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공동선 개념과 헌법해석
헌법해석에 공동선이라는 개념이 적용될 수 있을까? 본 논문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보려고 한다. 라이히(R. B. Reich)는 미국 헌법에 담긴 공동선 개념의 내용과 기원에 관해 언급한 바 있다. 라이히에 의하면, 메디슨(J. Madison)이나 제퍼슨(T. Jefferson)과 같은 헌법의 아버지들이 신생 민주국가의 미래에 대해 가졌던 생각은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정부가 아니라 공화적 자치였다. 토크빌(A. Tocqueville)이 신생국을 방문했을 때 그곳 사람들이 심장이 뛰는 한 습관처럼 하려고 한 것 역시 공화적 자치였다. 이런 삶의 방식에는 공적인 기상이 담겨있었다. 이들은 공화적 자치를 통해 어떤 유익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는데, 그 유익은 어려운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관대함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공화적 자치가 다른 사람에게도 성공할 수 있는 동등한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라이히는 이들이 내가 자유로운 만큼 타인의 자유를 인정하며 또 그것을 지키고 옹호하기 위해 함께 싸울 각오와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고, 이를 공동선에 대한 믿음이라 했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은 공동선이라는 도덕적 유대로 서로 결속되어 있으며, 또 세대와 세대를 연결하는 것도 이런 관념이었다.1) 우리 헌법에서도 공동선 개념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그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헌법에 나타나고 헌법원리로 작용하는지는 분명치 않고 깊이 연구된 바도 없다.
우리 법학계를 지배해온 법학 방법론이 법실증주의와 개념법학이라는 점에 큰 반대가 없을 것이다. 자연법 전통에 관한 관심과 연구가 더러 있어도 주로 법실증주의와의 이론적 대비를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우리의 자연법 이해는 서구의 자연법 전통을 온전하게 계승해서 고유하게 발전시킬 수준에 도달했다고 말하기는 어렵고, 헌법이나 개별법률, 혹은 법적 쟁점에 대해 공동선 개념이나 자연법적 사고를 적용해 법리적 분석을 실행해서 결론을 도출한 연구는 드문 편이다.2) 이런 현상은 헌법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제헌헌법의 평등주의가 민족공동체의 공동선과 결부되어 있다는 언급3), 나아가 입법의 목적인 공동선이 존중받지 않은 현실을 비판하면서 헌법해석에 제도화된 자연법적 방법론을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4) 그러나 공동선 개념이 헌법에서 어떤 위치와 기능을 맡고 있는지 본격적인 연구는 많이 등장하지 않고 있다. 우리 법제에서 자연법은 그 자체로서 실정적 규정으로 독립하여 존재하지 않고 오직 실정 법규를 통해 간접적으로 존재한다고 보아야 하며, 따라서 헌법에서 자연법도 실정법에 대한 대립이라는 견해도 있다.5) 헌법을 공동선을 실현하는 장치로 이해하고 헌법의 차원에서 공동선의 실현구조를 분석한 연구는 김명재 교수의 것이 유일해 보인다. 김명재 교수는 헌법은 공동체의 목적과 이를 실현하는 주체와 방법을 규정한다고 하고, 전통적으로 공동체의 목적으로 공동선(공공복리)이 주장되고 있으므로 헌법은 공동선(공공복리)의 실현에 관한 법이라 정의할 수 있다고 했다.6) 공동선 개념이 정치적 수사(修辭)에 그치지 않고 헌법학 연구에서 유용한 개념으로 인정받으려면 더 정밀한 개념 정의와 분석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본 논문은 헌법전문의 한 문구를 소재로 공동선 개념이 헌법해석에서도 유용한 도구임을 보여줄 수 있는지 살펴보는 시론적 탐색이다.
흔히 2차 세계대전 이후로 한국만큼 짧은 기간에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성장을 동시에 이룬 나라를 찾기 어렵다고 한다. 최근에는 한류에 힘입어 대한민국의 위상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 이런 시기에 헌법전문을 통해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어낸 우리의 정체성 혹은 헌법정신이 무엇일지 돌아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인데, 본 논문은 헌법전문 중에 ‘(각인의)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라고 한 부분에 한정해 그 의미를 공동선 개념과 연결해 규명해보려고 한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으로 시작하는 우리 헌법전문은 한국인과 대한민국의 독특한 특성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문구들을 담고 있다. 주관적 평가일 수 있겠으나 세계인이 부러워하는 오늘의 한국을 있게 한 원동력을 꼽으라면 단연 높은 교육열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 교육열은 헌법전문의 ‘(각인의)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한다’라는 이념이 우리 삶에 가지는 의미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생각된다(이하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한다’를 편의상 ‘완전주의’ 문구라 부르기로 한다). 그리고 헌법전문이 선언한 완전주의는 특정한 종교의 이념을 담은 것이라기보다는 세속적 성격이 강하다고 생각된다. 교육열의 실체는 바로 지상에서의 잘-삶에 대한 열망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한국인은 잘-삶에 대한 뜨거운 열망을 가졌고, 이것은 교육은 물론 정치나 경제, 사회 등 각 영역에서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게 하는 힘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 헌법은 잘-삶에 대한 열망을 담고 있으며, 이것이 현재 한국이 있게 한 원동력이자 한국적 정체성이라 말해도 좋지 않을까 생각된다.
하지만 이런 정도로 만족하는 것이 헌법전문에 담긴 의미를 탐구하는 전부일 수 없다. 오히려 깊은 이해를 위한 출발점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이하에서 보듯, 롤즈(J. Rawls)는 개인이 각자 자기 인생의 전망을 모색하고 자기 나름의 좋음을 찾아가도록 보장하는 것이면 몰라도 국가나 공공부문이 특정한 의미나 방향의 잘-삶을 정치적으로 앞세우는 것은 정치적 자유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7) 헌법은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이 사회를 이루며 사회적으로 협력할 수 있는 공정한 조건을 규정한 정치적 문서이다.8) 그리고 공동선은 시민의 다양한 삶을 정치적으로 결합하는 공정한 협력의 조건을 의미하기도 한다. 롤즈의 논지는 국가나 공공부문이 특정한 의미나 방향의 잘-삶을 제시하고 국민에게 그런 삶을 강제하는 것은 정치적 자유주의에 반하는 것은 물론, 시민들 사이에 공정한 협력의 조건으로 합의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헌법전문의 위 문구를 별 의문 없이 읽어왔어도 해석하기 따라서는 헌법에 담긴 공동선 개념과 양립하기 어려운 면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서 한국적 정체성을 대표한다고 볼 수도 있었던 이 문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 문제는 현재 우리 사회의 실태를 돌아볼 때 중요하게 다룰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의 교육열이 긍정적인 면만큼 부정적인 폐단도 드러내고 있는 점에서 알 수 있지만, 공동선 개념이 직업이나 삶의 다원성을 기반으로 하는 점을 고려하면 자유와 평등, 다원성이 해쳐지는 방향으로 조작된 잘-삶에 대한 이해는 공동선을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헌법전문의 완전주의 문구는 제헌헌법 때 처음 등장한 것으로, 1963년 및 1969년 헌법을 제외하고 현재까지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 제헌헌법을 처음 입안할 때 한국의 미래를 내다보며 국민 개개인이 각자의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할 수 있게 할 것을 헌법정신으로 담았다는 것은 참 놀랍고 가슴 벅찬 일이다. 현재 한국의 발전상은 그런 이상에 다가섰다는 믿음을 만들어내기에 충분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 사회는 전혀 다른 문제에 직면해 있다고 생각된다. 이 문제는 헌법을 제정할 때 내다보지 못했던 것으로서, 롤즈의 지적처럼 정치적 자유주의 또는 정치적으로 자유로우며 동등한 시민으로 구성된 다원적 사회와 쉽게 결합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이론적인 차원에서 재검토나 재구성이 필요한 것이고, 또 모든 국민의 잘-삶에 대한 열망이 공동선과 부합하도록 조정할 수 있는 법률해석의 가이드-라인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차원에서 현실적 과제이기도 하다. 이하에서는 헌법전문의 완전주의 문구의 연원과 기초적인 해석을 개관한 다음, 우리를 대표하는 헌법정신의 표현으로 이 문구를 읽으려면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살펴본다. 이어 롤즈의 반론과 관련해 정치적 자유주의를 우선하는 사회에서 이 문구를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합당한지 검토한다.
