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일본은 지속적으로 독도를 자국의 영토이며, 명칭은 다케시마(竹島)라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은 1953∼1965년 간 4번의 ‘일본정부견해’를 우리나라에 송부하였다. 이를 통하여 독도문제를 분쟁화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주장을 펼쳤다. 우리나라의 경우 일본에 3차례에 걸친 ‘한국정부견해’를 전달하여 대응하였으나, 일본정부견해4를 송부받은 이후에는 여기에 제기된 관련 문제에 대하여 적극적 대응은 자제하고 있다.
일본정부견해1∼3까지는 독도에 대하여 무주지 선점의 논리를 펼쳤으나, 이러한 논의가 우리나라에 의하여 반박당한 이후에 그 태도를 변경하여 일본정부견해4에서는 고유영토(固有の領土)라는 새로운 논리를 펼치며 독도에 대한 비논리적이며 맹목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일본 측은 ‘고유영토(固有の領土)’의 정의를 밝히고 있지 않지만, 러시아와의 국경 지대에 있는 남부 치시마열도(일본명 쿠릴열도)에 대해, “북방4도는 우리 국민의 선조 전래(父祖傳來)의 땅으로서 이어받은 것이며 여태까지 한 번도 외국 영토가 된 적이 없는 우리나라 고유의 영토(固有の領土)입니다”라고 밝히고 있다.1) 또한 「일본정부견해4」는 ‘고유영토(固有の領土)’를 처음으로 하나의 용어로써 사용하였다. 동시에 고유영토의 최소한의 요건을 제시한 바 있다. 이는 “국제법상 어느 지역이 오래전부터 일국의 고유영토인지 여부에 관해서는 그 나라가 문제 지역에 관해 이를 어떻게 실효적으로 지배, 경영해 왔는지가 가장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라는 것이었다.2)
이러한 일본의 주장에 있어서 가장 걸림돌이 되는 사료가 메이지10년 태정관지령이다. 일본의 고유영토론은 사료의 연대기 순으로 살펴보면 1) 1661년 오야가 문서(大谷家文書), 2) 1681년 청서(請書), 3) 1695년 「회답서」, 4) 1667년 「인슈시청합기(隱州視聴合記)」, 5) 1696년 돗토리 번의 「각(覺)」, 6) 1720년대 「다케시마도(竹島圖)」, 7) 1724년 돗토리번의 ‘마쓰시마·다케시마의 지도[松島·竹島の圖]’, 8) 1741년 「구상서」, 9) 「다케시마도설[竹島圖説]」, 10) 1775년 「일본여지로정전도(日本輿地路程全圖)」, 11) 1801년 「장생다케시마기[長生竹島記]」, 12) 1804년 「변요분계도고(邊要分界圖考)」, 13) 1836년 덴포[天保]다케시마일건 판결문 등을 들고 있다.3) 이러한 사료들은 메이지10년(1877년) 태정관지령이 발출되기 이전의 자료들이라는 점에서 실상 일본의 주장의 타당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또한 일본 외교부와 학계는 이러한 일련의 사료들만을 제시할 뿐 왜 이러한 사료들이 독도가 일본의 고유영토가 되는 근거가 되는지는 설명하지 아니한다.4)
이러한 사료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지속적으로 메이지10년 태정관지령의 국가기록물로서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려는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이러한 연결선 상에서 시마네현죽도문제연구회(島根県竹島問題研究会)에서는 제5기 「죽도문제에 관한 조사연구[竹島問題に関する調査研究]」중간보고서를 발간하였다.
이 글은 시마네현죽도문제연구회의 제5기 「죽도문제에 관한 조사연구」중간보고서 중에서 나카노 데쓰야(野徹也)의 「1877년의 태정관지령에 관하여[1877年の太政官指令について]」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제2장에서는 나카노 데쓰야의 글을 번역·정리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나카노 데쓰야의 글은 객관적이고 논리적이라는 인상을 일응 주지만, 그 실제는 고유영토론의 아킬레스건인 메이지10년 태정관지령을 평가절하하기 위한 논리를 펼치고 있음에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제3장에서는 中野徹也의 이러한 주장이 법리학적으로 타당한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Ⅱ. 메이지10년 태정관지령
메이지9년 (1876년) 10월 5일, 지적 편찬 사업과 관련하여 내무성 지리료의 타지리 켄신(田尻賢信)과 스기야마 에이조(杉山栄蔵)은 시마네현 지적 편제계에 다음과 같은 질의를 하였다.
내무성 지리료의 조회를 받고 1876년 10월 16일, 시마네현은 내무성에 「일본해내 다케시마 외일도 지적 편찬 방안」이라고 하는 문서를 제출했다. 이는 앞서 언급한 10월 5일 내무부로부터의 조회에 대한 답변이며, 다케시마를 포함한 섬들의 지적 편찬에 관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안하는 것이다.
