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며
법인격부인론 역적용 설시에 관한 최근의 한 판결문은 학계와 소송 실무의 수많은 관심을 불러왔다.1) 근래 법인격부인 소송은 법인회사지만 형태만 법인일 뿐 사실상 대표이사가 지배하는 개인기업과 다름없을 정도로 형해화 된 사안에서 채권자가 법인의 운영, 재무 상태 등 채무면탈 목적을 증명하면서 추궁하는 방법, 법인을 지배하는 자가 위법하거나 부당한 목적 또는 법률 적용의 회피를 위해 법인격을 남용하였을 때 보충적으로 법인격부인이 적용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2)
회사법상 법인과 그 구성원 간 분리의 원칙은 유한책임으로 파생되는데, 주관적으로는 채무를 면탈할 의도라면 입법자가 법인격을 부여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따져보자는 것이 법인격부인론에 관한 연구일 것이다. 각국의 판례들도 법인격의 형해화와 남용이 문제된 경우 법인격부인론을 적용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법인격의 그 배후자에게 책임을 묻을 수 있도록 회사법에 근거를 둔 입법례도 존재한다.3)
우리나라에서도 원고가 채무이행을 청구할 때, “상대방 법인이 배후자의 개인기업에 불과하다면 외견상으로 회사의 행위라 할지라도 이 경우 배후자의 책임을 부정함이 마땅한 신의성실에 위반되는 법인격의 남용”이라 주장할 정도로 소송사례에서 권리구제를 위해 적용되는 법리로 등장한다. 그렇다면 역(逆)으로 배후자가 채무면탈의 목적으로 법인을 설립하였을 때, 법인과 지배주주의 일체성이 인정된다면 사해행위 취소권이 아닌 법인격부인 이론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4)
예컨대 대법원 2019다293449 판결은 역적용을 인정하는 케이스가 아니다. 법인격 부인론의 역적용에 관한 사안을 신의성실의 원칙이라는 사법상 일반법원리에 포섭하여 문제를 해결한 것에 가깝다.5) 이에 법인격부인의 역적용은 가상의 막(veil)을 제거하여 법인의 재산에 청구하는 소송이므로 소수주주나 채권자의 보호도 고려되어야 할 것이고, 회사제도의 근간인 조직을 해체하는 형평법상 구제 수단이라는 점에서 법이론 적용이 합목적적이며 적절한지를 논하기로 한다.
Ⅱ. 법인격에 관한 소고
민법 제1편 총칙 제3장은 ‘法人’으로 규율하고 있으며, 자연인과 법인을 권리주체로 인정하고 있다. 법인도 자연인처럼 법인격을 가지며 권리와 의무의 귀속주체가 되어 완전한 권리능력을 가진다는 의미일 것이다. 민법 제34조 권리능력, 제3조에서 권리능력의 존속기간을 규율하고 있지만, 단지 권리능력의 개념을 권리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지위 또는 자격을 가리키며, 권리능력을 법인격으로 설명하고 있다.6)
권리능력자=권리주체=법인격이라 표현하는 것이 통설적 설명인데, 이와 같은 설명이 정착하기까지는 오랜 논의 과정을 거쳤기에 가능한 일이다.7) 법제사적으로도 법인은 로마법에서도 일부 그 원형을 찾을 수 있지만, 법인 본질에 관한 논의는 19세기 말 이래로 여러 이론이 주장되었다. 대표적으로 자비니(savigny), 푸흐타(puchta), 빈트샤이트(Windscheid) 등이 주장한 의제설(Fiktionstheorie)8)과 기르케(gierke)의 실재설(Realitätstheorie)9) 간 논쟁으로 유명하다.10) 법인이 허구적 존재인지, 실존하는 유기체로 보아야 할 것인지에 따라 학설의 설명이 갈라지기 때문이다.11)
의제설이 자연인에게 인정되던 권리주체성을 당시 법인에 대해서도 인정하기 위한 법리적 근거를 제공하는데 주안점이 있었다면, 기르케의 실재설은 단체의 결사에 대한 국가의 강제력을 막기 위한 법정책적 포석을 깔고 있었던 것이지, 이들 학설이 상충되거나 대립되는 것은 아니었다.12) 그런데 법인의 권리능력에 대해서는 의제설의 권리는 곧 인간의 도덕적 자유를 실현하기 위한 의사의 지배이기에 권리주체란 인간의 개념과 일치한다. 회사의 불법행위능력에 관하여 법인의제설에 따르면 회사는 의사를 결정하고, 그에 따라 행위할 수 있는 의사능력이나 행위능력이 없으므로 불법행위능력도 부인된다고 본다.13)
법인실재설은 기르케에 따르면 juristische person(法人)이라는 표현을 의식적으로 피하고, Verbandsperson(團體人)으로 사단과 재단은 모두 자연인과 마찬가지의 기관으로 조직된 단체로서의 人으로 설명한다. 권리주체가 될 수 있는 능력을 인격이라 하고, 법규에 의한 인격의 승인으로부터 모든 개별 권리와 의무의 기반이 되는 인격권이 도출된다. 인격권이 속하게 되는 존재를 법적 의미에서 Person(人)이라 하였다.14)