Ⅱ. 헌법과 공동선 개념
공동선 개념에 대해서는 자연법 이론가들 사이에도 명확한 의견일치가 없다 보니 개념이해에 어려운 점이 있다. 공동선 개념의 기원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출발한다고 알려져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전에 플라톤이 한 개인이 자신을 다스리는 일이나 가정을 다스리는 일과 국가를 통치하는 일은 성격상 완전히 다른 것임을 이해하지 못한 것을 비판했다. 그는 사람들이 모여 폴리스(국가)를 이루는 이유는 ‘사람들 사이에 공통된 좋음’(koinon agathon, koinêi sumpheron)을 폴리스에서 얻을 수 있기 때문이라 보았다. 또한 그는 시민들에 공통된 유익을 돌보는 정부는 정의라는 엄격한 원칙에 맞게 구성되는 정부이고 따라서 참된 정부형태이지만, 지배자의 유익만을 돌보는 정부는 모든 점에서 결함투성이고 왜곡된 형태의 정부라고 불러야 하는데, 왜냐하면 국가란 자유로운 시민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라 했다.9) 국가는 자유로운 시민이 연합해 만든 공동체이고, 이 공동체의 목적은 시민들에 공통된 유익을 돌보는 것이며, 그런 목적에 충실한 정부가 정치적으로 정의로운, 즉 정당한 정부라는 것이다. 또한 국가의 목적은 (시민들 각자의) 잘-삶(the good life)이며, 바로 이것을 위해 시민들이 가족과 마을이라는 단위를 넘어서 연합한 것이 바로 국가라 한다.10) 따라서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이 연합해 만든 국가에서 정치가 목적으로 삼는 어떤 좋음이란 곧 시민들에게 공통된 유익을 말한다. 사람들이 공유하는 공통된 유익이라는 뜻에서 공동선이라 하는 이 선은 사람들이 연합해 국가를 세우는 목적이 된다.
현대의 연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공동선에 대한 논의에서 많은 함의를 찾아낸다. 서구 정치사상사의 긴 발전이 보여주는 바이지만, 국가의 성립을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의 자발적인 연합으로 보는 것, 그 연합은 공동의 목적과 공동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는 것(정치적 연합의 목적으로서 공동성), 통치의 방식이 군주정이든 귀족정이든 민주정이든 통치의 정당성은 정치적 연합을 이룬 목적에 비추어 평가되어야 한다(통치의 정당성을 평가하는 규준으로서 공동선)는 것이 공동선에 관한 기본적인 이해이다. 또한 개별 시민들이 각자 나름의 잘-삶을 추구함으로써 모든 개인의 잘-삶과 국가의 번영이라는 공동선이 성취되는 것이므로 이를 위해 시민들이 타인과 공유하는 공통된 목적과 유익은 차별 없이 평등하게 존중받아야 한다(개인선의 자유롭고 평등한 존중과 보장을 통한 공동선의 성취). 특히 정치적 연합은 정의와 친애가 확립됨으로써 상호 신뢰가 강할수록 더욱 공고해지는 것이므로 법의 제정과 집행, 해석 등 공적 권력이 행사될 때는 공동선이 해쳐지지 않도록, 즉 상호성이 무너지지 않게 정의를 엄정히 세워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시민 사이의 친애까지 해쳐져서는 안 되므로 형평을 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시민이 사회에서 타인과 협력하는 공정한 조건으로서 공동선. 공동선의 원천으로서 정의와 친애). 따라서 법이 목적으로 선언한 공동선은 법의 지배와 법 앞의 평등으로 실현된다. 이렇게 보면 공동선이 다차원적인 개념임을 알게 되는데, 국가의 존재 이유이자 존립 근거라는 의미도 있고, 자유롭고 동등한 시민적 삶이 만들어내는 결과로서 개인적 삶의 성취와 국가의 번영이라는 의미도 있으며, 또 공권력이 행사될 때 유념해야 할 유의점을 의미하기도 한다.11) 이런 관점으로 헌법을 보게 되면, 헌법은 공동선을 위한 근본 규범임을 알게 된다.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이 정치적 연합을 이룬 목적은 시민들 사이에 공유하는 공통된 목적과 유익이 있기 때문이고, 이런 목적과 유익이 치우침 없이 평등하게 존중받고 보호받을 때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개인의 삶이 성장하며 국가 역시 번영할 수 있다. 헌법을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이 사회적으로 협력할 수 있는 공정한 조건을 규정한 정치적 문서라고 정의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앞서 우리 헌법에 자연법적 개념이 포함되어 있는지 혹은 헌법해석에 자연법이론을 직접 적용할 수 있는지 의문시하는 견해도 있음을 보았다. 하지만 우리가 이제껏 시도하지 않았을 뿐, 헌법은 공동선 개념을 비롯해 자연법적 사고와 개념을 그대로 담고 있다고 생각된다. 우선 우리 헌법은 공무원에 ‘국민전체의 이익’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규정(제7조 1항)을 두고 있는데, 공동선 개념은 일차적으로 헌법에 이런 표현으로 담겨있다. 어느 개인이나 집단만의 이익이 아니라 전체 국민이 공유하는 이익, 즉 국민 전체의 이익이 공동선이기 때문이다.12)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평등과 동등함의 원칙에 따라 구성된 국가에서는 시민이 서로 번갈아 가며 통치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할 것이라 했다.13)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공통된 유익이 잘 실현되려면 모든 시민이 동등한 정도로 통치에 참여할 뿐 아니라 폴리스가 요구하는 의무도 평등하게 부담하는 것이 좋다. 이것이 정치적 정의이기 때문이다.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이 연합해 성립한 국가에서 일인이 오래 지배하는 것은 서로 균등하게 권한을 행사하고 책무를 부담해야 한다는 정치적 정의를 해치고 시민들 사이에 상호신뢰라는 공동선을 해치며 궁극적으로는 정치적 결속과 연합을 약하게 만든다. 우리 헌법이 대통령 임기의 연장이나 중임변경을 위한 헌법개정은 그 헌법개정 제안 당시의 대통령에 대해서는 효력이 없다(제128조 제2항)고 규정한 이유도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 사이에 정치적 연합을 위한 공정한 조건, 즉 공동선이 해쳐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헌법은 자연법적 사고를 담고 있다고 생각된다. 사실 자연법적 사고가 아니라 법실증주의에 따라 헌법을 만드는 일은 매우 쉽다. 국민의 권리와 자유, 의무는 법률로 정한다는 단 하나의 조문만 두어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국가기관의 구성도 헌법제정권력이 누구이고 어떻게 헌법을 개정하며 각각의 헌법기관은 어떤 권한을 가진다는 최소한의 규정으로도 헌법을 만들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 헌법은 자연법적 사고로 가득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우리 법제에서 자연법적 사고는 실정적인 규정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인간의 존재와 사회생활, 국가의 운영에 관한 근원적인 관점을 제시하는 것은 자연법적 사고이다. 이에 의하면, 인간은 본성상 자유로운 존재이며, 생명을 보전하는 것, 혼인과 출산, 자녀의 양육을 비롯해 잘-삶을 추구하는 것은 자연적 본성과 질서에 따른 선(좋음)이다. 그런 선을 추구한다는 공통된 목적을 가진 개인들이 연합해 국가를 세웠고 그 공통된 유익을 지키고 보장하기 위해 공권력이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은 타인의 삶을 동등하게 존중하고 타인과 협력할 줄 알아야 하며, 또한 공동선을 위해 존재하는 한 공적 권위를 존중하고 복종할 의무를 진다. 헌법은 이런 자연적 본성과 질서에 따른 선을 보장하는 규정을 많이 두고 있다.14) 또한 앞서 본 바와 같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이 폴리스라는 정치적 연합을 이룬 이유는 시민들 사이에 공통된 목적과 유익(선, 유익, 좋음)이 있기 때문이고, 또 정치가 목적으로 삼는 것이 그것이라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정치가 목적으로 삼는 그 좋음을 사람들이 ‘행복’(eudaimonia)이라 부른다고 했다.15) ‘행복’처럼 주관적이고 모호한 표현을 담은 헌법 문구를 법실증주의는 설명하기 어렵고 받아들이기도 어려울 것이다. 국민이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짐을 인정하고 국가가 이를 보장한다는 규정(헌법 제10조)을 둔 것은 헌법에 자연법 전통이 수용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하에서는 공동선 개념을 토대로 완전주의 문구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지 살펴본다.