“귀하의 소속 지리료 직원이 지적 편찬을 위한 현지 조사를 위해 본 현을 방문하였을 때, 일본 해상에 있는 죽도 조사에 관하여 별지 을제28호와 같이 질의가 있었습니다. 이 섬은 에이로쿠(永禄) 연간에 발견되었다고 하며, 구 돗토리번(鳥取藩) 시대인 겐나 4년부터 겐로쿠 8년까지 약 78년 동안, 같은 번의 영내인 호키고쿠(伯耆国) 요나고쵸(米子町)의 상인 오타니 쿠에몬(大谷九右衛門)과 무라카와 이치베(村川市兵衛)라는 사람들이 구 막부의 허가를 받아 매년 건너가 섬 전체의 동식물을 싣고 본토로 팔았던 것은 이미 확증이 있으며, 현재까지 고문서, 서간 등을 통해 전해지고 있으므로, 별지의 원인 개요와 도면을 첨부하여 우선 상신합니다. 이번에 섬 전체를 현지 조사하여 상세한 내용을 기록해야 할 곳이지만, 원래부터 본 현의 관할이라고 확정된 것은 아니며, 북쪽으로 백여 리 거리에 있으며, 항로도 명확하지 않아 일반적인 범선 등으로는 왕복할 수 없으므로, 앞서 언급한 오타니와 무라카와가에 전해오는 기록에 대해서는 추후 상세하게 상신하겠습니다. 그러나 대략적으로 추측해 보면, 관내 오키구니(隱岐国)의 북서쪽에 해당하며, 산음 일대의 서쪽에 속한다고 생각되므로, 본 현의 국도(国図)에 기재하고 지적에 편입하는 등의 일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명령을 듣고 싶습니다.”8)9)
본 문의에 첨부된 별지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다케시마라고도 불리는 섬이 있는데, 오키구니(隠岐国)의 북서쪽으로 약 120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섬의 둘레는 약 10리 정도이며, 산이 험하고 평지가 적다. 세 개의 강과 폭포가 있지만, 골짜기가 깊고 어두워 나무와 대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물의 근원을 알 수 없다. … 물고기와 조개류는 매우 많으며, 특히 해달과 전복이 특산물이다. … 또 다른 섬이 있는데, 마쯔시마(松島)라고 불린다. 둘레는 약 30町 정도이며, 다케시마(竹島)와 같은 항로에 있다. 오키구니에서 약 80리 떨어져 있으며, 나무와 대나무가 거의 없다. 역시 물고기와 짐승이 서식한다.”10)11)
위와 같은 의견을 받아들여, 내무성은 1877년(메이지 10년)에 "일본해내죽도외일도지적편찬방안“이라는 제목의 문서를 태정관에 제출했다. 여기에는 시마네현이 제출한 자료 외에 내무성이 자체적으로 조사한 자료를 부속문서로 첨부하고 있다. 내무성의 자체조사는 1693-1699년 사이에 전개된 울릉도쟁계(일본측 명칭 竹島一件)를 재조사 한 것이며, 다케시마잡지(竹島雑誌), 다케시마도설(竹島図説), 이소다케시마각서(磯竹島覚書) 등을 포함한다.12) 내무성의 상신에는 원유의 대략(原由の大略)과 이소다케시마개략도(磯竹島略図」)도 첨부되었다.13)
“다케시마 소속에 관하여 시마네현에서 별지의 문의가 제출되었는데, 조사해 본 결과, 그 섬은 겐로쿠 5년에 조선인이 들어온 이후, 별지 문서에 기록된 바와 같이, 겐로쿠 9년 정월 제1호 구정부 평의의 의견에 따라, 제2호 통역관에게 통첩하고, 제3호 조선국으로부터 회답을 받고, 제4호 우리나라에서 회답과 구상서 등의 절차를 거쳐, 원록 12년에 모든 교섭이 끝나고 우리나라와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영토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므로, 별첨된 문서를 첨부하여 다시 한번 의견을 묻습니다.”
"제1호 구정부 평의"라고 기록된 문서는 1696년(겐로쿠 9년)에 조선국의 항의를 받고 에도 막부가 울릉도 도항을 금지하게 된 경위를 기록한 것이다. "제2호 역관에게 보낸 통첩”은 막부의 명령을 조선국의 역관에게 전달한 것을 기록한 문서이다. "제3호 조선국으로부터 온 회답”은 역관으로부터 막부가 마쯔시마로의 도항을 금지했다는 보고를 받은 "조선국 예조참의 이선부”가 보낸 서한이다. "울릉도가 우리 땅이라는 것은 지도에 기록되어 있으며, 문헌상으로도 명백하다"라고 하며, "귀국에서는 울릉도와 다케시마가 한 섬이면서 두 개의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라고 하면서 "그 이름은 다르다고 해도 우리 땅이라는 것은 같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제4호 본국의 답변"은 이에 대한 답장이다. "구상서"는 이를 보충하여 화관의 관수가 구두로 말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다케시마(울릉도)는 오랫동안 조선에서 "버려진 섬"으로, "일본의 속섬"인 것처럼 여겨졌지만, 대마도주(쓰시마)의 노력으로 막부는 "성실하게 교류한다는 관점에서" 일본인의 도항을 금지시켰다는 기록이 있다.16)
같은 해 3월 29일, 태정관은 내무성의 의견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습니다.
“위의 의견에 따라, 죽도 외 일도의 건은 본방(일본)과 관계없음을 명심할 것(伺之趣 竹島外一島之儀 本邦関係無之義ト可相心得事).19)”
1876년(메이지 9년) 12월, 키타지마 히데아사(北島秀朝) 나가사키 현령은 오오쿠보 토시미치(大久保利通) 내무경과 테라시마 무네노리(寺島宗則) 외무경에게 ‘마쯔시마 개척에 관한 상신서’를 제출했다. 이에 따르면, ‘마쯔시마’는 ‘나무가 무성한’ 섬이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1877년(메이지 10년) 8월, 즉 태정관의 지시가 내려진 후, 오오쿠보 내무경은 키타지마 나가사키 현령에게 보낸 회답서에서 ‘해당 섬’이 울릉도에 해당하는 섬이라는 인식을 보였다.
또한 1881년(메이지 14년), 시마네 현령 사카이 지로(境二郎)는 내무경과 농상무경에게 "일본해 내의 마쯔시마 개척에 관한 문의"라는 문서를 보냈다.