단체인의 권리능력은 자연인과 마찬가지로 공법과 사법 영역 모두에 미치게 된다. 법인실재설은 회사는 스스로 판단하고 행위할 수 있는 의사능력과 행위능력을 가지며, 그 기관인 주주총회·이사회·감사 등을 통하여 회사의 의사를 실현한다고 본다.15) 회사는 대표를 통하여 법률행위를 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우리나라에서 상법상 회사는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법인으로서 당연히 법인격을 부여받게 된다(제169조). 다만 법인격을 향유하느냐의 여부는 사단이나 조합과는 관계없이 개별 국가들이 법정책적으로 결정할 사안이다. 영미나 독일법은 물적회사에 대해서만 법인격을 부여하고, 인적회사에 대해서는 법인격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16)
상법 학자들은 정관 목적(상법 제179조 제1호) 외 운영을 할 수 있느냐는 ‘Ultra Vires Doctrine’에 관해 정관상 기재된 목적 범위 내에서만 인정된다는 ‘intra vires’, 그리고 법인이 목적범위 밖의 행위를 한다면 그러한 행위는 월권으로 본다는 ‘ultra vires’을 더 이상 논의하지 않는다.17) 비교법적으로도 1989년 영국에서 먼저 능력 외 이론을 사실상 폐지하였기도 하지만, 국내에서는 거래 안전이나 목적에 반하지 아니하는 행위는 권리능력의 범위에 포함한다는 입장이다. 무제한설은 상법이 민법 제34조를 준용하지 않고 있으며 목적이 추상적이라는 점, 판례는 제한설의 입장에서 목적 범위를 넓게 해석하여 거래의 안전을 보호하고자 한다.18)
법인은 법에 따라 영리를 추구하는 법인과 이윤 외의 목적을 추구하는 비영리법인으로 나뉜다. 나아가 상법상 회사는 주주가 존재하므로 주주의 재산과 회사의 재산을 구분한다. 양자를 분리하는 이유는 주주의 유한책임 원칙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또한 법인격이 부여되면 법인은 그 사원의 인격과 구별되는 독자적 권리주체성을 갖게 되며, 스스로 권리와 의무의 주체가 된다. 물론 소송절차상에서도 독자적으로 당자적격을 인정받는다.
법인격이 문제가 되는 법인, 특히 상법상 주식회사는 구성원인 주주의 인격과 분리되면서 법인은 자신의 고유한 특별재산을 가진다. 법적 독립성과 특별재산(Sondervermögen)의 형성이 법인격부여의 원칙적 의미라 할 수 있다.19) 따라서 회사에서 유한책임은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는 방식으로 발전되어 왔다. 만일 지배주주가 없는 상황이라면, 절차상 모든 주주가 공동으로 의사를 결정해야 한다. 이는 내부적으로 비효율성을 발생시키므로 대리인(경영자)에게 위임하는 방식을 선호했던 것이다.20)
다른 관점에서 세법 영역에서는 의제설과 실재설에 따른 효과보다는 조세회피방지 내지 조세의 중립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과세당국의 집행가능성이나 납세자의 ‘compliance’ 제고가 강조될 수밖에 없기에 조세법 영역에서 법인격 부인은 조세정의와 공평을 실현하는데 가깝다고 본다. 법인격을 부여하면서 인정되는 권리의무 및 재산귀속의 주체라는 속성은 소득주체에 과세한다는 과세 이념과 맞물리는데, 법인격과 법적 주체성이 구분되지 않는 법체계에서는 법인과세와 투시과세(透視課稅)의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일례로 최근 민간을 중심으로 미국 주식투자가 확대되고 있는데,21) 배당주 관련 투자에 MLP가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파트너쉽 과세는 과거 일본의 논의에 따르면, 법인실재설의 영향을 받아 “법인과세를 판정하는 근거가 실제로 권리의무 및 재산의 귀속주체로 본다면 충분한 근거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으며22), “법인의 전형적 특징인 유한책임이나 지분 양도성이라는 특징으로 법인과세를 적용하기보다는 조직 그 자체를 과세한다는 사고방식이 조세정책의 관점에서 중요하다”23)는 견해가 있다.
상법 제331조(주주의 책임)는 그가 가진 주식의 인수가액을 한도로 출자의무를 부담할 뿐, 회사의 채권자에 대하여는 직접 책임을 지지 않는다.24) 대부분의 교과서에서도 합자회사의 유한책임사원도 출자가액을 한도로 책임을 지는데, 주식회사 주주의 간접책임과는 성질이 다르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유는 주주는 주금납입의무를 부담하는 것이고, 유한책임사원은 회사 채권자에 대해 일정한 조건하에 직접 책임을 진다는 점에서 주주와는 구별된다는 점이다. 이처럼 상법의 법인격이나 민법상 권리능력은 독일법계의 영향을 상당 부분 받아왔다.
분리의 원칙(Trennungsprinzip)에 따라 법인과 사원의 재산은 구분된다는 점인데,25) 법인이 독립된 실체를 갖지 못한 경우에는 법인과 제3자 사이에 문제된 법률관계에서는 법인의 법인격을 인정하지 아니하고서, 법인과 사원을 동일시하여 책임을 사원에게 물을 수 있는 법리를 법인격부인론이라고 한다.26) 영미의 문헌에서는 ‘disregard of the corporate entity’27), ‘piercing the corporate veil’28), ‘lifting the veil of corporate entity’29)로 찾아볼 수 있다.