Ⅲ. 완전주의 문구의 해석과 공동선
헌법전문의 완전주의 문구는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케 하며”라는 표현으로 제헌헌법에 처음 등장했다. 이후 제3공화국 헌법인 1963. 12. 17 시행 헌법 및 1969. 10. 21 시행 헌법이 이 부분을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라고 수정하면서 이 문구를 삭제했다가 1972. 12. 27 헌법에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라는 표현으로 다시 등장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오랜 전통을 가진 문구임에도 정확한 의미는 알기 어렵다. 헌법과 같은 중요문서의 제정이나 개정과정에 어떤 정치적 이론이나 관점이 반영된 것인지 보여주는 기초자료가 부재하고 관련 연구도 크게 부족하다.16) 한편 헌법전문의 후반부는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라고 하여 ‘행복’을 언급했고17), 또 헌법 제10조는 행복추구권을 규정하고 있다.18) 서구 정치사상의 역사에서 살펴보면 완전주의와 가장 밀접한 개념은 (‘잘-삶’이라는 의미의) ‘행복’이다. 완전주의는 ‘행복’을 이해하는 하나의 관점이기 때문이다. 이하에서는 지금까지 헌법의 해석방법에 대해 먼저 살펴보고 이어 공동선 개념과 관련지어 완전주의 문구에 대한 해석을 시도해보기로 한다.
헌법의 특성으로 정치성이나 추상성을 드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런 시각으로 보기 좋은 단어의 나열 정도로 헌법전문을 무신경하게 보아온 것이 최근까지 경향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근래 헌법전문 문구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규명하려는 시도가 자주 나타나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헌법전문이 왜 3.1운동을 언급하는 것에서 시작하는지, 헌법을 제정한다는 우리 대한국민은 누구인지, 제헌헌법 전문에 제정한다고 한 일자와 우리가 제헌절로 기념하는 일자가 다른 이유가 무엇인지,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묻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19) 헌법의 특징으로 역사성과 개방성을 들기도 하는데, 현재까지의 기록이자 미래를 향한 기본구상이나 청사진이라는 의미이다. 강경선 교수는 이런 관점에서 헌법전문의 몇몇 문구의 본격적인 해설을 시도했는데,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여’를 한 단위로 묶어 분석했다. 기회균등 부분은 사회적 민주주의에 이어져 있다고 보았고, 능력의 최고도 발휘 부분은 사회복지국가가 진행되어 법 앞의 평등을 최고 수준에서 논하게 되는 것으로, 드워킨이 ‘동등한 배려와 존중’이라 표현했던 법의 지배의 이상향을 의미하는 것이라 설명했다.20) 강경선 교수는 우리 헌법을 미래를 향한 발전적 역사로 보는 관점에 대해서도 언급한 바 있다. 지난 헌법사의 초반 40여 년이 국민주권의 확립과 헌법의 기초를 다진 기간이었다면 이후에는 자유권 단계를 지났고 이제 3분의 2 능선에 이르렀는데, 아직 가보지 않은 길, 실질적 국민주권과 실질적 민주주의, 실질적 법치주의, 사회권과 문화권, 평화국가 등 헌법의 내용을 내실화하는 작업이 기다리고 있으며,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여’와 관련해서는 헌법의 이념도 자유와 평등을 넘어 박애(우애)로 확대되어 우리가 포괄적으로 복지국가라고 표현하는 단계를 앞두고 있다고 설명했다.21) 헌법의 정신을 역사적 발전으로 보는 관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고 헌법해석에 비전을 담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헌법 문구의 정확한 의미규명은 별도의 과제이고 또 헌법 조문이나 문구 사이의 긴장도 놓칠 수 없다.
헌법은 정치사적 사건의 결실이기도 하지만 그런 문서를 근거짓는 개념과 이론을 만들어낸 전통에 연결지어 살펴볼 필요도 있다고 생각된다. 정치적 문서로서 헌법은 한편으로 정치철학과 사상사의 개념과 비전을 씨줄로 하고, 한 국가의 정치사라는 복잡한 내막을 날줄로 하여 만들어져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헌법전문에 본격적인 관심을 가지고 문구마다 정확하고 구체적인 의미를 규명해가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작업일 수밖에 없다. 앞서 헌법을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이 공통의 유익을 위해 국가를 결성하고 사회에서 협력할 수 있도록 공정한 조건을 규정한 정치적 문서라 정의했는데,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유래하는 공동선 개념의 구체화로 헌법을 이해하는 관점에서 얻을 수 있는 정의이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 전통의 개념과 맥락에서 헌법을 보는 관점도 헌법해석에 유용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하에서는 공동선 개념을 통해 완전주의 문구의 해석을 시도할 것인데, 헌법의 행복 개념이나 완전주의 문구를 이해할 단서도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행복과 완전주의 개념은 정치적 자유주의나 자유민주주의와의 관계에서 오랜 난제이기도 하다. 이하에서는 공동체주의와 국가적 정체성과 관련한 문제, 완전주의의 다양한 의미 및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와 양립 가능한 의미를 확정하는 문제로 구분해 차례로 검토한다.
대개 헌법에 전문을 가진 경우에 그 내용은 대개 헌법제정의 주체나 절차, 국가형태를 밝히는 것이 보통이고, 실질적인 헌법적 가치를 언급하는 때에도 법치와 정의, 평화, 인간 존엄, 자유와 평등 등을 규정한 예가 많다고 하고22), 우리 헌법과 같이 헌법전문에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같은 문구를 담은 예는 남아프리카공화국 헌법 외에는 찾아보기 어렵다고 한다.23) 특이한 점은 우리 헌법이 제헌헌법 이래로 일관되게 헌법전문에 ‘행복’이라는 단어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행복’이나 ‘Welfare(Wellbeing)’와 같은 문구나 표현을 헌법전문에 담은 나라도 많은 편은 아니다.24) 그래서 결국 헌법에 ‘행복’을 담은 예는 더러 있어도 우리처럼 ‘능력을 최대로 발휘케 하며’라는 문구까지 포함한 나라는 매우 드물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이를 우리 헌법이 다른 헌법과 구별되는 특이성을 잘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다. 공동체주의에 의하면 개인이 공동체의 관념이나 전통의 영향을 받는 점을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고 하므로 헌법전문의 완전주의 문구가 한국인과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잘 드러낸다는 견해가 전혀 근거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라는 문구를 한국인과 대한민국의 독특한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에 대해서는 헌법상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와 충돌할 수 있는 문제, 헌법적 가치가 민족적 정체성에 우선하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첫째, 헌법이 단순히 ‘행복’추구권을 규정하는 것과 더 나아가 완전주의를 표명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헌법학계에서 헌법 제10조의 ‘행복’을 주관적 만족감 정도라고 설명하는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데25), 각 개인이 어떤 방향이나 내용의 삶을 선택하든 헌법 제10조의 행복 개념이 다 지지하고 포용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중요한 헌법적 가치라고 볼 때 헌법이 오직 특정한 삶의 방식만을 지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중대한 헌법적 요구사항이고, 헌법 제10조의 행복 개념은 구체적인 삶의 방향이나 방식, 양상과 완전히 무관한 개념이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헌법전문의 완전주의 문구는 헌법 제10조의 행복과 구분되는 표현일 수밖에 없다. 양자의 의미가 완전히 같다고 할 수 없는 이유는 ‘행복’이 포괄적이고 추상적인 성격의 단어임에 반해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는 ‘행복’의 한 유형으로서 구체적인 방향성과 삶의 방식을 갖춘 것을 가리킨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라는 문구는 해석 여하에 따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가 보장하는 삶의 다양성과 무차별성, 균등성을 해칠 위험을 안고 있음을 알게 된다. 헌법의 해석에서는 특정한 문구나 이념에 치우치지 않고 조화와 통일을 추구해야 한다.26) 따라서 헌법전문의 완전주의 문구를 헌법 제10조의 행복과 같은 의미로 해석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이 방법을 따르면 완전주의 문구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충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대신 문명국가라면 보편적으로 채택할 수 있는 문구에 그치므로 민족적 또는 국가적 정체성을 대표한다고 할 수는 없게 된다.
