 위안부 문제는 ‘무력 분쟁 중’ 법정지국의 영토 내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관할권 면제 사건의 판결 취지와 무관하다고 판시했다. 또한 1965년 청구권협정이나 2015년 위안부 합의로 손해배상 청구권이 소멸됐거나 시효가 완성됐다는 항변이 일본의 재판 불출석으로 제기되지 않았다는 점도 지적하고 있다.68)
일본은 위안부 판결이 국가 간 합의 및 국제법 위반이라고 주장한다. 만약 한국과 일본이 국제사법재판소나 중재를 통해 위안부 판결에 대한 국제법적 판단을 받는다면, 절차적인 측면에서 국가면제가 인정될 가능성이 높다.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위반의 중대성이나 강행규범과 국가면제의 경합 및 피해 구제를 위한 마지막 수단이라는 이탈리아의 주장이 모두 인정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럴 개연성은 더 높아진다. 일본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위법성을 부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사법부가 이와 관련된 정부 입장을 고려하여 판결을 내렸다면, 사정은 달라졌을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사법부는 대부분 선진국에서 관행인 ‘사법자제의 원칙’을 적용하지 않았다. 외교적 고려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문제에 대하여 국내법의 법리와 원칙을 적용하여 판단했다. 서울고등법원은 이탈리아와 독일 간의 강행규범과 국가면제의 충돌이 결국 2023년 이탈리아 헌법재판소의 합헌 결정으로 해결되었다는 점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서울중앙지방법원과 서울고등법원은 위안부 문제에 대한 두 판결에서 국가면제를 부인했다. 그러나 이 판결들은 실행이 불가능한 국내적 판결이다. 앞에서 본 것처럼, 일본 대사관이나 문화원과 같은 외국 정부 재산에 대한 강제집행은 한국이 비준한 조약과 국제관습법에 대한 명백한 위반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국제사법재판소는 관할권 면제 사건에서 독일의 국유재산인 ‘빌라 비고니’에 대한 이탈리아의 강제조치를 인정하지 않았다.69) 이탈리아 파기원도 2018년에 이탈리아 법원이 헌법 규정상 외국 국유재산 및 공공재산에 대한 강제조치의 관할권이 없다고 판시했다.70)
이와 같이 위안부 판결의 집행 가능성을 생각하면, 이 문제는 사법부가 해결할 수 있는 범위나 사법부에 부여된 권한을 넘는다. 전시에 있어서 여성 인권의 존중은 국제사회가 지향해야 할 중요한 가치이지만,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법부의 판단과 국내적 논란은 국제정치의 현실을 고려하여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제는 이탈리아가 취한 입법적·사법적 보완 조치의 도입을 국내적으로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쉽지는 않겠지만, 한일관계의 정상화를 위해 국회 차원에서 여야가 특별법에 합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해법을 통해 외교적 현안에 대한 정치적 합의와 사법적 당위의 간극을 좁힐 수 있도록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