미국의 판례도 법인격부인을 적용할 때 여러 가지 기준을 고려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paper company’, ‘conduit entity’를 활용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국세청(IRS)이 제기한 Aiken Industries, Inc v. IRS사건은 파나마 법에 따라 이자소득에 대해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한 거래였는데, 법원은 이를 경제적 실체가 없고, 세금 회피를 목적으로 형식적 거래로 판단하고, 해당 법인을 도관체(conduit)로 보아 조세회피 시도를 허용하지 않았다.30)
법인격부인론의 국내 도입 시 주로 참고하였던 미국의 문헌들은 회사는 주주의 대리인에 불과하다는 대리이론, 회사는 주주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도구설, 회사는 주주의 분신과 다름없지 아니한가라는 분신이론, 회사는 주주와 실질적으로 동일체라는 동일성설 등 이론이 제시되고 있다.31) ‘미국의 이론들은 정설이라 할 만한 것은 못 되고, 비유적 표현에 불과하여 법인격부인론의 법적 이해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고 한다.32)
법인의 본질을 도구로 보거나 의제로 본다면 법인격부인론을 쉽게 수용할 수 있으나, 자연인처럼 독자적인 법인격을 가진 실재설로 본다면 간단히 법인의 법인격을 부인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민법학의 송호영 교수는 “법인격을 부인하는 법리 대신에 문제되는 법률관계에서는 책임의 종국적 주체를 찾아내기 위한 실체파악의 법리로 접근하자. 독일식 규범적용설이라면 법인은 성립요건에 맞춰 설립등기를 마침으로 법적으로 사원과 별개의 독자적 존재로 그 법인격을 부여받는 것이므로, 그 법인격은 사안에 따라 함부로 부인하거나 무시되어서는 안된다. 단, 법인제도의 악용시에는 법인격 부인이 아닌 사원의 책임제한의 특권을 부인해야 한다”며 민법 제2조 신의성실의 원칙에 따라 제3자의 채무에 대하여 기존 법인격부인 이론이 아닌 법인과 배후사원 사이에 병존적 채무인수관계로 대체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33)
중첩적 채무는 처분이 아닌 채권행위로서의 성질만 가지는데, 채권자에게 인수인에 대하여 새로운 권리를 취득하게 하는 것으로 제3자를 위한 계약의 하나로 볼 수 있다.34) 판례도 제3자를 위한 계약과 이행인수의 판별 기준은 “계약 당사자에게 제3자 또는 채권자가 계약 당사자 일방 또는 인수인에 대하여 직접 채권을 취득케 할 의사가 있는지 여부”에 있다고 본다.35)
채권자 입장에서도 입증이 필요한 법인격부인론 보다는 소송에서 유리한 중첩적 채무인수를 선호할 것인데, 법인격 부인론이 아닌 사원의 책임제한이라는 특권으로 해결한다는 점에서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다만 효과만 보자면 보충성이 없다는 점에서 법인의 사원에게는 채무인수(마치 연대보증인처럼)가 된다. 이러한 논리는 주주의 동의가 있다면 주주유한책임의 원칙에도 불구하고 ‘주주들은 자발적으로 회사채무를 부담할 수 있다는 주주의 동의’와도 유사한 면이 없지 않다. 판례에서도 “제331조의 주주유한책임원칙은 주주의 의사에 반하여 주식의 인수가액을 초과하는 새로운 부담을 시킬 수 없다는 취지에 불과하고 주주들의 동의 아래 회사채무를 주주들이 분담하는 것까지 금하는 취지는 아니다”고 판시한 바 있다.36)
상법에서 유한책임은 전술한 바 정관의 규정이나 주주총회의 결의 혹은 제3자와의 약정에 의해 달리할 수 없는 강행적 제도로 소개되고 있다. 다만 계약상의 책임(회사가 차입한 자금의 변제)과 더불어 불법행위책임도 제한하고 있다. 그로 인한 폐해로 회사의 경영위험을 외부로 전가하거나 사업에 필요한 자산을 보험으로 담보하지 않거나, 잠재적 사회비용에 대한 책임을 대비하지 않는 등 악용의 폐단이나 사회적 문제로 발전할 가능성도 충분하다.37)
따라서 특별법인 상호저축은행법과 채무자회생법은 특별법으로서 주주유한책임에 따른 원칙의 예외를 규정하고 있다. 먼저 상호저축은행법 제37조의3(임원 등의 연대책임) 제1항은 “상호저축은행의 임원은 그 직무를 수행하면서 고의나 중과실로 상호저축은행 또는 타인에게 손해를 입힌 경우에는 상호저축은행의 예금등과 관련된 채무에 대하여 상호저축은행과 연대하여 변제할 책임을 진다”고 규율하고 있다.38)
최근 2023년 4월 개정으로 ‘과실’이 ‘중과실’로 변경되었다. 이는 상호저축은행 임원의 손해배상 연대책임 요건을 완화한 것으로 평가된다. 동조 제2항은 “상호저축은행의 과점주주는 상호저축은행의 경영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부실을 초래한 경우에는 상호저축은행의 예금등과 관련된 채무에 대하여 상호저축은행과 연대하여 변제할 책임을 진다”고 하여 국세기본법상 주식회사 발행주식 총수 또는 출자총액 50% 이상을 소유한 주주(특수관계인 소유한 주식 합산)에게도 책임을 묻고 있다.