둘째, 헌법에 민족적 정체성을 담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요소에 헌법의 규범체계나 가치개념들에 우선하는 지위를 인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헌법이 민족과 같은 공동체주의적인 개념이나 요소를 포함할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견해도 그런 개념이나 요소가 헌법의 통치구조나 기본권, 헌법정신 등 헌법의 규범체계에 우선한다거나 배제할 수 있다고 하지 않는다.27) 헌법에 공동체주의적 요소가 있더라도 헌법을 축소하지 않고 예외를 만들지도 않는다. 민족이라든지 공동체주의적 요소를 포함할 수 있다고 믿는 견해는 대개 그런 요소가 국가적 결속을 강하게 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헌법은 공정한 사회적 협력을 위한 정치적 문서이며 사회적 협력은 정의와 친애에 영향을 받으며 상호신뢰를 통해 강화된다는 관점에서 볼 때는 민족적 동일성도 상호신뢰를 강화하고 공동선을 강화한다는 전제에서만 헌법적 가치로 수용될 수 있다. 헌법 제11조가 법 앞의 평등으로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제1항 후문),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제2항)고 규정한 것도 법 앞의 평등이 바로 공동선의 근본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한편 공동체와 공동선의 관계에 있어 흥미롭게 볼 인물이 롤즈와 샌델(M. Sandel)이다. 흔히 전자는 자유주의를 대표하고 후자는 공동체주의를 대표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헌법이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 사이에 사회적 협력을 위한 공정한 조건을 정한 것이라는 관점, 그 조건이 공동선이며 상호협력의 조건을 침해하거나 무너뜨리는 것에 반대한다는 점에서는 양자 사이에 견해가 일치한다. 먼저 롤즈는 공동체주의에 대한 반대로 유명한데(롤즈는 아예 공동체라는 말 자체를 거부한다)28), 그 이유는 정치적 자유의 우선 및 평등한 자유의 원칙에 우선적 지위를 부여하는데 공동체주의적 요소가 이런 우선성을 위협할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다.29) 그런 롤즈도 분배정의에 있어서는 차등의 원칙을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공동선을 언급했다.30) 따라서 롤즈가 자유주의자로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반면 공동체주의는 공동선을 강조한다는 식의 이해는 정확하지 않은 것이다. 샌델은 롤즈의 차등원칙에 대해 비판했는데, 최소수혜자에게 대한 분배개선을 지지하는 롤즈의 논거가 만족스럽지 않다고 보았다. 샌델은 능력주의가 분배정의에 합당한 정의 원칙인 것 같지만, 승자에게는 오만을, 패자에게는 모욕을 남긴다고 하고 이런 부작용은 사회 전체의 공정한 협력의 조건이 되는 공동선을 해친다고 본다.31) 즉 성공하지 못한 사람이라 해서 무능력한 사람도 아니고 실패한 사람도 아닌데, 롤즈의 차등원칙은 그런 시각으로 최소수혜자를 보게 한다는 것이다.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이 연합해서 만든 사회가 한 시민을 실패자로 규정하고 동정하듯 돕는 것은 시민들 사이의 사회적 결속을 저해한다. 따라서 샌델이 차등원칙과 관련해 롤즈를 비판한 핵심도 롤즈가 특별한 공동체주의적 요소를 간과했기 때문이 아니라 상호부조에 내재한 공동선 원리를 침해했다는 점에 있다.32) 샌델의 비판은 우리가 헌법전문의 완전주의 문구를 해석할 때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는 사람이 한국인과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나타낸다는 인식은 자칫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지 않는 사람을 부정적으로 보는 편견으로 연결될 수 있다. 삶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각 개인에게 각자 자기 삶의 전망을 찾아가도록 보장하는 것이 자유롭고 평등한 사람들이 삶의 다원성을 누리는 국가와 공공부문의 기본 정책이 되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완전주의 문구에 부응하지 않는 삶의 양식을 자신이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태도는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 사이에 공정한 협력의 조건, 즉 공동선을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헌법전문의 완전주의 문구를 국가적 또는 민족적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읽고 싶은 유혹을 이겨내고 헌법정신과 전체적으로 잘 부합하는 내용으로 확정하려면 먼저 이 문구의 가능한 의미에 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헌법전문의 완전주의 문구와 본문의 행복을 완전히 일치하는 개념으로 볼 것인지도 해석 여하에 달린 것인데, 양자를 같은 의미의 연장에서 보는 해석도 가능한 해석의 하나일 뿐이다. 관건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정치적 자유주의와 양립할 수 있는 완전주의란 무엇인지 찾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정치철학자 중에 살펴볼 인물이 많이 있겠지만 이하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에서 시작해 칸트와 니체, 롤즈에 한정해 살펴본다.
먼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민들이 잘-삶이라는 공통된 유익을 위해 폴리스라는 정치적 연합을 만들었다고 했고 또 그 잘-삶을 행복이라 불렀다는 점은 앞서 본 바와 같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행복이 주관적 만족감 같은 것이 아니라 정의와 친애와 같은 시민적 덕성을 발휘함으로써 성취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잘-삶은 시민들이 서로 정의와 친애를 실천함으로써 누리는 올바른 삶, 정의로운 삶, 화목하고 평화로운 삶에 가깝다.33)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지 할 만하면 그런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해보라는 정도로 말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의 삶에 목적이 있다고 하고, 또 개개의 모든 사람에게 가장 선택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획득할 수 있는 한 최고의 것을 갖는 것이라 했다. 따라서 사람의 목적이 자연적 본성에 따른 완전한 실현에 있다고 보는 관점은 사람의 완성이 행복에 있다고 보는 관점과 결합해 잘-삶이 최고의 행복이고 또 최선을 다해 확보해야 할 것이 바로 잘-삶이라고 말하게 된다.34) 또 개인에게 행복이라는 것은 혼자만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긴밀한 협력과 이해 속에서만 확보될 수 있는 것이다. 로버츠(J. Roberts)는 이를 스포츠 경기에 비유하자면 (경기에서 이긴 것이 행복이 아니라) 선수로서 다른 선수와 협력하여 한 팀을 이뤄서 자기 역할을 훌륭하게 잘 해내는 것이 행복이라 했다. 이를 개인의 삶과 사회생활에 적용하면 사람이 개미집단처럼 사는 것도 아니고 다양한 방향으로 각기 자신의 자연적 본성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각자가 제각기 자신의 삶을 잘 살아가고 또 그런 삶이 사회적으로 협력을 이루며 조화를 이룬 것이 행복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상태는 누구는 행복하고 누구는 불행하다는 식의 관계에서는 생겨나지 않으며 또 개인이 그저 물건을 사고파는 것처럼 타인을 대하는 것으로는 생겨나지 않는다.35) 물론 연구자들 사이에도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잘-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해석이 나뉘고36), 헌법전문과 제10조에 등장하는 ‘행복’의 의미에 대해서도 일치된 해석은 없기에 헌법전문의 한 문구를 가지고 우리 헌법이 국가와 공동체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 전통의 이해를 계승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37) 다만 앞서 설명한 이해를 전제로 설명한다면, 헌법에 ‘행복’이니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하며’ 같은 문구가 등장한 것이 특이해 보여도 그 의미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에서 읽자면 대한민국의 주권자인 국민 개개인은 사회 속에서 공동선의 원천이 정의와 친애에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하고 또 ‘할만하면’이 아니라 언제든 최대한 시민적 덕성을 함양하고 실천하여 다른 시민과 조화로운 협력을 이루며 산다는 것이 헌법정신이라는 의미가 된다. 구체적으로는 각자가 나름의 잘-삶을 위해 국가에 참여한 것이므로 타인의 삶의 전망에 대해서도 동등하게 존중하고 살아가는 것, 정의가 상호결속의 원천이므로 정치・경제・사회・ 문화 등 어느 영역에서든 동등한 참여와 동등한 부담의 원리가 해쳐지지 않도록 유의하는 것, 그리고 그런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근래 논란이 되는 세대 사이의 갈등 문제에 대한 해법도 찾아볼 수 있다.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 사이의 상호협력을 위한 공정한 조건이라는 공동선 개념은 세대와 세대 사이에도 적용된다. 