그 내용의 대략 다음과 같다. 시마네현 나카군 아사이 마을의 사무라이 계급인 오야 켄스케(大屋兼助) 외 1명이 마쯔시마 개척을 요청하는 문서를 제출했다. 태정관의 명령에 따라, 다케시마를 비롯한 다른 섬들은 일본과 관계가 없다고 했는데, 벌목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혹시 그 후에 다시 논의되어 그 섬이 일본 영토가 된 것인지 여부를 문의하였다.20)
내무성은 “일본해에 있는 다케시마와 마쯔시마는 태정관의 지령에 따라 우리나라와 관계가 없다고 들었는데, 이번에 시마네현에서 위와 같은 질의가 왔다. 최근 조선국과 협상이나 약속을 한 적이 있는지, 일단 알고 싶다”며 외무성에 문의했다.21) 이 문서에는 앞서 언급한 3) 내무성에 의한 문의 ‘일본해 내 다케시마 외 일도 지적 편찬 방식에 대한 문의’가 별지 갑호로 첨부되어 있으며, 표제 뒤에 ‘외 일도는 마쯔시마이다’라는 가필이 달려 있었다.22)
이에 대해 외무성은 다음과 같은 답변 초안을 작성했다. 조선 정부에서 외무대신에게 일본인들이 그 섬으로 건너가 고기잡이와 나무를 베고 있다는 조회가 있었다. 조사해 본 결과 사실이었으므로, 해당자들에게 철수를 명령하고 귀국시켰다. 조선 정부에는 이런 일이 없도록 요청하고 금지한다는 취지로 답변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내무경은 시마네현에 “마쯔시마 문제는 이전의 지시대로 우리나라와는 관계가 없다”며 개척 신청을 허가할 수 없다는 지시를 내렸다.23)
하지만 일본인들이 계속해서 울릉도로 건너가자, 1882년(메이지 15년)에 일본에 온 수신사 박영효가 다시 외무경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에게 항의하기에 이르렀다. 거기서, 외무성은 태정관에게, 울릉도 도항을 금지하는 내달에 대하여 문의를 제출해, 다음 해 1883(메이지 16)년 3월 1일, 태정관대신 명의로, 다음과 같은 내달이 내무경에게 발출되었다.24)
“북위 37도 30분 동경 130도 49분에 위치한 일본에서는 마쯔시마 또는 다케시마, 조선에서는 울릉도라고 불리는 섬은, 예전에 일조 양국 정부가 합의하여 정한 바와 같이, 일본인은 함부로 건너가서는 안 된다. 각 지방 장관은 이를 위반하는 자가 없도록 훈계하도록 내무성에서 지시하시오. 그 내용을 알린다.”25)26)
그리고 내무성은, 다음 해인 1883년 3월 31일, 전국의 각 도도부현지사에게 다음과 같은 내달을 발송했다.
먼저, 태정관의 지시에서 언급된 “다케시마”는 현재의 울릉도를, “외일섬”은 현재의 독도를 가리키며, 메이지 정부는 울릉도와 독도가 “본국과는 관계가 없다”는 지시를 내렸다는 주장이다.29) 이 주장에 따르면, 시마네현에서 보낸 질의에 첨부된 일련의 문서와 지도를 종합해 볼 때, 시마네현이 “다케시마”(=울릉도)와 “마쯔시마”(=독도)를 하나로 묶어 질의했다는 것이 분명하다.30)
따라서, 내무성에서 보낸 “일본해 내 다케시마 외 일도 지적 편찬 방식에 대한 질의”라는 제목의 질의에서 말하는 “다케시마 외 일도”가 “다케시마”(=울릉도)와 “마쯔시마(=독도)”를 가리킨다는 데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일본해 내 죽도 외 일도 지적 편찬 방식에 대한 문의”라는 사료의 해석은 “텍스트 자체에 충실하게 해석하면 결론은 하나뿐이다. 메이지 10년의 일본 중앙정부는 다케시마(=울릉도)와 마쯔시마(=독도)가 일본의 영토 밖에 있다고 공식 문서로 명확히 밝혔다”라고 해석된다.31)
또한, 지리학자 다나카 아카마로가 1905년 8월 15일 발행된 「지학잡지」 200호에 다음과 같이 기록한 것도 근거로 제시된다.