채무자채무자 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률 제205조 제4항은 “주식회사인 채무자의 이사나 지배인의 중대한 책임이 있는 행위로 인하여 회생절차개시의 원인이 발생한 때에는 회생계획에 그 행위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주주 및 그 친족 그 밖에 대통령령이 정하는 범위의 특수관계에 있는 주주가 가진 주식의 3분의 2이상을 소각하거나 3주 이상을 1주로 병합하는 방법으로 자본을 감소할 것을 정하여야 한다”고 규율하는데, 과거 동조 제3항에서는 “회생절차개시 당시 부채총액이 자산총액을 초과하는 경우 회사가 발행한 주식의 2분의 1이상을 감자하거나 2주 이상을 1주로 병합”하도록 한 규정이 있었는데, 2014.5.20. 삭제되었다. 당시 소관부처인 법무부는 “주식 강제소각 및 신주인수금지 규정은 삭제하였지만, 차후 부실경영에 책임이 있는 특수관계인의 주식은 불이익하게 취급할 수 있도록 존치한다”고 하였다.39)
민법상 법인제도는 관념적인 존재로서 권리능력을 인정하기에 그 구성원이나 관리자와는 별도로 권리를 취득하고 의무를 부담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 법인격이 입법자의 취지와 달리 이용되는 경우는 법인격이 부인된다고 보며(통설), 세금포탈 또는 재산은닉 목적도 마찬가지로 판단한다.40) 그런데 법인격을 부인하는 일은 법인격을 부여받은 법인의 독립성과 구성원의 유한책임의 원칙을 깨뜨리게 된다.
법인격 부인의 법리를 언급한 55년 전 일본판례는 ①법인격이 형해화된 경우, ②법률의 적용을 회피하기 위해 법인격을 남용하는 경우를 들고 있다.41) 법인격남용에 관해서는 학설들은 대체로 비슷하게 인정하는 편이고, 법인격 형해화의 경우는 견해가 나뉜다. 강위두 교수님은 청산이 종료된 것과 같이 법인으로 인정할 만한 실체가 없어 법인격이 소멸되어 법인격부인 법리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보았다.42)
법인격부인론의 주관적 요건을 권리남용의 주관적 요건과 동일한 선상에서 판단한다고 하여도 ① 권리남용금지규정은 주관적 가해의사의 요건으로부터 탈피하여 객관적으로 권리의 목적 내지 사명을 일탈하는 권리의 행사를 제한하는 스위스 민법을 따른 것이며, ② 권리남용금지의 규정에서 주관적 요건을 강조하면 경제적 약자의 보호 및 권리의 사회성, 공공성이라는 사회적 요청에 대응할 수 없고, ③ 주관설을 따를 경우 상대방에게 손해만을 주기 위한 목적을 증명하는 것이 어렵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주관적 요건은 법인격부인론의 공통된 적용요건으로 필요하지 않다고 본다.43)
미국의 여러 州에서는 사기의 의도라는 주관적 요소로 포괄적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지만, 캘리포니아 등 다수의 주에서는 주관적 요소가 없는 사건에도 정의와 형평에 부합하는 듯한 법인격부인론을 적용하자는 견해가 있다.44) 이는 법인이 법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는 의미로 이해된다.
법인격부인론의 적용요건으로 주관적 요소 또한 법인격부인론을 적용할 구체적 유형에 따라 달리 판단하여야 한다.45) 대법원이 법인격의 형해화로 설시하였던 회사의 사유화에 대한 사건에서는 회사는 형식에 불과하고 그 실질은 지배주주의 개인기업에 불과하다는 것이 법인격을 부인하는 주된 근거가 되었듯이 지배주주의 주관적인 의도는 사실관계 존부에 있어서 중요한 일이지만, 법인격부인의 요건에는 그리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채무면탈의 목적으로 회사를 설립한 경우 등에서는 주식회사의 물적·유한책임성을 고려할 때 회사의 개인기업화 사안과는 달리 채무면탈행위는 물론 채무면탈의 의도 또한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46)는 타당해 보인다고 생각된다. 참고로 역적용에서 채무면탈은 다른 사법적 구제 수단으로 달성할 수 있기에 제외하자는 캘리포니아 항소법원의 case도 존재한다.47)
회사법에 법인격부인이라는 요건을 정하여 유한책임을 남용한 경우, 채권자가 직접 인민법원에 해당 주주에게 연대책임을 추궁할 수 있다는 논리는 중국 회사법에 2005년 전면개정 때 도입된 바 있다. 중국 舊회사법 제20조에는 “첫째 현저한 자산부족이 발생된 경우, 둘째 회사를 이용하여 계약의무를 회피하는 경우, 셋째 회사를 이용하여 법률의무를 회피하는 경우, 넷째 회사의 법인격을 형식화 하는 경우, 다섯째 채무를 면탈할 목적으로 회사를 매각하는 행위, 여섯째 자연인, 조합기업 등 비법인기업이 법인명의로서 대외적 경영행위를 하는 경우, 일곱째 국가단독출자회사가 행정주관부서에 의하여 과도하게 통제되어 행위하거나 조종되어 행위하는 경우”로 그 요건을 정하였고, 회사의 법인격이 부정되면 회사와 주주간에 유한책임의 법리가 부정되고 이로서 회사와 주주는 동일체로 간주되어 채권자는 주주에 대한 연대책임을 추궁할 수 있게 된다.48)
2023년에도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에서 두 번째 전면개정된 회사법을 정식 공포하였는데, 개정작업을 시작한 2019년부터 개정법을 공포하기까지, 판례나 사법해석 그리고 다른 나라의 회사법을 참고한 것이다.