현재 세대와 미래 세대 사이에 자유와 평등, 권리의 향유와 이를 뒷받침하는 정치・경제적 책무도 균등하게 부담한다는 원칙에 따르는 것이 공동선에 부합한다. 헌법은 과거를 기록한 문서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열려있다고도 하는데, 미래 세대 역시 헌법이 정한 공정한 협력의 조건을 믿고 국가라는 정치공동체로 참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 헌법이 주권자에게 일정한 실천을 명령하고 있는데,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라는 문구를 통해 항시 현재의 세대는 인권 등을 포함해 미래 세대를 위해 현재보다 더 나은 삶의 조건을 물려주어야 하는 것이 헌법의 명령이라 보는 견해도 있다.38) 어느 세대든 이전 세대가 물려준 삶의 조건들 위에 잘-삶이라는 행복을 향유하는 것이며 미래 세대에는 그보다 더 나은 조건을 물려주기 위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것’이 공정한 협력의 조건이 된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 개념에 따라 완전주의를 해석할 때 난점은, 개인의 삶에 시민적 덕성을 우월한 가치로 한껏 강조할 수 없다는 점 때문이다. 정의와 친애를 실천하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겠지만, 아리스토텔레스만 해도 모든 사람이 훌륭한 시민적 덕성을 갖추고 정치에 참여한다는 것이 대단히 비현실적임을 알았다.39) 또 사회와 공동체가 사람들에게 그런 탁월함을 함양하도록 큰 관심을 가지는 것은 몰라도 더 나아가 법으로 이런저런 덕성을 강제하고 그것도 ‘능력이 닿는 만큼 최대한 최선을 다해’ 실천할 것을 명령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에는 시민들이 정의와 친애라는 덕성을 통해 행복을 누린다는 말도 있고, 훌륭한 시민이 정의와 친애를 실천할 수 있다는 말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기에 더해 훌륭한 법이 훌륭한 시민을 만든다는 말도 했다. 하지만 연구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법이 시민적 덕성을 함양하는 데는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고 이해한다. 듀크(G. Duke)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양자를 직접 연결해 법이 시민적 덕성을 직접 명령하거나 강제할 수 있다고 말하지는 않았다는 점은 법의 내용이나 법에 대한 복종의무와 관련해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법은 단지 무질서와 악덕이 팽배하는 상태를 예방하는 힘에 그친다는 것이다. 법이 시민으로 하여금 자율적인 도덕적 주체로서 윤리적으로 완성될 수 있게 하는 조건을 확립할 수 있다거나 바로 그것이 법에 대한 복종의 의무가 생기는 이유라고 보는 견해를 아리스토텔레스와 연결짓는 것은 곤란하다.40) 롤즈도 고전 공화주의를 긍정해도 시민적 인문주의를 반대하는데41), (양자의 구분에 대해서는 다소 논란이 있어 보인다) 건전한 사회 기풍으로서 강조해야 할 것과 정치와 공공부문까지 나서서, 특히 법으로 특정한 삶의 방식을 강제하는 것 사이에 합당한 경계는 있어야 한다는 의미라 생각된다. 법이 공동선을 목적으로 하고 또 시민적 덕성의 함양과 실천을 통해 공동선이 성취된다고 해도 시민적 덕성을 법으로 명령하고 강제하는 것은 삶의 다원성을 긍정하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와 충돌할 소지가 크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에 따라 행복과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를 해석할 때는 정의와 친애와 같은 시민적 덕성을 직접 함양하는 것은 법의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것, 법은 오직 악덕과 무질서를 저지함으로써 훌륭한 덕성이 실천되는 바탕을 간접적으로 마련할 뿐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칸트는 개인이 도덕적으로 자율적인 주체로서 도덕법칙을 정립할 책무를 지고 있음을 강조했다. 도덕법칙의 정립은 인간의 목적으로서 이성의 완전한 계발을 요구한다. 칸트는 개인이 이성을 통해 자기 스스로 자신에 대한 행위의 법칙을 제시할 능력을 가진 자유로운 존재라 전제하고, 그런 개인에게 의무이면서 동시에 목적인 것으로 나의 완전함과 타인의 행복 둘을 들었다. 칸트는 나의 행복은 목적일 수는 있지만 자연적 성향으로 추구되는 것이지 나에게 의무일 수는 없다고 하고, 또 타인의 완전성에 대해서는 내게 목적일 수는 있지만 그 타인이 자신의 의무로서 삼는 것이지 그의 완성이 나의 의무일 수는 없다고 한다. 여기서 완전주의와 관련해 논의할 것은 전자, 즉 나의 완전성인데, 칸트는 나의 완전성이 자연적으로 또는 저절로 성취되지는 않으므로 목적일 뿐 아니라 의무로도 주어지는 것이라 한다. 따라서 완전성이 의무라는 것은 능력의 개발이 의무라는 말이며, 또 능력의 개발은 지성과 의지 양면에서의 계발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에게 의무란, 자신의 자연 본성의 조야함으로부터 오로지 스스로 목적을 세울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인간성으로 점점 더 높이 솟아오르는 것이며, 배움을 통해 무지를 보완하고 착오를 교정하는 것, 인간에 내재하는 인간성의 품격에 걸맞기 위해 이 목적을 그의 의무로 만드는 것이다. 한편 인간의 의무는 의지를 개발해서, 즉 법칙이 동시에 자신의 의무에 맞는 행위들의 동기가 되는 가장 순수한 덕의 마음씨로 고양하고, 그 법칙에 의무이기 때문에 복종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칸트는 이 완전성이 윤리적 완전성이라 말한다.42) 따라서 칸트의 완전주의는 계몽과 자기 계발에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성적이고 자율적인 주체로 서기 위해서는 계몽의 방향으로 최대한의 자기계발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칸트 윤리학은 인간과 완성, 행복 등을 언급하고 있어도 구체적으로 무엇이 선인지 내용이 없어 공허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43) 그러나 헌법전문의 완전주의 문구를 칸트의 완전주의 관점에서 한번 읽어보는 것도 대단히 흥미로울 수 있다. 어느 국가가 국민 개개인에 대해 윤리적 완성을 기대하고 보장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44) 또 칸트의 「윤리 형이상학」에서 내 행복은 목적이기는 하지만 의무는 아니라는 것, 타인의 도덕적 건강으로서 타인의 행복은 나에게는 소극적 의무라고 한 것45), 타인의 완전성은 내 목적이기는 하나 의무는 아니라는 것은 모두 소극적 자유주의를 지향한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46) 한편 여기서 검토하려는 문제는 완전주의 문구의 의미인데, 헌법전문의 완전주의 문구는 헌법 입안자가 국민 개개인의 권리나 의무로서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라고 말한 것이지만 칸트의 완전성에 대한 논의에서 볼 때는 국민 개개인에게 그 자신의 윤리적 완성이 의무라고 말하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완전성 문구를 헌법입안자가 입안자 자신에 대한 의무로 말한 것인지 국민 개개인의 의무로 말한 것인지 살펴보면, 엄밀히 말해 후자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칸트의 완전주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로서 완전성을 말하는 것이지 타인의 완전성을 내 의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즉 누가 타인에게 그 타인의 완전성이나 그것이 그에게 의무라고 말하는 것은 칸트의 완전주의와는 무관한 논리이다. 그러면 헌법입안자가 입안자 자신에게가 아니라 타인인 국민 개개인의 의무로서 완전주의를 말한 것은 칸트의 완전주의와 상치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더 나아가 완전주의는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나 중요한 문제이지 타인에게 강제할 성격의 것이 아니고, 따라서 애당초 헌법이나 법률에 완전주의 문구를 수용할 근거 자체가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 아니냐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47) 하지만 꼭 그렇게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된다. 헌법은 국민 개개인이 타인과 함께 협력할 수 있는 공정한 조건에 대해 개개인이 자발적으로 합의한 것을 의미하므로 각자가 자신의 의무로서 완전성을 생각하고 또 그런 생각이 국민 개개인에게 공통된다면 국민 전체적인 합치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완전주의는 헌법과 법률에 규정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사실은 이미 헌법에 규정된 바이다). 아울러 헌법이 완전주의를 선언했다는 것은 자신의 의무인 완전성이라는 것이 나의 의무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며 타인 역시 그의 의무로서 생각한 완전성에 대해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공정한 협력의 조건, 그것도 국가구성의 근본조건이 되었다는 의미이므로 완전성에 있어 타인의 의무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는 공동체적인 개입의 근거도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로 인해 자유주의를 침해할 위험이고 따라서 완전주의의 경계를 어디에 정할 것이냐이다.