“이 섬은 지난 2월 22일 시마네현령을 통해 공개적으로 우리 제국의 영역에 편입되어 행정적으로는 오키섬 섬주(島司)의 관할로 되었다. 그리고 당시 우리는 이 섬이 외국인에 의해 발견되었다는 사실과 지형에 대한 일반적인 정보를 소개한 바 있다. … 이곳은 지난 5월 27일의 일본해 해전을 통해 리앙쿠르 바위섬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이 섬의 연혁을 살펴보면 발견 시기는 불명확하지만, 프랑스 선박 리앙쿠르호가 발견하기 훨씬 이전부터 일본인들이 알고 있었다. 토쿠가와(徳川) 시대에 조선에 넘겨준 것처럼 기록되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는 이 섬이 오키, 호키, 이와미에 속하기도 했다. 메이지 초기에 이르러 정원 지리과에서 이 섬이 우리나라의 영토라는 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이후의 출판물에 실린 지도에는 대부분 이 섬의 위치가 표시되지 않았다. 〔이하 생략〕(밑줄은 인용 문헌에 의함)”32)
밑줄 친 부분이 “일본해 내 다케시마 외 일도 지적 편찬 방식에 대한 질의"에 대한 내용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명백하며, 1905년 8월에 "메이지 초기에 [...] 본국의 영유라는 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라고 지적하고 있기 때문에, "외 일도"는 오늘날의 독도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33)
또한, 이렇게 해석하지 않으면 1905년(메이지 38년)의 각의 결정문과 모순된다고 지적한다. 각의 결정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별지 내무대신 청의 무인도 소속에 관한 건을 심사한 결과, 위의 북위 37도 9분 30초 동경 131도 55분에 위치하여 오키지마(隱岐島)에서 북서쪽으로 85해리 떨어진 무인도는 다른 나라에서 점령한 흔적이 없으며, 일찍이 36년 전 본국인 나카이 요사부로(中井養三郎)가 어사(漁舎)를 짓고 인부를 보내어 어구를 갖추고 강치를 잡기 시작하였고, 이번에 영토 편입과 임대를 요청해 왔으므로, 이번 기회에 소속과 섬 이름을 확정할 필요가 있어 그 섬을 다케시마라 명명하고, 앞으로는 시마네현 소속 온기시마사의 관할로 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에 심사한 결과, 메이지 36년 이후 나카이 요사부로가 그 섬에 이주하여 어업에 종사한 것은 관계 문서에 의해 명백하므로, 국제법상 점령의 사실이 있는 것으로 인정하고 이를 본국 소속으로 하여 시마네현 소속 온기시마사의 관할로 하여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청의대로 각의 결정을 하여도 가하다고 인정한다. (밑줄은 인용 문헌에 의함)”34)
밑줄 친 부분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섬은 다른 나라에 의해 점령된 적이 없는 무인도이며, 메이지 36년부터 나카이 요사부로가 섬에 어사를 짓고 강치를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번에 나카이가 그 섬의 영토 편입과 본인에게 대하(貸下)를 출원해 왔으므로, 이번 기회에 섬의 소속과 섬 이름을 확정할 필요가 있어, 이 섬을 다케시마라 명명하고, 앞으로는 시마네현 소속 온기시마사의 관할로 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즉, 심사 결과, 메이지 36년부터 나카이가 그 섬에서 어업에 종사한 것은 문서상 명백하므로, 국제법상 점령의 사실이 있는 것으로 인정할 수 있으므로, 이 섬을 본국의 소속으로 하여 시마네현 소속 온기시마사의 관할로 하여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각의 결정문은, 각의 결정 당시 다케시마가 20년 이상 전부터 이미 일본 영토였다고 단정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그 이전까지 다케시마를 일본 영토로 인식하지 못했다고 해석하는 것이 훨씬 타당한 역사적 해석”이며, “메이지 10년의 태정관지령은 문자 그대로 ‘다케시마를 일본 영토 밖으로 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한다.35)
이에 대해 태정관 명령에서 말하는 "다케시마"와 "외일도"는 모두 오늘날의 울릉도를 가리킨다는 주장도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태정관의 결재 문서인 입안 제20호는 내무성의 문의(伺) "일본해 내 다케시마 외 일도 지적 편찬의 건"에 대한 것이다. 이 건명은 내무성의 문의에서 유래했으며, 내무성의 문의는 다시 시마네현의 문의에서 유래했다. 하지만, 내무성의 문의는 시마네현의 문의의 건명을 이어받으면서도, 태정관에 올린 문의에서는 "다케시마 소속에 관하여"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내무성은 오로지 "다케시마"(=울릉도)에 대해 "본국과 관계없음을 알린다"라고 판단한 것이다. 또한, 내무성이나 그 근거로 채택한 자료(일조 교섭의 기록 1호부터 4호)도 현재의 독도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입안 제20호는 내무성의 판단을 긍정하는 형태로 결재된 것이며, 이를 채택한 태정관지령은 "현재의 독도를 본국과 관계없다고 한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된다.36)
또한, 태정관지령 발행 후에 나온 여러 문서도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한다고 주장된다. 1877년(메이지 10년) 8월 오오쿠보 내무경의 기타지마 나가사키현령에게 보낸 답변서, 1881년(메이지 14년)의 "일본해 내 마쯔시마 개척의 건에 대한 문의", 이에 대한 외무성의 답변 기안 문서와 내무성의 지시, 1883년(메이지 16년)의 태정관내달과 내무성내달은 모두 "울릉도", "마츠시마", 그리고 "다케시마"를 동일한 섬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37)
마지막으로, 만약 1877년(메이지 10년)의 태정관지령이 "외 일도" 즉 "마쯔시마"(=독도)를 "본국과 관계가 없다"고 했더라도, 1883년(메이지 16년)의 태정관내달에 의해 "외 일도"의 해석이 "울릉도"로 변경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1883년(메이지 16년)의 태정관내달은 전국을 대상으로 한 지시이며, 1877년(메이지 10년)의 시마네현을 향한 태정관지령보다 더 무게가 있다. 또한, 1877년(메이지 10년)의 태정관지령은 "개별 사건에 관한 법령은 아니지만, 마찬가지로 태정관의 내무성에 대한 지시라는 의미에서 비교해 볼 때, 만약 내용에 모순이 있다면 '후법은 전법을 폐지한다'는 원칙(Lex posterior derogate priori)에 따라 1883년의 지시가 1877년의 지시를 '폐기'한다"고 주장된다.38)
1877년(메이지 10년)의 태정관지령에서 말하는 "다케시마"가 울릉도를 가리킨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그리고 1877년(메이지 10년)의 태정관지령의 기초 과정, 특히 시마네현에서 올린 문의에 첨부된 "원유의 대략"이 "다케시마"와 "마쯔시마"를 구분하고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지령에서 말하는 "다케시마"는 울릉도이고 "외 일도"는 독도를 가리킨다는 해석이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이다.39)
하지만, 1877년(메이지 10년)의 품의서인 입안 제20호에 "마쯔시마"에 대한 언급이 없고, 내무성의 문의의 본문에도 "마쯔시마"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태정관이 품의의 주요 대상으로 인식했던 것은 "다케시마" 즉 "울릉도"였다고 추측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다. "외 일도" = "울릉도"라는 설은 최근 연구에서 특히 강조되는 부분이지만, 기초 과정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통해 충분히 설득력 있는 강력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40)
이상과 같이, 1877년(메이지 10년)의 태정관지령에 나오는 "외 일도" 또한 울릉도를 가리켰다는 주장은, "외 일도"가 "다케시마"를 가리킨다는 주장에 충분히 대항할 수 있는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41)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문도 남아 있다. 즉, 1877년(메이지 10년)의 태정관지령이 "다케시마"(=울릉도)만을 대상으로 했다면, 왜 표제에 "외 일도"를 남겨두었는, 그리고 과연 "품의서에 자주 보이듯이 처음의 시마네현의 문의에 있던 표제를 그대로 안건 이름으로 사용했을 뿐"이었는지 이다.42)
Ⅲ. 메이지10년 태정관지령 상 ‘외 일도’의 해석
법률 또는 법률문서에 대한 해석에는 여러 가지 방법론이 존재한다. 법 조문은 추상적인 개념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구체적인 사안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법 조문의 의미를 해석해야 하는 필수적 요소이다.