법인격 부인과 관련하여 중국 회사법 제23조(2024년 7월 1일 시행)은 “회사의 주주가 법인의 독립적 지위와 주주의 유한책임을 남용하여 채무를 회피하고 회사 채권자의 이익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경우 회사 채무에 대하여 연대책임을 부담해야 한다. 주주가 지배하는 두 곳 이상의 회사에 대하여 앞 관의 행위를 하는 경우 각 회사는 다른 회사의 채무에 대해 연대책임을 부담해야 한다. 1인 주주 회사의 주주가 회사 채무와 본인의 재산이 별개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없는 경우 회사 채무에 대해 연대책임을 부담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49)
이미 우리나라의 선행연구와 학자들의 견해는 이에 대한 활발하고 다양한 접근방식에서의 연구가 이루어졌고, 이론상 법인격부인의 근거로서 ‘권리남용의 금지규정(민법 제2조 제2항)’을 들고 있고, 판례에서는 법인격을 남용한 일부사례에 대해 ‘신의성실의 원칙’을 그 근거로 법인격을 부인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법인격부인론은 성문법에 근거한 제도가 아니므로 어떠한 법리적 근거에서 이것을 정당화하느냐가 법논리적으로 결정적인 물음이 된다. 구체적인 사건을 법개념을 적용하여 사안의 집합에 귀속시키는 것이 무엇에 기초하는가? 상세히는 회사의 법인격을 일반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된 특정사안에 한하여 지배주주로부터 법인격, 독립성을 부정하자는 의미이다.50)
국내에서 법인격부인의 객관적 요건은 선행연구에서 정리된 요건을 소개하고자 한다.51) 아래의 견해 중 ①, ②, ③은 법인격부인의 유형을 구분하지 아니하고 그 적용요건을 열거한 후, 충족된 요건의 총체적인 상황을 평가하여 법인격부인 여부를 판단하게 된다. 견해 ④의 경우는 판례의 입장과 동일하며,52) 법인격의 형해화와 남용이라는 두 가지 유형에 따라 적용요건을 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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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지배의 완전성 : 회사에 대한 완전지배와 주주가 그 지배적 지위를 이용하여 계약상의 의무를 회피하거나, 법령을 위반하거나, 신의칙에 위반하는 불공정 행위를 하여야 한다. 완전지배의 징표로는 회사와 주주 사이에 업무와 재산이 혼동되어 있고, 회사를 위하여 따로 회계가 구분되지 않으며, 회사가 경영하는 사업의 규모나 성질에 비하여 현저하게 불충분한 자본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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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재산의 혼융 : 회사의 독립된 법인격이 사원 개인과 분리하여 존재하지 않고 이해 및 소유가 일치하거나, 사원에 의한 회사의 지배가 있어야 하고 사원의 행위가 회사의 행위로 인정되면 형평에 어긋나는 결과가 발생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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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회사의 무자력 : 회사가 그 자체의 독자적 의사 또는 존재를 상실하고 주주가 회사를 완전히 지배할 것이 요구된다. 회사의 재산과 업무가 지배주주의 그것과 혼융되어 주체를 구분하기 어려워야 하며, 회사의 무자력으로 회사채권자가 변제를 받지 못하는 손실이 있어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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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법인격의 형해화와 남용 : 실질적으로 회사가 주주의 개인기업에 지나지 않는 경우, 즉 회사의 재산이 주주의 개인재산 또는 다른 회사의 재산과 혼동되어 있거나 영업활동 및 수지가 혼융된 경우가 법인격의 형해화이며, 배후에 있는 자가 위법 부당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회사제도를 남용하는 경우가 법인격의 남용에 해당한다.
위의 요건을 바탕으로 문제가 된 법률행위나 사실행위를 한 시점을 기준으로 그 적용범위는 채무자에 대한 불법행위책임의 추궁이나 법인격부인의 역적용, 기판력·집행력의 확장에 연관된다. 다만 불법행위에는 상대방의 신뢰가 있을 수 없고, 법인에 대한 승소판결의 기판력 또한 승계인에 준하는 지배주주에게 미친다고 볼 수 없다.53) 생각건대, 법인격부인 이론은 어디까지나 비성문화된 판결이기에 중국처럼 적용 요건을 입법하거나, 예측가능성을 제고하는 차원에서 위 요건처럼 극히 예외적인 특수한 경우에 한해 적용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Ⅲ. 법인격부인론에 대한 검토
1993년 미국 의회는 국세청의 업무를 강화하기 위해 내국세법 제7701(1)을 시행하여 국외거래시에 원천징수규정의 적용과 관련해 일련의 금융거래에 있어 단순히 도관에 불과한 법인(intermediate entities)은 조세조약에 따라 이자에 대한 원천징수가 면제이지만, 이를 적용하지 않는다고 규정하였다.54) 우리 세법은 도관회사(conduit entity)에 대해 거래를 부인하는 직접적 규정은 없지만 국세기본법 제14조의 실질과세원칙과 조세조약에 따른 조세회피방지 원칙을 해석하여 조세회피에 대해 대응할 수 있다.55)
그렇다면 법인격부인의 법리가 세법에도 적용되어 법인이 형해화 내지 페이퍼 컴퍼니로 도관체에 불과하다면 그 법인의 배후자의 행위로 볼 수 있는 것인가? 법인격부인의 법리는 회사법상의 이론으로, 실질과세의 원칙은 세법상의 원칙으로 주로 논해져 왔다. 법인격을 남용하는 경우 이에 대한 제한은 세법분야에도 필요하다.