한편 칸트와 달리 니체는 매우 도전적인 사상가여서 그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큰 난제라고 알려져 있다. 여기서 그의 완전주의를 간단히 논의하는 것은 상당히 무리일 수 있으며, 따라서 반론과 이견을 열어놓고 논의할 수밖에 없다.48) 니체의 완전주의는 칸트의 계승이면서도 다른 한편 반발이라고 여겨진다. 니체는 완전성(Vollendung)이라는 말을 ‘삶의 순환 중에서 건강하고 또 높이 고양된 상태’라는 의미로 사용한다.49) 니체의 완전주의가 칸트의 계승이라고 보이는 점은 동물과 구분되는 인간성의 고양을 말하기 때문이고, 반발로 여겨지는 이유는 일반 대중의 도덕관념을 군집 동물의 도덕이라 해서 거부하기 때문이다.50) 니체는 구체적으로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관점, 자기 스스로 법칙을 정립하는 도덕적 주체라는 관념을 계승했지만, 도덕성의 내용을 채우는 것은 전적으로 주권적 개인, 가치창조자인 개인에게 맡겨져 있다고 본다. 고유한 도덕성을 제시하고 관철하는 것이 선이면 거기에 요구되는 힘과 능력을 갖는 것도 선이며, 그 결과 스스로 약속하고 스스로 관철하는 주권적 개인이 자유의지를 누린다.51) 한편 니체의 완전주의는 전통적인 덕 윤리를 모방한 것 같으면서도 완전히 다른 특성을 보인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완전주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에서 시작했는데, 니체도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완성에 대해 논의한 것처럼 보이므로 아리스토텔레스 전통의 연장에서 해석해보려는 시도도 있다. 하지만 헤텁(L. Hatab)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목적론적 관점에서 목적의 실현이나 완성으로서 완전주의를 논의했으나 니체의 완전주의를 그와 같은 맥락에서 관찰하는 것은 니체 사유의 복합성 때문에 부적절할 수 있다고 본다. 다만 어느 정도 장점이 있다면 니체의 사유에서 ‘탁월성’에 대한 이해에는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52) 해석이 일치하기 어려운 주제라는 전제에서 논의하는 것이지만, 니체의 완전주의나 탁월성은 강한 엘리트주의로 연결된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니체는 모든 사람이 원하는 것일지 몰라도 누구나 다 성취할 수 없는 탁월함이 있고, 그런 탁월함을 이룬 몇몇 개인을 두드러지게 추앙하는 경향이 있다.53) ‘입에 거품을 물고’(foaming at the mouth) 엘리트주의를 열성적으로 옹호한 인물로 니체만 한 사람이 없다고도 한다.54) 게다가 이런 탁월함은 전통적인 미덕으로 여겨졌던 박애나 희생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탁월한 사람은 무리의 도덕에 신경 쓸 것 없고 한없이 자기중심적이어도 된다.55) 특히 니체는 공동선과 같은 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한다. 모든 사람이 다 가지는 것이면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라는 이유이다.56) 코넌트도 니체가 피에 굶주린 엘리트주의를 주장한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 현대의 일반적인 해석이지만, 그래도 그가 국가의 구성과 조직에 관한 청사진을 제시할 기회가 있었다면 엘리트의 이익을 증진하는 제도를 선호했을 것이라 보는 해석 경향이 강하게 남아 있다고 한다. 니체가 인종이나 종교, 민족성으로 구분한 것은 아니지만, 세상의 사람을 두 유형(우월하고 탁월한 재능을 부여받은 몇몇 개인과 그렇지 않은 나머지)으로 구분해서 보았다는 사실, 그리고 후자를 희생해서라도 전자의 유익을 증진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 사실에 대해서는 (그것이 옳은 니체 해석인지를 떠나) 일반적인 의견일치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한다.57) 니체의 엘리트주의적 완전주의는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이 공정한 협력의 조건으로 참여한 사회를 수단으로만 본다는 점에서 공동선 개념과 양립하기 어렵고, 또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이 공정한 협력의 조건으로 합의하기도 어려운 점에서 애당초 공동선과 양립하기 어렵다. 영(J. Young)과 같이 니체가 몇몇 뛰어난 개인들을 찬양해도 결국 그런 인물이 사회의 번영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보았다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고, 또 스완튼(C. Swanton)과 같이 공동선을 사회의 번영으로 이해한다면 니체의 완전주의도 공동선 개념으로 포섭할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58) ‘너 자신이 되어라’라는 요청을 모두가 공유하는 새로운 공동선 개념으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동선 개념을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이 사회에 참여해 협력하는 이유로 사회에 참여해 협력함으로써 개인선을 성취한다는 목적이 공통되고 또 그런 방식으로 얻는 유익이 공통된다는 의미에서 ‘공동의’(common) 선이라 부르는 것임을 유의해야 한다. 헌법전문의 완전주의 문구는 니체의 완전주의와 연결해 읽어보는 것도 흥미로울 수 있겠지만, 문구의 해석상 ‘국민 개개인 각자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게 하며”라고 읽는 편이 ‘우리 중에 뛰어난 몇몇이’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게 하며”로 읽는 편보다 문언상 바른 해석이라 생각된다. 니체의 완전주의를 뛰어난 개인들을 통해 전체 공동체에 기여하게 한다는 의미의 제한된 엘리트주의로 이해할 때는 후자와 같은 방식으로 읽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우리 헌법정신이 그런 엘리트주의에 연결되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롤즈의 반-완전주의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니체적인 완전주의 모두에 대한 반대로 이해할 수 있다. 롤즈는 완전주의는 무엇을 선으로 정의하느냐에 따라 여러 유형이 있겠지만, 어떤 문화에서든 개인의 삶에서 어떤 탁월함의 성취를 목적으로 여기는 한 완전주의로 부를 수 있다고 한다.59) 롤즈는 이런 완전주의를 대표하는 사상가로 아리스토텔레스와 니체를 언급했는데, 둘 중에 반-완전주의의 대표적인 예로 자주 언급한 것은 니체이다.60) 롤즈의 완전주의 반대는 몇 가지 논거가 있다. 첫째, 어떤 문화에서 태어나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지 알지 못하는 원초적 상황에서 선택한다면 종교나 도덕에서 특정한 선 관을 가지는 것보다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자유와 양립하는 최대한의 동등한 자유를 가질 것에 합의할 것이기 때문이다.61) 둘째, 개인이 자기 삶의 전망을 어떻게 만들고 어떤 식의 삶을 살든, 그 삶은 그 자체로서 동등하게 존중받고 보호받을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롤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에 따르지 않아도 정의의 원칙에 부합하는 이상 어떤 삶이든 선하고 가치있는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으며, 이렇게 각 개인의 인생 전망을 민주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질서정연한 정의로운 사회에서 자신과 타인에 대한 존중의 토대를 이룬다고 한다.62) 따라서 사회나 공동체가 개인에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시민적 덕성을 함양할 것을 권하는 것은 정치적 자유와 평등이 우선적으로 보장하는 동등한 사람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으로서 거부되어야 한다. 정부와 공적 영역의 역할도 개인이 자기 삶의 방향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보장하고 거기에 필요한 최소한의 기본재를 제공하는 것에서 그쳐야 한다. 니체적 완전주의에 대한 반대도 정치적 자유와 평등의 우선, 개인적 삶의 동등한 가치를 근거로 한다.63) 완전주의는 정부가 탁월한 몇몇 개인에 대한 우선적 지원과 보장할 근거로 여겨질 수 있는데, 여기서 문제는 정부나 공공영역이 특정한 선 관을 지지하는 것이 정치적 자유주의에 반한다는 점이다. 국가가 특별한 영역에서 재능 있는 사람을 선발해 그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과 같은 정책을 펼치는 것은 시민들 각자의 삶이 모두 동등하고 똑같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정치적 정의의 원리에 반한다. 롤즈가 제안하고자 한 정치적 자유의 이론은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이 사회에 참여하여 평생에 걸쳐 그리고 세대를 이어 타인과 협력할 수 있는 공정한 조건에 관한 것이다.64) 이 공정한 협력의 조건을 공동선이라 부르므로 롤즈가 완전주의에 반대하는 이유도 완전주의가 공정한 협력의 조건, 즉 공동선에 반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롤즈의 반-완전주의는 헌법상 공동선 개념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비추어 쉽게 수용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피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는데, 바로 헌법전문이 완전주의 문구를 담고 있다는 점이다. 헌법전문은 이론적으로 양립하기 어렵다고 여겨지는 양자의 관계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어려운 문제를 제기한다.