오늘날까지 주류적인 방법론은 Karl Engisch의 고전적 해석방법론이 있다. 이 방법론에 따르면 법의 해석은 언어의 의미, 사고의 연관성, 역사적 연관성, 규정의 취지 또는 목적을 강조하는 문법적 해석, 논리적 또는 체계적 해석, 역사적 해석, 목적론적 해석의 네 가지가 있다.43) 이와 같은 4가지 방법론을 이용하여 법률 또는 법률문서를 해석하는 것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즉 법의 일반원칙으로 보기에 상당하다.
이를 통상 문리적 해석, 체계적 해석, 역사적 해석, 목적론적 해석이라 한다. 문리적 해석은 법 조문에 사용된 언어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해석하는 방법으로, 가장 기본적인 해석 방법이며, 아울러 법 조문의 명확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을 중점으로 한다. 체계적 해석은 법 조문을 전체적인 법 체계 속에서 파악하여, 다른 법 조문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해석하는 방법으로, 법 조문의 의미를 맥락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방법론이다. 역사적 해석은 법 조문이 제정될 당시의 사회적, 역사적 배경을 고려하여 해석하는 방법으로, 법 조문의 의미를 시대적 맥락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방법론이다. 목적론적 해석은 법 조문이 제정된 목적을 고려하여 해석하는 방법으로 법 조문의 본래 취지를 파악하는 데 유용하지만, 목적 해석이 지나치게 확대되면 법 조문의 문리에 반하는 결과가 도출될 수도 있는 한계를 가진 방법론이다.
이와 같이 여러 방법론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법이 추상적인 개념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해석방법론에 있어서 문리적 해석으로 바르게 읽는 경우에 법률 규정이 상정된 법적 문제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충분한 해답을 제시한다면 그 외의 해석방법론을 이용할 필요는 낮다. 즉, 법의 해석의 기본적 방법론은 문법적 문리적 해석이라 할 수 있다.44) 하지만 그렇지 아니한 경우에는 논리적, 체계적, 역사적, 발생적 해석 등을 받아들여야 한다.
즉 법의 해석은 1차적으로 문리에 충실하게 하는 것이 원칙이다.45) 이는 삼권분립 하 입법자의 의사를 존중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며, 이와 동시에 문리적 해석에 충실할 경우 각각의 해석주체가 내리는 결론이 동일할 가능성이 커지므로 법적 안정성의 확보에도 도움이 된다.46)
반면에 문리적 해석이 1차적 원칙이라 할 것이나, 문리적 해석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경우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 헌법 제37조 제2항 상의 ‘공공복리’, 민법 제103조 상 ‘공서양속’과 같은 일반조항은 문리적 해석만으로는 구채적인 사안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데 한계가 존재한다. 이와 같은 한계로 인하여 체계적 해석, 역사적 해석, 목적론적 해석이 함께 사용되어야 한다.
다만, 이들 방법론 간의 적용의 서열이 불분명하다.47) 대한민국 법원의 경우 문언적 해석이 해석의 원칙이며 논리적-체계적 해석이 추가적인 해석방법이라는 점, 또 목적론적 해석이 문언적 해석 및 논리적-체계적 해석의 제한을 받는다는 점을 분명히 함으로써 문언중심적 해석론 내지 완화된 문언중심적 해석론의 입장을 표방하고 있다.48) 법원과 국가에 따라 다소의 차이가 있을 것이지만, 통상적으로 문언적 해석의 원칙이 1차적으로 적용된다.
법해석의 단계를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49)
법해석의 기술에는 확장해석, 축소해석, 반대해석, 유추의 4가지가 있다.
법규범의 문언이 예정하고 있는 것보다 넓은 의미를 부여하는 해석을 의미한다. 단, 형벌법규를 해석할 때는 죄형법정주의의 원칙에 따라 피고인에게 지나치게 불리한 확장해석은 허용되지 않는다.50) 조세법규의 해석의 경우에도 원칙적으로 확장해석이 금지된다.51)
법규범이 원래 적용되어야 할 사안에 대하여 특정한 이유로 그 적용을 배제하기 위하여 법문의 의미를 한정하는 해석을 의미한다. 축소해석은 입법자가 불확정개념을 쓴 경우에 입법자의 의도가 그 후 사회의 변화에 적합하지 않게 된 경우 등에 이용된다.