그렇지만 세법분야의 경우에는 법인격이 남용되는 경우 실질과세의 원칙에 의해 조세회피 행위에 대한 규제가 가능하고, 실질과세의 원칙을 적용하여 과세가 어려운 경우 사법상 법인격부인의 법리를 확대하여 과세할 경우 납세의무자의 법적 안정성 및 예측 가능성을 해하여 조세법률주의에 위반될 수 있다. 대법원은 실질과세원칙을 적용하여 법적 형식을 부인하고 과세한 다수의 사례에 있어서 ‘실질과세의 원칙에 의하여 당사자의 거래행위를 그 법 형식에도 불구하고 조세회피행위라고 하여 그 행위계산의 효력을 부인할 수 있으려면 조세법률주의의 원칙상 법률에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부인규정이 마련되어 있어야 함이 원칙’이라고 설명하고 있다.56)
모회사가 자회사를 통해 부동산 보유회사의 주식을 취득한 경우 모회사를 지방세법 제138조 제2항의 취득세 간주취득규정의 적용을 받는 과점주주로 인정할 것인지에 대한 최근 행정법원 판결 중 서울행정법원 2007.11.6 선고, 2007구합5349 판결은 사법상 법인격부인의 법리의 세법 적용을 긍정하고 있다.57) 해당 사안의 경우 실질과세의 원칙이 적용되는지 여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하고 세법분야의 법인격부인의 법리를 적용하기 위한 요건이나 그 법리를 적용하는 경우 모회사와 자회사의 과세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는 상황에서는 법인격부인의 법리를 적용하는 데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58) 조세법률주의의 원칙 위반이 문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국내에도 과세관청이 특수목적법인의 실질을 부인하고 도관으로 보아 과세처분 하는 경우가 있으며, 법원도 법인의 행위를 법인의 주주 등 배후자의 행위로 보기 위해서는 법인 자체가 도관회사로서 법인격이 부인될 정도가 된다면 법인격을 부인하는 듯한 판례가 등장하고 있다.59) 다만, 세법상 조세법률주의와 실질과세원칙에 얽힌 내용은 본 주제와는 달리 특수에서 특수를 도출하는 추론이기에 제외하고, 이하에서는 법인성으로부터 출발하는 지점만 다루기로 한다.
1974년 법인격부인이 고등법원 판결문에 등장한 이래로60) 1988년 제3자이의의 소에서 편의치적(flag of convenience) 사건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졌다.61) 특정 주주가 회사를 완전히 지배하고 회사의 사업이 주주의 개인사업체처럼 운영된다면 이러한 사실만으로 회사법의 주주유한책임을 고려해줄 가치가 없고, 대부분 학설은 채권자 보호의 필요성은 주주의 남용의사와 무관하게 발생한다고 보고 있다. 다만 판례에서도 법인격 형해화의 정도나 기타 사정을 고려하여 판단해야 함을 단서로 남겼는데, 각각의 독립적 선택인지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62)
법인격부인은 법인격이 남용된 특정한 경우에 한하여 회사의 독립적 법인격을 제한하는 것으로 미국에서는 법인의 본질에 따라 접근방법을 달리하고 있다.63) 역사적 논증, 편의성의 논증, 정책적 논증의 방식들이 있었고, 법인격부인이론은 사기의 방지를 위한 형평법상의 구제를 위하여 예외적으로 인정된다고 하면서 그 근거로 대리인이론(agency), 분신이론(alter ego), 도구성 규칙(instrumentality), 동일체 이론(identity) 등을 들고 있다.64)
회사가 분리·독립된 의사 또는 의지가 없거나, 회사로서의 존재가 없는 단순한 도구에 불과할 정도로 모회사의 통제를 받고 있거나, 특정 1인이 법인의 분리·독립된 법인격을 부인할 만큼 실제로 법인조직을 지배하는 경우 법인은 특정 분신(alter ego)에 불과하고, 도구성 규칙(instrumentality rules)에 따라 법인격을 부인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65)
독립된 법인격을 부인하기 위한 적용요건으로는 ① 주주의 회사의 회계뿐만 아니라 정책과 경영에 대한 완전한 지배, ② 사기(fraud) 또는 부정행위(wrongdoing), ③ 주주와 회사간 업무재산의 혼융(commingling), ④ 과소자본(undercapitalization)을 내세우고 있다.66)
법인격부인의 법리는 계약상의 책임 외에도 부당한 결과를 방지하기 위함이라는 점에서 불법행위책임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것으로 생각되는데, 불법행위채권자와 같은 비자발적 채권자는 채무자를 선택할 수 있는 지위에 있지 아니하였으므로 과소자본여부가 중요하게 고려될 것이다. 정의의 관념이나 형평에 부합한다면 불법행위에도 적용하지 못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법인격 부인론은 다양한 사안에서 문제될 수 있지만, 그 원칙적인 모습은 법인격이 남용된 회사의 책임을 그 회사 배후에서 지배하고 있는 주주 개인에게 묻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가 가장 기본적인 법인격 부인론 적용 방식이다. 그 외에 변형된 법인격 부인론의 예로는 한 개인이 두 회사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는 상태에서 한 회사의 재산을 다른 회사의 소유 재산으로 인정하여 책임을 지우는 경우이다.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개인의 채무를 회사에 묻기 위한 경우에도 법인격 부인론이 이용될 수 있다. 개인이 자신의 채무를 면탈하기 위해서 회사를 설립하고 이 회사에 자금을 출자하는 사안에서 법인격을 부인하여 회사의 재산을 주주 개인 재산처럼 취급하여 책임을 지우는 유형이 법인격 부인론의 역적용 사안이다.67)
법인격부인론 역적용을 부정하는 견해는 대체로 “법인격 부인론이 원칙적으로 주주 개인의 채무를 회사에 부담시키기 위한 법리인데, 이것을 역으로 주주 개인의 채무를 회사에 부담시키기 위해 활용하는 것은 법인격 부인론의 본질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한다.68)