자유주의와 완전주의의 관계를 보면, 완전주의는 자유주의를 포함할 수 있지만, 자유주의가 완전주의를 쉽게 포용하기는 어려운 관계에 있음을 알게 된다. 또한 양자의 관계는 양자를 각각 어떻게 개념 정의할 것인가에 크게 좌우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완전주의는 개인이나 공동체에 근본적인 선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문화마다 다르다. 대개 종교 문제를 먼저 거론하는 것이 서구의 경향이고 따라서 완전주의가 자유주의적인 형태를 취해도 크게 염려하는 것은 종교적 관용이다.65) 반면 우리 헌법전문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하며”의 의미는 정치・경제・사회 등 여러 영역을 향한 것이고 특별히 종교에 대한 강조가 담겨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다만 헌법전문의 완전주의가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것이면 다 좋은 것’이라는 식의 관념을 담고 있지는 않으며, 어느 영역의 실천이든 완전주의가 수용될 수 있는지는 공동선을 해치는가 아닌가 하는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완전주의를 앞서 본 바와 같이 니체식의 엘리트주의형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와 친애를 중심에 둔 시민적 덕성형, 칸트의 계몽적 자율형으로 크게 구분해보면, 공동선 개념에 잘 부합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나 칸트의 완전주의라 생각된다. 자유주의에도 개인의 자율성을 크게 강조하는 개인주의적 경향에서부터 시민적 공화주의와 같은 자율과 자치의 시민적 덕성을 공유하는 유형이 있다. 자유주의를 대표하는 롤즈는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이 공유할 수 있는 공정한 조건으로서 공동선 개념을 이해하고 있고 또 그런 전제에서 정의의 이론과 정치적 자유주의를 개진했으므로 중도적인 자유주의로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완전주의와 자유주의 양자가 공유할 수 있는 영역으로 완전주의적 자유주의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자유주의에는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이 있으므로 양자를 결합한 자유주의도 가능한 것인데, 그런 ‘완전주의자의 자유주의’(Perfectionist Liberalism)로 벌린(I. Berlin)이나 라즈(J. Raz)가 대표적으로 거론된다. 라즈는 국민의 삶을 성공적이고 완성된 것으로 만드는 것, 다시 말해 국민의 잘-삶을 보호하고 증진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라는 완전주의자의 정부관을 당연한 출발점으로 삼는다. 현대 사회에서 개인의 잘-삶은 각자가 자신의 원대로 다양한 삶의 방식을 자율적으로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완전주의적 정부는 개인이 자기 삶을 자율적으로 이끌어감으로써 완성할 수 있으려면 반드시 자유가 뒷받침되어야 함을 인식하고 충분히 존중해야 한다. 자율성 존중과 관련해 정부의 의무는 일차적으로 개인에게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만들어감에 있어 우선적 자율권이 있다는 것을 보장하는 소극적인 형태로 나타나지만, 개인이 자기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자원과 필요한 역량을 제공해야 하는 점에서는 적극적인 의무이기도 하다. 결국 정부의 주된 의무는 시민의 신체적・정신적 건강, 충분한 교육, 삶의 전반적인 편의와 품격과 같이 자율적이고 성공적인 삶이 필요로 하는 전반적인 조건과 자원을 보장하는 것이다. 라즈는 정부의 역할이 개인이 가지는 선택권은 물론 사회 전반의 영역에서 개인적 삶의 성격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정부개입의 방식이나 형태가 어떠해야 하는지 더 면밀하게 검토한다. 완전주의 정부가 개인의 자율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은 개인의 삶에 대한 강제가 허용될 수 있는 요건에 제한을 부과하지만, 개인의 자율성 역시 가치 있는 삶의 추구를 위한 자율성으로 제한된다는 원리에 의해 정부개입의 근거는 물론 그 성격을 결정짓는 토대가 마련된다. 라즈는 도덕적 후견주의에 대해서는 개인의 자율성이나 신탁(trust)의 원리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거부하는 한편, 밀의 해악의 원리를 유지하면서 여기에 완전주의를 결합할 수 있다고 보았다. 라즈는 정부개입의 문제에 있어 최소한의 정부론이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있지만 그런 견해는 강제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라즈는 개인이 그의 삶에 자율적인 저자라고 여겨질 수 있는 요건을 정의하는데, 이에 의하면 어떤 행동을 하든 모든 선택의 여지가 타인에 의해 결정된다 해도 오직 개인의 행동이 타인에 의해 조작되거나 강제되는 때에만 자율성이 부정된다. 그런 때 개인은 타인을 위한 도구 이상이 되지 못한다. 이것은 달리 말해 개인의 삶에 어떤 제약이 부과된다고 해서 다 자율성을 침해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한 개인은 타인을 살해하지 못하게 기회를 박탈당할 수 있지만 그런 경우에 개인이 자율성을 잃었다고 하지 않는다. 살인한다는 것은 가치 있는 자율적 삶의 내용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라즈가 개인의 자율성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말할 때 그 자율성은 내적 제약에 따른 자율성, 즉 가치있는 삶을 위한 자율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에게 내적 제약을 준수하도록 강제하는 정도의 비후견적인 강제, 가령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강제는 정당화될 수 있다. 그것은 사회가 자율적인 행동이라도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도록, 즉 내적 제약을 따르는 범위에서 자율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 주된 이유가 되겠지만, 여기에는 부차적으로 행위자도 그렇게 함으로써 그 개인의 잘-삶도 보장할 수 있다는 이유도 있다. 신탁의 원리와 관련해서 라즈는 자율성이라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아니라 상황 여하에 따라서는 침해될 수 있는 것임을 지적한다. 외형상 자율성을 침해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렇게 할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는 상황이 인정된다면 자율성 침해의 문제는 간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라즈는 타인을 보호한다든지, 장기적으로 개인의 자율성을 더 잘 보호할 수 있다든지, 개인이 해야 할 의무를 다하게 할 필요가 있다든지 하는 것을 자율성을 침해할 정당한 근거로 거론한다. 그 외에도 해악의 의도가 없음이 명백한 강제라든지, 개인의 선을 위해 충분하고 합당한 이유가 있는 강제도 자율성을 침해하지 않는다고 본다. 여기서 신탁의 원리란 한 개인에 진정한 선이 무엇인지 판정할 권위는 오직 그 개인에게 있으며, 특히 강제나 도덕적 후견주의를 허용하려면 반드시 그 개인의 위임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그 경우에도 타인의 선을 위해 그에게 강제를 부과할 충분하고 합당한 이유가 있는가에 따라 자율성 침해가 정당화될 수 있는지 판정되며 신탁받았다는 사실이 자율성을 침해할 합당한 권위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또한 라즈는 개인과 정부 사이에도 신탁의 원리는 중요하다고 보는데, 한 개인이 시민권을 가졌다는 것은 곧 정부에 대해 신탁할 수 있는 전제가 되며 또 법이 권위를 인정받고 복종의무를 인정받는 것은 신탁의 원리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즈는 완전한 시민권을 누리면서 정부에 신탁하지 않은 개인에 정부가 후견적인 강제를 할 권한은 없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정부가 합당한 이유가 있어서 후견적 개입을 할 근거는 신탁에 의해 마련되는 것이라 본다. 법과 정부 및 통치의 권위는 ‘완전한 시민권을 누리는’(enjoying full citizenship) 개인이 신탁했다는 사실에 있다고 한다.66)