특정 법문이 있는 경우 그 규정의 취지는 법문의 규정 외의 사항에는 미피지 않는다고 해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해석의 예로 민법 제184조 제1항은 ‘소멸시효의 이익은 미리 포기하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나, 이와 반대로 소멸시효의 이익을 소멸시효가 완성된 후에 포기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특정 법문을 일반화하여 새로운 규범을 만들고, 이를 그 법문이 적용되어야 하는 사안과 중요한 점에서 유사한 사안에 적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유추는 법의 흠결을 메우기 위하여 법정에서 자주 이용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법의 해석에 속하지 않는다.
확장해석과 유추의 구별의 기준이 되는 것은 ‘문언의 가능한 범위’이다.52) 그러나 법조문의 문언은 대개 불확정적이거나 탄력적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끼자가 ‘문언의 가능한 범위인지’여부의 구별은 쉽지 않다.
또한 유추는 반대해석과 대립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법조문에 ‘남자’라고 규정하고 있는 경우에 반대해석은 ‘여자’는 배제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임에 반하여 유추는 ‘남자’를 일반화하여 ‘사람’이라고 하고 남자와 여자는 중요한 부분에서 유사하므로 해당 법조문을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적용된다고 해석하는 것이 유추이다.
메이지10년(1877년) 태정관지령은 ‘다케시마 외 일도는 본방과 무관한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문제의 본질적 부분은 바로 ‘외 일도’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에 있다. 앞서 살펴본 학설들에 따르면, ‘외 일도’=‘다케시마(독도)’라는 설, ‘외 일도’=‘울릉도’라는 설 및 메이지16년 태정관내달에 의한 변경설이 있다.
본 절에서는 해당 3가지 학설을 법해석론적인 측면에서 검토해 보고자 한다.
이 설에 따르면 메이지10년(1877년) 태정관지령 상 ‘다케시마 외 일도’에 관하여, 다케시마는 현재의 울릉도로, 외 일도는 현재의 독도로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메이지10년 태정관지령은 울릉도와 독도에 대하여 일본의 판도 밖의 지역으로 이해하는 견해이다.
이 설을 법률문서의 해석방법에 따라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외 일도’의 해석에 있어서 해석의 제1단계인 문언적 해석 방식인 문언에 따라 ‘통상적 의미’로 해석할 경우 시마네현이 상신한 ‘일본해 내 다케시마 외 일도 지적 편찬 방안’의 본문 상에는 독도(당시 일본측 명칭 마쯔시마)에 대한 문언적 언급이 부재한다. 따라서 제1단계의 방법만으로는 ‘외 일도’의 의미를 해석할 수 없다.
따라서 해석의 2번째 단계인 체계적 해석으로 넘어가 보도록 한다. 해석의 1단계로 명확한 결과가 도출되지 않는 경우에 2단계를 적용한다. 2단계에서는 체계해석을 이용하며, 본 건과 관련하여서는 ‘일본해 내 다케시마 외 일도 지적 편찬 방안’에는 별첨문서 ‘원유의 대략(原由の大略)’과 ‘이소다케시마개략도(磯竹島略図)’가 있다. 이 중 ‘이소다케시마개략도’에는 마쯔시마가 그려져 있다.
‘외 일도’를 문헌자료의 본문에서 찾아볼 수 없으나, 해당 문헌의 첨부자료에 표기된 것을 통해 체계해석의 2-2단계에 따라서 ‘이소다케시마개략도’를 체계해석의 근거로 활용하여 ‘외 일도’=‘다케시마(현재 독도)’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즉, ‘외 일도’=‘다케시마(현재 독도)’설은 문헌해석의 2단계에서 그 해석의 정당성이 확인된다고 볼 것이다.
다만 메이지10년(1887년) 태정관지령에 한정하지 아니하고, 이후의 일련의 문서들을 검토해 보면, ‘죽도 외 일도’의 해석에 대한 매우 중요한 자료가 존재한다. 메이지14년(1881년) 시마네현에 마쯔시마 개척원이 접수되었으며, 이에 대하여 내무성이 외무성에 관련 문의를 하였다. 해당 문의의 별지 갑호에 ‘일본해 내 다케시마 외 일도 지적 편찬 방안’이 첨부되어 있다, 여기에 더하여 표제 뒤에 ‘외 일도는 마쯔시마이다’라는 가필이 달려 있다.53)
즉, 메이지10년(1887년) 태정관지령과 메이지14년(1881년) 내무성이 외무성에 보낸 문의의 별지 갑호의 주석을 동시에 일괄 문헌으로 간주하여 해석을 실시하면, 해석의 1단계인 문언적 해석만으로도 마쯔시마(현 독도)가 ‘외 일도’로 해석됨이 타당하며, 1-3단계에 따라 ‘외 일도’의 의미가 ‘마쯔시마’임을 확정할 수 있으며, 그 외 차순위의 해석 방법들은 적용할 필요가 없어진다.
이상과 같이, ‘외 일도’=‘다케시마(현재 독도)’설은 메이지14년(1881년) 내무성이 외무성에 보낸 문의의 별지 갑호의 주석에 따라 해석의 1단계에 의하여 그 의미가 명확히 확인할 수 있으며, 최소한 메이지10년(1887년) 태정관지령과 관련하여 시마네현의 문의문서와 해당 문서의 별첨문서의 체계해석을 통하여서도 그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해석방법에 따른 검토를 통해 ‘외 일도’=‘다케시마(현재 독도)’설은 문언적·논리적·체계적으로 흠결 내지는 비약이 없는 적절한 학설로 판단된다.