법인격 부인론의 역적용이 문제되는 사안은 주주가 채무를 면탈하기 위한 사해행위를 목적으로 회사에 출자한 경우가 많을 것인데, 이러한 사안은 민법상 채권자취소권 등 기존의 법리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고, 불법적인 목적으로 회사를 설립한 경우에는 법원에 회사 해산 청구를 신청할 수 있으므로(제176조 제1항), 굳이 무리하게 법인격 부인론의 역적용을 인정하여 해결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69)
법인에 변제자력이 존재한다면 법인격부인이 실정법에 근거한 것이 아니기에 채권자에 의한 법인격부인 역적용 가능성도 존재한다고 본다. 다만 역적용의 효과로 회사채권자에 우선하여 주주에게 출자를 환급해주는 듯한 외관을 만들기에 채권자보호의 이념에 반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70) 판례도 이를 의식하여 주주가 회사설립 전에 부담한 채무이고, 개인이 회사에 이전한 자산에 관해 회사가 정당한 대가 없이 부당한 이익을 누리는 경우에 한정하고 있다.71)
채무자가 개인사업을 하다가 신설법인을 세운 경우, 개인사업 관련 채권자가 신설법인에 대해서 ‘법인격 남용’을 근거로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판례이다. 대법원은 상고를 기각하면서 다음과 같이 판시하였다. “주식회사는 주주와 독립된 별개의 권리주체이므로 그 독립된 법인격이 부인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개인이 회사를 설립하지 않고 영업을 하다가 그와 영업목적이나 물적 설비, 인적 구성원 등이 동일한 회사를 설립하는 경우에 그 회사가 외형상으로는 법인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나 법인의 형태를 빌리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고, 실질적으로는 완전히 그 법인격의 배후에 있는 개인의 개인기업에 불과하거나, 회사가 개인에 대한 법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함부로 이용되고 있는 예외적인 경우까지 회사와 개인이 별개의 인격체임을 이유로 개인의 책임을 부정하는 것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므로, 이러한 경우에는 회사의 법인격을 부인하여 그 배후에 있는 개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다. 나아가 그 개인과 회사의 주주들이 경제적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등 개인이 새로 설립한 회사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지배적 지위에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로서, 회사 설립과 관련된 개인의 자산 변동 내역, 특히 개인의 자산이 설립된 회사에 이전되었다면 그에 대하여 정당한 대가가 지급되었는지 여부, 개인의 자산이 회사에 유용되었는지 여부와 그 정도 및 제3자에 대한 회사의 채무 부담 여부와 그 부담 경위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보아 회사와 개인이 별개의 인격체임을 내세워 회사 설립 전 개인의 채무 부담행위에 대한 회사의 책임을 부인하는 것이 심히 정의와 형평에 반한다고 인정되는 때에는 회사에 대하여 회사 설립 전에 개인이 부담한 채무의 이행을 청구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
대상 판결은 채무자인 개인이 새로운 회사를 설립하고 그의 사업상 자산을 신설회사로 이전한 사안으로, 대법원은 개인의 채권자가 신설회사를 상대로 채무의 이행을 청구할 수 있다고 판시함으로써 법인격 부인론의 역적용이 적용되는 사실관계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적어도 채무면탈 목적 등 일정한 사안에서는 배후자의 채무를 법인이 책임질 수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73)
이를 인정한다면 회사와 개인이 별개의 인격체임을 내세워 회사설립 전 개인의 채무부담행위에 대한 법인의 책임을 부인하는 것이 정의와 형평에 반한다고 보면, 회사에 대해 설립 전 개인이 부담한 채무의 이행을 청구함이 가능해 보인다. 또한, 본문에는 역적용의 내용은 없다. 공보상 표제에 “법인격부인론의 역적용을 전제로” 문구가 언급되었을 뿐이다.74) 즉, 이 사건 판결에서 끌어낼 만한 법리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예컨대 아무런 사업을 하지 않던 자연인이 채무면탈 목적으로 주식회사를 설립하였으면 이 사건 판결은 적용하기 어렵다.75) 다만 “제3자에 대한 회사의 채무 부담 여부와 그 부담 경위”를 고려요소로 명시함으로써 위 제기된 문제를 보완하였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판시라 할 수 있다.76) 다만, 사실관계를 살펴보면 개인 책임을 회사에 물은 ‘역적용’이 아니라 개인사업 및 신설법인의 사실상 동일성을 근거로 하는 ‘남용’에 가깝다는 견해가 타당해 보인다.77) 회사의 영업과 상관이 없는 자의 채무를 회사가 갚아야 할 이유를 찾기 어렵다는 점에서 법인격 부인론 역적용에 관한 이론과 판례가 연결되는 논리적 연관성을 보여주지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원심(대구지방법원 2022. 9. 2. 선고 2021다301570 판결)은 피고 회사의 법인격이 남용되었다고 보아 그 법인격을 부인하여 피고의 원고에 대한 책임을 피고 회사에 귀속시켜야 한다고 판단하였는데, 원고는 피고에게 2006년 금전을 대여한 채권자이고, 2008년 지급명령이 발령되고 확정되었다. 다만 피고는 친인척이 보유한 주식을 통해 피고의 회사를 사실상 지배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을 소지도 존재한다. 피고회사는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었고, 피고가 해당 주소지에 거주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2009년에 해산간주 되었다가 피고가 대표청산인으로 선임되면서 원고가 피고회사를 상대로 위 대여금 채무지급 청구의 소를 제기한 사례이다.