하지만 이런 절충이 가능한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크다. 누스바움(M. Nussbaum)은 근본적으로 반대하는 견해를 밝혔다. 정치적 자유주의에서 볼 때 완전주의자의 자유주의는 타인의 선택과 삶에 대한 존중 문제를 결코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67) 누스바움이 아리스토텔레스 전통의 시민적 덕성의 부활을 강조하기는 해도 정부의 역할은 시민의 역량을 강화하는 것에 제한된다.68) 반면 자유 사회에서 완전주의적인 입법을 하더라도 그것은 하등 자유주의와 충돌하지 않는다는 견해도 있다. 히팅거(R. Hittinger)는 롤즈가 말하는 합리적으로 다원화된 사회가 완전주의를 배제한다고 볼 필요는 없으며, 합리적으로 다원적이면서도 완전주의적인 영역도 가능하다고 본다. 가령 전통적으로 법은 공동선을 위한 명령이라고 이해되고, 따라서 공동선에 속하는 것은 입법대상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미국 헌법(수정 제1조)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종교의 자유가 공동선에 속하기 때문이다. 헌법이 종교의 자유를 규정한 것은 완전주의적 요소로 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런 규정을 가지고 헌법이 종교가 없는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69) 히팅거의 논지는 헌법이 완전주의적 규정을 담았더라도 그런 규정이 완전주의를 수용하지 않는 사람은 존중받지 못하며 사회적 협력을 제공할 구성원에서 배제된다는 의미로 해석할 것까지는 없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이런 논지는 공동선 개념과 완전히 합치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이 합의한 공정한 협력의 조건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객관적인 가치로서 선 개념이 존재하는 것을 전제로 그런 선을 헌법에 규정하는 것은 그 선을 인정하지 않거나 무관한 개인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 우리 헌법학계는 종교의 자유를 무종교의 자유까지 포함하는 것이라 해석하는데70), 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된다. 종교의 자유는 신이라는 절대자를 전제로 하는 자유이지만 헌법에서 종교의 자유는 절대자를 인정하지 않거나 무신론자도 포용할 수 있는 개념으로 파악할 수밖에 없다. 또한 라즈의 시도에 대해 평가하자면, 자율성과 완전주의를 조화하려고 한 시도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개인의 자율성이 근본적이고 중심적인 가치이지만 절대적 가치는 아니고 가치있는 자율성이어야 한다는 내적 제약을 받는다고 본 것, 여기에 신탁을 완전주의적 개입의 요건으로 인정한 것, 완전주의적 개입은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보면서 그 예로 자율성을 보호하고 증진하는 것을 든 것이 그 예이다. 이를 우리 헌법과 결부시켜보면, 헌법전문은 자율성의 원리를 천명하는 한편 신탁에 상응하는 권위도 제공한다고 할 수 있고, 또 합당한 이유로는 라즈가 좁게 제시한 것처럼 개인의 자율성을 더욱 증진한다는 차원의 것은 완전주의를 정당화할 논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71)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자유주의와 완전주의의 관계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롤즈가 정치적 자유주의나 자유주의적 정의론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민적 덕성이나 완전주의에 반대했어도 아리스토텔레스의 공동선 개념이 롤즈보다 훨씬 더 자유 사회에 건전한 바탕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72) 이 문제는 여기서 간단하게 마무리하거나 해결할 성격의 주제는 아니며 앞으로도 연구가 계속될 필요가 있다. 글을 마무리하는 이 자리에서는 잠정적으로 우리가 공동선 개념을 모든 시민이 합의할 수 있는 최대한의 포괄적인 조건으로 정의한다는 출발점에서 벗어나지 않는 편을 선택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된다.73) 이런 사정을 염두에 두면 우리 헌법의 완전주의는 칸트의 계몽형과 같은 최소화된 유형을 선택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된다. 헌법이 공정한 협력의 조건에 관한 근원적인 합의라면 개별 입법은 그 구체화로서 완전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의 실제 충돌과 긴장은 거기서 일어난다. 개별 입법이 천명한 목적에 대해서도 공동선의 선언이라는 당연한 관점에서 맹목적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헌법에서 천명했고 또 우리가 공정한 조건으로 합의한 그 완전주의가 무엇인지 확인한 토대 위에서 그 목적의 완전성에 대한 검토가 이어질 필요가 있다.74)
Ⅳ. 결론
이상과 같이 헌법의 행복과 완전주의 문구를 공동선 개념과 연결해 살펴보았다. 우리 헌법처럼 행복은 물론 국민 개개인이 어느 영역에서든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것을 보장한다는 문구를 헌법에 담은 예는 세계적으로 드물다. 이런 헌법정신이 오늘과 같이 경제발전과 정치적 민주화를 이룬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게도 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의 위상이 이렇게 고양된 때가 없었을 바로 이때 한국의 소멸을 경고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국가의 위기는 공동선의 위기에서 비롯된다. ‘능력을 최대한 발휘한다’라는 완전주의도 공동선을 돌아보지 못하면 타락하고 부패한 욕망덩어리일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정의와 친애의 시민적 덕성에서 생겨난 평안한 잘-삶이라는 완전주의는 시민적 덕성이 상실된 채 오직 물질적 잘-삶을 추구하는 이기적 세태와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롤즈만 해도 합리적 다원주의를 말했지 물질적 성공에 세상 사람들이 다 휩쓸려 다니는 세태를 정의를 중심으로 질서정연하게 잘 조직된 사회에서 보게 될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경제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것은 실패나 낙오가 아니지만 경제적 성공만이 능력의 척도라는 엉터리 신화에 오염된 사람도 많다. 자유주의와 다원주의란 개인이 각기 자기 나름의 잘-삶에 대한 전망을 만들어갈 마음을 갖고 살아가도록 격려하는 생각이지 그런 잘못된 신화를 옹호하는 논리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 한국 사회의 공동선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롤즈는 「정의론」에서 정의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에 대해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기로 선택한 사람을 비유로 설명했다. 사랑을 선택한 사람은 그 때문에 더 큰 불운을 겪을 수도 있고 또 예기치 못한 희생을 치러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털끝만치도 상처받지 않으려는 마음으로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 사랑을 선택한 사람은 결코 우호적이지 않은 여건 속에서 살아야 할 것이며 불이익이나 불운을 감수해야 할 수 있다. 사회가 그런 노력에 보상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사랑하고 있다면 후회는 없는 법이다. 그리고 먼 훗날 여건이 좋아진 때에 다시 돌아보면 그 모든 희생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그때의 선택이 옳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 했다.75) 사랑의 실천이 믿음과 희망 위에 자라나듯이 정의감도 그렇게 보존되고 성장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논의인데, 공동선과 같은 헌법정신도 그와 같은 방식으로 기억되고 실천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