이 설에 따르면 메이지10년(1887년) 태정관지령 상 ‘다케시마 외 일도’에 관하여, ‘다케시마’와 ‘외 일도’ 모두 오늘날의 울릉도를 의미한다는 견해이다. 본 견해의 주요한 논리는 내무성이 태정관에 상신한 문의에서 ‘다케시마의 관할에 관하여’라고 기록하고 있는 바, 내무성은 오직 다케시마, 즉 현대의 울릉도에 대해서만 판단한 것으로 해석한다. 이러한 해석이 타당한지 검토해 보고자 한다.
이 설 역시 법률문서의 해석방법에 따라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외 일도’의 해석에 있어서 해석의 제1단계인 문언적 해석 방식인 문언에 따라 ‘통상적 의미’로 해석할 경우 시마네현이 상신한 ‘일본해 내 다케시마 외 일도 지적 편찬 방안’의 본문 상에는 독도(당시 일본측 명칭 마쯔시마)에 대한 문언적 언급이 부재한다. 아울러 ‘외 일도’=‘울릉도’라는 견해의 근거자료인 ‘일본해 내 죽도 외 일도 지적 편찬 방안’의 본문 상에도 독도에 대한 문언적 언급이 부재한다. 따라서 ‘죽도 외 일도’에 관하여 제1단계의 방법만으로는 ‘외 일도’의 의미를 해석할 수 없다. 여기에 더하여 ‘통상적 의미’로서 ‘외 일도’를 해석하면 ‘다케시마 이외에 섬이 하나 더 있음’을 의미하여야 하지만, ‘외 일도’=‘울릉도’견해는 이러한 문언적 해석의 통상성 또는 일상성에 위배된다.
따라서 해석의 2번째 단계인 체계적 해석으로 넘어가 보도록 한다. 2단계에서는 체계해석을 이용하면, 본 건과 관련하여서는 ‘일본해 내 다케시마 외 일도 지적 편찬 방안’의 별첨문서 ‘원유의 대략(原由の大略)’과 ‘이소다케시마개략도(磯竹島略図)’가 있으며, 이 중 ‘이소다케시마개략도’에는 마쯔시마가 그려져 있다. 또한 메이지10년(1887년) 태정관 입안제20호 본문은‘별첨된 내무성의 문의 일본해 내 다케시마 외 일도 지적 편찬의 건...’으로 시작하며, 동 입안제20호의 말미에는 ‘문의의 취지는, 다케시마 외의 일도는...’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동년 제3월 29일 태정관지령 역시 본문은‘문의의 취지는, 다케시마 외 일도는...’으로 시작한다.
상기의 별첨문서와 태정관 입안제20호 및 태정관지령의 본문에 ‘외 일도’가 명시적으로 언급되었다는 점을 통해 체계해석의 2-2단계에 따라서 ‘외 일도’≠‘울릉도’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또한, 전항에서 검토한 ‘외 일도’=‘다케시마(현재 독도)’설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일본해 내 다케시마 외 일도 지적 편찬 방안’에는 별첨문서 ‘원유의 대략(原由の大略)’과 ‘이소다케시마개략도(磯竹島略図」)’가 있으며, 이 중 ‘이소다케시마개략도’에는 마츠시마가 그려져 있다. 또한 내무성이 태정관에 제출한 섬지 제664호‘일본해 내 다케시마 외 일도 지적 편찬 방안’ 이라는 제목의 문의는 그 표제 뒤에 ‘외 일도는 마츠시마이다’라는 가필이 달려 있다.54)
이와 같은 태정관지령의 발령 과정 전반의 문헌들을 체계적으로 해석하면, ‘외 일도’≠‘울릉도’라는 결론이 더욱 강해진다. 동시에 내무성이 태정관에 제출한 섬지 제664호‘일본해 내 다케시마 외 일도 지적 편찬 방안’의 표제 뒤에 가필에 명확히 ‘외 일도는 마쯔시마이다’라고 되어 있는 바,55) ‘외일도’≠‘울릉도’인 동시에, ‘외일도’=‘마쯔시마(독도)’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밖에 없다.
법률문서의 해석방법 2단계 체계적 해석 중 2-1 ‘체계적 해석의 결과가 문언적 해석의 결과와 일치하는 경우에는 최종적으로 문언적 해석 및 체계적 해석의 결과에 따른다.’고 되어 있는 바, 전항의 견해가 해석방법론 측면에서 타당성을 강하게 가지는 반면에, 본항의 견해인 ‘외일도’=‘울릉도’는 체계적 해석을 통해 볼 때, 그 견해의 타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 할 것이다.
이 설에 따르면 메이지10년(1877년) 태정관지령이 ‘외 일도’ 즉 마쯔시마(현 독도)를 일본과 관계가 없다고 하더라도 메이지16년(1883년) 태정관내달에 의해 ‘외 일도’의 해석이 ‘울릉도’로 변경되었다는 견해이다.
해당 견해에서는, 1883년(메이지 16년)의 태정관내달은 전국을 대상으로 한 지시이며, 1877년(메이지 10년)의 시마네현을 향한 태정관지령보다 더 무게가 있다고 본다. 또한, 1877년(메이지 10년)의 태정관지령은 "개별 사건에 관한 법령은 아니지만, 마찬가지로 태정관의 내무성에 대한 지시라는 의미에서 비교해 볼 때, 만약 내용에 모순이 있다면 '후법은 전법을 폐기한다'는 원칙(Lex posterior derogate priori)에 따라 1883년의 지시가 1877년의 지시를 '폐기'한다"고 여기는 견해이다.
본 견해에 대하여 본고의 검토 대상인 나카노 데쓰야의 ‘1877(메이지10)년의 태정관지령에 대해서’에서는 구체적 설명이 부족한 바, 여기서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메이지16년(1883년) 태정관내달은 내달 발령 전의 지령 2건과 발령 이후 내훈 1건이 연속선 상에 있기에 함께 약술한다.