대법원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원심이 A가 채무를 면탈할 의도로 회사의 법인격이 남용되었다고 보는 것은 법인격부인과 그 역부인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였다고 하여 법인격의 역부인을 인정하지 않았다. 대법원 판결과 원심인 고등법원 판결은 모두 “대법원 2021. 4. 15. 선고 2019다293449 판결,”을 인용하여 (1) 개인이 회사에 지배적 지위에 있고, (2) 회사 설립 전 개인의 채무 부담행위에 대한 회사의 책임을 부인하는 것이 심히 정의와 형평에 반하는 경우에는 개인의 채무에 대한 회사의 책임을 인정한다고 판결하고 있다.79)
동 판결은 법인격 부인론의 역적용을 새로운 법리로 채택하지는 않고, 법인격 부인론이 인정되는 유형 중에서 법인격 남용에 관한 유형에 속하는 사안으로 다루고 그 판단기준도 동일하게 판시한 것으로 보며 법인격 부인의 역적용을 채무면탈 수단으로 법인격을 사용한 경우의 하나인 사해설립의 유형 중 하나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도 있다.
판례는 아직 법인격부인의 역적용이라는 개념을 채택하고 있지 않으며,80) 2021년 대법원판결의 경우 채무면탈을 위한 회사설립을 법인격부인의 한 유형으로 처리하고 있을 뿐이라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일 것으로 생각된다. 주주의 개인적 채무를 회사에 귀속시킨 것처럼 보이지만 기존에 영위하던 사업이 개인사업의 형태였던 것에 기인하는 차이에 불과하고 법인격을 부인한 요건에서도 기존 채무면탈 판례와 주목할 만한 차이가 없으므로 새로운 법리를 채택한 것이 아니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앞서 2021년과 2023년 대법원 판결에서 법인격부인의 역적용을 명시적으로 언급하면서 과연 우리 대법원이 이를 인정한 것인지, 이에 대한 견해는 나뉘고 있다. 법인격부인의 역적용을 정면으로 수용하였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고 보는데, 다만 실무적으로 채권자를 효과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대법원이 법인격부인의 역적용을 수용한다면 채무면탈에 대처할 효과적 수단이 될 것임은 자명한 일 것이다.81)
법인격부인론의 적용 요건으로 기업의 형태나 내용의 실질적 동일성은 제시된 내용이고, 법인격부인이 언급된 판례들을 살펴보면 법인격부인의 성립 요건인 법인격의 형해화와 법인격 남용을 여전히 기본으로 하고 있으므로 지배요건과 채무면탈의 주관적 요건이 필요하며, 경제적 이해관계에 대하여 세분화된 요건의 보충도 필요해 보인다.
결국 법인격 남용에 대한 대응책으로 역(逆)적용을 인정할 필요성은 인정되지만, 회사법 제도의 근간인 법인격을 흔드는 문제이므로 그 적용 요건은 더욱 엄격하게 설정되어야 할 것이다.82) 주주의 유한책임을 이용하여 재산의 강제집행을 회피하고 회사의 재산을 본인의 재산처럼 사용하는 지배주주에 대하여 채권자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법인격부인론과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83) 역적용은 법인의 재산이 관련되기에 법인격부인론의 연장이 아니라 독립된 판단이 별도로 필요한 이론이다.84) 나아가 일반적인 소수주주나 채권자 등 선의 피해자 보호 등 그 요건을 명확히 고려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Ⅳ. 나가며
판례는 기존 회사와 신설회사가 다르다고 법인격부인론 적용을 달리한다면 채권자가 보호받지 못한다는 점에서 실질적 동일성을 요건으로 제시한 바 있다. 또한, 귀납 추론과정에서 법인격부인론의 역적용에 관한 성립요건은 채권자의 인적 구성으로 경제적 이해관계가 고려되었느냐도 중요한 문제이다. 채무면탈 의도라면 객관적인 사실은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판단해야 하며, 주관적 요소는 구체적 유형에 따라 달리 판단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기업의 영리 추구와 이기적인 동기는 어찌 보면 인간의 본능인 욕망과 유사한데, 기업의 공로와 과오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그 출발점이 동일한 것이 아닐지 모르겠다. 산업에 어떤 기업이 필요한지 찾아내는 것도 중대한 과제이지만, 법인을 통해 마치 사람처럼 속임수, 조작 등으로 채권자에게 피해를 주고, 행위자는 법인격 뒤에서 책임을 저버리기도 하는 문제도 발생하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법인격을 통제할 연구의 필요성을 찾는다면, 문제는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