“북위 37도 30분 동경 130도 49분에 위치한 일본 칭호 마쯔시마, 일명 다케시마, 조선 칭호 울릉도는 예전부터 양국 정부 간에 협정이 있었으므로 일본인이 함부로 건너가 상륙하지 못하도록 하여야 하니, 오해하는 자가 없도록 각 지방 장관에게 이를 널리 알려 줄 것을 내무성에서 지시하도록 하라.”56)
“이번에 별지와 같이 내무경에게 지시한 바와 같이, 위에 위반하여 해당 섬에서 밀무역을 하는 자는 일한 무역 규칙 제9조에 따라 경중에 따라 죄를 범한 자로 여겨 우리 형법에 따라 처분하도록 각 재판소장에게 내부 지시를 내릴 것을 이에 통지한다.”57)
“북위 37도 30분 서경 130도 49분, … 일본 칭호 마쯔시마, 일명 다케시마, 조선 칭호 울릉도는 예전부터 양국 정부 간에 협정이 있었으므로 일본인이 함부로 건너가 상륙하지 못하도록 하여야 하니, 오해하는 자가 없도록 귀하의 관할 지역에 널리 알려 줄 것을 이에 통지한다.”58)
“최근 조선국 울릉도에 건너가 상륙한 백성들에 대한 처분 방안에 대해 통지한 바 있는데, 이들 백성과 관련된 사람들 중 해당 섬에서 나무를 베는 등의 행위를 하고, 내지로 실어 나른 자들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만약 이러한 행위가 있었다면 형법에 따라 마땅히 처분해야 할 것은 물론이나, 대체로 다음과 같이 처리할 것을 알려 두니, 이에 따라 처리하도록 하라.”59)
메이지16년(1883년) 태정관내달 및 전후의 발령 어디에도 ‘외 일도’ 또는 ‘마쯔시마’라는 용어가 등장하지 아니한다. 따라서 본고의 검토대상인 ‘외 일도’에 관하여 법률문서의 해석방법에 따른 해석의 지점을 찾을 수 없다. 각 문헌들은 오직 울릉도에 한정하여 발령하고 있다. 즉, 독도와 관련성이 없는 사료라고 봄이 상당하다. 울릉도에 한정된 내달 등 총 4건의 문헌에 등장하지도 아니하는 ‘외 일도’의 해석을 도출하고자 하는 것은 확장해석으로 볼 수 없으며, 단지 지나치게 확대해석한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
1883년(메이지 16년)의 태정관내달을 근거로 ‘외 일도’의 해석이 ‘울릉도’로 변경되었다고 하는 것은 일견의 학설이라기보다는 어불성설이다.
Ⅴ. 결론
독도는 한반도에 부속된 3천여개의 섬 중 단지 하나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독도는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대한제국 침략의 시발점에 해당하며, 이와 동시에 독도의 일본으로부터의 행정권의 분리는 대한민국 광복의 상징 중 가장 중요한 상징점이라 할 수 있다. 즉, 독도에 대한 타국의 간섭은 대한민국과 그 구성원인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하나의 모멸로 이어질 수 밖에 없으며, 특히 일본의 독도에 대한 도발은 그 자체로서 신라시대에서부터 현재까지 독도를 영유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역사를 모멸시키는 행위이자, 이와 동시에 내정간섭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행태는 변함 없이 독도를 다케시마라 칭하며, 자국의 영토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또한 독도문제를 분쟁지역화하여 이를 ICJ로 가져가고자 각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시마네현 다케시마 문제 연구회(島根県竹島問題研究会)의 ‘제5기 「다케시마 문제에 관한 조사연구(竹島問題に関する調査研究)」중간보고서’ 역시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다케시마(현 독도) 고유영토론을 강화하고자 하는 노력의 산물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본 졸고를 통해 시마네현 다케시마 문제 연구회의 보고서와 일본 정부의 주장은 수 없이 많은 사료들과 법률문서들 중에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보만을 모자이크하여 이어 붙인 편향된 논리에 불과함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일본의 죽도 고유영토론을 강화하기 위하여 작성된 나카노 테츠야(中野徹也)의 ‘1887(메이지10)년의 태정관지령에 대하여[1877(明治10)年の太政官指令について] 역시 편협한 논리구조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특히 학설 소개에 있어서 「외 일도」= 「다케시마」설이 2페이지에 걸쳐 설명된 반면에 「외 일도」= 「울릉도」설은 반페이지에 불과하며, 심지어 논리적 근거조차 명확하지 않다. 말 그대로 기서(奇書)라 할 수 있을 만큼 법리학적으로 납득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편향적인 목적론적 해석을 도출해 내기 위하여 사료와 법률문서자료를 짜깁기한 괴서(怪書)라 할 수 있다.
나카노 테츠야의 평가 중 ‘1877년 메이지10년 태정관지령이 “죽도(현 울릉도)”만을 대상으로 했다면, 왜 표제에 “외 일도”를 남겨두었는지’라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즉, 이러한 의문의 잔재는 자신들이 내세우는 주장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논리적 공백이 존재함을 나카노 테츠야 역시 인증하고 있음을 방증한다고 볼 수 있다.
독도에 대한 대한민국의 영유권 강화는 지속되고 있으며, 지속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일본의 영토·주권전시관(領土·主權展示館)이나 시마네현 다케시마 문제 연구회의 보고서들과 같은 아집에 찬 확증편향적 자료들을 지속적으로 발굴·연구·홍보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할 때, 독도에 대한 연구 역시 일본의 확증편향적으로 해석된 논리구조를 내재적 접근을 통해 파훼해 나갈 수 있도록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